날개를 달다 (2)
“임기 4년 차건만, 국민과 소통이 많이 부족했던 모양이군. 노력한다고 했는데···. 소통이라는 게 참 힘들어.”
대한민국 대통령 이광진의 표정에 낙심이 그득했다.
은연중에 부끄러움도 엿보였다. 못 알아보는 줄도 모르는 채 친한 척한 자신에 대한 민망함일 터였다.
SSG 국장 이윤성은 안절부절못했다.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평소 그토록 느물느물하던 양반이 대통령 앞이라고 완전히 쪼그라든 인상이었다.
수습은 유지훈의 몫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너무 무심했던 탓입니다.”
“세상일에 무심한 친구가 신화그룹을 해체 지경에 몰아넣었는가? 빌런을 수없이 때려잡고.”
이광진은 은근 옹졸한 구석이 있는 노친네였다. 꽁한 표정으로 유지훈의 사과를 넘겨버렸다.
‘한 뒤끝 하는 영감님이로군. 비장의 무기를 꺼내야겠네.’
최근에 알게 된 전가의 보도였다.
귀환자.
“대통령님께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어디 좀 멀리 다녀왔거든요. 제법 오랫동안요. 그간 벌어진 일들이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그 점 널리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오호! 그러고 보니 자네 귀환자라고 했지!”
다행히 통했다.
대통령이 관심을 보였다.
“다녀온 곳이 어디인가? 그곳도 여기처럼 몬스터들이 출몰하던가? 아니면 아예 몬스터가 지배하는 세상인가?”
“몬스터보다 더한 놈들이 득실대는 곳이었습니다.”
사실 일반인에게 무림 고수는 몬스터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한 존재는 아니었다. 특히 마교 고수나 흑도 수괴는 몬스터 이상으로 삶을 고달프게 만드는 괴물들이었다.
대통령은 흥미로운 듯 눈을 반짝였다.
“오호! 험한 곳을 다녀왔구먼. 듣자 하니 자네 거기 가기 전에는 찐따 중에 찐다였다던데, 거기서 강해진 모양이야.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가? 아니면 특별한 계기라도?”
“몬스터보다 더한 놈들 틈바구니에서 생존하려다 보니 별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님 표현이 조금 저속, 아니 몹시 친근합니다.”
“아. 찐따? 친근한 소통을 위해 젊은이들의 언어를 사용하곤 한다네. 내가 이렇게 소통에 신경을 쓰는데, 나를 몰라보는···.”
소통보다 뒤끝에 진심인 대통령이었다.
유지훈은 귀환에 관한 대화는 이쯤에서 정리하고 싶었다. 아직 밝히고 싶지 않은 주제가 거론되는 건 거북했다.
“귀환에 관해서는 아직 제가 얼떨떨합니다. 일종의 트라우마일 수도···. 자세한 이야기는 좀 더 정리된 이후에 나눴으면 합니다.”
조용히 배석해 있던 이윤성도 거들었다.
“유지훈 씨 귀환에 관해서는 차근차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관련 연구해도 협조하시기로 했습니다. 이만 놓아주시지요. 대통령님.”
“그래그래. 귀환은 국력과도 직결된 대목일 수 있으니 이 국장이 수고 좀 해주게. 유지훈 씨도 부탁하네.”
그러는 사이 테이블에 음식들이 차려졌다.
된장찌개와 흑미밥 그리고 정갈한 반찬들이었다. 소박했지만 정겨운 상차림이었다. 식사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자네 얼마 전에 여당 중진 의원 하나 혼찌검을 냈다더군. 여당 의원들이 길길이 날뛰고 난리도 아니야.”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그래도 유지훈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물오물 음식을 먹으며 천연덕스럽게 반응했다.
“그거 혼내려고 부르신 겁니까?”
“하하하. 아닐세. 잘했어. 정도균이 그거 똥오줌 못 가리는 놈이야. 진즉에 혼 좀 났어야 했는데. 시원하게 잘 혼내줬어.”
유지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뜻하지 않은 칭찬에 고래가 제로투 댄스를 출 판이었다.
“혼내다 말았는데 마저 혼낼까요?”
“허허허. 대가리가 깨졌다던데···.”
“아예 쪼개버릴 수도 있습니다. 시켜만 주시면 바로···.”
“아닐세. 대통령이 돼서 살인의뢰를 할 순 없지.”
대통령이 짐짓 정색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유지훈 씨 성격이 아주 시원시원하구먼. 내 속이 다 후련해. 앞으로 대한민국에 큰 복이 될 것 같아.”
칭찬의 뉘앙스가 왠지 묘했다. 뭔가 어려운 부탁을 앞두고 운을 띄우는 느낌이었다.
유지훈은 신경 쓰지 않는 척 된장찌개를 퍼서 먹음직스럽게 밥에 비볐다. 맛나게 오물거렸다.
기대했던 반응이 아닌 듯 대통령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땐 반응을 해줘야 했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오! 내 얼굴에 뭔가 쓰여 있기라도 한 건가?”
대통령이 반색했다. 기다렸던 반응인 듯했다.
“그러니 보자고 하셨겠지 싶어서요.”
“하하하. 역시 그렇겠지. 내가 포커페이스로 유명한데, 표정에 뭔가 드러냈을 리가 없지.”
아무래도 대통령이 스마트한 분 같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역대 대통령 중에 스마트한 분은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대통령이 가라앉은 어조로 본격적인 주제의 서두를 열었다.
“자네도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일본에서 외무 회담을 청해왔네. 양국 각성자 회합을 겸한 행사로 말이야.”
“국가안전본부 회의 갔다가 들었습니다. 일본 각성자들의 대거 입국을 놓고 논쟁이 제법 뜨거웠습니다.”
“당연히 그랬을 거야. 신화그룹 문제로 일본 각성자들에 대한 국민 여론이 지독하게 안 좋은 시점이니 말이야.”
대통령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 일본이 내건 회담의 주제가 화해일세. 그간 신화그룹과 관련한 사안들을 사과하겠다는 거지. 그리고 양국 각성자의 화합을 희망한다고 했네. 활발한 교류를 통해 공조하자는 요청이네.”
“구실은 그럴듯하군요.”
“그렇지. 때마침 명분도 생겼네. 대한민국에 변종 몬스터 창궐이 우려되는 상황이니, 양국 각성자들의 공조가 필요하기도 하지.”
유지훈은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어차피 예상했던 각본이자 수작이었다.
“명분도 중요하지만, 대통령의 입장에서 여론도 무시할 수 없네. 자네도 알다시피 여론은 당연히 절대다수가 반대일 거야.”
“놈들이 들어와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으니까요. 일단 들어오면 통제가 쉽지 않은 게 고레벨 각성자들이기도 하고요.”
“맞는 말일세. 일본 측에서 예상 참석 리스트를 보내왔는데, 초인만 다섯에 레벨 7 이상 각성자가 서른이나 포함됐네. 이들이 뭔가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면···.”
대통령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유지훈이 짐짓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대통령님께서 거절하시면 끝날 문제 아닌가요?”
사실 의아할 것도 없었다. 대충 배경은 짐작했다. 누군가의 압력 때문일 터였다.
그리고 유지훈은 일본 각성자들의 입국을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초인이 다섯이나 포함된 점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대통령이 쓴웃음을 흘렸다.
“그게 여의치가 않아서 문제일세.”
“누군가의 입김이 작용하는 모양이군요. 그것도 몹시 세게.”
대통령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도 모르지 않는 듯하군.”
“크리스털 박이라는 로비스트입니까?”
이름이 거명되자 대통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윤성을 쳐다봤다.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인사인데. 이 국장을 통해 들었는가?”
“클럽에서 사건이 좀 있었는데요. 그때 얼핏 그런 존재가 있다는 말 정도만 들었습니다. 이름은 다른 경로를 통해 알게 됐습니다.”
“다른 경로라···.”
대통령이 턱을 만지작거렸다.
다른 경로라는 표현이 조금은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권력과 상당히 밀접한 인사겠군.”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굳이 묻진 않겠네.”
“감사합니다.”
유지훈은 대통령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를 기다렸다.
크리스털 박. 야마가토산업에 이어 또 하나의 흑막이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크리스털 박. 박수정. 2, 3년 전까지 화류계의 큰손이었던 여인네라네. 이제는 정재계를 뒤흔드는 로비스트지. 아. 개명한 이름일세. 화류계에 몸담았을 때만 해도 박순덕이라는 이름을 썼네.”
“아!”
“왜? 아는 이름인가?”
“순자가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한끝 틀렸네요.”
“역시 자네는 통찰력이 대단하군. 어쨌거나 그 여인네가 이번 한일 외무 회담 성사에 압력을 넣고 있네.”
대통령의 안색이 씁쓸했다. 은연중에 수치가 엿보이기도 했다.
유지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일개 로비스트의 압력에 대통령이 좌지우지될 정도라니.
“대통령님께서 거절할 수 없는 압력입니까?”
“정상 회담도 아니고 외무 회담이니···. 게다가 현 국내 상황에 비춰봤을 때 뚜렷이 거절할 명분도 없고···.”
대통령이 말을 얼버무렸다. 눈치가 석연치 않았다.
유지훈은 말없이 대통령을 바라봤다. 대통령도 뜨끔한 듯했다.
“내가 그 여인네의 청탁을 거절하기 힘든 사연이 있네.”
“얼마나 대단한 사연이길래 그러시는 겁니까? 약점이라도 잡히셨어요? 몰카 동영상이라도 있는 겁니까?”
분위기가 너무 딱딱해 농담 삼아 던진 말이었는데, 대통령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급기야 안색이 꺼멓게 죽어가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 자네는 통찰력이 대단한 청년이로군.”
“뭐예요? 맞아요? 동영상?”
“부끄럽네.”
대통령이 땅이 꺼질 듯한 한숨과 함께 사연을 털어놓았다.
5년 전 당시 야당의 대권 주자로 입지를 굳혀가던 시절의 일이라고 했다. 이광진에겐 대선을 1년 앞둔 중요한 시기였다.
그 무렵 박순덕의 업소는 정계와 재계 고위 인사들의 은밀한 회담 장소로 활용되곤 했다. 가끔 회담 후 더욱 은밀한 밤의 이야기가 탄생하기도 했다.
“더도 아니고 딱 한 번이었네. 경선 승리가 거의 확실시되던 상황이라 들뜬 마음에···.”
덫이었다. 로비스트로 영향력을 발휘하겠다는 박순덕, 이제는 크리스털 박의 빅픽쳐이기도 했다.
이광진이 걸려든 것이었다.
“당선되고 인수위원회를 꾸릴 시점에 짧은 영상과 함께 연락이 왔네.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따끔히 호통을 쳤지만, 이튿날 언론사로 자료를 보냈다는 메시지가 왔더군. 손을 들 수밖에 없었네.”
“제대로 걸려 드셨군요. 그때 털고 갈 순 없는 문제였습니까?”
대통령이 쓸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선된 이유 중에 가정적인 이미지가 크게 작용했네. 자상한 남편과 아버지 이미지였지. 덕분에 여성 유권자들의 지지가 압도적이었고.”
“쉽지 않은 문제였겠네요.”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네. 함께 찍힌 여인이···.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유명 배우였네. 털고 가려 해서 공개됐으면 대한민국 사회가 발칵 뒤집힐 일이었지.”
“유명 배우 누군데요? 혹시 영상 볼 수 있나요?”
“자, 자네···!”
“농담입니다. 농담. 대통령님 너무 긴장하신 듯해서···.”
이후 크리스털 박은 크고 작은 청탁을 이어갔다. 인사라든가, 이권이라든가, 드물게 정책에 관해서도.
문제가 될 만한 청탁은 아니었다. 그럭저럭 받아줘도 법적 도의적으로 문제 될 게 없는 청탁들이었다.
다만 쌓이고 쌓이니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정부 고위층에 크리스털 박의 사람들이 대거 자리했고, 정부 관련한 이권도 그녀에게 집중됐다.
베일에 감춰진 크리스털 박이 대한민국의 실질적인 실력자로 군림하게 된 과정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직접 이실직고하고 털어버리고 싶었네. 국민 앞에 석고대죄하고. 최악의 경우 대통령직도 내려놓을 수 있다고.”
“차라리 그러셨더라면···.”
“그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었네. 국격과 관련된 문제니 말일세. 지저분한 스캔들로 대통령이 물러나고, 그 과정에 국정이 더럽혀진 게 외국에 알려진다고 생각해보게. 국가적인 망신 아니겠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망신을 당하는 것도 중차대한 문제였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
“박순덕을 제거하는 방법은 없었습니까?”
죽여 없애는 가장 확실한 처리가 이뤄지지 않은 대목이었다.
대답은 이윤성에게서 나왔다.
“크리스털 박이 자신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자동으로 공개되도록 조치해뒀습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윤성이 대통령을 쳐다봤다. 동의를 구하는 듯했다.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통령님 외에도 약점 잡힌 고위 인사가 수두룩하다는 점입니다. 크리스털 박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일제히 공개될 겁니다. 정계와 재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엄청난 혼란이 빚어질 테고요.”
유지훈이 입을 떡 벌렸다.
대통령을 비롯해 수많은 고위 권력자를 손에 쥐고 흔드는 여인. 이쯤 되면 권력의 정점이라 부를 만했다.
“물론 제거할 겁니다. 동영상 공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어느 정도 근접한 상태입니다. 다만 또 다른 걸림돌이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또 뭡니까?”
끊임없이 이어지는 난관에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이윤성의 대답은 짜증을 쏙 들어가게 했다.
“초인입니다. 초인이 크리스털 박을 비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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