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를 달다 (1)
귀환자라는 단어가 던진 파문은 묵직했다.
각성자 진영과 정부 측 인사들 그리고 국가안전본부 간부들 대부분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지훈의 실체를 아는 최금강만이 묘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귀환자의 의미를 모르는 국회의원 하병우는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머리가 깨진 정도균은 떡실신 직전이라 논외였다.
좌중의 시선이 국가안전본부 본부장을 향했다.
신영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유지훈 씨는 귀환자입니다. 저도 최근에 알게 됐습니다. 강은영 국장을 프리 에이전트로 발령한 이유도 유지훈 씨와 긴밀한 협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상황이 정리됐다.
비각성자임에도 초특급 몬스터를 둘이나 처치한 비결 또한 귀환이라는 단어로 이해되는 분위기였다.
대책 회의 또한 급물살을 탔다. 당분간 유지훈의 개인기에 기대면서 초인 및 거대 길드들과 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아울러 신화그룹과 야마가토산업의 은밀한 실험에 대해서도 국가안전본부와 각성자수사청에서 내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유지훈은 제대로 된 수사를 기대하진 않았다. 틀림없이 누군가 방해할 테니. 야마가토산업이든, 배후의 권력자든.
어쨌거나 이들에게 압박이 가해지는 것만으로 만족이었다. 압박이 가해지면 서두를 테고, 허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렇게 비상 대책 회의는 막을 내렸다.
***
“미안해요.”
회의를 마치고 영훈길드로 향하는 길에 강은영이 머리를 조아렸다.
유지훈은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뭐가? 나 몰래 사과할 일 저질렀어?”
“유지훈 씨 귀환자라는 사실 공개한 거요.”
“그거야 뭐···.”
유지훈이 피식 웃었다.
“어차피 다 알게 될 일이었잖아. 진즉에 내가 밝히기도 했고. 본부장도 알고 있었다며. 머지않아 공론화했겠지. 잘했어. 우리 마스터께서 장엄하게 선언해주신 것도 나쁘지 않았어.”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요.”
강은영이 방긋 웃고는 질문을 던졌다.
“오늘 회의 어땠어요? 불편하진 않았어요?”
“불편할 게 뭐 있어. 국회의원이 국개의원인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직접 경험해 보니 짜증은 나더군.”
“정도균 의원 여당 실세 중 하나예요. 유지훈 씨를 상당히 귀찮게 할 수 있어요.”
“도발해주면 더 좋고. 가만히 안 있어도 되니까.”
조심하라는 당부에도 유지훈의 반응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강은영은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긴 해.”
“뭔데요?”
“국가안전본부 간부들이 회의에 임하는 모습.”
“그게 어때서요?”
“확연히 둘로 나뉘더군. 각성자를 지지하는 쪽이랑 정부 편을 드는 쪽이랑. 한쪽은 젊고, 다른 한쪽은 상대적으로 연령대가 높았고.”
유지훈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연령대가 높은 간부들은 정부 인사들에게 동조했다. 반면 젊은 간부들은 각성자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강은영이 공감하며 설명했다.
“국가안전본부의 인적 구성 때문이에요.”
“각성자들로만 이뤄진 거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요. 각성 시점은 차이가 있거든요. 말하자면 본부에 합류한 시기가 각성 전이냐, 각성 후냐로요.”
강은영의 분류에 의한 국가안전본부 인력은 둘로 나뉘었다.
정부 기관 공직자로 근무하던 상황에서 각성자가 된 이들과 각성자가 된 이후 국가안전본부에 합류한 이들이었다.
“내부에선 원공과 어공이라 불러요. 원래부터 공무원, 어쩌다 공무원이죠. 간부들 대다수는 공직에 오래 몸담은 원공이에요. 그러다 보니 정부 의견을 따르는 성향이 강해요.”
“어공들이 불만이 많겠네. 각성자는 생태계가 엄연히 다른데, 각성자로 이뤄진 국가안전본부가 동떨어진 결정을 내릴 때가 많을 테니.”
“맞아요.”
강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원공들은 대부분 저레벨 각성자들이에요. 당장 본부장님도 레벨 2에 불과하죠. 상대적으로 레벨이 높은 어공들이 못마땅해하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이유이기도 해요.”
“딱히 좋은 직장은 아니네. 내가 우리 마스터를 구제해준 거였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강은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적은 그쪽에 두고 일은 우리 쪽에 와서 할 수 있게 해줬잖아. 더러운 꼴 안 보면서 본부 일까지 할 수 있게 됐으니. 구제가 아니면 뭐겠어. 나한테 감사하면서 살아.”
“말이 왜 그렇게 가는 건지···. 고마운 건 인정해요. 그나저나.”
강은영이 뭔가 떠오른 듯 화제를 바꿨다.
“일본 각성자들 입국하는 거 반기는 것 같던데요? 유지훈 씨는.”
“눈치가 제법인데! 대체로 눈치가 없는 것 같다가도 어떨 때 보면 은근히 예리하단 말이야.”
“칭찬으로 들을게요. 그런데 우려할 일 아니에요? 하병우 의원도 말했지만, 일본 각성자들이 우리보다 수준이 높은 건 사실이에요.”
“각성자 수준이 높아봤자 나한테는 의미 없는 거 알지 않나?”
역시나 유지훈은 심드렁했다.
강은영은 잠시 눈을 깜빡였지만, 이내 유지훈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파악했다.
“유지훈 씨 설마···?”
“응. 그 설마가 맞을 거야. 이번 기회에 양국 각성자 수준 좀 비슷하게 맞춰주지. 뭐.”
“하아···. 또 사고 칠 생각에 눈빛이 반짝였던 거로군요.”
“사고를 치다니. 말은 똑바로 해야지. 사고를 수습하려는 거야. 사고는 쪽발이 놈들이 치는 거고.”
유지훈이 짐짓 눈을 부릅떴다가 피식 웃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야마가토 놈들이 각성자들을 보낼 거란 말을 들었어. 와서 난장판을 만들려 하겠지. 우리나라를 도발해 오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 싹 다 응징해드려야지.”
“이미 그 이야기를 들었다고요? 누구한테요?”
“아. 이나연인가? 신화그룹 막내딸이 다녀갔어. 이자걸이 보냈다고 하더군. 그룹을 대표해서 사과한다고.”
유지훈이 이나연이 다녀간 사연을 들려줬다.
사과와 함께 도움을 청했다는 이야기였다. 아울러 베일에 감춰진 권력자 크리스털 박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크리스털 박이라고요? 처음 듣는 이름이네요.”
“그러게. 이름도 참···. 박순자가 더 어울릴 것 같은데···.”
“그러니까 야마가토산업의 사주를 받은 크리스털 박이 일본 각성자들의 입국이 이뤄지도록 뒤에서 손을 쓸 거란 말이죠?”
“그렇지. 놈들은 들어와서 이자걸부터 노릴 거란 이야기고.”
강은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충 상황이 이해되네요. 오늘 회의에 왔던 외교통상부 장관이랑 국회의원들도 크리스털 박 작품인 것 같네요. 일찌감치 본부에 운을 띄워놓으려는 수작이었어요.”
“한마디로 개수작이지. 어쨌거나 나로서는 환영할 일이고. 입 벌리고 있다가 덥석덥석 물어버리면 될 테니.”
강은영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었다.
“그래서 이자걸을 도울 거예요?”
“아니. 이자걸을 돕는 게 아니고, 대한민국을 도발하는 쪽발이들을 처단하려는 거야.”
“그게 그거잖아요. 결국엔 이자걸을 돕게 되는···.”
“그전에 이자걸부터 응징할 거야. 응징할 짓을 저질렀으면.”
“그게 무슨···?”
“변종 몬스터.”
내내 무신경하던 유지훈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변종 몬스터들이 한국 땅을 활보하고 다니는 데 이자걸이 관여했으면 마땅히 벌을 줘야지. 지금 봐선 어떤지 모르겠는데, 한 번 만나서 이야기나 들어보려고.”
“만나기로 했어요? 피해 다니는 눈치던데···.”
“만나겠대. 이나연이 그러더라고.”
“으음. 정황상 떳떳하게 만나자고 할 처지는 아닐 텐데···.”
고개를 갸웃하는 강은영을 향해 유지훈이 질문을 던졌다. 이나연에 대해 궁금하게 여겼던 사안이었다.
“이나연도 각성자라던데? 혹시 알아?”
“레벨 테스트받고 갔다는 말은 들은 적 있어요. 레벨 4라 그랬던가? 레벨 5라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으음···.”
유지훈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뭔가 석연치 않다는 눈치였다. 강은영이 놓치지 않고 물었다.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별거 아니야. 우리 길드에 들어오고 싶다나···.”
“이나연이 영훈길드에 들어오겠다고요? 안돼요!”
뜻하지 않은 강은영의 거부 반응에 유지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반응이 격한데! 질투하는 거야?”
“네! 네?”
“질투 맞네. 하하하. 걱정하지 마. 우리 길드 이름이 뭐야. 강은영의 영, 유지훈의 훈. 영훈길드잖아. 누가 와도 마스터는 그쪽이라고.”
“아직 완전히 수락한 건 아닌데···.”
마스터직을 놓고 모종의 딜을 하고 싶은 강은영이었지만, 상황은 그녀를 수락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강은영은 비장의 카드 한 장 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가슴에 품은 채 언젠가 반드시 꺼내 들겠다고 다짐했다.
***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고요?”
소식이 끊겼던 SSG 미중년으로부터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다짜고짜 요청해왔다. 누군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고. 대답 옵션에 거절은 없는 듯 완강한 분위기였다.
[그렇습니다. 긴한 만남을 원하십니다.]
“어디 은밀한 장소로 끌고 가실 건가요?”
[은밀한 장소로 모시고 갈 겁니다.]
“흐음. 신화길드 이자웅 놈이 생각나는데요? 그 자식 결과가 어땠는지는 아시죠?”
[하하하. 알아서 깍듯이 모시겠습니다.]
“싫다고 해도 끌고 가실 분위기네요.”
[모시고 가겠습니다.]
가기로 했다.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미중년의 어조가 절실하기도 했다.
전화를 끊고 채 10분도 되지 않아 미중년이 나타났다.
“뭐야!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만큼 유지훈 씨를 중요시한다는 의미입니다.”
“스토킹하는 것 같은데요?”
“결례를 범했다면 죄송합니다.”
유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길. 이 기분이었구나. 변태···.”
“네?”
“아니에요. 가시죠.”
미중년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갔다.
평소 거느리고 다니던 청년들도 없었다. 말 그대로 긴한 만남을 위해 은밀한 장소로 향하는 듯했다.
미중년의 표정도 평소와 달랐다. 특유의 느물거리는 장난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긴장한 기색까지 엿보였다.
“표정 좀 푸세요. 내가 끌려가는 게 아니라, 내가 그쪽을 끌고 가는 것 같잖아요.”
“하하하. 표가 많이 납니까?”
“얼굴에 쓰여 있어요. 도살장에 끌려가는 중이라고요.”
“하하하. 어려운 분을 뵈러 가서 그런 모양입니다. 유지훈 씨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한테나 어려운 분이니까요.”
차는 서울을 빠져나가 과천으로 향했다. 경마장을 거쳐 서울대공원까지 지나더니 산속으로 접어들었다.
구불구불 숲길을 5분 정도 달린 끝에 아담한 주택 앞에 멈춰섰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가옥이었다.
고즈넉한 느낌이었지만, 유지훈은 감지할 수 있었다. 가옥 주위로 삼엄한 경비가 펼쳐져 있었다.
차에서 내리기 전 미중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정식으로 제 소개를 드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진작에 좀 하시지 그랬어요. 변태로만 알고 있었잖아요.”
“하하하. 일전에 제가 SSG 소속이라는 말씀은 드렸었죠?”
“네. 쓱.”
“맞습니다. 쓱. 시크릿 스트래티지 그룹. 비밀전략국이죠.”
미중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내밀었다.
“제가 국장입니다. 이윤성이라고 합니다.”
“아. 국장님이셨구나. 하도 긴장하시길래 국장님을 만나러 가는 줄 알았는데, 국장님은 바로 옆에 있었네요.”
유지훈이 악수하며 농담을 던졌다. 긴장을 풀어주려는 의도였다.
이윤성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제 직속 상관을 만나게 되실 겁니다. 제겐 몹시 어려운 분이죠.”
이윤성이 유지훈을 가옥 내부로 안내했다.
1층은 수더분한 옛날식 가옥이었다. 이윤성은 안쪽 방의 도어 키를 작동했다. 문이 열리더니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지하는 초현대식이었고, 넓었다. 장식도 품격 있었다.
복도를 걸어 도착한 곳은 고급 레스토랑을 연상케 하는 식당이었다.
은발을 단정하게 빗어넘긴 사내가 일행을 맞이했다. 평범한 체구에 인자한 미소가 인상적인 노인이었다.
“어서 오시게. 오느라 힘들진 않았는가?”
“처음 뵙겠습니다. 유지훈이라고 합니다.”
노인이 푸근한 웃음과 함께 유지훈의 손을 잡았다.
“알고 있네. 이 국장으로부터 이야기 많이 들었네.”
유지훈은 고개 숙여 인사하며 생각했다.
‘누구지? 분명 처음 보는 분인데, 왜 나를 초면이 아닌 것처럼 대하는 걸까? 언제 만난 적이라도 있었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처음 만난 노인이었다.
하지만 노인의 태도는 자신을 아는 게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참다 못한 유지훈이 물었다.
“저기 죄송한데요. 제가 영감님 뵌 적이 있던가요? 저는 통 기억에 없어서요. 혹시 누구신지 여쭤보면 실례일까요?”
노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어 눈빛에 낙심이 번졌다. 짧은 탄식을 토해내기까지 했다.
기함한 건 옆에서 미소짓고 있던 이윤성이었다.
“유지훈 씨. 대한민국 대통령님이십니다.”
“네? 대통령은 여자분 아니셨던가요?”
그러고 보니 무림에 다녀온 이후 뉴스를 본 적이 없었다. 대통령이 누구인지도···. 5년 전 대통령만 머릿속에···.
이 모든 게 신화 그 개 같은 놈들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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