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는 각성을 압살한다-48화 (48/150)

진정한 거악

“뭐라고요? 증인 출석 안 해도 된다고요?”

유지훈의 증인 출석이 결국 없던 일이 됐다.

피의자인 신화길드 마스터 이자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공소권 없음’ 처분이 내려지게 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자살로 추정됐다.

태안반도 폐교에서 벌어진 의문의 폭발 사고. 현장 감식 결과 처참하게 짓뭉개진 시신 한 구가 발견됐다. DNA의 주인은 이자웅이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가 진행됐지만, 이자웅의 개인 PC에서 유서가 발견돼 자살 쪽으로 무게가 실리게 됐다.

‘모든 잘못을 인정한다. 신화그룹의 명예에 누를 끼쳐 죄송할 따름이다. 모든 죄악을 짊어지고 떠나겠다’는 취지의 유서였다.

신화그룹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부회장 이자성이 이자웅의 범죄 관련 증거 서류를 들고 각성자수사청에 자진 출두했다.

신화길드 전략이사 장중호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기도 전이었다. 선제적으로 범죄 사실을 털어놓겠다는 움직임이었다.

신화길드와 빌런 조직의 결탁, 몬스터 부산물 횡령을 통한 비자금 조성, 불법적인 사업 방해 요인 제거···.

신화길드와 이자웅이 자행한 범죄들이 낱낱이 드러났다.

이자성은 충격적인 내용이 담긴 기자회견까지 개최했다.

“모든 악의 근원인 신화길드를 폐업하겠습니다. 소속 헌터들을 비롯한 모든 길드 자산은 국가의 처분에 맡기겠습니다.”

대한민국 3대 길드 중 하나인 신화길드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소속 헌터들의 몸값을 비롯해 인적 물적 자산의 가치만 2조 원에 달하는 거대 길드였다. 모든 걸 포기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신화길드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회장과 부회장이 사퇴하겠습니다. 경영 일선을 떠나 국가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겠습니다.”

창업주 이철승 회장과 장남 이자성이 퇴진을 선언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범죄행위 당사자 이자웅은 죽었지만, 누군가 책임져야 할 사람은 있어야 하니까. 그룹의 사주 일가가 책임지고 물러나는 건 당연지사였다.

당분간 차남인 이자걸이 임시로 그룹을 수습한 뒤, 이후 전문 경영인에게 그룹을 맡기겠다는 부연 설명이 따랐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비난 여론이 밀려들 무렵, 또 하나의 충격적인 발표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임시로 그룹을 맡게 된 이자걸의 기자회견이었다.

“신화전자를 제외한 모든 계열사를 매각하겠습니다. 매각 수익은 전액 사회에 환원하겠습니다.”

신화그룹 해체 선언이었다.

매각 수익까지 포기하는 초강수. 향후 계열사를 되찾을 여지까지 남겨두지 않겠다는, 완벽한 그룹 해체를 천명한 것이었다.

“전임 회장과 상의가 된 사안입니까?”

“이자성 부회장은 영영 경영 일선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까?”

“신화그룹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입니까?”

쏟아지는 취재진의 질문 세례에 이자걸은 단호한 대답을 내놓았다.

“앞으로 신화그룹이란 이름은 없을 것입니다. 아버님이나 형님과 상의는 없었습니다. 제 의지를 신뢰하고 지지해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창업주 및 후계 1순위 장남과 논의도 거치지 않은, 이자걸의 독단적인 결정이라는 대답이었다.

신화의 앞날에 파란이 닥치리라는 우려가 고개를 들 무렵, 이자걸이 쐐기를 박는 선언을 덧붙였다.

“지금의 신화그룹은 정치권과의 불법적인 결탁과 일본 거대 기업으로부터의 편법적인 지원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신화전자만이 온전히 신화만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모든 불법과 편법의 고리를 끊고 신화의 고유 역량으로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기 위한 결정입니다.”

심지어 이자걸은 신화그룹과 결탁한 고위층 리스트를 공개했고, 일본 거대 기업과 연계해 행한 탈법, 편법 행위까지 낱낱이 드러냈다.

정치 권력 및 외부 세력과 완벽한 단절을 만천하에 천명했다.

“앞으로 신화그룹 아니 신화전자는 어떠한 권력과도 손을 잡지 않겠습니다. 자체 역량만으로 승부하는 기업으로 거듭나겠습니다.”

이자걸의 충격 발표는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정치권이 발칵 뒤집혔고, 재계도 술렁였다.

리스트에 포함된 고위 공직자들은 사실무근이라 항변하며,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고 했다. 이자걸은 불법 자금을 건넨 증거를 제시해 이들을 ‘데꿀멍’으로 만들었다.

재계는 신화그룹이 매물로 내놓은 알짜 계열사들 인수를 놓고 경쟁을 벌였다. 신화금융, 신화건설, 신화화학, 신화패션 등의 새 주인 찾기가 재계의 화두로 급부상했다.

그야말로 폭풍이 몰아친 시간들이었다.

이자걸의 폭탄선언 덕분에 신화에 대한 여론은 서서히 우호적으로 바뀌어 갔다. 몸통을 자르고 머리만 남겨둬야 신화가 살 수 있다는 이자걸의 전략이 먹혀든 국면이었다.

하지만 불씨는 남아 있었다.

신화그룹의 배후 세력, 야마가가토산업과 드러나지 않은 채 대한민국 정부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자의 향후 대응이었다.

***

“야마가토산업 이야기는 쏙 빼놓았네. 일본 거대 기업이라 했으니 추측은 가능하겠지만, 몬스터 대상 실험은 언급하지 않았으니···.”

유지훈은 언짢았다.

증인으로 출두하게 되면 몬스터 관련 실험을 반드시 언급해 사회적 이슈로 만들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이자걸의 충격 발표에 그 부분은 전혀 없었다. 재수사 또한 중단됐다. 국민 여론을 고려해 중단을 결정했다는 설명만 있었다.

“이자걸은 대체 뭐 하던 놈이야? 난데없이 나타나서 판세를 완전히 뒤집어 버리네. 승부사 기질이 대단한데.”

“회장 네 자녀 중 가장 조용한 인물이었어요. 신화금융을 맡고 있었는데, 그룹 전체 일에는 그다지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거든요.”

강은영은 떨떠름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이자성이나 이자웅이 워낙 저돌적이고 과격한 성격이라 대외적인 인지도가 높았다면, 이자걸은 합리적이고 온건한 성품이라 내부적으로 인기가 많았다고 하더군요. 유지훈 씨 보상도 이자걸이 결정한 사안이란 이야기도 들었어요.”

“괜찮은 놈인 모양이구먼. 아니지. 그놈 하자는 대로 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냐. 그럼 신화 놈들 악행이 다 묻혔을 텐데. 그놈이야말로 진정한 거악일 수도 있겠는데.”

“그게 또 그렇게 되나요?”

강은영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좋은 일을 한 상대를 악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유지훈의 논리가 황당한 한편으로 그럴듯해서였다.

“그나저나 몬스터 대상 실험 문제가 쏙 들어가 버렸어. 정작 가장 큰 문제가 묻혀 버렸단 말이지. 똥 누다 말고 끊고 나온 기분이야.”

“비유 한 번 적절하네요. 나까지 다 찝찝해졌어요.”

“그쪽은 뭐 들은 이야기 없어? 변태 양반이나 최 영감님 통해서.”

“딱히 없어요. 변태 자식은 연락도 없어요. 궁금해서 전화는 해봤는데, 안 받더라고요. 많이 바쁜 모양이죠. 하긴 수습할 게 많을 테니.”

이자걸의 리스트 공개로 드러난 고위 공직자만 100명을 훌쩍 넘겼다. 중간 간부급까지 합치면 수백에 달하니 공직 사회가 발칵 뒤집히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강은영이 뭔가 떠오른 듯 말을 이어갔다.

“그러고 보니 폭발 사고 현장이 무슨 연구소 같았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 말 듣고 흔적을 없앤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그럼 이자웅 그 자식 자살한 게 아닐 수도 있겠는데? 누군가 덮으려고 그놈을 죽이고 폭발로 자살을 위장한···.”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이자걸일 수도 있겠네요.”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이 이야기 변태 양반한테 했어?”

“전화 안 받아서 문자로만 남겨뒀어요. 읽씹인 걸로 봐서 확인은 했을 거예요.”

“변태 양반 바쁠 만도 하네. 기다리고 있으면 연락 오겠다.”

유지훈이 갑자기 빙글빙글 웃기 시작했다.

뭔가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떠오른 표정이었다.

“듣고 보니 어느 정도 설명이 되네.”

“뭐가요?”

“재수사 중단 지시 내려온 이유 말이야. 이자걸 그 음흉한 놈의 승부수가 제대로 통한 결과일 수도 있겠어.”

강은영은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깜빡였다.

유지훈은 눈을 살짝 흘겨준 뒤 설명을 이어갔다.

“이자걸이 배후 권력자랑 야마가토산업을 가지고 놀고 있는 거야. 몬스터 대상 실험 결과를 빌미로.”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 생각에 이자걸은 결과물을 가지고 있어. 야마가토산업이 절실하게 원하는 거지. 그게 있다는 사실이 세간에 밝혀지면 야마가토산업 입장에선 장기간 공들인 탑이 무너지는 결과가 될 테고.”

“그래서 윗선에 압력을 넣어서 재수사를 중단시켰다?”

“그렇지. 야마가토산업의 사주로 배후의 권력자가 손을 썼다는 추측이 가능해지지. 그 말은 배후의 권력자와 야마가토산업이 한통속이라는 의미도 되는 거고.”

강은영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서 이자걸이 충격 발표할 때 야마가토산업을 명시해서 언급하지 않았군요. 배후 권력자에 대해서도 두루뭉술하게 표현했고요.”

“일종의 경고였을 거야. 은근히 거래를 제안하는 것일 수도 있고. 너희가 원하는 게 내 손에 있으니 내가 다치지 않도록 알아서 잘 해라. 뭐 이런 메시지를 던진 거라고나 할까?”

“호오! 사실이면 이자걸 정말 무서운 놈이네요.”

“말했잖아. 진정한 거악일 수 있다고.”

이제 두 가지 궁금증이 남았다.

배후 권력자의 실체와 야마가토산업의 대응이었다.

“배후 권력자는 대체 누굴까? 돌아가는 꼴을 보면 대통령은 아닐 것 같은데. 대통령 못지않은 권세를 발휘하는 것 같기도 하고.”

“대통령 못지않은 권력자들 제법 있어요. 여당 실세 의원이나, 야당 차기 대권 주자나···. 따지고 보면 초인들도 대단한 권력자들이네요.”

유지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 클럽에서 웃기는 놈 하나를 만났는데. 신나게 처맞으면서 고모를 찾더라고. 고모가 알면 다 죽을 거라나.”

“하아! 살다 살다 고모 찾는 놈이 다 있어요?”

“그렇더라니까. 그래서 어디 고모 좀 만나보자며 그놈 피떡을 만들어줬거든. 그런데 아직 고모 쪽에서 연락은 없더라고.”

“허풍이었나 보네요. 그런 새끼들 하는 짓이 다 그렇죠.”

강은영이 혀를 끌끌 찼지만, 유지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변태 양반은 다른 말을 하더라고. 고모라는 여자가 드러나지 않은 권력자일 수 있다고. 판을 뒤흔들 정도의 권력자. 생각해 보니까 신화 놈들 배후가 그 고모라는 여자가 아닌가 싶기도 하네.”

“그럼 변태 자식은 알고 있다는 말이네요.”

“그래서 더 바쁜 것일 수도 있어. 그 여자에 대해 뭔가 진행 중이라고 했거든. 지금이야말로 박차를 가할 시점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

“방향 잡히면 연락 오겠네요. 기다려보죠.”

이자걸이 일으킨 풍운을 주제로 한 대화가 마무리됐다.

이제 두 사람의 일을 이야기할 차례였다.

“그쪽은 이제 지낼 만하겠네? 어느 정도 명예도 회복했을 테고.”

“못살게 굴던 인간들 다 불명예 퇴직하게 됐어요. 저야 이제 제자리 찾아갈 수 있겠죠. 다 유지훈 씨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아직 고맙다는 인사받을 때는 아닌 것 같고.”

“아니에요. 큰 신세 졌어요. 은인이나 마찬가지예요.”

“보람있게 능력을 사용하고 싶다고 했잖아. 그때 돼서 고맙다고 해도 늦지 않을 거야.”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어요? 진짜 감동이에요.”

강은영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유지훈이 손사래를 쳤다.

“그렇다고 지금 감동할 건 없어. 앞으로 감동할 일 계속 있을 텐데.”

“기대할게요. 유지훈 씨는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또 이놈 저놈 썰고 다니고 그럴 건 아니죠?”

“썰긴 썰어야지. 나쁜 놈도 썰고, 몬스터도 썰고. 이자걸이 나쁜 놈이면 그놈도 확! 그전에 길드 설립부터 마무리해야겠지.”

“오! 드디어 유지훈 씨 길드가 탄생하는 건가요? 발족식도 해야죠.”

“당연히 해야지. 날짜도 잡아놨어. 사흘 후, 장소는 길드 사무실.”

강은영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축하해요. 나도 꼭 불러주세요.”

“당연하지. 그쪽이야말로 반드시 와야지.”

“성대하게 해요. 신화길드를 무너뜨린 영웅의 길드 출범이잖아요.”

“영웅은 무슨. 아는 사람 누가 있다고···. 성대하게까진 좀 그래도 몇 분 초청은 했어. 최 영감님이랑, 마 영감님이랑···. 임정명 영감님도 오신다는 것 같기도 하고.”

“우와! 초인 두 분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각성자까지. 엄청난 자리가 되겠는데요.”

강은영이 진심 감탄했다.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유지훈을 바라보기까지 했다.

“아. 동생분 유지연 씨는 안 오나요?”

“어. 걔는 다시 아카데미로 갔어. 실습 있어서 못 온대.”

“유지연 씨 이야기 나와서 생각난 건데요.”

강은영이 뭔가 말하려 하자, 유지훈이 다급히 말을 끊었다.

“혹시 몸서리?”

“그런···데요?”

“닥쳐!”

“내가 너무 억울해서 그래요.”

“더 억울한 건 나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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