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이 쏘아 올린 작은 공
[유지훈 씨 증인 출석도 연기된 거예요?”]
휴대폰을 통해 들려온 강은영의 음성에 짜증이 묻어 나왔다.
짜증스럽기는 유지훈도 매한가지였다.
“그렇다니까. 준비 마치고 나가려는 찰나에 연락이 왔다니까. 그럴 거면 진작에 알려주든가 해야지. 그런데 나도는 또 뭐야? 다른 사람도 연기된 게 있어?”
[장중호 이사도 조사가 미뤄진 모양이더라고요. 원래대로면 잡아 온 다음 바로 시작해야 하는데, 2, 3일 후에나 할 모양이에요.]
“뭐야? 누가 손을 썼구먼. 뭔가 공작을 벌이려고.”
[신화 놈들이지 누구긴 누구겠어요.]
강은영의 짜증이 다시금 휴대폰을 타고 넘어왔다.
[신화에서 장중호 이사 접견을 신청했어요. 만나서 꼬리 자르기에 들어가려는 거겠죠.]
“그래서 접견이 이뤄졌어?”
[그렇진 않은 모양이에요. 신화 쪽 변호사들이 대거 와 있는데, 계속 대기 중인 걸로 봐선 여의치 않은가 봐요. 장중호 이사가 접견을 거부한다는 것 같기도 하고···.]
유지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날 장중호의 표정은 자포자기였지만, 결연했다. 뭔가 중대한 결심을 한 듯했다. 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꼬리 자르기의 희생양이 되진 않겠다는 의지 같은 게 엿보였다.
“다행이네. 그나저나 신화 새끼들 이렇게 시간 끌면서 여기저기 마구 찔러대는 거 아냐? 배후에 힘 있는 놈들 있다며. 야마가토 어쩌고 하는 쪽발이들도 있고.”
[아무래도 그러려는 거겠죠. 그래도 이번엔 만만치 않을 거예요.]
“왜?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대?”
[관련된 제보가 들어오고 있어요.]
“제보?”
[이자웅이 짱박혀 있는 은신처라든가, 신화길드 비리가 담긴 서류의 위치라든가 하는 거요.]
“제보자가 누군데?”
[그건 모르겠어요. 그런데 제법 신빙성이 있어요. 각성자수사청에서 체포조 꾸려서 이자웅 놈 은신처 덮치려 하고 있어요.]
“그쪽도 같이 가나?”
[가라고··· 하네요. 위험하고 고약한 일에선 빠지는 법이 없어요.]
강은영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을 거예요. 이자웅 쪽 상황에 대한 제보에 맞춰서 철저하게 준비해서 출동하는 거니까요.]
“그래도 조심해. 괜히 나서거나 하지 말고.”
[어머! 나 걱정해 주는 거예요? 무슨 일이래?]
“조심해야지. 중요한 분인데.”
[어머머! 왜 이런데? 이 양반이 왜 자꾸 감동하게 하지?]
“그런 게 있어. 나중에 알게 될 거야.”
[유지훈 씨도 조심해요. 신화 놈들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요.]
“바이에른 뮌헨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지.”
통화가 끝났다.
옆에서 귀를 쫑긋한 채 듣고 있던 유지연이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역시 그렇고 그런 사이였어.”
“그렇고 그렇긴 뭐가 그렇고 그래! 그런 거 아니니까 닥치고 잠이나 퍼질러 자!”
“오늘은 몸서리치자는 말은 안 하네? 새언니 컨디션이 안 좋은가?”
“미친···. 새언니는 누가 새언니야! 연상은 내 취향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몸서리는 왜 쳐? 볼 장 다 봐놓고 그러는 거 아냐.”
“어휴~.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유지훈이 씩씩거리며 웃옷을 챙겨 입었다. 나갈 채비를 갖췄다.
“어디 가게? 새언니 만나러 가냐?”
“닥쳐라. 길드 사무실 간다. 아! 너도 같이 가서 구경이나 할래? 길드 사람들이랑 인사도 할 겸.”
“이름도 없고, 마스터도 없는 가짜 길드를 뭐하러. 아카데미 생도들이랑 점심 약속 있어. 가서 가산점 자랑해야 해.”
“자랑 많이 해라. 매정한 년.”
유지훈은 유지연에게 독설을 날린 뒤 길드 사무실로 향했다.
***
길드 사무실 분위기가 왠지 이상했다.
이미 와 있던 엄덕대와 박형식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유지훈을 맞이했다.
“형님 이제 나오셨습니까?”
“왜 다들 밖에 나와 있어?”
엄덕대와 박형식 뿐만 아니라 강민정 이상목 등 길드 구성원 모두가 건물 앞 정원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손님이 와 계셔서요.”
강민정이 쭈뼛쭈뼛 대답했다.
유지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손님 왔다고 주인이 쫓겨나와 있는 건 또 뭐냐?”
“그게···. 같이 있기 좀 불편한 분들이라서요···.”
유지훈이 고개를 갸웃하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응접실에는 세련된 외모의 중년 사내가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옆으로 우람한 체구의 사내 여섯이 호위하듯 서 있었다.
“유지훈 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왔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겠습니다.”
중년 사내가 풍기는 분위기는 오만이었다. 단정하게 예의를 갖춘 인상이었지만,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예의는 아니었다.
유지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거긴 제 자리 같은데요? 주인이 왔으니 이만 비켜주시죠.”
“감히!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장년의 경호원이 발끈해 나섰지만, 중년 사내가 만류했다.
“나서지 말게. 맞는 말 아닌가. 주인 자리는 주인에게 내줘야지.”
중년 사내가 옆자리로 옮겨 앉더니 장년의 경호원에게 눈짓했다.
“차 실장 건네 드리게.”
경호실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유지훈에게 뭔가를 건넸다. 명함이었다.
[신화그룹 부회장 이자성]
유지훈이 피식 웃은 뒤 명함을 탁자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경호실장의 눈매가 꿈틀했지만, 이자성이 다시금 만류했다.
“신화그룹 부회장님께서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이랍니까?”
유지훈이 삐딱한 자세로 질문을 던졌다.
이자성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고도 없이 찾아와 언짢으신 모양이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거래를 제안하러 왔습니다.”
“거래요?”
유지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자성의 입술이 씰룩했다. 노기를 삼키는 눈빛으로 말했다.
“증인 출석을 거부해주십시오. 그럼 신화길드를 드리겠습니다.”
“흐음. 증인 출석 거부에 신화길드라···.”
유지훈이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무슨 증언을 하려는 줄 알고 출석을 거부해달라는 거죠?”
“그거야 신화길드 산하 호광길드의 5년 전 사고 관련한···.”
“그리고 문 닫게 생긴 신화길드를 나한테 떠맡기겠다고요? 똥 치워달라는 거예요? 저를 똥 치우는 청소부로 아는 겁니까?”
“그, 그건···.”
“거래를 원하면 거래 품목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한 뒤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지닌 걸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유지훈이 싸늘한 냉소와 함께 이자성을 노려봤다.
“건방진 놈!”
경호실장이 나서 유지훈을 제압하려 했지만, 유지훈이 훨씬 빨랐다.
경호실장이 움직이려는 찰나, 유지훈 날아올랐고, 그림 같은 돌려차기로 경호실장의 턱을 날려버렸다. 이어 경호실장의 머리를 잡고 그대로 탁자에 꽂아버렸다.
우지끈! 콰직! 경호실장의 머리와 탁자가 동시에 박살이 났다.
“거래를 하자면서 이렇게 되지도 않는 힘을 앞세우려는 것도 제대로 된 자세가 아니죠.”
경호원들이 일제히 나서려 하자, 유지훈이 싸늘한 한 마디로 눌러 앉혔다.
“지금 대화 중인 거 안 보이냐?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는 새끼는 머리랑 몸을 분리해버릴 거야. 이놈처럼은 안 끝내.”
경호원들이 엉거주춤한 채로 이자성의 눈치를 살폈다.
경호실장은 레벨 5의 각성자였다. 강화 계열 특성을 보유했기에 한 방에 제압당할 인물이 아니었다. 목을 분리해주겠다는 유지훈의 경고가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이자성이 가볍게 손을 저어 경호원들을 뒤로 물렀다.
“제 불찰입니다. 미리 일러뒀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평소 어땠는지 알 수 있게 해줬네요. 매우 유익했어요.”
유지훈이 피식 웃은 뒤 말을 이어갔다.
“돌아가세요. 거래는 없어요. 뭘 들이민다고 해도 나는 증인으로 출석할 거고, 하고 싶은 말을 할 거예요.”
“과연 그러는 게 유지훈 씨한테 유리할까요?”
이자성의 말투가 달라졌다.
가장한 예의도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였다.
“부회장님한텐 더 불리하겠죠.”
“기어코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겠다는 건가?”
하대로 바뀌기까지 했다.
반말에는 반말이 유지훈의 원칙이었다.
“이 양반도 무협 소설 좀 읽은 모양이네. 한때 많이 듣던 표현이야. 반갑기까지 하네.”
조롱 한마디를 던져 준 뒤 본격적인 말을 이어갔다.
“당신 같은 사람 문제가 뭔지 알아? 모든 게 뜻대로 될 거라 생각하는 거지. 모든 사람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거라 생각하고. 하다못해 공권력까지. 윽박지르고 돈 몇 푼 쥐여주면 되겠거니 여긴다고.”
“······.”
“중대한 착각이라는 걸 배울 때도 되지 않았나?”
“감히···.”
이자성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유지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 집만 해도 그래. 빼앗아가면 꼼짝없이 뺏길 거라 생각했어? 밟혀도 꿈틀거리지 못할 줄 안 거야?”
“······.”
“어쨌거나 좋아. 보상은 하려고 하대? 그래도 응분의 대가는 치르게 했겠지만, 적당한 선에서 하려고 했더니 또 밟으려는 건 뭐야? 기어코 한판 해보자는 거였잖아?”
“그 부분은 사과하겠다. 그래서 거래를···.”
“거래 따윈 없어. 한 번만 더 거래 어쩌고 하면 입을 찢어버릴 거야. 다시는 입을 열지도 못하게.”
유지훈이 무시무시한 기세를 담아 노려본 뒤 말을 이어갔다.
“뒤에 누구 대단한 세력이 있다고? 그 세력 믿고 여전히 나를 밟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착각하지 마. 그 세력이 뭔지 모르지만, 너희 안 도와줘. 아니 도와주지 못할 거야.”
“무슨 소리냐?”
“문제가 이렇게 된 시작이 어딘지 알아?”
이자성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노려볼 뿐이었다.
“버닝 스타였던가? 네 동생 놈이 한 다리 걸친 클럽. 거기 관련해서 빌붙어 먹던 기생충 짭새 새끼들이야. 몹쓸 짓 하는 망나니 새끼들 신고한 정의로운 시민을 잡아가려고 하더군.”
“그게 나랑 무슨 상관···.”
“너희가 그렇게 만든 거야. 서민을 위해 존재해야 할 공권력을 기생충으로 만들었다고. 난 그걸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거고.”
유지훈이 빙긋 웃었다.
“그리고 그 기생충 새끼들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너희를 지나, 너희가 철석같이 믿는 배후 세력을 향할 거야. 누군지 모르지만 막으려 하겠지. 신화 너희들을 방패 삼아.”
이자성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미처 생각지 못한 대목인 듯했다.
유지훈이 낭랑한 목소리로 계속 이야기했다.
“나는 다 말할 거야. 5년 전 폭발 사고? 그거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 없어. 그동안 내가 목격하고 경험한 신화의 잣 같은 행태를 있는 그대로 다 말할 거야.”
말을 마치자마자 유지훈이 이자성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손을 들어 뺨을 내리치려 했다.
“나한테 너희 같은 새끼들 훈육하는 비기가 하나 있어. 누군가는 싸다구 갈기기 신공이라고 하던데.”
뺨을 후려치는 듯싶더니 툭툭 건드리기만 했다.
“굳이 내가 가르칠 필요는 없을 듯해. 이번엔 사회가 가르치겠지. 그러니 얌전히 가서 사회의 가르침을 기다리도록 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너희 뒤에 있는 누군가도 그러길 바랄 거야.”
이자성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배후 권력자에게 부탁해둔 상태였다. 가까스로 장중호와 유지훈의 조사 시기만 미룰 수 있었다.
배후 권력자는 벌어준 시간 동안 증인들의 입단속을 철저히 하라고 했다. 그래야 자신도 뭔가 힘을 써줄 수 있다고.
하지만 이자성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장중호도, 유지훈도, 그의 손에서 벗어난 상태임을.
그러는 사이 유지훈의 싸늘한 일성이 비수가 돼 가슴에 꽂혔다.
“이거 하나는 분명히 알아둬. 너희가 부리던 기생충 짭새 새끼들이 정의로운 시민의 신고만 제대로 처리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이 모든 게 너희가 초래한 비극이라고. 물론 사회 전체로는 경사지만.”
유지훈이 이자성의 머리를 밀친 뒤 웃옷에서 지갑을 꺼냈다. 5만 원권 지폐를 수북이 꺼냈다.
“부서진 탁자 값은 변상해야지. 1주일도 안 된 새 건데.”
유지훈이 지폐를 흔들며 손을 까닥였다.
“가 봐. 다시는 얼굴 보는 일 없도록 하자고.”
“후회하게 해주겠다.”
이자성이 이를 악물었다.
유지훈은 유쾌한 냉소로 반응했다.
“그럼 더 좋고. 그땐 내가 확실히 훈육할 수 있을 테니. 싸다구 갈기기 신공으로.”
유지훈이 오른손을 까닥까닥 뺨을 때리는 시늉을 했다.
이자성이 코웃음을 치더니 쾅! 문을 박차고 응접실을 나섰다.
“어이! 문도 배상하고 가. 부서졌겠다.”
증인 출두가 난데없이 연기돼 짜증스럽던 참이었다.
뭔가 해소할 대상이 필요했는데, 일을 꾸민 당사자가 몸소 찾아와 매를 벌었다. 속이 다 후련했다.
한편으로 싸다구 갈기기 신공을 참은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했다.
“사회의 가르침. 내가 생각해도 멋진 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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