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는 각성을 압살한다-26화 (26/150)

예상치 못한 만남 (2)

짜릿한 등장이었다.

초인 임정명이 쓰러진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검치호가 태광길드 헌터들을 튕겨 내고, 임정명의 목숨마저 거두려는 찰나였다.

현장에 있는 인류의 머릿속을 지배한 생각은 절망이었다. 초인마저 쓰러뜨린 몬스터의 다음 행보는···.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때 등장한 은빛 여전사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기 충분했다.

은빛 광휘를 휘몰아치며 검치호를 밀어냈다. 찬란한 검광은 놈의 옆구리에 깊은 상처를 남기기까지 했다.

주저앉은 임정명의 앞을 막아선 채, 포효하는 검치호를 응시하는 여전사의 모습은 오연했다. 또한 매혹적이었다.

“누구지?”

유지훈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강은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겠어요. 레벨 7은 거뜬히 넘을 기세인데, 저런 헌터가 있다는 말은 못 들어봤어요.”

몸에 짝 달라붙는 전투복에 눈과 코만 드러낸 투구 그리고 투구 아래로 흩날리는 머릿결만이 여전사를 묘사할 수 있는 외양이었다.

강은영은 리스트에 있는 레벨 7 각성자들을 모조리 떠올렸지만, 일치하는 인물을 찾을 수 없었다.

“크허엉!”

여전사를 노려보던 검치호가 포효와 함께 땅을 박찼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여전사를 덮쳐갔다.

동시에 여전사가 훌쩍 뛰어올랐다. 날렵하게 검치호의 돌진을 피해낸 뒤 검을 연달아 아래로 내리 찔렀다.

“캬아악!”

찔리긴 했지만, 상처가 그리 깊진 않은 듯했다. 검치호는 한층 거세게 요동쳤다. 맹렬하게 앞발을 휘저으며 여전사에게 달려들었다.

여전사는 날렵한 몸놀림으로 피하면서 검을 내질렀다. 기세가 사뭇 예리했다. 육중한 검치호의 공세와 균형을 이뤘다.

“밀리겠어요. 검치호 저놈 레벨 7이 아니에요. 어쩌면 국내에 처음으로 재앙급이 출현한 것일 수도 있겠어요.”

싸움을 보는 눈은 무림 구력 50년의 유지훈이 한 수 위였다. 유지훈은 강은영의 우려보다 한층 근심스러운 상황으로 보고 있었다.

여전사가 현란하게 국면을 주도하는 듯했지만, 기본적인 파워에 있어서는 검치호가 압도적인 우위였다.

무림으로 비교하자면 우직하게 장법만 사용하는 화경의 고수와 화려한 초식을 앞세운 초절정 검객의 대결이라 할 수 있었다.

“뭔가 전기가 필요할 것 같은데, 저 처자는 특성이 검술인가? 레벨 7의 특성이라기엔 대단할 게 없어 보이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전사의 검로가 바뀌었다. 소용돌이치듯 회전하더니 허공을 향해 뻗었다. 동시에 예리한 은빛 기운이 검치호를 향해 날아갔다.

“슈퍼 스팅어!”

“응?”

“특성이요. 슈퍼 스팅어예요. 마나를 응축해 침의 형태로 발출하는 능력이에요. 굵기나 순도가 레벨 7에서도 상위권이겠어요.”

여전사의 슈퍼 스팅어가 연달아 검치호를 향했다.

검치호는 앞발을 휘저으며 털어내려 했다. 대부분 튕겨 냈지만, 두 개의 슈퍼 스팅어가 발꿈치와 발목 부분을 꿰뚫었다.

“크아악!”

몸부림치던 검치호가 목을 들썩이더니 희멀건 액체를 뿜어냈다. 임정명을 쓰러뜨린 독액이었다. 연달아 세 차례 쏘아냈다.

여전사는 예상했다는 듯 가벼운 몸놀림으로 피했다. 사뿐사뿐 뛰어올라 독액의 사정권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검치호가 노린 건 따로 있었다. 놈은 여전사의 움직임을 읽고 있었다. 여전사가 피해갈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앞발을 휘둘렀다. 바위라도 쪼갤 듯 묵직한 일격이었다.

“아!”

여전사가 황급히 몸을 굴러 공격권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둔부를 스치는 가격까지 피하진 못했다. 스친 듯했지만, 충격은 가볍지 않았다.

“아앗!”

외마디 비명과 함께 멀찍이 내동댕이쳐졌다.

검치호는 어슬렁어슬렁 여유롭게 걸어 다녔다. 시선은 여전사에게 고정한 채였다. 마지막 공격을 앞둔 준비 동작인 듯했다.

검치호가 멈춰섰다. 검으로 지탱한 채 몸을 일으키는 여전사가 정면으로 보이는 위치였다. 뒷다리를 구부렸다. 땅을 박차고 먹잇감을 향해 달려나가려는 자세였다.

때마침 검치호의 등판은 유지훈을 향하고 있었다.

“유혹하는 건가?”

유지훈은 검치호를 접한 이후 줄곧 생각했다. 소멸기와 몬스터의 역학관계에 대해서였다.

분명 소멸기는 몬스터에게도 통했다. 지난번 던전에서 만난 거대 독두꺼비에게서 확인한 사실이었다.

문제는 어디까지 소멸시키는지였다. 독두꺼비에게선 독이 사라졌다. 다른 능력도 소멸했을 수 있겠지만, 확인하지 않았다. 바로 목을 날려버렸기에 확인의 여지가 없었다.

검치호의 경우엔 어떨까? 물론 독은 사라질 테고.

능력도 어느 정도 사라지긴 하겠지만, 놈은 자체로 무시무시했다. 어마어마한 체구에서 나오는 용력. 타고난 신체적 힘이 남아 있다면 쉽게 상대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어쩌랴. 눈앞에서 등판을 들이대고 유혹하는데.

냅다 올라탔다.

“위험해요!”

강은영의 외침을 뒤로 한 채 납작 엎드려 양손을 검치호의 등짝에 밀착했다.

“크헝?”

여전사를 덮치려던 검치호가 의아한 듯 괴성을 토했다.

난데없이 웬 녀석이 등판에 납작 달라붙어 있으니 이상할 만도 했다. 몸을 흔들어대며 유지훈을 털어내려 했다.

유지훈은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장심을 타고 오르는 간질간질한 기분을 만끽했다.

1초, 2초··· 6초. 간지러움이 끝났다.

소멸의 완성. 레벨 7 각성자보다 우위의 몬스터였다.

무림으로 치면 화경의 벽 앞에 선 초절정 고수. 구대 문파 장문인과 비슷한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재앙급까진 아니겠군. 그저 재앙에 준하는 정도.”

더 이상 볼썽사납게 달라붙어 있을 이유는 없었다.

검치호의 몸부림에 맞춰 못 이긴 척 튕겨 내려왔다. 놈의 몸놀림, 정확하게는 기세의 흐름을 주시했다.

과연 소멸은 어느 정도까지였을까?

“크허엉! 크허엉!”

포효가 왠지 구슬펐다.

기세도 눈에 띄게 약해지고 있었다.

놈도 인지한 것이었다. 위력을 지탱하던 원천이 사라진 사실을.

타고난 힘이 그대로이더라도, 기세를 잃으면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덩치만 산만 한 하위 레벨 몬스터로 격하됐다고 할까.

그래도 검치호는 검치호, 타고난 힘을 무시해선 곤란했다.

특히 막다른 골목에 몰린 놈의 경우엔. 쥐새끼도 고양이를 무는 판에, 하물며 검치호인데.

단검을 꺼냈다. 날렵하게 검치호의 복부 쪽으로 파고들었다. 필사적으로 휘두르는 앞발을 단검으로 그으며 비집고 들어갔다.

드디어 뱃가죽이 눈앞이었다.

서걱! 서걱! 서걱! 닥치는 대로 썰기 시작했다. 덩치가 큰 놈이라 썰 곳도 많았다. 다만 썰어도 썰어도 끝이 없었다.

특이할 점은 뱃가죽이 유달리 연했다. 그리 힘들이지 않고도 쉽게 썰렸다. 최하급 몬스터인 거대 황소개구리를 썰 때보다 쉬었다.

‘아하! 소멸기가 작동하면 피부도 일반 산짐승 수준이 되는구나.’

향후 몬스터 사냥을 대비해 좋은 깨우침이었다.

손놀림이 빨라졌다. 뱃가죽을 완전히 뚫고 내장 일부까지 썰었다. 괴성과 함께 몸부림치던 검치호의 움직임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슬픈 눈으로 유지훈을 내려다봤다.

“그렇게 보지 마. 미안하잖아. 그러게 너네 동네에서 잘 살지. 뭐하러 사람 사는 세상에 와서···.”

펄쩍 뛰어올랐다.

최후의 일격. 길게 목을 썰었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검치호의 피를 전신에 뒤집어쓴 채 유지훈이 땅에 내려섰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검치호가 쓰러져 바닥에 널브러졌다.

“우와아!”

“초특급 몬스터를 해치웠다!”

환호성이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욕설도 들려왔다.

“너 뭐 하는 새끼야! 기껏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이나 얹고!”

은빛 여전사였다.

분기탱천한 모습으로 유지훈에게 다가왔다.

뉘 집 딸래미인지 입 한 번 더럽게 거치네.

“뭐?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기껏 살려줬더니 숟가락이 어째? 물에 빠진 년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거냐?”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여전사가 투구를 벗어 집어던지고는 유지훈에게 달려들었다.

유지훈도 자세를 취했다. 먼저 도발해 오면 참지 않는 유지훈이었다. 여차하면 썰어버릴 기세였다.

그런데.

“어?”

“어!”

서로를 확인한 두 사람의 눈빛이 괴이했다.

“너?”

“너!”

“지연이?”

“오빠?”

유지연이었다. 그동안 그토록 엇갈렸던.

“네가 왜 이런 모습으로···?”

“너 죽은 거 아니었어?”

“어째 내가 죽길 바란 것 같다?”

“그런 건 아니지만···.”

5년, 아니 50년 만에 남매 상봉의 순간이었다.

일단 얼싸안았다. 할 이야기가 많았다.

“살아있었으면서 연락은 왜 안 했냐?”

“그게 사정이···. 설명하자면 복잡하다. 그런데 너는 왜?”

그때 강은영이 남매 해후 현장으로 찾아들었다.

“유지연 씨였군요. 초인양성아카데미 원생이 아닐까 짐작은 했는데, 유지연 씨인 줄은 몰랐네요.”

“초인양성아카데미?”

눈이 휘둥그레진 유지훈을 향해 유지연이 멋쩍게 웃었다.

“그렇게 됐어. 오빠 죽은, 아니 사라진 다음에 갑작스럽게 각성을 했는데, 수준이 좀 높더라고.”

“그런데 왜 남해에 살아?”

“초인양성아카데미가 남해에 있는데. 왜?”

“전화는 왜 안 받은 거야? 아까 전화했는데.”

“실습 중엔 휴대폰을 꺼놓거든. 여기도 실습 나왔다가 우연찮게 알게 돼서 온 거야.”

일단 급하게 궁금한 점들은 해결했다.

강은영에게 불호령을 내릴 차례였다.

“알고 있었으면 말했어야 할 거 아냐!”

“아무 말도 하지 말라면서요!”

“그래도 그렇지. 이건 경우가 다르잖아! 당신 정말 바보야?”

“아니. 알려주겠다는 걸 굳이 알고 싶지 않다고 해놓고···.”

“됐어! 듣기 싫어. 아무 말도 하지 마.”

다시 남매 상봉의 현장이었다.

달라진 게 많은 만큼 궁금한 것도 많았다.

“너도 각성했냐?”

“아니. 검사는 받아봤는데, 비각성자래.”

“그런데 어떻게 저런 놈을 죽여? 초특급 몬스터라던데. 레벨 7.”

“그게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그때 강은영이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유지훈 씨는 비각성자이긴 해도···.”

“조용히 해! 아무 말도 하지 말랬지!”

“무슨 말을 못 하게 해···.”

강은영에겐 도끼눈이었지만, 유지연을 바라보는 유지훈의 눈은 더없이 따뜻했다.

“너 입이 많이 거칠어졌다. 욕도 상당히 찰지고.”

“거칠게 살아서 그래. 아카데미가 사람을 거칠게 만들거든.”

“그건 그렇고 옷이 이게 뭐냐? 은갈치냐?”

“은갈치 왜 안 나오나 했다. 누군 입고 싶었겠냐? 나도 검정색이나 남색 입고 싶었는데, 사다리를 잘못 타서···.”

“보니까 제법 하는 것 같던데, 아카데미에서는 어때? 우등생이야?”

연이은 구박에도 강은영은 남매 사이에 개입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눈치를 살피더니 기회를 잡은 듯 끼어들었다.

“당연히 상위권일 거예요. 모르긴 해도 10등 안에는···.”

“조용히 하라는 말 못 들었어요? 알지도 못하면서. 아카데미 원생이 전부 해서 열 명인데, 10등이면 꼴찌라는 거예요? 나 1등을 놓쳐본 적 없어요. 압도적인 1등이라고요!”

“아, 네···.”

유지연에게까지 혼쭐이 난 강은영은 입을 완전히 다물어야 했다.

하지만 남매 사이에 끼어드는 이는 또 있었다.

“저기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단정한 정장 차림의 사내 둘이 머뭇머뭇 말을 걸었다.

“당신들은 또 뭐예요!”

“저희는 국가안전본부 몬스터관리국 지원팀 직원인데요.”

“그래서요?”

“방금 퇴치하신 몬스터 관련해서 정산 절차가 필요하거든요.”

몬스터 퇴치는 사냥이기도 했다.

처치한 몬스터의 혈석과 부산물은 퇴치 당사자에게 귀속된다. 거기에 퇴치 사례금도 지급된다. 적지 않은 금전이 걸린 문제인 셈이었다.

“너 이것 때문에 밥상에 숟가락 타령 한 거였냐?”

“한두 푼이어야 말이지. 이 바닥은 땡길 수 있을 확 땡겨둬야 해.”

유지연의 시선이 사내들을 향했다.

정산을 앞둔 그녀의 눈매는 검치호를 사냥할 때보다 사나웠다.

“정산하면 되잖아요. 뭐 문제 있어요?”

“그게···. 두 분 말씀 나누시는 걸 보니 정리가 필요할 듯해서···.”

마무리는 유지훈이 했지만, 유지연의 기여도 작지 않았다.

언뜻 보기엔 유지연이 슈퍼 스팅어로 다 했고, 유지훈은 끝내기 칼질만 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소멸기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유지연의 형형한 시선이 유지훈을 향했다.

“반반.”

“허! 니 마음대로 하세요. 아니, 아예 네가 처치한 걸로 해라.”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원팀 직원들은 한층 난감한 기색이었다.

“그게···. 저희 본부에서 요청한 분은 임정명 초인님이랑 태광길드여서···. 그쪽에도 배분이 필요한···.”

“뭐예요! 그 양반들은 우리가 구해준 거잖아! 사례비를 받아도 부족할 판에 배분? 이거야말로 물에 빠진 놈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네!”

유지연은 금전 앞에서 더욱 강렬해지는 여전사였다.

유지훈은 가슴이 웅장해졌다. 한편으로 여리기만 했던 여동생이 어쩌다 저리됐는지 가슴 한 켠이 저며 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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