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는 각성을 압살한다-23화 (23/150)

대환장 활극 (1)

철두파 조직원들이 엄덕대의 뒤를 밟은 지 사흘이 지났다.

철두파 보스 아이언 헤드 주필호는 엄덕대의 배후에 대형 길드가 있을 것으로 굳게 믿었다.

대형 길드가 철두파를 향한 경고 차원에서 동생 스톤 헤드 주필운을 죽였다는 확신이었다. 엄덕대는 철두파를 배신하고 길드에 주필운을 팔아넘긴 악적이라 여겼다.

“엄덕대라는 새끼 뒤를 철저하게 밟아. 뒤에 어떤 길드 놈들이 있는지 밝혀내란 말이야.”

당연히 추적은 배후를 좇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그런데 엄덕대는 대형 길드 근처로도 가지 않았다. 친구로 보이는 또래 청년과 서른 즈음의 사내랑만 어울릴 뿐이었다.

“엄덕대란 놈 보기와 달리 치밀한 놈이었군. 필운이 밑에 있기 아까운 놈일 수도 있었겠어. 그래서 배신한 건가?”

의도치 않게 엄덕대의 가치가 올라갔다.

성미 급한 주필호는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냥 어울리는 놈들이라도 끌고 와. 잡아 족치면 뭐라도 나오겠지.”

“놈들이 던전에 들어간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그래? 잘됐군. 드디어 꼬리를 잡았어.”

“그런데 그게 레벨 1 던전이라···. 대형 길드와는 어울리지 않는···.”

“필요 없어. 일단 던전에 들어간 놈들 싸그리 잡아 와서 족쳐!”

철두파에 체포조가 꾸려졌다.

주필호는 굳이 나서지 않았다. 레벨 1 던전을 공략하는 조무래기들을 잡아 오는 데 레벨 7의 거물이 나서긴 모양이 빠졌다.

***

던전 공략을 마치고 나온 유지훈은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레벨 1 몬스터만 사냥하고 나와서였다. 그나마 스무 마리 남짓에 불과했다. 수입이 영 형편없었다.

“다 나누고 나니까 1인당 200만 원도 안 되잖아. 이래 가지고 인건비는 나오겠어?”

“원래 이렇습니다. 레벨 1 던전엔 레벨 1 몬스터가 정상이죠.”

“뭔가 대책이 필요해. 자금도 두둑이 마련했겠다, 서둘러 구상한 사업을 현실화해야겠어.”

두둑한 자금은 박형식이 사채업자에게 뜯긴 돈을 종잣돈 삼아 마련한 돈을 의미했다. 기적의 셈법으로 대폭 불린 유지훈의 작품.

박형식은 3억 원만 챙겼고, 나머지는 사업 자금으로 투자하기로 했다. 15억 원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사업이라는 게 뭔데요?”

“길드를 하나 세워보려고. 번듯하게.”

“길드요?”

“응. 내가 전에 길드에 근무했었다고 했잖아. 사냥 빼고 잡다한 일은 전부 내가 했거든. 길드 운영은 눈 감고도 할 수 있어.”

박형식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형님. 길드 설립하려면 적어도 레벨 4 이상 각성자가 하나는 있어야 하거든요. 그 외에도 각성자가 최소 열 명은 필요하고요.”

“그걸 내가 모르겠냐? 눈 감고도 길드 운영은 훤하다니까.”

“그럼 어쩌시려고요.”

“일단 간판부터 세워두는 거지. 그러고 나서 각성자는 하나하나 채워 넣어서 구색 맞추는 것으로. 일단 한 명은 확보.”

“누구요? 설마 저요?”

“그럼 안 하려고 했어?”

“저는 대학원 복학해서 파트타임으로밖에 안 되는데···.”

“주경야독해야지. 형식이 네가 할 일이 많다. 주변에 노는 각성자 있으면 잡아 오기도 해야 하고.”

삼인조의 길드 설립 계획이 무르익어가는 가운데, 이들 주위로 서서히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어이~. 엄덕대! 배신하고 나가서 몬스터 잡으러 다니니까 재밌냐?”

철두파 조직원들이었다.

유지훈 일행이 던전에서 나오길 기다렸다가 덮친 상황이었다.

엄덕대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가 이내 평안을 되찾았다. 유지훈과 함께 있을 땐 무서울 게 없었다.

“쟤들은 뭐냐?”

유지훈의 질문에 엄덕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철두파 양아치들입니다. 형님.”

“철두파면···. 아~. 쇠대가리인지 하는 빌런이 데리고 있다는 깍두기들이구나. 쇠대가리는 누구야?”

“회장님은 안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오십에 달하는 철두파 조직원들이 길목을 완전히 막아섰다.

“형님? 덕대 이 새끼 다른 조직에 들어간 거였냐?”

“새끼들 말 한 번 지랄같이 하네. 주둥이를 좍좍 찢어줄까?”

저들 딴엔 위협적인 말로 험악한 분위기를 조장하려 했지만, 통할 유지훈이 아니었다.

“쟤들 뭐라는 거냐?”

“에휴. 저것들이 똥오줌 못 가리네. 그래도 저랑 한솥밥 먹었던 놈들인데 저를 봐서 한 번만 봐주시죠.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엄덕대가 철두파 무리를 향해 소리쳤다.

“야. 지금 형님이랑 중요한 사업 얘기 중이다. 조용히 가라. 어디 한 군데 부러져서 질질 짜지 말고.”

옛정에 못 이긴 진심 어린 조언이었지만, 돌아오는 건 조롱이었다.

“덕대 너 이 새끼가 드디어 미쳤구나.”

“레벨 1 던전이나 전전하는 새끼들이 어디서 허세 질이야!”

“얼마나 처맞아야 정신 차릴래? 병신 새끼들아.”

이쯤 되면 참을 수 없었다.

유지훈이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요즘 들어 한껏 재미 들린 단검이었다. 오늘은 수준 이하의 몬스터들만 만난 탓에 꺼내보지도 못한 단검이기도 했다.

“오늘 하루 공쳐서 기분도 더러웠는데 잘 됐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발목 하나씩만 썰어야겠다.”

몸을 날리려는데 뒤쪽이 소란스러웠다.

돌아보니 전투복을 갖춰 입은 사내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스물 남짓이었다. 길드 소속 헌터들인 듯했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오십에 달하는 철두파 양아치들을 압도하는 기세였다.

“철두파 놈들이었구나.”

“네놈들이 감히 신화길드를 건드려!”

“본부장님을 해치고도 무사할 줄 알았냐?”

신화길드 부속실 요원들이었다. 안광이 사뭇 형형했다.

신화그룹의 숨은 칼 노릇을 하는 이들이 대거 몰려든 것이었다. 신화길드 타격본부장 김연학의 복수를 위해 단단히 벼르던 차였다.

이들은 그동안 김연학을 해친 흉수를 찾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한편으로 유지훈의 뒤도 밟았다.

철두파와 유지훈이 함께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비실비실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는 듯한 장면에서 한패임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길드 마스터 이자웅으로부터 빌런 조직과 유지훈 모두 격살하라는 임무를 받은 상태였다. 일석이조의 상황. 이렇게 공교로울 수 없었다.

“저 새끼들은 또 뭐야?”

“신화길드 놈들이잖아!”

철두파 진영도 술렁였다.

이들의 목적은 보스의 동생 스톤 헤드 주필운을 죽인 자들에 대한 복수였다. 당연히 대형 길드의 소행이라 짐작했다.

그간 엄덕대의 뒤를 캤지만, 대형 길드와 접점이 없어 이상하던 참이었다. 마침내 흉수가 실체를 드러낸 순간이었다.

“신화길드 네놈들이 철두파를 건드려?”

“그래. 어디 오늘 한 번 다 죽어봐라!”

철두파 조직원들이 일제히 달려나갔다.

개개인의 전투력에선 열세였지만, 두 배가 넘는 우월한 쪽수로 밀어붙이려는 양상이었다.

“이 자리에서 철두파를 지워버려라!”

신화길드 요원들도 몸을 날렸다. 혈투의 막이 올랐다.

유지훈은 슬그머니 옆으로 비켜섰다. 엄덕대와 박형식도 유지훈의 옆에 붙어섰다. 난데없는 싸움에 휘말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쟤들 갑자기 왜 저러냐?”

“글쎄요. 철두파랑 신화길드가 원한이 깊은 모양인데요.”

“그러게요.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저 정도는 아닐 텐데···.”

피가 튀고, 살이 튀었다.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철두파 양아치들이었다.

확실히 신화길드 요원들이 월등히 강했다. 서너 명 쓰러지는 동안 스물에 가까운 양아치들을 때려눕혔다.

“어휴 흉측해라. 형님. 우린 그만 가실까요?”

“좀 더 보다 가자. 재미있잖아. 싸움 구경.”

50년 무림에 머무는 동안 싸움 구경은 거의 못 했다.

무림 공적으로 몰린 유지훈은 항상 싸우는 쪽이었다. 주위에서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구경하는 자들을 부러워하곤 했다.

이토록 생동감 넘치는 난투극 구경을 마다할 유지훈이 아니었다.

“이거 딱 팝콘각인데. 혹시 팝콘 같은 건 안 가지고 다니지?”

엄덕대를 쳐다봤다. 기대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엄덕대는 기대조차 필요치 않은 녀석이었다.

“물론 있습니다.”

엄덕대가 클러치백에서 팝콘 한 봉지를 꺼내서 유지훈에게 바쳤다.

“허! 팝콘은 왜 가지고 다니냐?”

“형님을 잘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클러치백에 시선이 갔다. 명품 G사 클러치백이었다

어둠의 자식 같다며 일수 가방 좀 내다 버리라고 했더니, 신속하게 장만한 모양이었다.

“비싼 클러치백 같은데, 팝콘 같은 거 넣어 다니지 마라. 불룩해져서 모양 상할라.”

“괜찮습니다. 불룩해야 있어 보이고 좋습니다.”

한편 인근 건물 옥상에서 난투극을 내려다보는 사내가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에 평범한 외모, 후줄근한 옷차림이었지만, 오연한 눈빛에서 뿜어내는 기세가 어마어마한 사내였다.

레벨 8의 각성자, 초인 마철진. 신화그룹 차남 이자걸과 만남 이후 유지훈을 미행하며 관찰하던 중이었다.

며칠 미행했지만, 별다른 특이점은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어딘지 조금 덜떨어진 놈들이랑 어울려 다니고, 레벨 1 던전이나 전전하는구먼. 뭐가 그리 대단한 녀석이라는 거지?”

매사에 심드렁해 보이는 태도도 못마땅했다.

비각성자라도 뼈를 깎는 단련으로 저레벨 각성자를 능가하는 전투력을 갖게 된 이들도 있었다.

유지훈에게선 그런 분위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끔 날카롭게 벼린 기세를 드러내는 듯싶다가 이내 시들해지곤 했다.

“귀한 시간만 낭비했군. 신화 놈한테 단단히 따져야겠어. 막국수는 잘 먹었지만, 그냥 넘어갈 사안은 아니지.”

딱 오늘까지만 관찰하기로 했다. 그나마 레벨 1 던전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기대는 접은 상태였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했다. 철두파 조직원들이 몰려들면서 유지훈의 기세가 바뀌었다. 단검을 꺼내는 순간엔 마철진마저도 흠칫했다.

“오호! 드디어 실력을 확인할 기회가 온 건가?”

심지어 신화길드 부속실 요원들까지 몰려들었다.

듣기로 김연학의 복수를 위해 신화길드의 정예들이 투입됐다고 했다. 필시 유지훈을 처치하려는 자들일 터였다.

“옳거니! 철두파 놈들에, 신화길드 녀석들까지. 유지훈이라는 친구가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판이 깔리는구나.”

눈빛을 반짝이며 유지훈에게 집중했다.

그런데. 이내 기대가 허물어졌다. 눈을 의심해야 했다.

“어럽쇼? 왜 저놈들끼리 싸우는 거지? 유지훈이랑 싸워야지!”

철두파와 신화길드 사이 혈투가 벌어졌다.

신화길드 요원들은 전원 레벨 4 안팎의 각성자들, 기껏해야 레벨 2 각성자 여남은 명에 비각성자들로 이뤄진 철두파 양아치들이 감히 대적할 상대가 아니었다.

20명 남짓이 50여 명을 상대했지만, 이내 전세가 기울었다.

신화길드 요원 다섯이 쓰러졌을 때, 철두파 조직원 중 멀쩡히 서 있는 이는 열 명 남짓에 불과했다.

“좋다. 빌런 놈들 다 쳐 죽여라.”

빌런을 극혐하는 마철진이었기에 난투극의 전개 과정은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팝콘을 우물거리며 구경하는 유지훈이 못마땅할 뿐이었다.

“팝콘은 또 왜 가지고 다니는 거야? 군침 돌게끔···.”

순간 뭔가가 마철진의 뇌리를 강타했다.

“설마···!”

새삼 난투극을 주의 깊게 살폈다.

수적으로도 열세에 몰린 철두파였지만, 악착같이 싸웠다. 버텨봤자 몰살이 뻔한 상황이었는데, 죽음을 불사한 항전을 이어갔다.

“저, 저놈 정신 계열 특성을 보유한 것인가?”

유지훈이 두 집단의 정신을 지배해 서로 싸우게 만든 건 아닌지에 생각이 미쳤다.

정신 계열 특성을 지닌 각성자 중엔 특이한 사례들이 제법 있었다. 저레벨 각성자가 한참 상위 레벨 각성자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어 죽음으로 몰고 간 경우라든가.

비각성자라도 가능한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강한데···. 위험해.”

정신 계열 특성은 일반적으로 한두 명, 많아봤자 열 명 안쪽의 상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런데 유지훈의 주위에선 70여 명이 뒤엉켜 죽음을 무릅쓴 난투를 벌이고 있었다. 한꺼번에 70여 명의 정신을 지배하다니···.

마철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일단 대화는 나눠봐야겠군. 그런 다음에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해봐야겠어.”

건물 옥상에서 몸을 날리려는 찰나, 난투 현장을 덮쳐오는 거대한 기운이 감지됐다.

마철진이 멈칫하고 기운의 실체를 파악하려 했다.

쾅!

번쩍이는 기운이 신화길드 진영을 헤집었다. 굉음과 함께 신화길드 요원 셋이 육편이 돼 날아갔다.

“안 오려다가 노파심에서 와봤는데, 와보길 잘했군. 우리 애들 다 죽을 뻔했잖아.”

싸늘한 금속성의 기운을 두상에서 뿜어내는 사내. 철두파 보스, 아이언 헤드 주필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혈투의 판세를 뒤바꿀 게임 체인저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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