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의 가치
이튿날 강은영은 뜻하지 않은 인물의 방문을 받았다. 오전 내내 일없이 빈둥거리다가 팀원들과 점심을 먹으러 갈 때였다.
“강은영 팀장님.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돌아본 강은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쉽게 만나기 힘든 거물이 그녀를 향해 은은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어머나! 길드 마스터님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대한민국 3대 길드 중 하나인 금강길드의 마스터 최금강이었다.
단정하게 묶은 은빛 머리와 구릿빛 피부가 더없이 잘 어울리는 강인한 인상의 노인. 레벨 7의 각성자 중 자타공인 최강으로 인정받는 능력자가 한직을 떠도는 강은영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
레벨 7을 넘어 레벨 8에 도달했다는 설도 있었다.
레벨 8이 돼 초인에 등극하면 규정상 길드에 몸담을 수 없기에 레벨 7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가업이나 마찬가지인 길드를 지키기 위해 초인 등극을 미뤄뒀다는 이야기. 후계자만 정해지면 언제든 초인의 자리에 오를 거란 추측이었다.
어쨌거나 다섯 초인을 제외하곤 가장 강한 각성자임은 분명했고, 어쩌면 다섯 초인 중 한둘보다 강할 거란 관측도 있었다.
“팀장님과 긴히 상의할 게 있어서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결례를 범했습니다.”
결례를 범했다고?
어째 떨떠름한 표현이 들려왔다.
썩 반갑지만은 않은, 실은 상당히 불쾌한 표현이었다.
내색할 순 없었다. 헌터계의 살아있는 전설 중 하나였으니.
“아닙니다. 이렇게 뵙는 것만으로 영광인 걸요.”
“팀원들과 식사하러 가시는 길인 모양입니다.”
최금강이 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제가 팀장님을 빼앗아가는 모양새가 됐군요. 제 카드를 드릴 테니 팀원들 맛있는 식사 하실 수 있게 해주시죠.”
“아닙니다. 이러시면 곤란해요.”
강은영이 손사래를 쳤다.
“이러면 김종란법에 저촉됩니다. 제 카드 주면 돼요.”
강은영이 카드를 꺼내 팀원들에게 건넸다.
“이거 가지고 가서 푸짐하게들 먹어.”
“감사합니다. 아싸! 고기 먹어야지.”
“안 돼! 이거 내 개인 카드야. 고 국장이 법카 정지시킨 거 몰라? 김밥낙원 가서 원 없이 먹어.”
“팀장님은 길드 마스터님이랑 좋은 거 드실 거 아닙니까? 저희도 좋은 거, 고기 먹고 싶습니다.”
강은영이 입맛을 다셨다.
다시 카드를 챙겨 넣고는 슬그머니 최금강의 카드를 받아들었다.
“죄송해요. 요즘 제가 형편이 안 좋아서···.”
도끼눈을 뜨고 팀원들을 노려봤다. 최금강의 카드를 건넸다.
“인당 3만 원 넘기면 안 돼. 감사에 걸리면 답 안 나온다.”
“걱정마십쇼. 런치 세트 1인분에 2만9900원입니다.”
팀원들이 일제히 최금강을 향해 고개를 꾸벅한 뒤 2만9900원짜리 런치 세트가 있는 고깃집을 향해 달려갔다.
최금강이 흐뭇하게 웃었다.
“팀원들 준법정신이 투철하군요. 좋은 팀원들을 두셨습니다.”
“부끄럽네요. 언제 짤릴지 모를 놈들인데요. 먹는 거엔 진심이라···.”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는 말이 있습니다.”
“쟤들은 먹다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허허허. 팀원들을 아끼는 마음이 남다르십니다. 우리도 가시죠.”
최금강이 자신의 차에 강은영을 태웠다.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금강길드 같은 대형 길드의 마스터 정도 되면 수행 기사가 있을 텐데, 이채로운 장면이었다.
“기사가 따로 있지 않으셨던가요? 전에 뵀을 땐···.”
“긴히 상의할 게 있어서 제가 직접 차를 몰고 나왔습니다.”
긴한 상의라는 말에 불현듯 강은영의 뇌리에 뭔가 떠올랐다.
강은영이 미간을 좁히자, 최금강이 빙긋 웃었다.
“제가 운전이 익숙지 않아서요. 운전하는 동안 나눌 이야기는 아닌 듯합니다. 어디 조용한 데 들어가서 대화 나누시지요.”
“알겠습니다.”
결례를 범한다고 했을 때부터 대충 짐작은 했다.
한편으로 전날의 끔찍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혹시 길드 마스터님도 같이 감시 영상 보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괜스레 마음이 불편해졌다.
최금강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운전에 몰두했다.
서울과 하남 경계의 고즈넉한 한정식집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두 사람을 조용한 방으로 안내했다.
최금강이 말문을 열었다.
“예고도 없이 찾아와 이렇게 먼 곳까지 모셨습니다. 긴히 상의하기 위해 결례를 범했습니다.”
“아닙니다. 결례 안 범하셨습니다. 절대 안 범하셨어요.”
강은영의 반응이 이상해서인지, 최금강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아니에요. 결례를 범했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하는 양반이 떠올라서요.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허허허. 누군지 알 것 같군요. 사실 저도 질리게 들었습니다. 듣다 보니 익숙해지고, 자연스럽게 쓰게 되고, 입에도 잘 붙고···. 뭐 그렇게 된 겁니다.”
“부디 저는 안 그러고 싶네요.”
강은영이 눈매를 살짝 찡그렸다가, 최금강을 바라봤다.
“그럼 길드 마스터님께서 유지훈 씨 문제로 저를 찾으신···?”
“그렇습니다. 팀장님과 협력해서 유지훈 씨를 지원하고, 궁극적으로 국가의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도록 힘을 쏟을 예정입니다.”
놀라운 일이었다.
최금강은 권력의 입김을 배제하는 인물로 유명했다. 정계나 재계와 철저하게 거리를 둔 채 길드를 운영해왔다.
금강길드는 철저하게 독자노선을 걸었다. 권력층의 요청은 일단 거르고 봤다. 길드의 운영 원칙만을 고수했다. ‘길드는 몬스터 퇴치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최금강의 소신에서 비롯된 운영 방침이었다.
때문에 금강길드는 고위층이나 상류층 사이에선 인기가 없었다. 대신 서민들 사이에선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또한 최금강은 젊은 각성자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한 헌터 정신 때문이었다.
“금강길드는 정부 쪽 일은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물론 몬스터 퇴치에 관한 부분은 협력하지만요.”
강은영의 질문에 최금강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정부 쪽 일이라뇨?”
“네? 이번 일, 정부 기관의 의뢰를 받으신 거 아니었나요?”
“흐음. 정부 기관의 의뢰라···.”
최금강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군요. 딱히 답을 드리진 않겠습니다. 아직은 곤란하기도 하고요. 다만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라는 점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더러 어떤 조직과 함께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협조하라는 말씀이신가요?”
“머지않아 알게 되겠지만, 지금은 곤란합니다. 현시점에서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유지훈 씨에게 국가의 미래가 걸렸다는 점입니다.”
“유지훈 씨가 그 정도로 중요한 인물인가요?”
강은영이 재차 물었다.
눈빛에 강한 의문이 서린 채였다.
“팀장님은 유지훈 씨가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귀환자일 가능성 때문이죠. 다른 차원에 관한 연구에 열쇠가 될 수 있는 존재니까요.”
“그건 단편적인 시각에 불과합니다.”
최금강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유지훈 씨는 국가에 큰 위험이 될 수 있는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존재입니다.”
“국가에 큰 위험이 될 음모라면···?”
강은영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유지훈에 이어 자신까지 동참하게 하는 음모라면, 답은 하나였다.
“혹시 신화그룹과 관련된?”
“팀장님은 추적하신 적이 있으니 바로 짐작하시는군요.”
“저야 던전 폭발 사고에서 은폐된 횡령을 추적했던 건데요. 전에 만났던 분은 횡령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됐다고 하신걸요.”
“저 역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횡령은 진짜 음모를 가리기 위해 눈속임으로 기획된 것이라고요.”
“그럼 진짜 음모는 뭐죠?”
“거기까진 저도 모릅니다. 내부적으로도 은밀하게 추적 중이라는 것까지만 알고 있습니다. 추적 자체가 알려지지 않도록요.”
“대체 어떤 음모길래···.”
강은영의 뇌리에 유지훈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던전 폭발 사고 당시 기억에 관한 내용이었다.
“유지훈 씨도 던전 폭발이 횡령을 감추기 위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다른 음모에 대해서는 모르는 눈치였어요.”
“그건 횡령을 전제에 놓고 과거를 돌아봤기 때문일 겁니다.”
최금강이 빙긋 웃었다.
“횡령을 배제하고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분명 다른 단서를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강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 당시 그녀는 횡령 의혹에 대해서만 주구장창 알려줬다. 당연히 유지훈은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과거를 회상했을 터였다.
횡령을 떼어놓고 생각하면 다른 기억에 접근할 수도 있을 듯했다.
한편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신화그룹이 대단하다고는 해도 국가를 위기에 몰아넣을 정도까지일까요? 일개 재벌기업인데요. 서열 5위 수준에 불과한.”
“신화에 배후 세력이 존재한다면 가능한 일이겠죠.”
“배후 세력이라고요? 누가···?”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은밀히 추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화를 조종할 정도로 대단한 힘을 지닌 세력이니까요. 정부 고위층도 배제할 수 없는···.”
강은영이 짧은 탄성을 토했다.
왠지 감당하기 힘든 사안에 연루된 기분이었다.
최금강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번엔 다소 희망적인 이야기였다.
“저는 다른 방면으로도 유지훈 씨의 가치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떤 가치 말씀이시죠?”
“귀환자로서 유지훈 씨의 능력입니다. 비각성자임에도 최상위 레벨 각성자를 손쉽게 제압할 수 있는. 모르긴 해도 또 다른 차원 에너지에 의한 것이라 추측되거든요.”
“저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요즘 몬스터 관련한 해외 정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레벨 8을 넘어선 몬스터들이 각국에서 출몰하고 있는데, 대응에 곤란을 겪고 있는 형편입니다.”
강은영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한민국엔 아직 레벨 8 이상 몬스터가 출현하지 않았지만, 세계적인 추세로 볼 때 등장은 시간문제였다.
초인들이 다섯이나 되긴 했지만, 그들의 레벨을 넘어서는 몬스터가 나타나면 나라가 쑥대밭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유지훈이 대안이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새로운 차원 에너지는 좋은 힌트가 될 터였다.
“그럼 제가 뭘 해야 하죠?”
“유지훈 씨가 우리 쪽 계획에 동참하도록 설득해주시는 겁니다.”
“그쪽 조직에서 직접 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내막도 정확하게 모르는 저를 앞세우는 것보다요.”
“강압적으로 끌어들이려 한다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래도 팀장님은 유지훈 씨가 귀환했을 때 도움도 주고 해서 제법 친분을 쌓았을 테니까요.”
돌연 강은영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핫! 사람 잘못 보셨어요. 유지훈 씨는 저를 짐처럼 여길걸요? 안 그래도 제가 전해줄 게 있는데, 찾을 생각도 안 하거든요.”
“전해줄 게 무엇인지···?”
“여동생 주소랑 연락처요. 기껏 알려주려고 가져갔더니, 집 구한 다음에 알려달라고 하더니···.”
강은영이 사정을 설명했다.
최금강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유지훈 씨는 팀장님을 원망하고 있을 겁니다.”
“네? 그게 무슨···?”
“사실 저희 쪽에서 행정시스템에 조치를 취해둔 탓이거든요. 유지훈 씨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복구된 주민등록을 잠시 이전으로···.”
“그래서 여전히 사망자로 돼 있었군요! 유지훈 씨는 내가 연락처를 알 수 있는데, 연락하지 않고 있다고 여길 테고요.”
최금강은 빙긋 웃었고, 강은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만나면 한소리 듣겠네요. 설득이 될까 모르겠어요. 차라리 유지연 씨한테 먼저 연락해서 오빠 찾도록 하는 건 어떨까 싶네요.”
“유지훈 씨 동생이 유지연 씨라고요? 혹시···?”
“생각하는 그분이 맞을 거예요.”
“허허허. 이건 또 생각지도 못한 대단한 일이군요. 유지훈 씨에게 먼저 알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최금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바로 가시죠. 사정은 제가 잘 설명하겠습니다. 이참에 인사도 하고.”
“지금 당장요? 어디 있는지 아세요?”
“레벨 1 던전에서 몬스터 사냥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서둘러 가면 나올 무렵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조무래기 몬스터들 데리고 놀고 있겠네요. 바쁘게도 산다.”
강은영이 최금강을 따라나설 채비를 갖췄다.
불현듯 뭔가 뇌리에 떠올랐다. 불길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길드 마스터님. 혹시 어제 그쪽에 그분이 저랑 통화할 때요. 같이 계셨던 건 아니죠?”
최금강이 입가에 잠시 미소를 머금었다가 근엄한 표정이 됐다.
“사실 같이···. 본의 아니게 결례를 범했습니다.”
“아 쫌! 결례 좀 그만 범하세요! 제발!”
강은영이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은 가운데, 최금강은 성큼성큼 앞장서 갔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길이 엇갈릴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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