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만남 (3)
“죄송합니다. 저희는 규정을 준수해야 해서요. 한 번만 양해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유지연의 매서운 기세에도 지원팀 직원들은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규정을 들먹이니 유지연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오빠가 나설 차례였다. 유지훈에겐 꾹 눌러둔 카드가 있었다. 강은영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뭐해? 규정 어쩌고 하잖아. 가서 정리하지 않고.”
“저, 저요?”
잠자코 있던 강은영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쪽도 본부 직원이잖아. 규정 잘 알 거 아냐. 가서 들어보고 제대로 적용하나 들어보고 정리 좀 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면서요! 이럴 때만···.”
“우호적인 관계 만들어야 한다며. 이럴 때 열심히 하면 자연스럽게 우호적이 되는 거야.”
“하아! 내가 어쩌다 이 인간이랑 엮여서···. 하늘도 무심하시지.”
강은영이 털레털레 지원팀 직원들에게 다가갔다.
뭐라 뭐라 이야기를 나누더니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임정명 초인에게 향했다.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함께 유지훈 남매에게 걸어왔다.
임정명은 검치호의 독에 당한 부상이 제법 심한 듯했다. 걷는 동안 강은영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초인으로서 기도는 변함없었다. 유지훈이 돌아온 뒤 처음 마주한 강렬함이었다.
“인사가 늦었네. 임정명일세. 구해줘서 고맙네.”
임정명의 정중한 감사 인사에 유지훈은 가벼운 목례로 화답했다.
반면 사나운 기세로 정산에 임하던 유지연은.
“어머! 임정명 초인님. 뵙게 돼서 영광이에요! 초인양성아카데미 2기 생도 유지연이라고 합니다.”
언제 사나웠냐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넙죽 고개를 숙였다.
아카데미가 사람 거칠게 만들었다더니···.
“2기 생도 중에 줄곧 1등을 놓친 적이 없다지? 이야기 많이 들었네. 오늘 보니 명불허전이더군.”
“어머! 과찬이세요. 저도 초인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초인님께서 거대 반달곰 때려잡는 영상은 생도들 사이에서 전설로 통한답니다.”
사회생활은 미끌미끌 완전히 기름장어였다.
“허허허. 부끄럽구먼. 지난 1기 때엔 아카데미에서 초인이 나오지 않아 아쉬웠는데, 2기에선 나올 것 같아 든든하네.”
“어머! 감사해요. 초인님께서 특강 한 번 와주시면 큰 도움이 될 텐데요. 부탁드려요.”
“허허허. 대단할 것도 없는 중늙은이한테 특강은 무슨···. 보다시피 당장은 몸이 이래서 곤란하고, 회복되는 대로 갈 수 있도록 하겠네.”
임정명이 태광길드 헌터들을 향해 손짓했다.
대표자로 보이는 헌터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임정명이 지원팀 직원들에게 말했다.
“이번 검치호 퇴치는 전적으로 유지연 생도와···.”
임정명의 시선이 유지훈을 향했다. 누군지 묻는 눈치였다.
대답은 유지연의 몫이었다.
“제 친오빠예요. 유지훈이라고 합니다.”
“오! 역시 남매는 용감했어. 훌륭해.”
임정명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원팀 직원들에게 말을 이어갔다.
“유지훈 씨의 작품일세. 나는 오히려 도움을 받았지. 그러니 이로 인한 사례는 받지 않겠네. 태광길드 또한 내 뜻을 따라주길 바라네.”
“알겠습니다.”
태광길드 헌터도 고개를 숙였다.
다만 전적으로 수용하진 않았다.
“사례 부분은 받지 않더라도, 출동비는 받아야 합니다. 규정도 그렇고, 적지 않은 비용이 들기도 했고요.”
규정이 거론된 순간이 강은영이 나설 순간이었다.
“당연히 출동비 지급돼야죠. 규정에 따르면 국가안전본부 지원팀에 길드 출동비 예산이 책정돼 있어요. 그 예산에서 지급될 겁니다.”
“강은영 팀장님···.”
지원팀 직원이 난색을 표했다.
“길드 출동비는 관행적으로 현장에서 처리하는 것으로···.”
“규정대로 해야죠. 왜 그걸 몬스터 퇴치에 앞장서신 분들한테 떠넘깁니까? 더 챙겨드리진 못할망정.”
“그래도 관례라는 걸 무시할 순···.”
“그럼 책정된 예산은 어디에 쓰시려고요? 지원팀 유난히 소고기 회식 많이 하던데 그 돈인 모양이네요? 명절 떡값도 다른 부서들에 비해 두둑이 챙겨 가시던데···.”
“아닙니다. 저희 예산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깔끔히 정리됐다.
강은영은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무리한 거 아니야? 심하게 몰아붙이던데. 뒤탈 없겠어?”
“저 구역 미친년이 바로 나예요.”
“임정명 초인한테는 뭐라고 한 거야? 두말없이 양보하시네?”
“임정명 초인님은 원래 그런 분이세요. 재물 욕심 같은 건 없으시죠. 항상 함께 일한 분들한테 양보하시고요. 그래서 지원팀에서도 더 챙겨드리려고 한 걸 거예요.”
“그래? 좋은 분이네. 나라도 챙겨드려야겠다.”
“아서요. 자존심 상하실 수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겠네. 그나저나 오늘 몬스터 퇴치한 거 언론엔 누가 뿌려?”
초특급 몬스터 퇴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당연히 언론 매체를 통해 국민들에게 알려져야 했다.
보통은 언론사에서 취재 인력을 보내지만, 초특급 몬스터는 위험해서 국가안전본부에서 현장을 관리하면서 보도자료도 도맡았다.
“부끄럽지만 저예요. 잡다한 거 다 접니다.”
“잘됐다. 지연이가 퇴치한 걸로 자료 처리해줘.”
“왜요? 유지훈 씨가 썰었잖아요.”
“주목받고 싶지 않아. 당분간은 조용히 하고 싶은 일만 할래.”
“목격자들이 있는데, 안 알려지겠어요?”
“알려지면 사람들이 믿을까? 비각성자가 초특급 몬스터를 해치웠다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으니까 공식적으로는 지연이 작품으로 해줘.”
그러는 동안 정산 절차가 마무리됐다.
측정 결과 혈석과 부산물의 가치는 80억 원에 달했다. 거기에 퇴치 사례금까지 총 96억 원이 책정됐다. 세금과 수수료 빼고 각각 37억 원이 유지훈과 유지연의 통장에 입금됐다.
“와~. 이래서 네가 그 난리를 떤 거구나.”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챙겨야 해. 너처럼 호구로 살면 항상 뒤통수나 맞고 사는 거야.”
“나 이제 호구 아닌데?”
“두고 보겠어.”
헤어질 시간이었다.
유지연은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했다.
두 달 뒤 학기를 마친 다음에야 집으로 올 수 있다고 했다.
유지훈이 집 주소를 건넸다.
“새로 장만해서 잘 꾸며놨다. 와보면 놀랄 거야.”
“집? 나 집 있는데? 100평짜리 2층집. 지금은 지하에 트레이닝룸이랑 게임룸 공사 중이야. 한 달쯤 지나면 끝나니까. 너도 거기 들어가서 사는 걸로 해. 주소랑 열쇠 보내줄게.”
유지연이 떠났다.
유지훈의 도끼눈이 강은영을 향했다.
굳이 말하지 않았다.
‘말했어야지. 이 바보야.’
눈빛이 모든 걸 말하고 있었다.
강은영 또한 말없이 응시했다.
‘말하겠다는 걸 못하게 한 건 바로 너야.’
유지훈은 혼자 돌아가게 되리라 생각했다.
국가안전본부로 복귀해야 하는 강은영에겐 같은 방향의 지원팀 직원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강은영은 줄레줄레 유지훈을 쫓아왔다.
“같은 방향 저기 있잖아. 왜 날 따라와?”
“불편해요. 나 때문에 소고기 회식 백 번은 못하게 됐을 텐데.”
“이번에 나는 방향이 다른데?”
“그러지 말고 좀 태워줘요.”
“싫어. 피곤해. 집에 갈래.”
“그럼 나도 유지훈 씨 집에 갈래요.”
“그쪽이 우리 집에 왜 와?”
“그러니까 본부까지만 태워줘요.”
“완전 찰거머리네. 운전대나 잡아.”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강은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지훈 씨 각성자 측정 검사 다시 받아볼 생각 없어요?”
“비각성자라 불편한 것도 없는데 뭐하러.”
“각성자면 몬스터 사냥에 훨씬 유리해요. 유지훈 씨 실력이면 고레벨 던전도 공략할 수 있잖아요.”
“그건 좀 끌리네.”
고레벨 던전이라는 말에 유지훈이 혹하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나한테서 마나는 측정되지 않을 거야.”
“차원 이동 때문에 그런 건가요?”
“귀환에 관한 이야기는 아직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일단 우호적인 관계를 위한 전폭적인 지원부터.”
“하아! 결례를 범하는 인간이랑 통화 좀 해봐야겠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있어요. 변태 같은 자식.”
강은영이 부르르 몸서리쳤다.
전날 통화했던 순간이 떠올라서였다.
유지훈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유지훈 씨한테 한 말 아니에요. 변태 같은 자식 진짜 따로 있어요.”
“그게 아니라. 좀 전에 상대한 몬스터 때문에.”
“검치호요? 검치호가 왜요?”
강은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독이 있었잖아. 검치호가 독을 뿜는다는 말 들어본 적 있어?”
“없긴 한데···.”
“얼마 전에 던전에서 황소개구리를 만났는데, 그놈들도 독을 뿜어대더군. 보스가 독두꺼버길래 영향을 받은 건가 했는데···.”
“진화한 거 아닐까요? 인류의 사냥으로부터 생존하기 위해서요.”
“진화의 과정에 없던 독이 생기는 경우는 없어. 몸집이나 생김새의 변화를 동반할 뿐이지.”
유지훈이 뭔가 생각하는 듯싶더니 눈매를 좁혔다.
“혹시···.”
“혹시 뭐요?”
“쯧. 아니다. 그건 내가 너무 갔다.”
“뭔데요? 이야기하다 마는 게 어디 있어요. 사람 궁금하게.”
“피곤하니까 별생각이 다 나네. 난 잘게. 본부 도착하면 깨워.”
유지훈은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강은영은 본부에 도착할 때까지 유지훈이 하다 만 이야기가 궁금해 몸서리쳐야 했다.
***
“도대체 다 어디로 사라져버린 거야? 하늘로 솟았어? 아니면 땅으로 꺼진 거야?”
신화길드 마스터 이자웅이 집기를 집어 던지며 분노를 쏟아냈다.
유지훈을 추적하던 부속실 요원들의 연락이 끊겼다. 유지훈이 철두파와 접선하고 있다는 보고가 마지막이었다.
“철두파 놈들한테 당한 거야? 아이언 헤드가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부속실 애들이 철두파 양아치들한테 당할 리가 없잖아.”
“아직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전략이사 장중호가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이자웅은 답답한 듯 물 한 잔을 들이켰다.
“유지훈 그 새끼가 철두파랑 손잡은 게 맞긴 맞아? 철두파 우리랑 안 좋을 거 없다지 않았던가?”
“그렇긴 한데, 김연학 본부장이랑은 좋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장 이사님. 아이언 헤드랑 친분 있잖아. 전화 한 번 넣어봐.”
“아이언 헤드도 통화가 안 됩니다. 오른팔인 강 전무랑 연락이 닿았는데, 그 또한 연락이 안 되는 상태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지. 신화는 왜 건드렸냐고.”
“물어보긴 했는데, 잘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아이언 헤드는 배신한 조직원 처단하러 나간 뒤 연락 두절이라고···.”
이자웅이 괴성과 함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으아아! 배신한 조직원은 또 뭐야! 유지훈 그 새끼랑만 엮이면 온통 뒤죽박죽이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정말 유지훈 관련해선 불가해한 일투성이였다.
어글리 썬더부터 김연학과 타격대 정예를 거쳐 부속실 요원들까지.
유지훈을 처리하라 내보낸 쟁쟁한 실력자들이 모두 실패했다. 심지어 자취를 감추기까지 했다.
누군가 청소라도 한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지훈이라는 자를 과소평가한 것 같습니다.”
“그래 봤자 비각성자야. 평가할 것도 없어.”
“그래도 결과가 심상치 않습니다.”
“뒤에 누가 있겠지. 빌런 놈들일 거란 판단은 내 실수라고 인정하지. 그래도 뒤에 있는 놈들만 찾아내서 끝장내면 문제 될 거 없어.”
이자웅이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이자걸 그 자식도 아나? 부속실 요원들 사라진 거.”
“부속실에서 미래전략실로 공유했을 겁니다. 이자걸 대표님께도···.”
“아이 씨. 개짜증이네. 그 자식 실실 쪼갤 거 생각하니···. 아 참. 근데 그 자식 진행하는 건 잘 된대? 그룹 핵심 사업이니 뭐니.”
장중호의 표정에 난처함이 스쳤다.
“바이오를 말씀하시는 거면 저도 잘 모릅니다. 이자걸 대표님이 핵심 측근들과 은밀히 진행하는 사안이라···.”
“각성이 권력인 시대에 각성도 못 한 주제에. 골방에 처박혀서 약이나 만지작거리는 놈이 무슨 핵심 사업이라고···. 아버지도 참 약쟁이 놈한테 무슨 돈을 그리 쏟아부으시는지···.”
이자웅이 입맛을 다시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핵심 사업은 각성에 관한 거여야지. 약쟁이한테 맡길 게 아니라 길드에서 주도해야 하잖아? 안 그래? 장 이사님.”
장중호가 멋쩍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는 이자걸은 무서운 사람이었다. 비각성자라고 경시하는 이자웅의 경솔함이 걱정스러웠다.
“아. 그 자식 비실거리는 거 보기 싫어서라도 유지훈 이 새끼를 끝장내야 하는데···.”
입맛을 다시는 이자웅의 시선이 TV 화면에 멈췄다.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유지연이 초특급 몬스터 검치호를 퇴치했다는 내용이었다.
“오! 예쁜데! 몸매도 죽이고. 딱 내 스타일이야. 초인양성아카데미 생도 중에 저런 애가 있었나?”
입을 떡 벌리고 보던 이자웅이 장중호에게 손짓했다.
“장 이사님. 쟤 초인 되는 거 방해할 방법 좀 찾아봐.”
“그건 왜···?”
“초인이 되면 길드 소속이 될 수 없잖아. 내 밑으로 들어오게 해야 하는데. 완전 내 스타일이거든.”
“초인 선정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성공시켜요. 쟤는 무조건 내 밑에 둬야겠으니.”
이쯤 되면 죽기로 작정한 이자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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