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의 법칙
다사다난했던 하루였다.
많은 일이 있었고, 생각할 거리도 많았다.
무엇보다 의미 있었던 순간은 동생과의 재회였다.
50년 만의 해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너무 달라진 동생의 모습 때문일 터였다.
연약하고 겁도 많던 녀석이었는데, 초인을 바라보고 있다니···.
‘하긴 호구의 정석이었던 나도 무림을 재패했는데, 그 피가 어디 갈까. 확실히 피는 물보다 진하구나. 근데 이게 맞는 비유인가?’
어쨌거나 집에 오자마자 동생에게 전화했는데, 받지 않았다. 대신 잠시 후 문자 한 통만 떡하니 왔다.
[수업 중임. 대체로 전화 받기 힘드니 앞으로 전화는 내가 하겠음. 아! 지난 5년 동안 뭐 하고 살았는지 간략한 보고서 제출 요망. 추신: 앞으로 오빠 너는 내가 지킬 테니 발 뻗고 잠이나 푹 자셔.]
“허! 나는 노는 줄 아나. 그깟 전화 나도 안 받고 만다. 보고서? 이게 누굴 흑사리 껍데기로 아는 건지···.”
그래도 지켜준다는 말은 뭉클했다.
마음도 가벼워졌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동생이 마음에 걸렸는데, 도리어 오빠를 지켜준다고 하니.
강자에게 가족은 핸디캡이 될 수 있는 존재다. 무림에서 유지훈은 가족으로 인해 발목 잡힌 고수들의 사례를 숱하게 목격했다.
강자를 노리는 음모에는 대체로 가족이 있었다. 천하십대고수급 강자도 납치당한 아들로 인해 사파 무리에게 목숨을 잃기도 했다.
강한 동생을 둔 유지훈은 그런 걱정은 필요 없게 됐다.
“그나저나 오늘 있었던 일들도 하나하나 복기해봐야겠지.”
우선 초특급 몬스터를 격퇴한 일.
소멸기가 몬스터에게 작용하는 범위를 확인한 건 긍정적이었다.
소멸기는 몬스터를 일반 들짐승 수준으로 바꿔놓았다. 덩치나 힘은 그대로겠지만, 충분히 처치 가능한 수준이 됐다.
다만 소멸기를 구사하기까지는 문제가 될 수 있을 듯했다.
검치호의 경우 유지연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결과였다. 만일 일 대 일 정면 대결이었으면···. 그저 아찔할 뿐이었다.
“재생 능력이 있으니 당장 죽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계속 처맞으면서 소멸기를 사용할 기회만 엿볼 수도 없고···.”
그나저나 재생은 어디까지 가능한 거지? 어딘가 잘려도 다시 생겨나거나 하는 건가? 시험 삼아 잘라 볼 수도 없는데···.
검치호 같은 최상위 레벨 몬스터나 레벨 7 이상의 각성자를 상대하는 방식에 대한 숙제가 주어졌다.
레벨 6인 어글리 썬더까진 큰 어려움이 없었는데, 레벨 7의 김연학이나 아이언 헤드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어쨌거나 제압하긴 했지만, 운이 따른 결과였다. 비각성자라는 방심과 숨겨진 소멸기 덕분이었다. 제대로 맞붙었으면···. 승산은 3 대 7. 상대의 우위라 봐야 했다.
하물며 임정명 같은 초인에겐 승산이 보이지 않았다. 방심의 공간을 파고들지 않는 한 소멸기는커녕 손 한번 제대로 뻗어볼 수도···.
“무림이랑은 확실히 다르구나. 거긴 낭만이라도 있었는데···.”
먼저 도발하지 않는다는 유지훈의 원칙. 타고난 성품에 의한 것이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나름의 생존법이었다. 패턴을 읽히지 않겠다는.
절세의 박투술과 극강의 필살기를 지녔지만, 내공은 없는 유지훈이 절대 강자들과 맞서 생존한 비결이었다.
선제공격은 패턴을 읽힐 여지를 주기에 배제하는 대신, 도발해온 상대는 확실히 끝장내는 유지훈만의 방식. 경험한 자들은 모두 죽었기에, 기본적인 패턴을 감출 수 있었다.
21세기로 돌아와서도 유지해야 할 원칙이다. 좀 더 철저히. 비각성자라는 방심은 누리면서, 소멸기는 최대한 감추는 방식으로.
이곳에선 패턴을 숨기기 힘들다. 기술의 발달로 정보 전파의 속도와 범위가 무림과 비교할 수 없으니. 도발한 상대는 확실히 입을 다물게 해야 하는 이유다. 이른바 살인멸구(殺人滅口).
소멸기가 드러나면 방심 또한 사라진다.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 악전고투의 역사가 반복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공공의 적으로서 악전고투는 무림에서의 경험으로 충분했다.
게다가 21세기 각성자는 무림 고수와는 다른 방식의 능력자다. 무(武)에 대한 낭만도 없고.
유지훈의 생존법 또한 좀 더 정교하고, 치밀해져야 했다.
“어떤 게 더 필요하려나···.”
답을 찾으려는 찰나, 휴대폰 벨이 울렸다.
강은영이었다.
“어. 왜?”
[나예요.]
“알아. 용건이나 말해.”
[올~. 내 번호를 저장해뒀어요?]
“그런 거 안 해. 번호 아는 사람 넷밖에 없어. 여자는 둘이고.”
[쳇! 최금강 마스터님이랑 이야기 잘 끝냈어요.]
“무슨 이야기?”
[전폭적인 지원에 대해서요. 좋대요.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말해 보라세요.]
“뭐야. 너무 쉬우니까 재미없는데?”
[유지훈 씨 업적 말씀드리니까 바로 오케이 하시던데요?]
“무슨 업적? 검치호 썰어 죽인 거?”
[그럼 나 구박한 거겠어요?]
“그게 더 업적 같은데···. 그런데 영감님이 믿어?”
[숟가락 얹은 게 아닌가 반신반의하시는 것 같기도 했는데, 대체로 믿으시는 눈치였어요. 그러니까 필요한 거나 생각해두세요.]
“일단 하나 있어.”
[뭔데요?]
“길드를 설립할까 해.”
길드 설립이라는 말에 강은영이 흠칫했다. 비각성자인 유지훈은 규정상 길드 설립 자격이 안 되기 때문일 터였다.
[길드요? 유지훈 씨가요? 흐음···.]
“왜? 안돼? 그럼 무를까?”
[안 될 건 없는데, 쉬운 것도 아니라서요. 길드를 설립하려면 기본 조건이 레벨 4 이상 각성자여야 하는데, 유지훈 씨는···.]
“그래서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거야. 영감님 길드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훤하실 테니, 조언도 구하고 싶고.”
[알겠어요. 말씀드릴게요. 아. 혹시 조건 맞추겠다고 금강길드 헌터들 보내 달라는 건 아니죠? 그건 곤란할 거예요. 금강길드는 대한민국 3대 길드인데, 누가 가려고···.]
“보내준대도 안 받아. 나를 철통같이 믿고 따를 사람들이랑 같이할 거야. 이미 물망에 오른 인물도 있어.”
[그럴 바보가 누가 있다고···. 알았어요. 말씀 전해드릴게요.]
강은영이 통화를 종료하려 했다.
유지훈에겐 용건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용건이었다.
“그건 그렇고. 아까 변태 어쩌고 했던 양반 있잖아.”
[변태요? 아. 그 변태 자식이요. 그 자식은 왜요?]
“그 양반도 그쪽이지? 좀 높은 위치인 것 같은데 맞나?”
[그런 것 같던데. 왜요?]
“그 양반이랑도 자리 좀 만들어줘. 상의할 게 있어. 아주 중요한.”
[그 자식 연락처는 따로 없는데···. 아. 마스터님한테 말씀드리면 되겠구나. 그래요. 그렇게 할게요.]
무림과 확연히 다른 21세기 대한민국.
생존을 위해선 관계의 활용이 필수불가결했다. 무림에서처럼 공공의 적으로 몰려 고독한 투쟁을 이어갈 순 없었다.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온전히 자신의 사람만으로 꾸릴 길드의 설립. 그리고 활용할 인물들.
길드 마스터는 레벨 4 이상의 각성자여야 한다는 규정은 문제 될 게 없었다.
유지훈의 머릿속엔 이미 조건에 딱 맞는 인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
“꼴 좋다! 초인씩이나 돼서 초특급 몬스터 하나 처리 못 하고 이 지경이 된 거냐? 고작 레벨 7한테?”
병실에 누워있던 임정명이 씁쓸한 웃음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초인에게 이처럼 마구잡이 언사로 인사를 건네는 중년 사내를 누워서 맞이할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년 사내 역시 초인이었기에.
“어찌 알고 왔는가? 내 이러지 싶어서 쉬쉬하라 일렀거늘···.”
“소문 다 났다. 천하의 임정명이가 고양이 새끼한테 맞아서 옆구리에 빵구 났다고. 온 국민이 다 알아.”
“허허. 꼴이 말이 아니군. 자네는 평소에는 코빼기도 안 비치다가 내가 이리됐다고 하니 좋다고 달려온 건가?”
중년 사내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좋지. 좋고말고. 이런 일이 있으니 이렇게 네놈이랑 한 공간에서 얼굴 마주 볼 수 있는 거 아니겠냐.”
“하긴. 초인끼리 어울려 다니면 보는 시선이 영 불편하지. 우리가 무슨 작당을 할 것도 아닌데 말이야.”
임정명의 부상은 생각보다 깊었다.
보통 때 같으면 회복제를 투약하면 이내 상처가 아물었을 텐데, 좀처럼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검치호의 독액이 쉽게 해독되지 않았다.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고, 완치까지 석 달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각성 이후 가장 긴 시간 치료를 받게 된 상황이었다.
“어쩌다 그런 거냐? 방심했냐?”
“그렇다기보다···. 놈이 독을 뿜어냈네.”
“독? 검치호가?”
임정명이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회복제가 잘 듣지 않을 정도로 강한 독일세.”
“허어! 검치호가 대한민국에 나타난 것도 기이한 일인데, 거기에 독까지? 그럼 레벨 7을 넘어선 놈이겠구나? 재앙인 거야?”
“레벨 7은 넘은 듯했네. 재앙급까진 아니겠지만. 독을 염두에 뒀으면 제압할 수 있었을 테니.”
중년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요즘 들어 기이한 일투성이구나. 안 그래도 나도 황당한 장면을 목격했는데···.”
“자네도? 뭔가?”
“됐다. 환자 앞에서 이야기할 건 아니다. 나중에 막국수나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그나저나 네놈 나한테 목숨 빚진 건 아냐?”
중년 사내가 의기양양하게 묻자, 임정명이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무슨···?”
“이번에 네놈 구해준 게 녀석이 아끼는 제자란 말이다. 하하하.”
“아! 유지연 생도! 자네 아카데미에 특강 나간다고 했지? 맞네. 유지연 생도 덕분에 살았네.”
“지연이 그 녀석이 아카데미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했더니, 기어이 네놈 목숨까지 구했구나. 나한테 고맙다고 절해라. 하하하.”
임정명이 절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내 뭔가 생각난 듯 빙긋 웃었다.
“유지연 생도 덕분에 재미있는 친구를 만났네.”
“재미있는 친구? 어떤 놈이길래.”
“사실 최종적으로 검치호를 해치운 건 유지연 생도가 아닐세.”
임정명이 검치호 퇴치 과정을 자세히 들려줬다.
난데없이 뛰어들어 검치호의 등판에 매달렸다가, 벼락같이 뛰어내려 목을 그어버린 낯선 청년의 활약상이었다.
“오호! 그건 몰랐던 사실이로군.”
“그런데 진짜 재미있는 게 뭔 줄 아나? 그 친구가 각성자가 아니라는 사실일세. 비각성자가 초특급 몬스터의 목을 날려 버린 거야.”
“뭐라고? 비각성자가?”
중년 사내의 미간이 좁아졌다. 단지 놀라서만은 아닌 듯했다. 복잡한 의문을 담은 표정이었다.
“검치호의 가죽이면 레벨 7의 각성자도 쉽게 베지 못할 텐데, 어찌 비각성자가···.”
“그러니 재미있다는 것 아닌가. 그보다 더 재미있는 것도 있네.”
“또 뭐냐?”
“그 친구가 유지연 생도의 친오빠라는 사실일세.”
“뭐? 지연이의 친오빠? 그, 그 친구 이름이 뭐냐?”
놀란 나머지 중년 사내는 말까지 더듬었다.
임정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뭘 그리 놀라고 그러는가? 유지연 생도한테 오빠 있는 게 그리 놀랄 일인가?”
“됐고. 빨리 이름이나 말해 봐.”
“사람도 참···. 멀쩡하게 웃다가 다그치니 기억이 잘···. 유지까지는 같았는데···. 아. 유지훈. 유지훈이다.”
중년 사내의 표정이 굳어졌다가 이내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왜? 아는 이름인가?”
“아, 아니. 아는 녀석인가 했는데, 아니네. 몰라. 모르는 놈이야.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친구 맞구먼.”
“그러게 말일세. 유지연 생도랑 분위기도 흡사해. 엉뚱하고 능청스럽고. 각성자 아닌 거 빼면 둘이 똑같더군. 역시 남매는 용감했어.”
중년 사내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주억거렸다.
임정명이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독을 뿜는 검치호라니 걱정일세. 어쩌면 재앙급 몬스터 출현도 머지않은 듯하니···. 자네도 조심하게. 혹시 레벨 7 언저리 몬스터를 상대하더라도 우리가 아는 놈이 아닐 수 있네.”
“남 걱정 말고 네놈 몸이나 신경 써라. 네놈 누워있는 동안 나는 대한민국 몬스터 다 때려잡아서 부자 될 참이다.”
“하하하. 그래 돈 많이 벌게나. 그렇게 돈 많이 벌어서 뭐 하려고?”
“뭐하긴. 막국숫집이나 차려야지.”
두 초인의 환담은 한동안 이어졌다.
평소 최고 자리를 놓고 불꽃 튀는 경쟁 관계였지만,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로서 우애 또한 깊었다.
“몸조리 잘 해. 완치되면 막국수나 먹으러 가자고. 내가 살 테니까.”
“막국수면 용인 그 집이지? 좋지. 좋아. 꼭 같이 가세.”
병문안을 마치고 병실을 나서는 중년 사내의 표정이 묘했다.
“그 녀석이 지연이 오빠라고? 그럼 이야기가 달라지잖아.”
초인 마철진의 심사가 복잡해졌다.
“분명 위험한 놈인데, 지연이 녀석 오빠면 나쁜 놈은 아닐 테고···. 에잇! 우라질 신화 놈 때문에 골치만 아프네. 내 이 자식을 그냥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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