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는 각성을 압살한다-37화 (37/150)

각성의 폭주 (1)

임정명의 병문안 이후, 마철진은 유지훈에 대한 경계를 접었다. 의문스러운 점은 많았지만, 애제자 유지연의 오빠인 만큼 위험인물은 아니라고 간주했다.

다만 여전히 괴이한 능력에 대해선 궁금했다.

비각성자이면서 고레벨 각성자들을 손쉽게 제압하고, 초특급 몬스터 검치호를 해치운 전투력. 혹시 마나 측정에 잡히지 않은 정신 계열 이능을 지닌 건 아닌지. 관심의 끈은 놓지 않았다.

“길드를 세우려는 건가?”

가끔 오가며 관찰한 바로, 유지훈은 길드를 설립하려는 듯했다.

저레벨 각성자들과 레벨 1 던전을 돌았고, 그 과정에서 함께 할 인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유지연에 생각이 미쳤다.

“혹시 지연이를 길드에 끌어들이려는 건 아니겠지?”

그럴 순 없었다. 유지연은 초인이 돼야 했다. 자칫 오빠의 길드에 합류하겠다고 초인을 포기하는 일이 있어선 곤란했다.

마철진이 판단하기에 유지연은 향후 대한민국 최고 각성자에 오를 인재였다. 혈육으로 인해 초인의 길을 가지 않게 둘 순 없었다.

그 점은 유지훈에게 분명히 해야 했다.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고, 정 안 되면 완력이라도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로 가는 거지?‘

만나러 가다가 마주친 유지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뒤를 밟았다. 움직임이 특이했다. 추적을 뿌리치려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뿌리치려는 듯 위장한 채 유인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내 존재를 알아챈 건가?’

한결 흥미로웠다.

기척을 최대한 감춘 채 뒤를 밟고 있었다. 은밀한 움직임에 있어서 마철진은 단연 대한민국 최고 수준이었다.

그런 그의 추적을 감지할 수 있다면, 유지훈의 기감은 어지간한 고레벨 각성자를 능가하는 수준일 터였다.

‘정말 재미있는 녀석이군.’

유지훈이 향한 곳은 서울과 구리 접경의 아차산이었다. 산자락 고구려 대장간 마을에 다다를 무렵, 유지훈이 걸음을 멈췄다.

빙긋 웃으며 뒤를 돌아봤다.

“뭣들 해? 나와. 숨어서 쫓아오느라 힘들지도 않아?”

마철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서려 했다.

들킨 것도 언짢았지만, 다짜고짜 반말하는 게 더 기분 나빴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그것도 초인한테.

그런데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은 따로 있었다.

“우리를 유인한 것이었나?”

낯선 분위기의 청년 둘이었다. 하나는 빡빡머리, 나머지 하나는 단정하게 묶은 긴 머리.

마철진은 나서려던 동작을 멈추고, 모습을 감춘 채로 지켜봤다.

예사롭지 않았다. 감지되는 마나의 크기로는 레벨 7에 못 미쳤지만, 음험한 기세는 레벨 8에 육박했다.

‘누구지? 저런 각성자가 있었나?’

떠오르지 않는 인물들이었다.

가지런히 정돈된 기운의 양상이 빌런 같진 않은데···.

“유인했다고도 할 수 있고. 실력을 알아보고 싶기도 했고.”

유지훈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답했다.

긴 머리가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어떻던가?”

여유로운 긴 머리와 달리 빡빡머리의 기세는 사나웠다. 원한을 머금은 눈빛이었다.

어깻죽지에 동여맨 붕대가 눈에 들어왔다. 유지훈으로 인해 당한 부상인 모양이었다.

“어째서 멀쩡하지? 분명 적중했는데. 세 군데나.”

“응. 그거? 스쳤던 모양이야. 빨간약 바르니까 하루 만에 나았어.”

심드렁한 유지훈의 대답에 빡빡머리가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 보니 말투가 어색했다. 어눌한 한국어였다.

마철진이 눈매를 좁혔다.

‘일본 놈들인가?’

떠오르는 인물군이 있었다.

일본 정재계를 아우르는 거대 세력 야마가토산업. 거기서 양성하는 젊은 각성자들이었다. 야마구치 가문의 실전 무예를 전수해 레벨을 능가하는 실력을 지녔다고 들었다.

‘그런데 일본의 각성자가 국내에 들어왔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은밀히 들어왔다면, 선한 의도가 아닐 터였다.

경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편으로 관심이 한결 커지기도 했다. 유지훈은 일본의 각성자들을 어떻게 상대할까.

“너, 우리와 함께 가야겠다.”

“너희들이랑 같이? 어디로?”

“본국으로.”

“하하하. 초청하는 거야?”

유지훈이 유쾌하게 웃었다.

“공교롭게 됐네. 나도 너희들 데리고 어디로 좀 가려고 했거든.”

“우리를?”

“그래. 너희들. 몰래 들어왔잖아. 일단 데려가서 입국 신고부터 시키고. 어떤 놈이랑 쿵짝이 맞아서 작당을 꾸미는지 알아봐야겠거든.”

“흐흐흐. 능력이 될까?”

긴 머리 히로 나카무라가 가소롭다는 듯 조소를 흘렸다.

유지훈은 혀를 끌끌 차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는 너희들은? 아! 이참에 확인해보면 되겠네. 나랑 너희 중에 누가 능력이 되는지.”

순간 유지훈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모르는 모양인데, 나는 나를 도발해온 놈들을 가만두지 않거든.”

유지훈이 긴 머리룰 향해 몸을 날렸다. 양손에 쥐어진 단검이 싸늘한 광채를 뿜어냈다.

히로가 표정을 굳혔다가 이내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양손으로 크게 원을 그리고는 연달아 뻗어냈다. 마나가 응축돼 형성된 수리검이 쏟아져 나왔다.

여덟 개의 마나 수리검이 덮쳐오는 유지훈의 전신을 압박했다.

유지훈 단검을 휘둘러 마나 수리검을 튕겨냈다. 일부 떨쳐내지 못한 마나 수리검은 몸통을 소용돌이처럼 회전해 비껴내려 했다.

두 개의 마나 수리검이 옆구리와 대퇴부를 스쳤다. 피가 허공에 비산했다. 유지훈은 개의치 않고 히로의 하반신으로 압박해 들어갔다.

“물러서라!”

유지훈의 단검이 긴 머리의 다리를 베려는 찰나, 빡빡머리 카이토 나카무라가 끼어들었다.

어깨 부상 탓에 오른팔 사용이 여의치 않은지, 왼손만으로 마나 수리검을 쏘아낸 뒤 몸통으로 유지훈에게 부딪혀 왔다.

촤악!

서걱!

카이토의 마나 수리검이 유지훈의 등판을 베고 지나갔다. 유지훈의 단검은 카이토의 오른 팔뚝을 갈랐다.

상처의 크기는 유지훈이 컸다. 등 전체에 긴 상처를 남겼다.

반면 깊이는 카이토 쪽이 깊었다. 뼈까지 베었다. 오른팔을 사용하기 힘들 정도의 상처였다.

히로는 멀찍이 날아가 착지한 뒤 재차 마나 수리검을 쏘아낼 자세를 갖췄다. 카이토 또한 몸을 굴러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두 형제가 앞뒤에서 유지훈을 노리는 형국이었다.

유지훈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쯧. 머리 긴 놈을 썰었어야 했는데, 엉뚱한 놈한테 칼질했네.”

나카무라 형제의 표정이 굳어졌다. 팔을 부여잡은 카이토는 아드득 이를 갈기까지 했다.

유지훈이 팔을 뒤로 뻗어 등을 훑었다. 제법 많은 피가 묻어 나왔다.

“이런! 피가 철철 흐르잖아. 이런 상태로 등판을 적에게 보이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데···.”

유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히로 뒤쪽을 향해 소리쳤다.

“구경할 만큼 하셨으면 그만 나오시죠. 보아하니 이놈들이랑 한패는 아닌 것 같은데요.”

히로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무슨 수작이냐. 누가 있다고···.”

순간 히로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뒤돌아보는 찰나 웅장한 회오리바람이 히로를 덮쳤다. 칼날의 기운을 동반한 용솟음과 함께 히로를 하늘로 날려 보냈다.

동시에 유지훈이 카이토를 덮쳤다.

서걱!

발목을 썰어버린 뒤 카이토를 쓰러뜨렸다. 위에 올라타 무릎으로 양팔을 제압했다. 양손으로 목을 감싸 쥐었다. 소멸기를 발동했다.

3초 남짓. 카이토의 각성이 사라졌다.

쿵!

뭔가 땅에 처박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하늘로 올라갔던 히로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피투성이가 된 히로가 땅에 처박혀 꿈틀댔다.

유지훈이 슬쩍 돌아봤다. 못마땅한 표정의 중년 사내가 히로와 유지훈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유지훈은 중년 사내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카이토를 마저 제압했다. 양손을 뒤로한 뒤 옷자락을 찢어 결박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잘 설명해야 할 것이다. 외국의 각성자에게 손을 쓰는 건 자칫 외교 문제로···.”

중년 사내 마철진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엄습해오는 거대한 기운에 다급하게 양손을 휘둘러 특성 토네이도를 구사해야 했다.

쾅!

거대한 기운의 충돌 결과.

마철진이 밀렸다. 볼썽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피투성이의 히로였다. 초인 마철진의 토네이도에 전신을 난자당하고, 하늘로 솟구쳤다가 패대기쳐졌음에도 일어나 공세를 취한 것이었다.

심지어 마나 수리검과 토네이도의 맞대결에서 마철진을 밀어내기까지 했다. 상위 레벨의 상대를 특성으로 압도한 셈이었다.

“이, 이게 무슨···.”

마철진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토네이도는 제대로 작렬했다. 물론 죽일 생각은 없었기에 전력을 다하진 않았다. 그래도 한동안 거동이 힘든 상처를 입혔어야 했다.

그런데 상대가 반격을 펼쳐왔다. 마나를 응축한 검의 형태였다.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전력을 다한 토네이도로 맞섰지만, 그가 밀렸다.

레벨 6, 기껏해야 레벨 7로 보였는데. 심한 부상까지 당한 상대가 그를 압도하는 위력을 보여준 것이었다.

“흐흐흐. 기대 이상이군.”

웃음이 기괴했다. 아니 사람 자체가 비정상이었다.

덩치가 눈에 띄게 커졌다. 눈은 눈동자가 사라진 핏빛이었다. 기도가 흉흉했다. 사람이 아닌 몬스터의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초인인가? 하찮군. 조선은 초인도 대단할 게 없어. 크흐흐.”

히로가 괴랄한 웃음과 함께 양손을 뻗었다. 마나 수리검이 쏟아져 나왔다. 수리검이 아니었다. 미사일을 연상케 하는 위력이었다.

마철진이 다급하게 양손을 휘저었다. 사력을 다해 토네이도를 전개했다.

쾅! 쾅! 쾅! 쾅! 쾅!

연이은 기운의 충돌. 결과는 이번에도 히로의 우위였다.

히로는 거침없이 밀어붙였고, 마철진은 형편없이 밀렸다. 레벨 7과 초인이 뒤바뀐 양상이었다.

‘뭔가 잘못됐다.’

보고만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유지훈도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정면으로 파고드는 건 불가능했다. 비각성자 유지훈이 끼어들 영역이 아니었다.

마철진과 대결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 히로의 후방이 유지훈에게 허락된 공간이었다.

히로는 마철진을 밀어붙이는 흥에 겨웠는지, 유지훈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쩌면 관심을 둘 가치조차 없다고 여겼을 터였다.

유지훈은 마나 수리검과 토네이도의 충돌을 피해 히로의 후방에 자리 잡았다. 덥석 끌어안았다.

“가소롭군.”

히로는 유지훈을 하찮게 여겼다. 뒤에서 끌어안은 들 국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리라 간주했다. 눈앞의 상대, 초인만 끝장내면 상황 종료라 판단하는 눈치였다.

기회가 왔다. 소멸기를 작렬시킬 순간이었다.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느낌. 역시 3초 남짓이었다. 소멸의 완성까지.

‘응? 이 정도면 기껏해야 레벨 7이란 의미인데···.’

유지훈이 이상하게 생각할 때, 히로 또한 뭔가 이상함을 느낀 듯했다. 격렬하게 몸을 흔들어 유지훈을 떨쳐냈다.

튕겨내진 유지훈이 몸을 굴러 착지한 뒤 히로를 노려봤다.

기세는 여전히 흉흉했지만, 각성이 소멸된 이상 큰 문제는 없으리라 판단했다. 여유로운 눈빛으로 히로를 응시했다.

“크흐흐. 귀찮은 놈이군. 사로잡아 오라고 해 살려두려 했더니.”

히로가 비릿한 미소와 함께 양손을 뻗었다.

유지훈은 코웃음으로 대응했다.

“흥! 헛짓···!”

코웃음을 가르고 목을 엄습해오는 예리한 기운. 마나 수리검이었다.

조금 전의 미사일 같은 위력은 아니었지만, 날카로웠다. 목을 꿰뚫기 충분한 기세를 머금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목을 젖혔다. 싸늘한 기운이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멍청한 놈! 뭐 하는 거냐!”

안타까운 외침과 함께 마철진이 토네이도를 쏘아냈다.

유지훈을 향해 공세를 펼치던 히로가 토네이도에 휘말렸다.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가 털썩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유지훈은 왼손으로 목을 지혈하며 히로에게 파고들었다. 맹렬하게 단검을 휘둘렀다.

스억! 스억! 스억! 스억!

닥치는 대로 썰었다. 칼질이 뻑뻑했다. 소멸기가 작렬하기 전 몬스터를 써는 느낌이었다.

괴이했지만,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무조건 썰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단검을 휘저었다.

공간을 내줄 순 없었다. 다시 마나 수리검을 쏘아내면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최대한 공간을 좁힌 채 썰고 또 썰었다.

격렬히 몸부림치며 맞서던 히로의 움직임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눈빛이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왔고, 몸집도 원래 크기로 작아졌다.

서걱!

마침내 목을 써는 데 성공했다.

히로의 몸이 축 처졌다. 눈빛에서 생기가 사라져갔다.

유지훈이 긴 한숨과 함께 단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휴우.”

돌아보니 상처투성이의 중년 사내가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