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는 각성을 압살한다-41화 (41/150)

음모의 실체

“결국 약으로 귀결되는 양상이군요.”

SSG의 미중년이 미간을 좁혔다. 짧은 탄식을 토해냈다.

유지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단정 짓진 마세요. 투약하는 장면을 본 건 아니니까요. 그놈에게 그런 특성이 있을 수도 있는 문제고요.”

유지훈과 강은영 그리고 익명을 요구한 미중년이 함께하는 자리.

유지훈은 나카무라 형제를 상대한 과정을 털어놓았다. 마철진까지 가세해 제압한 이야기였다.

공식적으로는 마철진이 히로를 죽인 것으로 돼 있었지만, 미중년에겐 있는 그대로 사실을 알렸다.

대결 과정에서 히로가 보여준 괴랄한 변화와. 마철진을 압도한 위력까지. 이면에 약물의 힘이 작용한 것 같다는 추측을 곁들였다.

물론 소멸기의 작렬 이후에도 히로가 특성을 구사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소멸기는 미중년에게도 감춰야 했다.

“신화그룹의 배후 세력이 야마가토산업이라 상정하면, 우리가 추적해온 음모의 실체를 약으로 추정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렇긴 하죠. 대신 추정에 그쳐선 곤란해요. 밝혀내야죠. 그건 그쪽에서 하실 거죠? 밥상은 차려드렸으니 떠먹는 건 알아서 잘.”

“이상한 점이 있어요.”

강은영이 의문을 제기했다.

“신화그룹에 그럴 역량이 있나요? 10여 년 전 구조조정 당시 신화제약을 매각한 이후 의약품 개발 쪽엔 관심도 안 둔 것으로 아는데요.”

“그렇긴 합니다만. 야마가토산업이 뒤에 있다면 설명이 됩니다. 야마가토제약은 일본에서 제일가는 바이오 기업이거든요.”

“그래도 의문점은 남아요.”

강은영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자세를 견지했다.

“5년 전 던전 폭발 사고 당시 신화그룹에 대한 압수 수색이 이뤄졌어요. 몬스터 대상 실험이나 약품 개발이 진행됐다면, 뭔가 발견됐어야 했는데, 그런 이야기는 전혀 없었어요.”

“저도 그런 이야기는 못 들어본 것 같군요.”

“야마가토산업이 굳이 인프라도 없는 신화그룹에 약품 개발을 맡긴 점도 이해되지 않아요. 직접 진행했으면 진작에 성과가 나서 상용화가 가능했을 텐데요.”

타당한 의문 제기였다.

신화그룹이 몬스터를 대상으로 실험한 지 7, 8년이 지났다. 아직 약품을 완성한 단계는 아닌 듯했다.

만일 야마가토제약에서 직접 실험을 진행하고, 약품 개발에 나섰으면 적어도 5년 안에 약품을 완성했을 터였다.

“일리 있는 말씀이군요. 저희가 파악하기로 실험은 신화길드에서 주도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만일 인프라가 갖춰진 바이오 기업에서 진행했다면 기한을 3년은 단축할 수 있었을 겁니다.”

강은영과 미중년의 사고가 미궁으로 향하려는 찰나, 유지훈이 길잡이로 나섰다.

“답이 뻔히 나와 있는데, 뭘 그리 고민해요. 그쪽은 나랑 같이 보기까지 했잖아.”

“내가 유지훈 씨랑 뭘 봤는데요?”

“독을 뿜어대는 검치호. 내가 썰어버린 놈. 그놈이 실험으로 인해 탄생한 변종이야. 몬스터의 레벨업이라고.”

“그래서···요?”

강은영이 알듯 말듯 눈을 깜빡이는 사이 미중년은 답을 찾았다.

“실험의 위험성을 염려했기 때문이겠네요! 자칫 변종 몬스터가 생겨날 수도 있으니까요. 실험과 약품 개발을 한국으로 보낸 거였어요!”

“한 마디로 개새끼들이죠.”

유지훈이 일단 욕설부터 박은 뒤 말을 이어갔다.

“그게 다가 아닐 수도 있어요.”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요?”

강은영은 여전히 헤매기만 하는 스스로의 아둔함이 원망스럽던 참이었다. 유지훈이 또 다른 이유를 들먹이는데, 당최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깊은 자괴감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불행히도 유지훈은 그녀의 눈빛에서 자괴감을 읽었다.

“그쪽 바보잖아. 모른다고 부끄러워할 거 없어.”

“안 부끄러워요! 빨리 이유나 말해요!”

“두 가지 측면에서 추측할 수 있어. 하나는 몬스터의 변이를 추적해서 새로운 약품 개발에 활용하는 것.”

“나머지 하나는요?”

“한국 사회에 엄청난 혼란을 초래하는 것. 혼란을 이용해 뭔가 도모하려는 거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천하의 개새끼들이야.”

강은영과 미중년이 동시에 탄식을 쏟아냈다.

“사실이라면 무시무시하네요. 한쪽에선 약 빤 놈들이 설쳐대고, 또 한 쪽에선 독 품은 몬스터들이 기승이면···. 상상만 해도 끔찍해요.”

“상상만으로 그칠 일이 아닌 듯해서 더 걱정입니다. 이미 레벨이 올라간 몬스터들이 출몰하고 있으니···.”

“몬스터들로 혼란이 빚어졌을 때 도움을 빙자해서 일본 놈들이 밀고 들어오면···. 신화 이 개잡놈의 매국노 새끼들.”

다시금 길을 이끄는 건 유지훈이었다.

“탄식만 하고 있으면 뭐가 되나요. 실마리를 찾았으니 실타래를 풀어야죠. 신화 놈들부터 시작해서 쪽발이들까지 하나하나 깨부수다 보면 말끔히 정리되지 않겠어요?”

강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각성자수사청에서 신화길드에 대한 재수사를 시작했어요. 아! 그러고 보니 유지훈 씨 증인 조사 다녀왔어요?”

“내일 간다. 잊고 있었는데, 생각나니까 제대로 킹받네.”

유지훈이 깊은 빡침을 드러냈지만, 강은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조사 잘 받으셔야 해요. 신화를 깨부수는 건 유지훈 씨 증언에서 시작되는 거니까요.”

“갑자기 그쪽을 깨부수고 싶어진다. 어쩌냐.”

“본부에 있는 끄나풀도 어느 정도 솎아냈겠다, 신화도 재수사 피해가기 쉽지 않을 거예요.”

유지훈이 으르렁대든 말든, 강은영은 천연덕스럽게 이야기를 마쳤다.

자칫 험악해질 상황에 미중년이 슬며시 끼어들었다.

“실험이나 약품 제조에 대한 증거를 찾아야 할 텐데요. 저희 쪽에서 꾸준히 추적해왔지만, 아직 이렇다 할 단서는 찾지 못한 상태입니다.”

“숨겨둔 자회사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요?”

강은영이 의견을 제시했다.

“5년 전에 신화길드 조사할 때 중소 길드 여러 군데의 지분을 우회적으로 보유한 사실을 밝혀냈었거든요.”

“아! 비슷한 방법으로 신화그룹에서 바이오 기업의 지분을 우회 보유하고 있다면···. 그 부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때 그거 제가 밝혀낸 거였어요. 지분 관계요.”

강은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미중년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우쭈쭈 했다.

“이번에도 강 팀장님께서 도와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좀 바빠서 시간이 될지 모르겠는데···. 내볼게요. 시간.”

미중년의 시선이 유지훈을 향했다.

“유지훈 씨가 증인으로 나선다면, 신화 쪽에서 유지훈 씨를 노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도 성립합니다. 저도 놈들을 노리고 있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안 그래도 밑밥 잘 뿌려뒀습니다. 와서 주워 먹으면, 덥석! 낚아채기만 하면 됩니다.”

“유지훈 씨야 어련히 잘 하시겠지만, 그래도 걱정은 되는군요. 조심해주십시오.”

“조심은 놈들이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조심해서 죽여주십사 부탁드리는 겁니다. 저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요.”

“안타깝게도. 제 칼엔 눈이 달려 있지 않습니다.”

미중년이 입을 떡 벌리며 탄식한 뒤 강은영을 바라봤다. 뭔가 말하려는 찰나 강은영이 가로막았다.

“결례를 범한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제발요.”

“네? 그동안 제가 그렇게 많이 결례를 범했던가요?”

“하지 말라고! 이 변태 새끼야! 제발!”

***

유지연이 불쑥 집으로 쳐들어왔다.

징검다리 연휴를 맞아 나흘간 휴가를 얻었다고 했다.

“아카데미 생도도 휴가가 있냐?”

“으응. 강사들이 다 휴가야. 이참에 생도들도 쉬는 거지.”

100평짜리 2층집이 있다고 해놓고 굳이 유지훈의 아파트로 찾아들어 거실을 장악했다.

소파를 차지하고 발라당 누워 냉장고 파먹기까지 진행하고 있었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TV를 보는 모습이 사뭇 혼란스러웠다.

“야. 너는 너네 집 두고 남의 집에 와서 이러고 있냐?”

“지하실 공사 중이라고 했잖아. 시끄러워서 못 있어.”

“연휴 때도 수리하냐?”

“서둘러서 공사 마쳐달라고 돈 더 줬어. 너도 빨리 거기 들어가서 살고 싶을 거 아냐.”

핫팬츠에 민소매 셔츠. 허연 속살을 훤히 드러낸 옷차림도 눈에 거슬렸다. 늑대들의 소굴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여기 있을 거면 옷이라도 갈아입어. 덕대 보기 민망하지도 않냐?”

“저는 좋습니다.”

어느 틈에 엄덕대가 나타나 유지연에게 꾸벅 인사했다.

“저는 누님이 와 계시는 것만으로 영광스러울 뿐입니다.”

“거봐. 덕대도 좋다잖아. 근데 왜 너는 나한테 누나라 그러냐? 나보다 더 들어 보이는데. 몇 살이야?”

“스물일곱입니다.”

“그럼 나랑 동갑인데.”

“제가 사람 구실 못한 세월이 5년쯤 됩니다. 그거 빼면 누님이 누님 맞습니다.”

“뭐래니···.”

유지연과 엄덕대의 정신 산란한 대화를 듣고 있자니 어지러웠다. 일단 갈라놔야 했다.

“덕대 넌 방으로 들어가. 쟤 갈 때까지 방에 처박혀 있어.”

“저도 누님이랑 같이 있고 싶은데···.”

낙심한 채 방으로 가려는 엄덕대를 유지연이 불러 세웠다.

“덕대야. 그러지 말고 먹을 것 좀 가지고 와 봐.”

“드시고 싶은 거라도 있으십니까? 제가 요리는 좀 합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엄덕대는 요리를 잘했다. 손맛이 제법이었다. 유지훈이 데리고 사는 이유 중 가장 비중이 컸다.

그러고 보면 엄덕대는 잡다한 일에 두루 능했다.

다만 길드의 주업무 몬스터 사냥은···. 유지훈이 하드 트레이닝으로 끌어올려야 할 영역이었다.

“뭐 잘하는데?”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음···. 순댓국?”

“네? 그건 돼지 뼈를 밤새 고아야 하는 고난도의···.”

“됐고. 아무거나 자신 있는 거 만들어와 봐.”

“넵!”

엄덕대가 줄레줄레 냉장고로 달려갔다가, 냉장고를 열어보고는 나라 잃은 표정이 됐다.

“이럴 수가! 냉장고가 텅 비어 있다니···.”

“야. 냉장고 얘가 다 파먹었다. 냉장고까지 안 먹은 게 다행이야.”

“누님. 장 봐다가 해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대답은 유지훈의 몫이었다. 물론 한사코 만류.

“장을 보긴 뭘 봐. 먹을 거 없으면 가겠지.”

“가긴 어딜 가. 내 집 놔두고.”

“이게 어떻게 니 집이야? 내 집이지.”

“니 집이 내 집이지.”

“너 집 있다며!”

“내 집이 니 집이야.”

“당최 무슨 말인지···. 어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한숨을 내쉬는 유지훈의 눈에 입을 떡 벌린 엄덕대가 들어왔다.

“넌 왜 그러고 있냐?”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해서요.”

“뭐가?”

“그 누구도 형님을 말로는 이길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누님 앞에서는 형님도 꼼짝 못 하네요. 경이롭습니다.”

“너 당장 방으로 안 들어가!”

이제 엄덕대는 유지훈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유지연에게 살살거리기 여념이 없었다.

“누님. 배달 주문 어떻습니까? 배달의 용사로 주문하면 10분이면 날아옵니다.”

“순댓국도 배달돼?”

“물론이죠! 모둠 순대도 시킬까요?”

이번에도 유지훈이 제동을 걸었다.

“순댓국 배달시키면 식어서 맛없어. 순댓국은 뜨거울 때 먹어야 해.”

“그럼 가서 먹자.”

“제가 모시겠습니다.”

세 사람은 순댓국집으로 향했다.

잘 먹고 돌아오는 길, 유지연은 뿔이 단단히 났다.

“순댓국 맛이 뭐 저래? 설렁탕에 순대 빠트린 거잖아. 완전 사기야.”

“그러게 누가 소사골 순댓국을 먹으래? 순댓국은 돼지사골인데···.”

“너도 소사골 순댓국 먹었잖아!”

“너 때문이잖아! 생각하니까 또 킹받네.”

“그럴 줄 알고 저는 돼지사골 순댓국을 먹었습니다.”

다 좋은데 엄덕대는 눈치가 없었다.

“입 닥치지 못해!”

“그 입 다물라.”

모처럼 남매의 마음이 통했다.

극도로 예민해진 점도 일치했다.

누구든 걸리기만 해라. 다 죽여버리겠다. 살인적인 눈매로 밤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유 씨 남매.

엄덕대는 곁에 있는 것만으로 오싹했다. 자신도 모르게 옷깃을 여몄다. 라운드 티셔츠를 입어 여밀 수도 없었다.

“어이! 거기 그림 좋은데!”

어떤 정신 나간 놈이 눈치도 없이···.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 못 하는 놈은 일단 타일러야 한다는 게 엄덕대의 철칙이었다. 준엄하게 훈계하려 했다.

그런데 놈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기어코 선을 넘었다.

“어이 유지훈이! 핫팬츠 아가씨랑 데이트하고 오는 길인가?”

손도끼를 어깨에 걸친 빨강 머리 사내 옆으로 삼십 명은 됨직한 사내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유지훈을 기다린 듯했다. 앞길을 막아선 양상이었다.

“으음. 드디어 밑밥을 주워 먹는 놈들이 나타난 건가?”

유지훈이 중얼거리며 엄덕대를 뒤로 밀어냈다.

“하긴 내일 증인 조사를 받으러 가니 나타날 때가 되긴 했지.”

서서히 말려 올라가는 유지훈의 입꼬리를 보며, 엄덕대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차마 볼 수 없어 외면한 순간, 엄덕대는 털썩 주저앉았다.

때마침 눈에 들어온 유지연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 올라가 귀에 매달려 있었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