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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는 각성을 압살한다-53화 (53/150)

변종 몬스터 대책 회의 (1)

봉지 커피 한 잔씩을 놓고 마주 앉은 뒤, 이나연은 살짝 눈을 흘겨 유지훈을 바라봤다.

“조금은 섭섭하네요.”

“뭐가요?”

“저 나름 대한민국 내에선 알아주는 셀럽이에요. 유지훈 씨는 전혀 모르시는 눈치군요.”

“아···. 하하하.”

유지훈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미안합니다. 제가 TV나 뉴스 볼 시간이 없어서요. 그동안 누구 덕분에 너무 바빴거든요.”

“아하하. 유지훈 씨 사람 미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남다르시군요.”

이나연이 짐짓 새침한 웃음으로 응수했다.

“괜찮아요. 저도 앞으로 TV나 뉴스에 나갈 일이 없어졌거든요. 누구 덕분에 돈만 좀 많은 백수가 돼서요.”

한 차례씩 유쾌하게 주고받았다.

이나연의 첫인상, 나쁘지 않았다.

당당하고 자신 있는 태도였다. 과하지 않은 선에서 예의도 갖추고 있었다. 억지로 만들어 보이는 예의가 아니기에 편했다.

“그럼 어떤 용무로 저를 찾으셨는지 말씀하실까요. 이제 막 길드를 출범한 상태라 몹시 바쁜 상황입니다.”

“그러죠. 일단 신화를 대표해서 사과드린다는 말씀은 이미 드린 것 같고요.”

이나연이 유지훈의 눈치를 살피고는 말을 이어갔다.

“받아주시는 것 같진 않군요. 물론 이 자리에서 받아주실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어요. 시간을 갖고 성의를 보이겠어요. 신화전자 차원에서, 또 저 나름대로도요.”

“쉽진 않을 것 같군요. 어쨌든 지켜보겠습니다. 이게 사과에 대해 제가 드릴 수 있는 대답입니다.”

이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로 충분해요. 용건은 또 있어요. 더 중요한 용건이에요.”

“말씀하시죠.”

이나연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도움을 청하고 싶어요.”

“네? 도움을 청하고 싶다고요?”

어리둥절한 요청이었다.

신화는 야마가토산업과 손잡고 은밀한 실험과 연구를 진행했다. 대한민국을 위기에 몰아넣을 수 있는 위험한 행태였다.

유지훈은 이를 밝혀내고 응징하려고 마음먹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도움을 청한다고?

목을 내밀고 내리쳐달라고 해도 부족할 판국에?

이나연은 진지한, 아니 간절한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

“신화그룹, 아니 신화전자는 권력과의 모든 고리를 끊으려 하고 있어요. 진행 중이긴 하지만, 저항이 만만치 않아요. 특히 기존에 연결돼 있던 권력은···.”

“잠깐, 잠깐, 잠깐.”

유지훈이 말을 끊었다.

“지금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닌 것 같은데요. 야마가토산업이랑 벌인 일 아직 안 끝난 거 아니에요? 여전히 진행 중이잖아요.”

“맞아요. 아직 안 끝난 건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진행 중이진 않아요. 중단된 상태예요. 계속 진행하라는 압력이 들어오고 있어서 문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거예요.”

“압력이 들어오고 있다···.”

“그래요. 야마가토산업이 움직이고 있어요. 국내에도 야마가토산업을 도와 신화에 압력을 넣으려는 실력자가 있고요.”

유지훈은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지만, 일단 가만히 듣기로 했다.

“둘째 오빠와 저는 그들에게 맞서려 해요. 어떠한 권력과도 연관되지 않도록 단절의 대못을 박으려는 거예요.”

“국내에서 야마가토 놈들을 돕는다는 실력자가 여자입니까?”

“그, 그래요. 유지훈 씨도 아시는 모양이군요. 크리스털 박이라고 로비스트예요. 한국명은 박수정. 고위 권력자들을 쥐고 흔드는 베일 뒤의 실력자예요.”

“박수정이라···. 왠지 예명 같네. 순자가 더 어울릴 것 같아.”

“크리스털 박은 큰오빠 쪽으로도 압력을 넣고 있어요. 도와줄 테니 그룹을 되찾으라고요. 야마가토산업과 더욱 탄탄히 손잡으라고요.”

유지훈이 눈매를 살짝 찡그렸다. 고개도 가로저었다.

“이나연 씨도 모르지 않을 것 같은데요. 신화그룹이 야마가토산업이랑 몬스터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고, 연구를 진행했어요. 뭔가를 개발하기 위해서였죠.”

“신화길드가 진행한 실험과 연구까진 저도 알아요. 뭔가를 개발하는 것까진···. 어쨌거나 셋째 오빠가 죽으면서 다 사라졌어요. 남은 일말의 여지도 제거하자는 게 신화전자의 생각이고요.”

“흐음. 진짜 몰라서 이러시나···?”

유지훈이 고개를 갸웃하자, 이나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제가 뭘 모른다는 거죠?”

“이자웅의 죽음. 자살이 아니라면요? 누군가가 모든 걸 덮기 위해 자살을 위해 죽인 거라면요? 그리고 결과물을 감추고 있다면요?”

이나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설마 둘째 오빠가···?”

“가정입니다. 그럴 수도 있다는. 이자걸 대표가 아닐 수도 있고요.”

“아닐 거예요. 둘째 오빠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요. 권력의 손에 좌지우지되는 신화그룹을 혐오했어요. 임시로 그룹을 맡은 이후 권력과 연계된 계열사들을 잘라버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어요.”

“그 과정에서 이나연 씨 회사들도 잘려나갔죠.”

유지훈이 빙긋 웃었다.

이나연이 쓸쓸한 웃음으로 반응했다.

“어쩔 수 없죠. 그렇게 해야 권력으로부터 단절될 수 있다면, 저부터 나서서 희생해야죠.”

“지금까지 만나본 신화 쪽 사람과는 다른 분이군요. 이나연 씨는.”

유지훈이 이나연을 향해 빙긋 웃어 보인 뒤 계속 말했다.

“아직 못 만나봐서 단정 짓긴 어렵습니다만. 저는 여전히 이자걸 대표를 의심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야마가토 놈들과 합작에 연루됐을 거라고요. 어쩌면 가장 깊숙이 연관됐을 수도 있고요.”

“저도 둘째 오빠의 실체는 모를 수 있어요. 다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믿어요. 신화를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고 애쓰는 점이요. 그걸 믿기에 둘째 오빠와 손을 잡은 거예요.”

“뭐. 좋습니다. 내가 뭘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이나연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야마가토산업에서 조만간 국내로 사람을 보낼 거예요. 그들 나름대로 상황을 바로잡으려는 게겠죠. 막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내가요? 나한테 무슨 힘이 있다고.”

“유지훈 씨 힘 있는 거 다 알아요. 돕는 분들도 막강하고요. 도와주시면 원하시는 건 뭐든 드릴게요. 능력이 되는 한도 내에서요.”

유지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야마가토 놈들이 사람을 보낸다고요? 도움을 청할 정도면 대단한 놈들을 보내는 모양인데, 초인쯤 되는 겁니까?”

“초인일 수도···. 있어요.”

“허허. 쪽발이 각성자가 마음대로 한국에 들어올 수 있다고요? 하물며 초인이요?”

“야마가토산업이라면 가능해요. 크리스털 박을 움직일 테니까요. 크리스털 박은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을 테고요.”

“하하하. 잘됐네요.”

유지훈이 유쾌하게 웃었다.

“안 그래도 야마가토 놈들을 어떻게 조지나 고민 중이었는데. 제 발로 찾아와 준다니 환영해야겠어요. 좋아요. 돕죠. 대신!”

중요한 단서를 달았다.

“이자걸을 믿는 건 아니에요. 대한민국을 상대로 장난질 하는 놈들을 처단하기 위한 거지. 이자걸에 대한 의심은 짙어질 겁니다. 만일 의심이 사실로 드러나면···.”

유지훈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을 것 같군요.”

이나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고마워요. 둘째 오빠도 시간 내서 유지훈 씨 만나 뵙겠다고 했어요. 만나보시면 아실 거예요. 둘째 오빠 괜찮은 사람이에요.”

“이나연 씨는 괜찮은 분인 것 같군요.”

용건이 끝났다.

하지만 이나연은 떠나지 않고 사무실을 둘러봤다.

“무슨 용무가 더 남았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이나연이 잠시 주저하더니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여기 영훈길드··· 사람 필요하지 않나요? 말하자면 헌터요.”

“네? 누구요? 이나연 씨요?”

“네···. 백수가 되기도 했고, 헌터가 돼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해서요. 이참에 한번···.”

유지훈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이나연을 살핀 뒤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나연 씨 이런 데 들어올 자격이 안 되는 분 같은데요.”

“네? 서운한데요! 저도 각성자예요.”

이나연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지훈이 손사래를 쳤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제가 하려는 말은···.”

유지훈이 뭔가 말하려 할 때 요란하게 휴대폰이 울렸다.

강은영이었다.

“어. 무슨 일이야? 중요한 손님이랑 이야기 중인데.”

[비상이에요.]

“또 무슨 비상? 거긴 맨날 비상이야?”

[변종 몬스터 때문이에요. 퇴치에 실패했어요. 초인 한 분이 중상을 입었고, 협력 길드 헌터들도 몰살을 당했어요.]

“초인까지? 그럼 몬스터는?”

[어디론가 도망갔어요. 행적이 파악되지 않고 있어요. 비상이에요. 유지훈 씨도 본부로 좀 와줘야겠어요.]

“나도? 왜?”

[왜는요. 유지훈 씨가 변종 몬스터를 둘이나 해치웠잖아요. 비상 대책 회의가 소집됐어요. 마철진 초인이랑 최금강 마스터도 오실 거예요. 자세한 건 와서 이야기해요.]

졸지에 국가안전본부의 비상 대책 회의에 끌려가게 생겼다.

이나연과 흥미로운 대화는 여기서 중단해야 했다.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던 이야기는 다시 시간 내서 마저 하도록 하죠.”

“알겠어요.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해주시길 바랄게요.”

이나연이 떠났다.

유지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각성자라는 사실은 처음 만난 순간 파악했다. 드러난 기세의 크기는 강은영과 비슷했다. 레벨 5 언저리였다.

다만 기감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잠재된, 어쩌면 갈무리해 숨겨둔 기운의 크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최금강이나 마철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듯했다.

길드에 들어올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초인 아니냐는 질문을 에둘러 던진 것이었다.

“여러모로 흥미로운 여인이군. 이자걸 이나연···. 예의 주시해야겠어. 재미있는 남매야.”

아무리 그래 봤자 유지훈 유지연 남매만 할까.

***

강은영은 국가안전본부 청사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지훈이 들어서자마자 허겁지겁 달려와 에스코트했다.

“빨리 좀 오라니까 이제 오면 어떡해요? 다들 기다리고 있잖아요.”

“원래 주인공은 가장 늦게 나타나는 거야. 그런데 얼마나 대단한 양반들이 왔길래 그리 호들갑이야?”

강은영이 한껏 눈살을 찌푸렸다.

“있어요. 쓰잘데기 없는 인사들. 이런 일 있을 때면 괜히 나타나서 감놔라 배놔라 하는···.”

“비상 대책 회의라며? 그런 인간들을 왜 들여보내? 내보내야지.”

“그런 인간들이 장관이고 국회의원이에요. 유지훈 씨가 한 번 내보내 보세요.”

“오케이! 그쪽이 시킨 거다. 나는 시키는 대로 한 거고.”

“아니에요! 아니에요! 무슨 말을 못 하게 해···.”

강은영이 투덜거리며 유지훈을 회의실로 안내했다.

회의실 안엔 스무 명 정도가 참석하고 있었다. 국회의원 둘과 장관 둘의 명패가 뚜렷이 눈에 들어왔다. 마철진과 최금강도 보였지만, 명패는 없었다. 장관과 국회의원에게만 제공된 특혜인 듯했다.

삐딱하게 앉아있는 장관과 국회의원의 모습. 몬스터 트림 소리만 들어도 혼비백산할 인사들이 몬스터 대책 회의에 와서 거들먹거리고 있는 꼴이 가관도 아니었다.

유지훈은 종종걸음으로 들어가며 고개부터 숙였다.

“아이고. 많이들 기다리고 계셨네요. 이런 줄도 모르고.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자 국회의원 중 하나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명패에 정도균이라고 적혀 있었다.

“젊은 친구가 빨리빨리 안 다니고 뭐 하는 거야! 우리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들인 줄 알아!”

유지훈이 빙긋 웃으며 국회의원을 쳐다봤다. 허리를 깊이 숙였다.

“바쁘신 분들 시간을 뺏게 돼 죄송합니다. 제가 책임을 지고 퇴장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그대로 뒤로 돌아 회의실을 빠져나오려 했다.

강은영이 다급하게 앞을 막아섰다.

“가시면 안 돼요! 유지훈 씨 조언을 구하기 위해 모신 거예요.”

국가안전본부 본부장도 달려와 유지훈의 손을 잡았다.

“오늘 이 회의가 유지훈 씨로 인해 소집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변종 몬스터에 대해 고견을 청해 듣기 위해서 마련된 자리입니다.”

유지훈의 시선이 정도균을 향했다. 소리 높여 외쳤다.

“바쁘신 분들 시간을 뺏게 돼 죄송합니다. 제가 책임을 지고 퇴장하도록 하겠습니다.”

“큼큼···.”

정도균은 찔끔해 시선을 돌렸고, 유지훈은 퇴장 선언을 이어갔다.

“바쁘신 분들 시간을 뺏게 돼···.”

계속된 유지훈의 퇴장 선언과 애써 외면하는 정도균. 세 차례나 도돌이표처럼 이어졌다.

급기야.

“몬스터가 나라 쑥대밭 만들기 전에 회의 좀 합시다! 원인 제공한 양반이 나서서 수습 좀 해요!”

마철진의 짜증 섞인 호통이 정도균에게 꽂혔다.

정도균이 마지 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지훈에게 다가왔다.

“미안하게 됐네. 그런 줄도 모르고···.”

유지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비어있는 마철진의 옆자리로 향했다. 혼잣말을 읊조리며. 물론 정도균에게 들리게.

“그런 것도 모르면서 여긴 왜 앉아있대?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그렇게 한가한가? 국회의원이 아니라 국개의원이었던가?”

정도균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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