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결의 시간 (4)
이자웅은 유지훈과 미중년의 여유로운 모습에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이내 코웃음을 쳤다.
“흥! 좀 있으면 시멘트 속에서 허우적댈 놈들끼리 허세는···.”
옆에서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는 구명한에게 지시했다.
“유지훈이만 빼고 싹 죽여. 블루 바이퍼랑 매드 스콜피온 밑에 놈들까지 모조리. 흔적도 남기지 말고.”
“알겠습니다!”
구명한이 이행에 나서려 하자, 장중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블루 바이퍼 조직원들은 여기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조만길이 안 보이네? 어떻게 된 거야?”
“유지훈을 데려오는 과정에 문제가 좀 있었다고 했습니다. 조만길과 조직원들 대부분은 오지 않았습니다. 저기 몇 명만···.”
“뭐야! 장 이사 자꾸 일 이따위로 할 거야? 꼬리를 남겨뒀잖아! 어떡할 거야? 문제 생기면 장 이사가 책임질 거야?”
이자웅이 장중호의 정강이를 걷어차고는 구명한에게 명령했다.
“일단 여기 있는 놈들부터 싹 처리해. 조만길이 문제는 그런 다음에 생각해 보자고.”
“네!”
구명한이 대원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평소 훈련을 통해 약속된 작전 지시였다.
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70여 명이 유지훈과 미중년 일행을 포위하듯 진용을 갖췄고, 나머지는 매드 스콜피온 조직원들 주위로 자리를 잡았다.
“싸움 좀 해본 놈들 같은데요?”
“대한민국 3대 길드로 손색이 없는 움직임이군요.”
확실히 체계적으로 진을 형성한 양상이었다.
공격과 방어의 포스트가 곳곳에서 중심을 이뤘고, 주위로 대원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공간을 형성했다.
무림에서 경험했던 검진을 떠오르게 했다. 각각 위치의 대원들도 빈틈없는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진 자체에선 약점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미중년의 수하들이 권총을 들고 겨눴지만, 대원들은 위치를 굳건히 지켰다. 반복된 훈련이 본능을 지배한 결과일 터였다.
“몬스터에 대비한 훈련의 결과일까요?”
“몬스터를 사냥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제압하려는 듯합니다.”
“이것들이 누굴 몬스터로 아나. 확 몬스터나 돼버릴까요?”
“그럴 필요까진 없을 듯합니다.”
잠시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탄탄한 진용을 형성했지만, 대원들도 총은 신경 쓰는 눈치였다.
방호복을 입었다 해도, 머리를 겨냥한 총부리가 뚜렷이 보였으니. 섣불리 공격에 나서기 주저하는 듯했다.
유지훈은 세심히 진용을 관찰했다. 겉으론 짐짓 태연한 척했지만, 여유 부릴 상황이 결코 아니었다.
진의 핵심이 되는 위치마다 만만치 않은 기도의 실력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구명한 못지않은 기세를 뿜어내는 자들이었다.
‘레벨 7 언저리 셋, 레벨 5 이상으로 보이는 놈들 서른 정도. 공격과 방어의 유기적인 조화가 이뤄지도록 배치됐군.’
무림으로 치면 무당의 칠성검진이나, 화산의 매화검진을 연상케 했다. 무림에서 이런 경우라면, 무조건 튀고 보는 게 정답일 터였다.
‘이쪽은 일곱이 총을 들고 있으니 스물 정도는 무력화시킬 수 있을 테고, 청년 셋은 레벨 6은 돼 보이니 각자 몫들은 할 텐데···.’
미중년의 실력이 도무지 가늠되지 않았다.
별다른 기세가 감지되지 않는 것으로 봐선 저레벨 아니면 비각성자인데, 여유로운 표정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무신을 떠오르게 했다.
‘설마 기도를 감출 정도로 고수인가?’
어쨌거나 선제공격이 중요했다. 진세가 발동하면 속수무책으로 밀릴 수밖에 없을 듯했다.
‘총부터 쏘라고 한 뒤 중요 포스트를 깨고 들어간다.’
방향을 정한 뒤 미중년에게 눈짓을 보냈다. 총을 가리키며 쏘라는 시늉까지 곁들였다.
미중년은 빙긋 웃으며 고개만 살랑살랑 흔들 뿐이었다.
“기다려 보시죠.”
기다리긴 뭘 기다리라는 거야!
짜증이 밀려들려는 찰나,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이러고도 너희들이 대한민국의 헌터라고 할 수 있는가!”
치렁치렁한 은발을 단정히 묶은 구릿빛 피부의 노인. 금강길드 마스터 최금강이었다.
금강길드 헌터 100여 명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창고로 들어섰다.
“이래서야 빌런 잡놈들이랑 다를 게 뭐가 있다는 말인가! 대한민국 3대 길드의 일원으로 부끄럽지도 않은가!”
신화길드 대원들이 술렁였다.
이자웅의 안색은 꺼멓게 썩어들어갔다.
“최금강 저 노인네가 여긴 왜···?”
“이자웅 마스터. 그대는 대한민국 헌터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당장 국민들을 향해 무릎 꿇고 석고대죄해야 할 것이야!”
최금강의 서릿발 같은 호통이 이어졌다.
유지훈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미중년을 바라봤다. 미중년은 익살스러운 웃음으로 반응했다.
“마스터님께 신화길드 동향 좀 알아봐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대규모 움직임이 파악됐다며, 인원을 동원해 대응하겠다고 하시더군요. 때맞춰 오셨네요. 주인공은 가장 나중에 등장한다더니 말입니다.”
“귀띔이라도 해주셨어야죠! 어떻게 대처하나 계속 머리 굴렸잖아요. 아직도 골이 띵해요.”
“죄송합니다. 제가 극적 재미를 추구하는 성향이라···.”
“재미 하나도 없어요. 별점 한 개 반짜리예요.”
“어이쿠. 별점 테러로 응징하시는군요.”
그러고 보니 미중년 일행 모두 여유로웠다. 전혀 긴장한 기색 없이 신화길드의 대규모 병력을 마주했었다.
‘이것들이 나만 빼고 자기들끼리만 알고 있었구나. 혼자 낑낑대는 거 보면서 속으로 얼마나 웃었을까.’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어떻게든 갚아주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는 사이 최금강의 준엄한 질타는 계속됐다.
“수치를 아는 자라면 당장 무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조아려라. 엄정한 법의 심판을 기다리도록 하라.”
신화길드의 젊은 대원들이 동요했다.
최금강은 길드 헌터들 사이에서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특히 젊은 헌터들에겐 절대적인 지지와 존경의 대상이었다.
젊은 대원들이 하나둘 무기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뭐 하는 짓들이야! 너희들 마스터는 나야! 저 늙은이가 아니라고!”
이자웅이 길길이 날뛰며 소리를 질러댔지만, 무기를 버리는 대원들은 점점 늘어갔다. 절반 가까이 이탈 대열에 합류했다.
구명한을 비롯한 간부들이 이자웅을 잡아끌었다.
“일단 빠져나가시죠. 여기 현장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내가 가긴 어딜 가! 나 신화길드 마스터야! 신화그룹 주인 중 하나라고! 저런 버러지들한테 쫓길 사람이 아니야!”
“마스터님! 현장에서 잡히면 끝입니다! 일단 나가서 후일을 도모하셔야 한단 말입니다!”
구명한을 시작으로 길드 고위 간부들이 특성을 발동했다. 이자웅의 앞뒤 양옆으로 자리했다. 중견 대원들도 주위를 에워쌌다. 이자웅을 이끌고 창고 밖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딜 도망치려고! 놈들을 못 나가게 봉쇄하라!”
최금강의 명령이 떨어지자 금강길드 헌터들이 움직였다.
창고 입구를 가로막는 한편, 이자웅을 에워싼 대원들을 잡아챘다. 이자웅에게서 떼어내려고 했다.
신화길드 대원들은 필사적으로 맞섰다. 안간힘을 다해 이자웅을 밖으로 내보내려고 했다.
서로 간에 살수는 쓰지 않았다. 죽고 죽이는 대결이 아니었다. 나가려는 자들과 막으려는 자들의 몸싸움이었다.
“저리 비켜라! 다친다!”
“나가려거든 나를 밟고 가라!”
구명한을 비롯한 고레벨 각성자들의 특성을 앞세운 신화길드 쪽이 좀 더 절실했다.
금강길드 헌터들의 방어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자웅은 창고를 벗어날 수 있었다.
“가긴 어딜 가겠다는 거냐! 내가 친히 너희들을 막겠다.”
최금강까지 뛰어들려 했다.
미중년이 다가가 만류했다.
“그냥 가게 두시죠. 부하분들한테도 물러나라고 하시고요. 괜히 금강길드 헌터분들 다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대로 도망가게 놔두자는 말씀입니까?”
“도망가는 게 놈들한테는 더 안 좋을 거예요.”
유지훈도 미중년을 거들었다.
“잘못을 인정한 격이잖아요. 현장에서 시비를 가렸으면 어떤 식으로든 공방이 이뤄졌을 텐데요. 변호사들 불러서 절차 어쩌고 하면···.”
“유지훈 씨 말씀이 맞습니다. 저렇게 도망간 이상 도망자 신세밖에 안 될 겁니다. 신화그룹 차원에서 커다란 부담이 될 테고요.”
미중년의 말을 받으며 유지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꼬리를 하나 잘라놓고 갔잖아요. 아주 굵직한 놈으로요.”
유지훈의 시선이 닿은 곳엔 망연자실한 표정의 장중호가 있었다.
“어때? 아직도 말 안 하고 뻗댈 건가?”
장중호가 무거운 한숨과 함께 머리를 감싸 쥐었다.
“말하겠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털어놓겠습니다.”
장중호에겐 마지막 남은 동아줄이 있었다.
그를 구해줄 순 없겠지만, 남은 가족들에겐 최후의 빛이나 다름없는 동아줄이었다.
모시던 주군이 아닌 가족을 위해 그 동아줄을 잡아야 할 때였다.
가족을 책임져주겠다던 누군가의 은밀한 약속을 떠올리며 도망친 보스를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잘 생각했어.”
자포자기해 고개마저 들지 못하는 장중호의 어깨를 다독인 뒤, 유지훈은 최금강에게 인사를 건넸다.
“영감님한테 크게 신세 졌습니다.”
“신세는 무슨.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가지고.”
“그런데 영감님 말투가 왜 그래요?”
“내 말투가 어때서?”
“무슨 무협 소설에 나오는 말투 같잖아요.”
“그, 그게 근엄하게 보이려고···.”
***
“장중호 이사가 접견을 거부하고 있다.”
신화그룹 장남이자 부회장 이자성의 안색이 어두웠다.
신화길드 전략이사 장중호의 체포 소식을 접한 뒤 그룹 법무 역량을 총동원해 백방으로 손을 썼지만, 성과가 미미한 탓이었다.
“일단 조사를 며칠 미루는 데까진 성공했다. 문제는 장 이사가 우리를 만나려 하지 않으니···. 장 이사는 길드가 연루된 모든 비위를 아는 인물인데···.”
이자성 앞엔 신화그룹 차남 이자걸이 있었다.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은 모습이 의미심장했다.
“만나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요? 설마 입을 닫게 하시려고요? 그렇게 꼬리를 잘라서 자웅이를 구하실 생각은 아니겠죠?”
비릿한 미소에 냉소적인 어조. 평소와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자걸아! 자웅인 우리 형제다. 무슨 수를 써서든 구해야지.”
“그럼 신화는 어떻게 하고요? 자웅이는 구해도 나락에서 헤어날 수 없습니다. 신화도 함께 침몰하게 하자는 말씀입니까?”
“자걸아!”
이자성이 눈을 부릅뜨며 노기를 드러냈지만, 이자걸은 태연하기만 했다. 오히려 입가의 냉소가 짙어졌다.
“장 이사는 모든 것을 털어놓을 겁니다. 자웅이와 관련된 모든 비리를요. 하나부터 열까지 남김없이.”
“자걸이 너···.”
“장 이사 정도의 꼬리 자르기로 해결될 상황이 아닙니다. 적어도 다리 하나 정도는 잘라야죠.”
동생을 바라보는 이자성의 눈빛이 멍해졌다.
이자걸의 말투는 한결 싸늘해졌다.
“다리 하나 잘라서 신화가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제 생각엔 몸통까지 잘라야 하는 건 아닌지 싶은데요.”
“너 대체 무슨 생각을···.”
“머리만 남겨도 신화는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 아니죠. 머리만 남겨야 신화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군요. 어쩌면 확신입니다.”
이자성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차례 마른 세수를 한 뒤 이자걸을 노려봤다.
“너 야마가토산업은, 박 여사는 어쩔 참이냐?”
“야마가토산업이요? 그게 뭔데요? 박 여사는 또 누구죠?”
반문하는 이자걸의 얼굴에 번진 웃음은 조롱이었다.
“아! 형님께서 따로 관리하신 분들인 모양이군요.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보아하니 힘깨나 쓰는 분들인 듯하네요. 형님께서 고생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자걸이 너 정말!”
이자성이 탁자를 내리쳤다. 이자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한 대 후려칠 기세로 노려봤지만, 이자걸은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가만히 이자성의 손을 떼어낸 뒤 빙긋 웃었다.
“야마가토산업이나 박 여사라는 분에게 구걸하려면 바쁘시겠군요. 서두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저 나름대로 신화를 위해 준비할 게 많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돌아서는 이자걸을, 이자성은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자걸이 부회장실을 나선 뒤에야, 이자성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비서실장을 호출했다.
“비상이야. 그룹 임원들 전원 호출해. 야마가토랑 박 여사 쪽으로 연락 가능한 선 있는 대로 확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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