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상의 전환
길드 설립의 첫발은 순조롭게 내디뎠다. 금강길드 마스터 최금강은 계획을 들어보지도 않고 아낌없는 지원부터 약속했다.
“계획도 안 들어보시고요?”
“유지훈 씨가 하시고자 하는 일은 뭐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게 저희 방침입니다.”
“그 전에 말씀부터 편하게 해주시죠. 머리도 허연 분이 말씀을 너무 높이시니 불편하네요.”
사실 무림에서 유지훈은 칠순의 노인 무신과도 말을 트고 지냈다. 살아온 세월만 치면 최금강보다 길었다. 그래도 무림과 21세기는 엄연히 다른 공간. 로마에선 로마의 법을 따르는 게 편했다.
“유지훈 씨를 불편하게 할 순 없죠. 험험. 그럼 그리 하겠네.”
최금강은 기다렸다는 듯 편한 말투를 수용했다. 그리고는 준비라도 한 듯 길드 설립에 대한 조언을 쏟아냈다.
“자네도 알겠지만, 길드를 세우려면 법률적인 조건이 있네. 그 부분은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야.”
“각성자와 관련한 조건 말씀이시죠?”
“그렇지. 기본적으로 특성을 개화한 레벨 4 이상이 최소한 한 명은 있어야 하고, 그 외에도 다섯은 있어야 기본 조건을 완비하게 되네.”
“그 부분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일단 간판부터 세워놓고 차근차근 각성자를 채워 넣는···.”
“그래서 말인데, 금강길드에서 인원을 보내줄 의향도 있네. 설립부터 마친 뒤 추후에 자네가 원하는 인력을 채운 뒤 내보내는 방식일세. 같이 해도 괜찮으면 계속 둬도 좋고···.”
“아닙니다. 처음부터 함께하는 이들이 중요합니다. 저랑 마음이 맞을 인원으로 구성하고 싶습니다.”
유지훈의 단호한 반응에 최금강이 미세하게 표정을 굳혔지만, 이내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믿을 만한 수하들을 유지훈의 길드에 참여시키려는 마음이 없지 않았던 탓이었다. 지원을 빙자해 감시도 겸하려는 의도였다.
간파해서였을지 모르겠지만, 유지훈은 완곡한 철벽으로 대응했다.
“길드 설립을 서두르는 듯해서 돕고자 하는 취지였는데···. 왜 길드를 세우려 하는지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돈 벌려고요. 요즘 세상에 몬스터 사냥만큼 돈 되는 게 또 없잖습니까? 별다른 기술도 없는 저 같은 사람한테요.”
유지훈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어갔다.
“당분간 레벨 1 던전 돌면서 괜찮은 사람 물색해볼 계획입니다. 몬스터도 사냥하고, 길드에 합류시킬 각성자도 찾아보고요.”
“레벨 1 던전을 도는 각성자라면, 기껏해야 레벨 2 수준일 텐데요? 그 인원으로 길드 만들어봤자, 들어갈 수 있는 던전은 레벨 2가 다예요. 운영비 감안하면 수지가 안 맞는다고요.”
강은영의 우려에 유지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 비각성자야. 그쪽도 봤다시피 레벨 7 몬스터도 때려잡았고. 레벨은 숫자에 불과해. 아닐 것 같아?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허허허.”
유지훈의 패기에 최금강이 털털하게 웃었다. 유지훈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다만 걸림돌은 있었다.
“다 좋은데, 레벨 4 각성자는 어찌할 텐가? 법규상 길드 마스터는 레벨 4 이상이어야 하네. 자넨 길드 마스터가 될 수 없다는 의미일세.”
뭔가 떠오른 듯 최금강이 한 마디 덧붙였다.
“자네 동생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곤란하네. 유지연 생도는 유력한 초인 후보일세. 초인이 되면 길드에는···.”
“하하하.”
유지훈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손사래를 쳤다.
“지연이를 우리 길드에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녀석 데려오면 잔소리에, 잔소리에···. 어휴~. 상상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지네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최금강이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누구를? 길드 마스터는 누구보다 자네와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이어야 할 텐데···.”
“그 부분은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즉에 최적의 인물을 찾아뒀으니까요.”
유지훈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궁금하세요? 영감님은 앞으로 많은 도움을 주셔야 할 분이니, 살짝 귀띔해 드릴까요?”
“험험. 궁금해서라기보다 전폭적인 지원을 위해 미리 알아두는 차원에서···.”
유지훈이 최금강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최금강이 박장대소했다.
“하하하. 거 참 절묘한 생각이로구먼. 정말 절묘해. 하하하.”
“누군데 그러시는 거예요? 저도 좀 알려주세요.”
덩달아 궁금해진 강은영이 졸랐지만, 최금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말할 수 없네. 정 궁금하면 저 친구에게 직접 듣게.”
강은영의 시선이 유지훈을 향했지만, 이미 철벽이 내려진 상태였다.
“영업 비밀을 함부로 공개할 순 없지.”
이후 논의는 순풍에 돛 단 듯 진행됐다.
설립을 위한 자금은 충분하다 못해 넘치게 마련된 상태. 사채업자로부터 받아낸 15억 원에, 검치호 사냥 수입 37억 원까지 52억 원이면 어지간한 중견 길드 자본금을 월등히 웃돌았다.
인력 계획까지 그럭저럭 마무리된 셈이니, 본격적인 설립에 들어가도 큰 무리는 없었다.
“행정 절차나 장비 구매 등에 관해서는 금강길드에서 지원하겠네. 준비되는 대로 알려주시게.”
최금강과 강은영이 떠났다.
유지훈이 엄덕대 박형식 등 1차 발기인들과 함께 제반 준비를 시작할 차례였다.
“일단 사무실부터 알아보자. 2, 3층짜리 작은 건물 한 채 구할 수 있으면 제일 좋을 것 같다.”
“안 그래도 부동산에 매물 나오면 바로 연락 달라고 했습니다.”
역시 잡다한 일에는 누구보다 빠릿빠릿한 엄덕대였다.
“레벨 1 던전 도는 각성자들 중에 쓸 만한 친구들도 물색해뒀습니다. 형님께서 직접 만나보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박형식의 순발력도 몰라보게 발전했다.
역시 경쟁은 진보를 위한 최고의 밑거름이었다.
“면접 같은 건 필요 없고, 같이 던전 돌아보자고 해. 말만 번지르르한 놈보다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놈이 필요해.”
“안 그래도 세 명 정도 같이 던전 나가기로 했습니다.”
“지난번에 같이 나갔던 양반한테는 물어봤어? 황소개구리 독에 한쪽 팔 못 쓰게 된 각성자 말이야.”
“의사는 타진해봤는데요. 폐를 끼치고 싶진 않다고···.”
“생각이 반듯하네. 우리랑 같이 움직이다가 그렇게 됐는데, 끝까지 함께해야지. 폐 끼칠 거 없으니 들어오라고 해.”
무림에 외팔이 무인도 적지 않았다. 유지훈이 아는 이 중에 오른팔을 잃은 뒤 좌수검으로 바꾼 초절정 외팔이 검객도 있었다.
‘그 녀석은 어떻게 지내나 모르겠군. 환갑은 지났을 텐데···.’
유지훈이 그리 강하지 않던 시절 친분을 쌓았던 인물이었다. 사파 출신이었지만, 호방하고 정정당당했다. 정파 무인의 암수에 걸려 팔을 잃었지만, 뼈를 깎는 수련 끝에 좌수검으로 경지에 올랐다.
유지훈은 그 과정을 지켜봤다. 좌수검으로 복수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팔을 잃은 각성자도 훌륭한 길드 구성원이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안 되면 그가 되게 만들 생각이었다.
“잘 시작했으니까 오늘 저녁때 회식이나 하자. 순댓국 어때?”
“에이~. 형님도 회식에 순댓국이 뭡니까?”
“모둠 순대도 한 접시 시켜.”
“그러지 말고 클럽 한 번 가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클럽?”
유지훈이 관심을 보이자 박형식이 적극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 동창 놈 중에 클럽 쪽에 빠삭한 놈이 있습니다. 음반 기획사에서 프로듀서로 일하는 놈인데요.”
“너는 철학과라면서 동창은 참 다채롭다? 사채업자 아들에, 클럽에 빠삭한 음반 기획사 직원까지···.”
“철학이 만물의 근원이라 그렇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놈이 잘 닦아놓은 클럽이 있는데, 요즘 물 좋다고 합니다.”
유지훈은 클럽엔 가본 적이 없었다. 어둠의 세상이라 여겨 꺼렸다. 어리숙하게 갔다가 어둠의 자식들에게 해코지라도 당할 것 같았다.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어둠의 자식들은 잘 타이르면 될 일이었다. 새로운 세상이 궁금하기도 했다. 심지어 물까지 좋다고 하니.
“그게 어딘데? 물은 확실히 좋은 거지?”
“요즘 강남에서 제일 핫한 클럽입니다. 전국의 미녀들은 다 거기 모인다는···.”
전국의 미녀들이 다 모인다고?
무림에도 그런 곳이 있긴 했는데···. 무림 공적으로 쫓겨 다니느라 가보진 못했다.
그래. 돌아온 김에 전국 미녀들이나 영접하러 가보자.
***
“유지훈이라는 녀석한테 너무 신경을 쓰는 것 같구나.”
신화그룹 회장의 장남 이자성이 짐짓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눈앞의 상대는 바로 아래 동생 이자걸이었다.
“글쎄요. 별로 대단할 것 없어 보이긴 하지만, 위험한 인물입니다. 제 본능이 그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신화그룹 후계자의 가장 강력한 후보 둘이 독대하는 자리였다.
장남 이자성은 그룹 전체를 아우르는 경영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후계자 낙점을 목전에 둔 상황이었다.
다만 이자걸의 도전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이자걸이 맡은 그룹 차세대 핵심 사업의 성공 여부는 후계구도를 뒤흔들 수 있었다.
이자성은 이자걸의 추진 사업을 지원하면서 견제도 해야 했다.
“어차피 비각성자다. 자웅이 선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게야.”
“이자웅 대표가 괜히 건드려서 쓴맛을 보고 있습니다. 빌런을 동원한 일도, 김연학 본부장을 앞세운 일 모두 긁어 부스럼만 됐습니다.”
“배후에 있는 누군가를 과소평가한 결과라더구나. 확실히 정리한다고 했으니 그 건은 자웅이에게 맡겨둬라.”
“그래도···.”
이자걸이 항변하려 했지만, 이자성은 단호했다.
“마철진 초인을 움직이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칫 그룹 전체에 곤란을 끼칠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마철진 초인이 제가 움직이란다고 움직일 분인가요? 저는 그저 유지훈이라는 친구를 제어하기 위해···.”
“네가 경솔했다. 그 부분은 나와 먼저 상의했어야 했다. 마철진 초인 건은 모르는 척할 테니, 앞으로 너는 유지훈 건에서 빠지도록 해라.”
이자걸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후계자를 놓고 경쟁 관계이긴 해도 그룹 전체 지휘권을 지닌 이자성은 그에게 상관이었다. 지시는 따라야 했다.
동생의 수긍을 확인한 이자성이 입을 열었다. 본격적인 논의 주제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진행 중인 건은 어떻게 잘 돼가고 있느냐?”
“마무리 단계입니다. 기본적인 테스트는 결과가 만족스러웠습니다. 임상 테스트를 위한 시제품 생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으음···.”
긍정적인 보고 내용에도 이자성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예상보다 늦어지는구나. 계획대로라면 두 달 전에는 임상 테스트에 들어갔어야 했는데···.”
“그룹의 미래가 걸린 일입니다. 몇 달, 아니 1, 2년 늦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철저한 검증을 거쳐 완벽을 추구해야 합니다.”
“네 말도 일리가 있다만, 저쪽에선 좀 더 서둘러주길 바라는 눈치다. 안 그래도 이번에 사람을 보내왔다.”
“사람이라면···?”
불길한 예감에 이자걸이 뭔가 당부하려 했지만, 이자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테스트용 제품을 보여주기로 했다. 저쪽 사람들을 대하는 건 자웅이 쪽에서 맡아서 진행할 예정이다.”
“안됩니다! 형님! 시기상조입니다.”
평소 업무 관련 자리에서는 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 이자걸이었지만, 다급하게 형님을 외쳤다.
“그리고 그쪽 인사를 상대하는 건 나연이 담당 아닙니까? 나연이에게 맡겨서 테스트용 제품 보여주는 것도 미루는 방향으로···.”
“원래 시제품을 요구해왔다. 테스트용 제품으로 대체하기로 한 것도 간신히 달랜 결과다.”
이자성은 이자걸의 더딘 진행을 책망하듯 몰아붙였다.
“이번에 온 자들이 제법 높은 레벨의 각성자들이다. 길드 쪽에서 맡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나연이도 자웅이 못지않은 각성자입니다.”
막내인 이나연은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이자걸과 말이 잘 통했다. 과격하고 무분별한 이자웅이 나서는 것보다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이자걸은 생각했다.
하지만 이자성은 요지부동이었다.
“그쪽에서 밤 문화를 즐기고 싶어 한다. 그런 일이라면 자웅이 쪽이 어울리지. 업계에 연줄도 탄탄하고. 그러니 너는 이번 일은 신경 쓰지 말고 시제품 생산에만 주력하도록 해라.”
“형님!”
“그리고 당분간 그룹 일에서도 손 떼는 것으로 해라. 미래전략실에는 그렇게 일러두마. 그만큼 네가 맡은 일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니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논의가 끝났다.
이자걸은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자칫 대계가 어그러질 수 있다는 우려가 밀려들었다.
‘자웅이를 앞세운다고? 어쩌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플랜 B로 플랜 A를 대체하기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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