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손님
이자걸을 만나진 못했다.
마철진을 필두로 유지훈과 강은영이 신화전자로 쳐들어갔지만, 이자걸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SSG의 미중년은 긴급 호출에 불려가 함께하지 못했다. 상당히 다급한 사안인 듯했다. 변태 논쟁의 속개에서 벗어나려고 쇼를 한 것일 수도 있었다.
이자걸은 반도체 공장 시찰을 위해 지방 출장길에 올랐다고 했다. 이틀 예정으로. 기다려봐야 별수 없기에 일단 해산하기로 했다.
그래도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영감님. 이자걸한테 집착하시는 것 같은데요? 무슨 일 있었어요?”
마철진이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시더니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자걸 녀석이 너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뭐라던가요?”
“위험한 인물이라고 했다. 유심히 살펴봐달라고 하더구나.”
마철진이 이자걸과의 만남에 대해 들려줬다.
용인 외곽 막국숫집에서의 은밀한 만남. 유지훈에 대해 말하며 적절히 대처해 달라고 요청한 일이었다.
“아항! 그래서 영감님이 나를 몰래 쫓아다니신 거구나?”
“꼭 그런 것만은···. 정명이 병문안 때 들은 이야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연이 오빠가 어떤 놈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혹시 아이언 헤드랑 한바탕 할 때도 숨어계셨던가요?”
“그것도 알고 있었냐?”
“제가 신경이 좀 예민해서요. 영감님인 것까진 몰랐어요. 대단한 양반이 숨어서 보는구나 정도였어요.”
돌연 유지훈이 유쾌하게 웃었다.
“영감님한테 감사해야 할 것 같은데요? 하하하.”
“뭐가?”
“저를 처단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신화 놈들한테 넘기지도 않았잖아요. 오히려 나카무라 형제들이랑 싸울 때 도와주기까지 하셨죠.”
“그거야 네놈이 억지로 나를 끌어들인 거지.”
마철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약효 때문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폭주한 나카무라 히로와 대결은 그에게도 섬뜩한 기억이었다.
“그 실험인지 개발인지에 대해서는 반드시 밝혀내야 할 것 같다. 오늘 당장 이자걸이 놈을 만났어야 하는 건데···.”
“지금 당장 만난다고 달라질 건 없을 겁니다. 이자걸이 모른다고 잡아뗐을 때 대응하기도 마땅치 않고요.”
“그래도 계속 밀어붙이다 보면···.”
“현재로선 이자웅이 다 짊어지고 떠났어요. 증거라고 할 만한 것도 완전히 사라졌을 테고요. 이자걸이 모르는 일이라고 하면, 우리로서는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
“어떤 의미에선 오늘 만나지 못한 게 다행일 수 있어요. 우리끼리 논의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이 있잖아요. 추적할 단서가 생긴 셈이니, 좀 더 들이밀 것들을 확보하는 계기로 삼죠.”
유지훈은 작지 않은 성과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이자걸이 그의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 의미 있었다.
이자웅이나 이자성은 유지훈의 실체를 무시했기에 신화그룹을 몰락으로 몰아넣었다. 반면 이자걸은 알고 있었음에도 신화그룹의 침몰을 방치했다. 비상한 노림수가 있다는 추정도 가능했다.
‘놈이 노리는 게 뭘까? 고작 신화전자 하나 먹겠다고 그룹을 날려버리진 않았을 텐데···.’
좋은 방향일 수도, 나쁜 방향일 수도 있을 터였다. 현재로서는 나쁜 방향에 방점을 두고 대처하기로 했다.
마철진에게 볼일도 아직 남아 있었다.
“영감님. 우리 길드에도 종종 놀러 오세요.”
“영훈길드에? 거긴 뭐하러.”
“협력 관계잖아요. 가끔 와서 우리 애들도 좀 봐주고 그러세요. 우리 애들이 강해져야 영감님한테도 좋은 거잖아요.”
“협력 관계 좋아하고 있네. 일 없다.”
철벽을 세우는 마철진 앞에서 유지훈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지연이한테 전화할까요?”
“언제 가면 될까? 내일도 괜찮은데···.”
화끈하게 말이 잘 통하는 마철진이었다.
***
영훈길드가 본격적으로 출범했다.
첫 임무까지 성공적으로 마쳤으니, 길드로서 첫발은 기운차게 내디딘 셈이었다. 유지훈 혼자 다 한 건 함정이었지만.
어쨌거나 첫 임무에서 72억 원이라는 퇴치 보상금까지 받았다. 초특급 몬스터의 부산물 처분 수익에 성공 보수를 합친 금액이었다.
“이번엔 나 혼자 했지만, 앞으론 여러분들이 활약해야 해. 나한테 다 맡길 생각은 지금 이 순간 쓰레기통에 처넣길 바란다.”
사실 길드원 면면을 보면 그런 말이 나오기 쉽지 않을 터였다.
레벨 2 각성자 박형식과 강민정 조정훈 이상목, 그나마 이상목은 황소개구리의 혈독에 당해 오른팔을 잃었다.
레벨 1 던전을 도는 과정에서 선발한 나머지 인원 남기영 서동원 손석우는 모두 레벨 1 각성자였다. 거기에 비각성자 엄덕대까지.
길드원의 면면을 놓고 보면 한숨부터 쉬고 봐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유지훈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을 고레벨 각성자에 버금가는 전사로 키울 자신이 있었다. 이들과 함께 영훈길드의 명성을 높인 뒤 실력 있는 고레벨 각성자들이 찾아오도록 만들 계획이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영훈길드를 신화길드가 빠진 대한민국 3대 길드의 한 자리에 올리겠다는 비전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여러분들은 약하다. 그렇다고 계속 약하란 법은 없다. 강하게 만들면 된다. 안 된다고? 내가 되게 할 거다. 어떻게? 토할 때까지 하면 된다. 안 되면 또 토할 때까지.”
모처럼 근엄한 유지훈의 연설에도 할 말을 하는 이는 있었다.
볼륨의 남다른 발육을 무기로 들이대는 강민정이었다.
“그래도 클래스는 넘을 수 없는 벽 아닐까요? 저희 다 레벨 2 아니면 레벨 1에 불과해서요.”
“그깟 레벨 다 숫자에 불과하다. 지금 이 순간 레벨도 변기통에 처넣고 갈아버리도록 해라. 실력은 숫자 따위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이다.”
길드원들이 술렁였다.
각성자와 헌터의 전투력을 결정하는 요인이 레벨인데. 레벨을 무시한 실력이라니.
유지훈의 준엄한 일성이 이어졌다.
“내가 왜 여러분들을 영훈길드의 구성원으로 선발했는지 아나? 친해서? 밥을 잘 해서? 아니면 발육이 우월해서?”
“······.”
“여러분들에게서 근성과 절실함을 봤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상목 씨다. 팔을 잃었지. 하지만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이상목은 팔을 잃은 이후에도 계속 사냥에 나서려 했다. 당초에 그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면 길드 합류 제안은 고사했다.
그러면서도 레벨 1 던전은 꾸준히 돌려고 했다. 동행을 거절당하기 일쑤였지만.
영훈길드에 합류한 뒤 유지훈은 삼재검법을 가르쳤다. 무림에서 우애를 나눴던 외팔이 좌수검의 기억을 그에게 투영하려 했다.
이상목은 지난 한 달 동안 각고의 수련을 거듭했다. 지금은 제법 그럴듯하게 삼재검법 스물세 개 초식을 구사할 수 있었다.
“이상목 씨는 어떻게 생각해? 검법은 좀 익숙해졌나?”
“아직 부족합니다. 그래도 예전보다 월등히 강해진 것 같습니다. 생각 같아선···. 레벨 3 던전 정도는 거뜬할 듯합니다. 무리하면 레벨 4 던전도···. 사실 자신은 없습니다.”
“아!”
길드원들이 다시금 웅성거렸다.
팔을 잃은 레벨 2 각성자가 레벨 3 던전이 거뜬하다니. 심지어 레벨 4 던전까지 언급했다. 전투력이 반으로 줄었어야 정상인데, 오히려 두 배 늘었다고 자신하는 격이었다.
유지훈은 한술 더 떴다.
“아니. 나는 이상목 씨 레벨 4 던전도 문제없을 거라 보는데? 고생은 좀 하겠지만, 살아서 나올 순 있을 거야.”
유지훈이 빙긋 웃으며 길드원들을 둘러본 뒤 이상목에게 물었다.
“이상목 씨 몇 번 토했지?”
“글쎄요. 서른 번까지 세다가 포기했습니다.”
“거봐. 토할 때까지 하니까 되잖아. 안 되면 또 토할 때까지. 계속 토할 때까지 하다 보면 되게 돼 있어.”
“아···. 이제 밥도 양껏 못 먹겠구나.”
구시렁구시렁 소리가 들려왔지만, 유지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야. 그럴수록 양껏 먹어야지. 그래야 토도 잘해. 토를 잘할수록 실력도 빨리 늘어.”
“잘 나가시다가···.”
“어쨌거나!”
유지훈이 다시금 분위기를 다잡았다.
“오늘부터 여러분들 각자에게 맞는 무공을 가르칠 계획이야. 물론 기반을 다지기 위한 기초 체력 훈련은 필수겠지. 익숙해질 때까지 토하고, 또 토해가면서 단련하길 바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깟 레벨, 특성을 갖기 전까진 다 똑같다고 생각해. 뼈를 깎는 단련으로 넘을 수 있는 벽이야. 다만 여러분들은 특성을 가질 수 없지.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
“······.”
“단련으로 넘어서야지. 토하고, 또 토하면서 단련하다 보면 특성도 넘지 못할 벽이 아닌 순간이 오게 될 거야.”
“알겠습니다!”
길드원들의 눈빛이 결기로 반짝였다.
유지훈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한 달 동안 특훈이다. 한 달 뒤에 레벨 4 던전으로 실습 나갈 거니까 준비들 단단히 해야 할 거야.”
“저희 레벨 4 던전 갈 자격은 안 되지 않나요?”
언제나 할 말을 하는 강민정이 볼륨과 함께 질문을 던져왔다.
유지훈은 애써 출렁이는 볼륨을 외면하며 대답했다.
“우리에겐 마스터가 있잖아. 레벨 5 각성자. 각서만 쓰면 레벨 4까진 문제없이 들어갈 수 있어.”
던전 진입 규정상 가능했다.
무리의 각성자 중 최상위 레벨 바로 아래 단계 던전까지는 진입이 가능했다. 안전 책임에 대한 각서를 제출하는 조건이었다.
레벨 5 각성자 강은영이 이끄는 영훈길드는 레벨 4 던전까지 진입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다만 생명은 스스로 책임져야 했다.
“레벨 4 던전 몇 번 돈 다음에는 레벨 5 던전도 갈 거야. 아. 그 부분은 최금강 영감님이 지원해주신다고 했으니 걱정 안 해도 돼.”
“못 들어갈까 봐 걱정되는 게 아니라 들어갈 수 있을까 봐 걱정되는 건데요? 레벨 5 던전이라니. 어휴···.”
“계속 토하면 된다. 토하는 횟수가 자신감이랑 비례할 거야.”
길드원들의 실력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릴 비장의 수단이 남아 있었다. 다만 아직 언급할 때는 아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공개하기로 하고, 일단 접어뒀다.
유지훈이 주위를 둘러봤다. 마뜩잖은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찼다.
“마스터는 왜 안 보이는 거야? 중요한 순간에 한마디 해야지···.”
대답은 엄덕대에게서 들려왔다.
“누님, 아니 마스터님 본부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연락 왔습니다. 조금 늦으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본부 업무가 우선이라고 했으니 뭐라 할 수도 없고···. 그 규정 괜히 동의해줬네.”
입맛을 다시며 길드원들에게 개별 훈련 프로그램을 정해주려 할 때, 낯선 여인이 사무실을 기웃거렸다.
단아하게 정장을 갖춰 입은 서른 즈음의 미녀였다. 기품과 요염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묘한 매력의 여인이었다.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져왔다.
“여기가 영훈길드 맞나요?”
“앞에 간판 안 걸려 있던가요?”
유지훈의 짐짓 무심한 대답에 엄덕대가 다급히 손을 흔들었다.
“형님. 아직 간판이 안 와서 못 걸었습니다. 색을 잘못 칠했다고···. 형님이 원하시는 색이 너무 까다롭답니다.”
“파스텔톤 자수정색 바탕에 쪽빛 글자가 뭐가 그렇게 까다롭다고···.”
유지훈이 여인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간판 아직 안 걸렸다네요. 영훈길드 맞습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유지훈 마스터님을 뵙고 싶어서 왔습니다.”
“제가 유지훈이긴 한데, 마스터는 아닙니다만···.”
“아. 그렇군요. 제가 제대로 찾아온 것 같긴 하네요.”
여인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순간 강민정이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이나연이다! 신화패션이랑 신화엔터테인먼트 대표.”
여인이 고개를 들더니 빙긋 웃었다.
“지금은 그냥 돈 좀 있는 백수에 불과합니다.”
이나연의 시선이 유지훈을 향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지금은 사라진 신화그룹의 막내 이나연이에요. 신화를 대표해 유지훈 씨에게 사과드리러 왔습니다.”
이나연이 우아한 미소와 함께 유지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모습이었다.
“악수 정도는 뿌리치지 않으시겠죠? 사실 둘째 오빠가 부탁해서 오게 됐어요. 물론 저도 유지훈 씨를 만나고 싶었고요.”
유지훈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나연의 손을 잡았다.
거짓이나 가식이 느껴지진 않았다. 사과하는 표정이나 눈빛 모두 진실해 보였다. 은은한 당당함도 엿보였다.
하지만 묘한 위화감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뭘까? 재미있겠는데.’
의도가 의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여인의 실체가 궁금했다.
유지훈은 반갑게 웃으며 이나연에게 자리를 청했다.
“뜻밖의 손님이시군요. 때론 이런 의외성이 삶을 유쾌하게 하곤 하죠. 잘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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