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결의 시간 (1)
“니 친구냐?”
유지연이 입꼬리가 귀에 걸린 채 물었다.
유지훈은 콧방귀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행이네.”
“뭐가 다행이야.”
“친구면 못 때리잖아.”
빨강 머리가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서른 남짓의 사내들이 우르르 걸음을 함께했다. 포위망을 갖춘 모습이었다.
“유지훈이. 나랑 같이 좀 가야겠는데.”
“어딜?”
“그건 알 거 없고. 너를 만나고 싶어하는 분이 계셔서. 얌전히 따라오면 저 아가씨는 곱게 보내줄게.”
“얘를?”
유지훈이 유지연을 슬쩍 돌아봤다.
여전히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웃음이 소름을 돋게 했다.
“평소 같으면 저 아가씨를 데려갔을 텐데, 오늘은 너만 데려오라는 부탁을 받아서···. 아쉽긴 하네. 딱 내 취향인데.”
“그냥 얘 데려가지···.”
그때 유지연이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휴대폰을 꺼내고는 사진 몇 장을 넘겨봤다.
다시금 고개를 갸웃하며 빨강 머리를 바라봤다.
“너 혹시 블루 바이퍼냐?”
“응? 그렇긴 한데···.”
“머리는 언제 염색한 거냐?”
“며칠 됐는데 그건 왜···?”
“그럼 말을 해야지! 못 알아볼 뻔했잖아! 블루라고 해놓고 빨갛게 하고 다니는 놈이 어디 있냐?”
“그, 그게···.”
머뭇거리던 빨강 머리가 버럭 했다.
“그런데 이년이 언제 봤다고 꼬박꼬박 반말이야!”
유지연은 빨강 머리의 폭언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유지훈에게 슬쩍 턱짓할 뿐이었다.
“쟤는 내 거다. 빌런 때려잡으면 아카데미 가산점 있거든.”
“그냥 너 다 하세요.”
빨강 머리는 흥분한 나머지 유지연의 말을 제대로 못들은 듯했다. 그저 비아냥거리는 줄 알고 한층 분개해 소리쳤다.
“이년이! 얼굴 반반하고 몸매 늘씬해서 곱게 보내주려 했더니, 도저히 안 되겠구나.”
“오! 인정해주는 거야?”
“미친년. 납작 가슴 주제에.”
“내 가슴이 납작하다고? 이 볼륨은 뭔데?”
“뽕이잖아! 내가 뽕이랑 진짜 가슴도 구분 못 하는 줄 알아?”
“들켰네.”
유지연의 눈매가 한결 싸늘해졌다.
“내 비밀을 함부로 공개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오른손으로 크게 원을 그리더니 힘차게 뻗었다.
응축된 마나가 미사일의 형태를 이뤄 빨강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어? 이게 뭐냐?”
빨강 머리가 도끼를 맹렬하게 휘둘러 막으려 했다.
유지연의 마나 미사일은 도끼를 박살 낸 뒤 여세를 몰아 빨강 머리의 어깨까지 꿰뚫었다.
“으악!”
빨강 머리가 어깨를 부여잡고 나뒹굴었다. 어깨 아래로 커다란 구멍이 뚫린 양상이었다.
“슈퍼 스팅어라고 했던가? 지난번보다 세진 것 같네?”
“하이퍼 스팅어야. 지난번에 검치호 상대하면서 보니까 부족하더라고. 단련 좀 더 해서 날카롭게 다듬었어. 이제 어지간한 건 다 뚫어.”
하는 짓은 이상해도 실력만큼은 진짜인 유지연이었다.
빨강 머리, 블루 바이퍼, 아니 지금은 레드 바이퍼의 무리가 주춤거렸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유지훈 일행을 응시했다.
“뭐야? 비각성자라 그랬잖아.”
“숨어서 보호하는 놈들 없는지만 확인하면 된다고 했는데.”
“저 아가씨는 누구야? 저런 사람이 있다는 말은 없었잖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정보가 많이 어긋난 모양이었다.
유지연이 천천히 무리를 향해 다가갔다.
“너희들 뭐야? 준구가 시키드나?”
“네? 준구가 누군데요?”
“모르면 맞아야지. 얍!”
다시금 하이퍼 스팅어가 작렬했고, 세 놈이 어딘가 한 군데씩 뚫린 채 멀찍이 날아갔다.
“니가 가라. 하와이.”
“하와이는 왜요?”
“모르면 맞아야 한다니까! 이얍!”
여지없이 하이퍼 스팅어가 쏘아져 나갔고, 비명과 함께 서너 명의 사내들이 날았다.
유지연은 연신 괴상한 말을 쏟아냈고, 대답이 못마땅하면 하이퍼 스팅어로 응징을 가했다.
유지훈은 그저 길게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쟤 뭐라는 거냐?”
“모르겠습니다. 그저 경이롭기만 합니다.”
엄덕대는 정신줄을 놓은 채 유지연의 괴랄한 활약에 스며든 모습이었다. 눈에 초점마저 흐려진 상태였다.
“어째 내 주위엔 멀쩡한 인간이 하나도 없냐.”
유지훈이 도우러 나설 시점이었다.
유지연을 돕는 게 아니라, 유지연에게 무참히 짓밟히는 사내들을 도와야 했다.
“야! 다 죽이면 안 돼. 몇 놈 살려둬. 물어볼 게 있어.”
유지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저희가 뭘 가져갔다고 그러세요?”
“모르면 계속 처맞아라! 이이얍!”
유지훈이 작정하고 앞을 막아선 다음에야 비로소 하이퍼 스팅어의 포화가 막을 내렸다.
서른이 넘는 무리 중 멀쩡한 놈은 다섯에 불과했다. 그나마 겁에 질려 주저앉아 있었다. 심지어 지렸다.
“꼭 때려잡아야 가산점이 있는 거야? 멀쩡한 상태로 잡으면 안 돼?”
“어? 그건 안 알아봤네. 어쨌든 때려잡는 게 깔끔해.”
유지훈이 엄덕대에게 멀쩡한 놈들 제압을 지시한 뒤 빨강 머리에게 다가갔다. 몇 차례 더 하이퍼 스팅어에 당한 모양이었다. 어깨에 구멍 외에도 서너 군데 크고 작은 상처들이 있었다.
“누가 보냈냐?”
“나, 나는 정말 준구는 모른다.”
“병신아. 나도 준구는 몰라. 그러니까 누가 보냈냐고.”
“으으···.”
대답이 석연치 않을 땐 방법이 있었다. 무림에서 사용하던 혈도 공략이었다. 천돌혈에 이어 거궐혈을 거쳐···.
“마, 말할게. 말할게. 신화의 의뢰를 받았다.”
“신화 누구? 길드 주인 놈? 아니면 더 위?”
“장중호 이사라는 자였다.”
“장중호 이사? 잘라낼 꼬리인 모양이군.”
유지훈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어디로 데려오라고 했냐?”
“인천 소래포구 근처에 있는 물류창고다.”
“인천? 물류창고? 이 자식들이 영화 많이 본 모양이네. 물류창고에서 작업해서 인천 앞바다에 던지려고? 드럼통에 시멘트 공구리쳐서?”
유지훈이 빨강 머리의 뒤통수를 쥐어박은 뒤 질문을 이어갔다.
“주소는?”
“저기 차 내비에 입력돼 있다.”
빨강 머리가 멀찍이 주차된 승용차를 가리켰다. 독일산 B사 세단이었다. 옆으로 승합차 네 대가 나란히 서 있었다. 졸개들이 타고 온 차량인 모양이었다.
“가자. 앞장서.”
“뭐? 이 꼴을 하고 앞장서라고?”
꼴이 말이 아니긴 했다. 온몸에 구멍이 다섯 군데나 나 있었으니.
그러고 보니 한쪽 다리가 덜렁거렸다. 앞장서긴커녕 어디론가 갈 수도 없는 상태였다.
유지훈이 미간을 좁혔다.
‘이놈을 앞세워서 현장을 덮치려 했건만, 저 망나니가 이 지경을 만들어 놨으니···. 플랜 B를 발동해야 하는데···.’
사실 준비된 플랜 B는 없었다. 즉석에서 만들어야 했다.
어쨌거나 현장을 덮쳐야 하는 게 핵심. 일단 빨강 머리부터 윽박지르고 봐야 했다.
“그럼 전화나 걸어.”
“어, 어디로···?”
“어디긴 어디야! 나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지. 전화해서 내가 시키는 대로 말해.”
유지훈이 빨강 머리에게 전화로 읊을 대사를 일러줬다. 세 번의 예행연습을 거친 뒤 전화를 걸게 했다.
“정말 시키는 대로 하면 보내줄 거냐?”
“그래. 몇 번을 말하게 하냐. 몇 군데 썰어줘?”
유지훈이 단검을 꺼내 보인 다음에야 빨강 머리는 후다닥 휴대폰을 들었다. 긴장한 모습으로 전화를 걸었다.
“긴장할 거 없어. 몇 마디 되지도 않는 대사로.”
신호음이 떨어지기 무섭게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장중호요.]
“나요. 바이퍼.”
[연락이 늦었군. 기다렸소.]
“그렇게 됐소. 어찌 됐든 확보했수다.”
[문제는 없었소? 경호하는 자들이라든가···.]
“경호하는 놈들은 없었는데, 놈이 만만치 않았소. 그런 건 미리 말을 해줬어야지. 우리 애들이 제법 상했소. 별도로 계산이 필요할 거요.”
[섭섭지 않게 챙겨 드리겠소. 서둘러 와주시오.]
“상한 애들 수습하는 대로 가겠소. 나도 좀 다쳐서···.”
[기다리겠소.]
통화를 마친 뒤 빨강 머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키는 대로 했으니 이제 가도 되는 거냐?”
“그래. 보내줄게.”
유지훈이 주위를 살피더니 유지연을 향해 손짓했다.
“볼일 다 봤다. 이제 얘 니 거야.”
“오케이! 안 그래도 잡으러 가려던 참이었어.”
빨강 머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보내준다며! 약속이 틀리잖아!”
“보내주잖아. 쟤한테.”
유지훈이 빨강 머리를 유지연에게 인계하며 말했다.
“나 어디 좀 가봐야 하는데, 너도 같이 갈래?”
“아니. 가산점 챙겨야 해.”
“어디 가는지는 안 궁금하냐? 걱정 안 돼?”
“전혀. 5년씩 사라졌다가도 멀쩡하게 나타나는 인간을 걱정은 무슨.”
말로는 도저히 못 당할 유지연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걸음을 옮기는데, 유지연이 불러 세웠다.
“가기 전에 가산점 수습하는 것 좀 도와줘.”
“돕긴 뭘 도와!”
“할 일이 많아. 각성자수사청에 연락해서 이놈들 인계도 해야 하고, 국가안전본부 통해서 가산점 승인 신청도 해야 하고···.”
국가안전본부 소리를 들으니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기다려 봐. 수습해줄 사람 불러줄 테니까.”
“누구?”
“있어. 국가안전본부에.”
“아~. 그때 그 덜떨어진 언니?”
“그런 말 하지 마. 좀 덜떨어지긴 했지만, 좋은 사람이야.”
유지훈이 짐짓 정색했다.
유지연은 재미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둘이 사귀어?”
“사귀긴 뭘 사귀어! 나보다 두 살이나 많아. 연상은 관심 없어.”
“그럭저럭 어울리는 것 같긴 하던데···.”
“전화해야 하니까 그 입 다물라!”
유지연을 조용히 시킨 뒤 강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요?]
“전화 받자마자 왜요가 뭐냐? 퉁명스럽게. 그러니까 그 나이 먹도록 남자 하나 없는 거 아냐.”
[내 남자 걱정은 내가 할 테니까 용건이나 말해요.]
“좀 와줘야겠어.”
[왜요? 또 무슨 사고 쳤어요?]
“사고는 아니고···. 아무튼 와보면 알아.”
[지금은 곤란해요. 본부에 사고 터져서 퇴근도 못 하고 있어요.]
“무슨 사고?”
[나카무라 카이토가 죽었어요. 본부 감치소에서요. 그거 때문에 비상이에요. 에휴. 나까지 집에도 못 가고 이게 뭔 지랄인지···.]
유지훈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나카무라 카이토의 죽음.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다.
일본의 각성자가 한국 정부 기관에 구금돼 조사를 받던 중 사망한 사건이었다. 양국 간에 외교 문제로 번질 사안이었다.
조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텐데. 대응 논리가 취약한 상황이란 의미였다. 당연히 외교 대결에서 수세에 몰릴 터였다.
“왜 죽었는데?”
[아직 밝혀지진 않았어요. 자살로 추정되긴 하는데···. 일본 대사가 접견을 다녀간 뒤 벌어진 일이라 석연찮긴 해요.]
“일단 와. 와서 이야기하자고.”
[못 간다고요. 내가 지금 유지훈 씨가 무지무지 보고 싶어서 몸서리쳐질 지경인데 갈 수가 없어요.]
“그래. 그럼 방법을 알려줄게. 지금 여기 블루 바이퍼라는 빌런 놈이랑 조직원들 서른 정도 때려잡아 뒀거든.”
이어질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 강은영이 뒷말을 받았다.
[각성자수사청에 연락해서 날아갈게요. 아싸! 탈출각이다!]
“와서 날 봐도 몸서리는 치지 마.”
통화가 끝났다.
옆에서 유지연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바라보고 있었다. 귀도 쫑긋 세운 모습이었다.
“몸서리치는 건 또 뭐야?”
“그게 무슨 말이야?”
“둘이 막 끌어안고 몸서리치고 그러는 사이야?”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괜찮아. 성인 남녀끼리 그럴 수도 있지. 아니. 그래야지.”
“시끄러!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적들의 소굴로 쳐들어갈 준비를 해야 했다.
원래 강은영에게 전화해서 수습만 부탁한 뒤 가려고 했지만, 만나서 카이토의 죽음에 대한 사정을 들은 뒤 가야 했다.
일단 강은영이 오기 전에 준비라도 철저히 해두기로 했다.
“덕대야. 거기 멀쩡한 놈들 잘 모아뒀냐?”
“네. 형님. 모아두고 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들끼리 알아서 잘 모여 있습니다.”
하이퍼 스팅어의 참극을 기적적으로 피해간 녀석들.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유지훈 남매가 다가가자 일제히 몸서리치기까지 했다.
“너희들이 왜 몸서리치고 그러냐?”
만신창이가 된 빨강 머리를 앞세울 순 없었다.
멀쩡한 놈들이 유지훈을 소굴로 안내해야 했다. 그러려면 철저한 사전 교육이 필요했다.
배드 캅, 굿 캅 작전. 유지연을 앞세운 뒤 슬그머니 나타나 다정하게 타이르는 작전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쟤가 손에서 미사일을 막 발사해서 배에 구멍도 뚫리고···. 배 아래 쪽에 맞으면···.”
길게 타이를 필요도 없었다.
“시켜만 주십시오!”
“물류창고에 들어갈 때는 정문으로···.”
군기가 빡 들어 알아서 각본까지 만드는 가련한 영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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