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는 각성을 압살한다-50화 (50/150)

첫 번째 미션 (1)

유지훈의 길드 출범식이 열리는 날 오전. 강은영은 울적했다.

국가안전본부의 인사 발령을 확인한 후였다. 신화그룹과 관련된 비리에 연루된 간부들이 불명예 퇴직한 공석을 채우는 인사 발령이었다.

강은영은 내심 기대했다. 승진까지는 아니더라도, 원 없이 일할 수 있는 자리 정도는 찾아갈 수 있으리라 전망했다.

신화그룹의 비리를 밝혀내는 데 적잖은 공을 세웠으니. 과거의 불명예 또한 말끔히 씻어냈으니.

그런데 명단에 없었다. 심지어 그녀가 팀장으로 있는 탐사 3팀은 해체가 결정됐다. 소속 부서가 사라진 상황에서 인사 발령 명단에 없다는 건···. 한 마디로 붕 떴다는 의미였다.

인사팀에 문의했더니 잘 모르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고려 사항이 있어 보류된 것 같다는 부연 설명만 있었다.

‘보류되면 어쩌라고. 이제 웬만한 자리는 다 차서 마땅히 갈 곳도 없잖아. 책상도 없이 떠돌아다니라는 거야?’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진짜 나가라는 건가 싶었다.

꾹 눌러 참았다. 지금까지도 버텼는데, 또 못 버틸까.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악착같이 버티겠다고 다짐했다.

울적했지만, 축하할 일은 축하할 일. 유지훈의 길드 출범식에는 참석해야 했다. 신생 길드의 출범이니 국가안전본부에서도 담당자를 보낼 사안이었다.

각성자관리국 대외협력팀 직원들과 함께 길드 사무실로 향했다.

“누님!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시면 됩니다.”

싹싹한 엄덕대가 강은영을 반겼다.

넉살이 좋은 녀석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누님이라는 호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외양은 떡대에 깍두기인데, 하는 짓은 귀여웠다.

이런 놈이 제비로 나서면 업계를 쓸어버리지 않을까.

“어! 정말 여기가 내 자리 맞아요?”

좌석 배치를 보고 감격했다.

맨 앞줄 귀빈석에 최금강 마스터와 마철진 초인 사이 좌석이었다.

“그럼요. 누님이야말로 오늘 이 자리 최고의 귀빈인데요.”

“영광이에요. 고마워요. 덕대 씨.”

“그냥 덕대야 라고 불러주십쇼.”

기대 이상의 귀빈 대접. 감동의 전율이 몰아쳤다. 인사 발령의 울적함이 조금이나마 씻겨가는 것 같았다.

유지훈의 인사말로 출범식의 막이 올랐다.

이어 길드 이름을 공개하는 순간.

‘영훈길드라고? 지훈길드가 아니고? 무슨 의미지?’

유지훈은 최금강의 금강길드에 찬사를 보내곤 했다. 마스터의 이름을 따서 길드명을 지으니 책임감이 느껴진다는 취지에서였다.

그래서 당연히 지훈길드라 명명할 줄 알았는데···.

과감하게 손을 들고 의미에 대해 질문하니, 중요한 의미가 있단다. 잠시 후에 설명하겠다고 했다.

‘이 인간 뜸 들이는 데 재미 붙였나? 맨날 나중에야.’

이윽고 출범식의 하이라이트, 길드 마스터 공개의 시간이 찾아왔다.

어떤 의미에선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아직 유지훈의 길드는 레벨 4 이상 각성자가 없어 설립 요건을 채우지 못한 상태였다.

자격을 갖춘 각성자가 길드 마스터로 합류해야 설립 요건을 완비하고 길드로서 진정한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깜짝 놀랄 거라고 했지? 보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길드 마스터를 단상으로 모신다는 말과 함께 유지훈이 잠시 뜸을 들였다. 입가엔 묘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강은영을 향했다.

최금강을 시작으로, 엄덕대 박형식에 이어 마철진 임정명···.

“왜 다들 나를 보고 그래요? 나 아니에요!”

강은영이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며 손사래를 쳤다.

너털웃음과 함께 날아온 유지훈의 일성이 강은영의 가슴에 비수가 돼 꽂혔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왜 영훈길드겠어. 강은영의 영, 유지훈의 훈. 그래서 영.훈.길드! 빨리 나와. 강은영 마스터님.”

“네? 아닌데···.”

박수갈채가 쏟아졌고, 플래시 세례가 밀려들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 놔. 미쳐버리겠네.”

유지훈이 단상에서 내려와 강은영을 잡아끌었다.

“어때? 깜짝 놀랐지? 미쳐버릴 정도로까지 놀랄 줄은 몰랐는데.”

“이게 뭐하자는 짓이에요?”

“능력을 보람있게 쓰고 싶다며. 여기 와서 그 아름다운 뜻 마음껏 펼쳐 보이라고.”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요! 나 국가의 녹을 먹는 사람이라고요!”

“녹은 내가 원 없이 먹여줄게. 영훈길드에서 국가를 위해, 국민을 위해 여한 없이 봉사하기만 하면 돼.”

“필요 없어요!”

강은영이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인사 발령에서 배제된 설움이 뒤늦게 북받쳐 오른 탓이었다.

“오늘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강은영이 자리에 주저앉아 고개를 파묻었다.

유지훈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감격해서 우는 것 같진 않은데···.”

매스컴의 취재 경쟁은 뜨거웠다.

초인 둘에 최금강까지 참석한 신생 길드 출범식에서 길드 마스터의 취임 거부 해프닝이라니.

“마스터 취임을 거부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처우가 부적절하다고 여기시는 겁니까?”

“두 분 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혹시 연인입니까?”

“헤어지기라도 하신 겁니까?”

출범식이 혼돈의 국면으로 빠져드는 찰나, 한 사내가 허겁지겁 현장으로 뛰어들어 왔다.

“제가 좀 늦은 모양이군요.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SSG의 미중년. A.K.A. 변태 양반이었다.

“어? 어떻게 알고 오셨네요? 연락이 안 돼서 초청장도 못 보내드렸는데.”

“당연히 와야죠. 정리할 일이 있어서 처리하느라 좀 늦었습니다.”

미중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강은영에게 다가갔다.

강은영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손만 휘휘 저었다.

“하지 마세요. 그거. 지금은 화낼 힘도 없어요.”

“그게 아니라···.”

“결례 범하지 마시라고요. 제발.”

“강 팀장님 발령 문제 좀 상의드리려 합니다.”

“네?”

강은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국가안전본부에 팀장님 인사 관련해서 요청해놓은 게 있었습니다. 그 부분을 처리하느라 발령이 늦어진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프리에이전트로 활동하실 수 있도록 했습니다. 물론 적은 국가안전본부에 두게 됩니다. 직급은 국장급으로요.”

“프리에이전트라고요? 뭘 어떻게 하라는···?”

“말 그대로입니다. 국가안전본부 소속으로 자유롭게 활동하실 수 있습니다. 업무 영역에 구애받지 않으면서요.”

“뭐든 할 수 있다는 말씀이에요?”

“물론입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일이라면.”

미중년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고개를 숙였다.

“절차상에 고려할 부분들이 있어서 처리가 다소 늦었습니다. 결례를 범했다면···.”

“하지 말라고요! 그거. 제발. 아니다. 이번엔 괜찮아요. 이런 결례는 범하셔도 돼요.”

“감사합니다.”

미중년이 이마에 찔끔 흐른 땀을 닦더니 말을 이어갔다.

“자유로운 활동의 범위는 팀장님, 아니 이제 국장님이라 불러야겠군요. 국장님 생각보다 넓을 겁니다. 이를테면···.”

미중년의 시선이 유지훈을 향했다.

“유지훈 씨가 만든 길드에 마스터로 합류하셔도 무방합니다. 다만 국가안전본부의 임무가 있으면 우선적으로 수행하셔야 하고요.”

“언더커버 요원 같은 건가요?”

강은영의 질문에 유지훈이 발끈했다.

“그건 위장해 숨어들어서 적진을 때려 부수는 거잖아!”

“생각 같아선 유지훈 씨 길드 백 번은 때려 부수고 싶어요.”

“영훈길드야! 강은영의 영! 유지훈의 훈!”

“그래도 내 이름을 앞에 뒀네요. 뭔 일이래···.”

“훈영길드는 어감이 이상해서···.”

유지훈과 강은영 사이 티키타카가 이어지는 사이 요란한 경고음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마철진 임정명 등 초인과 최금강 등 길드 간부들의 휴대폰에서 울리는 경고음이었다. 강은영의 휴대폰에서도 울렸다.

“이런! 몬스터 출현 경고예요. 특급 이상, 그러니까 레벨 6 이상의 몬스터가 나타난 모양이에요.”

사람들이 다급하게 경고를 확인했다. 표정이 굳어졌다.

최금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세 마리가 동시에 출현했다고 하는군. 금강길드에 출동 요청이 왔네. 특급 몬스터를 퇴치해달라는 요청일세.”

“같은 장소에 나타난 건가요?”

“그렇지는 않고. 금강길드는 인천 쪽으로 가야 하네. 서둘러야겠군. 먼저 가보겠네. 영훈길드 설립 축하하네.”

최금강이 금강길드 헌터들을 이끌고 떠났다.

초인 마철진에게도 당연히 출동 요청이 왔을 터였다.

마철진도 떠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영감님은 어디로 가십니까?”

“나는 경기도 화성 쪽이다. 그나저나 그동안 신화길드 놈들이랑 협력했었는데, 그 새끼들 사고 쳐서 문 닫았으니 누구랑 협력하냐···.”

유지훈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멀리서 찾으실 필요 있습니까?”

마철진이 눈을 껌뻑껌뻑하더니 버럭 화를 냈다.

“뭐! 나더라 너희 길드랑 같이하자고?”

“따끈따끈합니다. 훌륭한 마스터도 있고요.”

“괜찮은 생각이군. 유지훈 이 친구 실력이 예사롭지 않아. 철진이 자네한테 큰 도움이 될 걸세.”

임정명도 나서서 한마디 거들었다.

임정명은 아직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아 몬스터 퇴치에 나설 형편은 아니었다.

“일 없다. 이놈 길드를 내가 떠맡을 일 있냐?”

“곤란한 말씀인데요.”

유지훈이 오른손 검지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지연이한테 전화하면 어쩌시려고요?”

“그거야말로 일 없다. 길드 마스터도 정해진 마당에 그걸로 협박이 통할 것 같냐?”

“자리가 마스터뿐인가요? 회장도 있고, 고문도 있고···.”

“가즈아!”

태세 전환이 빠른 마철진이었다.

“뭐해? 앞장서지 않고. 네 차로 가야지. 운전해.”

“제 차는 소중해서요···.”

유지훈이 빙긋 웃더니 강은영을 바라봤다.

“우리 마스터 차로 가시죠.”

“나 아직 수락 안 했거든요!”

“와서 언더커버 요원 해. 마음껏 때려잡으라고.”

출범과 동시에 영훈길드에 몬스터 퇴치 임무가 떨어졌다.

엄덕대 박형식 강민정 등 길드원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끌려가는 신세가 됐다.

“초인님 가는 곳에 우리가 가도 되는 거야?”

“특급 몬스터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아니야. 초인님은 초특급, 그러니까 레벨 7 몬스터가 출현했을 때 출동하셔.”

“이러다가 길드 발족 회식도 못 하고 다 죽는 거 아닐까요?”

볼륨의 발육이 남다른 강민정은 울먹이기까지 했다.

***

마철진 초인과 함께하는 영훈길드의 첫 번째 임무 현장. 이미 다른 길드가 출동해서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었다.

거대 뱀이었다. 몸통 굵기 2m에 길이가 20m는 됨직한.

앞서 놈을 상대하던 헌터들의 지휘관이 마철진에게 다가왔다.

“마철진 초인님 오셨습니까. 저희 동방길드에서 초인님과 협력하도록 요청받았습니다.”

“조대현 마스터. 오랜만이구나.”

“기억해주시는군요. 3년 전에 잠깐 뵀었는데요. 감사합니다.”

마철진은 조대현의 인사를 받는 대신 시선을 거대 뱀 쪽으로 향했다. 눈빛이 사뭇 심각했다.

조대현이 나서서 설명했다.

“티타노 보아입니다. 초특급 몬스터로 분류되는. 열대 지방에나 출몰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어떻게 대한민국에 나타났는지···.”

듣고 있던 유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징글징글하네. 신화 개새끼들 장난질. 아니지. 신화랑 쪽발이 새끼들의 합작 장난질이지.”

“그게 무슨 소리냐?”

마철진과 조대현이 동시에 유지훈을 쳐다봤다.

조대현이 유지훈 일행을 가리키며 마철진에게 물었다.

“이분들은···?”

“영훈길드라고 오늘 새로 설립된 길드다. 당분간 내가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칠 생각이다.”

“아. 네···.”

조대현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신화길드가 사라진 상황에서 동방길드가 마철진 초인의 협력 길드가 될 줄 알았는데, 엉뚱한 길드가 끼어들어 언짢은 기색이었다.

유지훈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유지훈입니다. 영훈길드 오너 되겠습니다.”

“아. 네. 유지훈 마스터시군요. 동방길드 마스터 조대현입니다.”

“아. 제가 마스터는 아니고요. 마스터는 여기 강은영 마스터. 저는 비각성자라 마스터는 될 수 없어서 그냥 오너.”

유지훈이 강은영을 소개했다.

조대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은영을 아는 눈치였다.

“강은영 팀장님? 팀장님이 왜···?”

“오랜만에 봬요. 조대현 마스터님. 그렇게 됐어요. 언더커버 요원 정도라고 알아주시면 돼요. 그리고 이제 국장이에요.”

조대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강은영과 유지훈을 번갈아 바라봤다.

영훈길드 구성원들도 둘러보더니 다시금 고개를 갸웃했다. 들릴 듯 말 듯 혼잣말을 했다.

“비각성자가 이런 데 와도 되나? 길드원들도 기껏해야 레벨 2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데···. 강 팀장이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거야? 언더커버 요원은 또 뭐지?”

순간적으로 조대현의 입가에 스친 표정은 조소였다.

놓칠 리 없는 유지훈이었다. 호방한 한 마디로 대응했다.

“어디 가나 똥오줌 못 가리는 양반은 꼭 있다니까. 어쩌겠어. 가르쳐 드려야지. 영감님. 갑시다! 앞장서세요.”

“네가 앞장서라. 이 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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