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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는 각성을 압살한다-21화 (21/150)

초인의 관심을 유발하다

용인 외곽의 허름한 막국숫집. 밤 11시를 지나 문을 닫을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내부에 손님은 단 두 사람. 막국숫집 주변엔 눈에 띄지 않게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늦은 시간에 외진 곳으로 모셨습니다. 사죄드립니다.”

30대 중반의 사내, 신화그룹 회장의 차남 이자걸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재벌 2세의 오만함을 찾을 수 없는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오히려 이자걸 앞에 팔짱을 끼고 앉은 사내가 오만했다. 내려다보는 자세로 대수롭지 않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내였다. 자격은 차고 넘쳤다.

길 가다 흔히 마주칠 법한 인상. 허름한 옷차림에 평범해 보이기만 하는 사내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다섯 사람 안에 꼽혔다.

레벨 8의 각성자, 초인 마철진. 이자걸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지만, 이미 50을 훌쩍 넘었다. 끊임없는 단련과 철저한 몸 관리 덕분에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였다.

“이곳으로 오도록 한 점은 탓할 생각 없다.”

마철진이 씩 웃으며 가게를 둘러봤다.

“이 집에서 이토록 한가하게 막국수를 즐길 기회는 흔치 않으니.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10분 안에 허겁지겁 먹고 나가곤 했으니.”

입맛이 도는 듯 군침을 삼키기까지 했다.

“여유롭게 먹고 싶어서 배달도 시켜봤는데, 그 맛이 아니더군. 역시 면은 삶자마자 먹어야 했어. 들기름의 고소함도 휘발돼 버렸고. 이런 만남은 언제든 환영이다. 단!”

마철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안광을 번득였다.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로 내 시간을 허비하려 한다면 곱게 돌아갈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다. 막국수를 여유롭게 먹게 해줬으니 살려는 드릴 테지만 말이야.”

“물론입니다. 저는 초인님과 귀한 만남을 쓸데없는 이야기로 허비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습니다.”

그때 막국숫집 사장, 괄괄한 인상의 할머니가 들기름 비빔 막국수 한 그릇을 들고 와 탁자 위에 탁 내려놨다.

“이게 뭐지?”

마철진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매서운 시선의 대상은 이자걸이었다.

“그쪽은 안 먹나?”

“아. 저는 조금 전에 저녁을 먹었습니다. 좀 과하게 먹어서요···.”

“저녁은 나도 먹었다. 이 집에선 인당 한 그릇은 필수다. 이 집뿐 아니라 모든 식당에서 인당 메뉴 하나는 국룰이다. 신화는 장사를 그따위로 하는가?”

“아닙니다. 저도 먹겠습니다.”

이자걸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 할머니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저도 같은 걸로 한 그릇 부탁드립니다.”

“진작 그렇게 주문하시지. 면 삶으려면 시간 걸리는데···.”

마철진도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 할머니에게 고개를 숙였다.

“대신 사과드립니다. 이모님. 젊은 친구가 이 집이 처음인 모양입니다. 그리고 기왕 삶으시는 김에 2인분으로. 저는 물 막국수 하나 추가하겠습니다.”

“오. 젊은 양반이 막국수 드실 줄 아시네. 내 특별히 물 막국수는 곱빼기로 말아 드릴게.”

마철진이 흐뭇하게 웃더니 자리에 앉아 막국수를 비비기 시작했다. 의식이라도 올리듯 정성스러운 동작이었다.

“오늘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이자걸이 운을 띄우려 했지만, 마철진은 손을 들어 저지했다.

“먹을 땐 오직 먹는 것에만 집중한다. 그게 지금 내가 이 자리까지 올라서게 해준 원칙이다.”

마철진이 들기름 비빔 막국수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추가로 주문한 막국수 두 그릇도 도착했다.

이자걸은 속이 부대꼈지만 먹는 시늉이라도 하려고 했다. 마철진의 퉁명스러운 한 마디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나는 음식 남기는 놈이랑은 상종을 안 한다.”

“국수가 참 맛있습니다. 하하하. 남기려야 남길 수 없겠어요.”

마지막 남은 동치미 무 하나까지 오독오독 씹어 먹은 다음에야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었다.

마철진은 육수까지 탈탈 털어 마시고도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신화길드의 타격본부장 김연학이 당했습니다.”

“김연학이···. 신화그룹 위세만 믿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불던 놈이었지. 언젠가 당할 줄 알았다.”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었다.

마철진의 눈빛에 불쾌감이 깃들기까지 했다.

“설마 나한테 김연학 따위의 복수를 의뢰하려는 것인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초인님께서 흥미를 느낄 만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려는 것뿐입니다.”

“흥미? 김연학이가 레벨 8을 넘는 몬스터를 만나기라도 한 건가? 국내에 재앙급 몬스터가 출현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마철진이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레벨 8 각성자인 그에게 레벨 8 몬스터는 호승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상대였다. 천문학적인 수입도 보장됐다. 처치 사례금에 부산물 판매 대금을 합치면 300억 원은 거뜬히 넘을 테니.

마철진은 내심 대한민국에 레벨 8 이상 몬스터가 나타나길 바랐다.

국가적인 재앙이 될 수 있어 대놓고 희망할 순 없었지만, 매일 아침 눈뜰 때마다 재앙급 몬스터 출현 경보를 기다리곤 했다.

김연학이 레벨 8 몬스터에게 당했다면, 기꺼이 나설 일이었다.

하지만.

“몬스터가 아닙니다.”

“그럼 빌런의 암수에 당한 건가? 빌런 따윈 관심 없다.”

“빌런도 아닙니다.”

“그럼 대체 뭐냐? 길드 간에 전쟁이라도 한 거야? 나한테 그딴 이야기를 왜 하는데?”

“비각성자에게 당했습니다.”

“뭐라?”

마철진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내 표정이 일그러졌다.

“장난하나? 레벨 7의 김연학이가 어떻게 비각성자한테 당할 수 있나. 자고 있을 때 암습을 당해도 찰과상도 입을까 말까일 텐데.”

“분명 비각성자에게 당했습니다. 정확하게 파악되진 않았지만, 특성까지 활용해 격투를 벌인 결과였습니다.”

“뭐라? 김연학이의 특성? 침투경을 쓰고도 당했다고?”

마철진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이자걸이 씁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파악하긴 그렇습니다. 김연학 본부장 말고도 김창용이라는 빌런과 호광길드 마스터도 그자에게 당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흐음. 어글리 썬더와 박찬수면 전투력만으론 레벨 7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는 놈들인데···.”

마철진이 콧잔등을 긁적였다.

“재미있군. 신화에서 그 비각성자에 대해 허투루 조사하진 않았을 테고. 어디 들어나 볼까?”

이자걸이 설명을 시작했다.

신화길드 산하 호광길드의 잡무 담당 직원이었던 과거부터 사고로 행방불명됐다가 돌아온 이야기. 돌아와서 불가해한 신체적 능력을 발휘하기까지 소상하게 털어놓았다.

최근 몇몇 악질 빌런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건도 거론했다. 이면에 유지훈이 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흥미로운 친구로군. 신화에선 왜 그런 친구를 건드렸나? 보상 잘 마치고 사이좋게 지냈으면 신화도 손해 볼 건 없었을 텐데.”

“길드에서 판단을 잘못한 결과입니다. 길드 마스터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그룹 차원의 역량 부족이기도 하고요.”

“흥! 번드르르하게 말은 잘하는군.”

마철진이 피식 웃었다.

“나한테 그 친구에 대한 응징을 의뢰하는 거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 알다시피 내 능력은 국가의 승인을 거쳐 국민을 위해 쓸 뿐이다.”

“물론입니다. 저희도 감히 초인님께 그런 의뢰를 드리진 않습니다.”

“그럼 나한테 왜 이런 이야기를 하지?”

“흥미로우실 테니까요.”

이자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초인님 입장에서 새로운 강자의 등장은 활력소로 작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 번 만나보셔도 좋겠다 싶어서 말씀드린 겁니다.”

“활력소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레벨 8에 올라 초인으로 인정받은 이후 마철진은 무료했다.

국내에 출현한 몬스터 중엔 그를 버겁게 하는 존재는 없었다. 빌런 중에도 초인에 대적할 만큼 강한 놈은 없었다.

간혹 외국에서 레벨 8 이상의 몬스터나 빌런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정부에서 만류했다. 국가 자산인 초인을 외부로 유출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레벨 7 각성자를 쓰러뜨린 비각성자는 충분히 활력소가 될 만했다.

“전적으로 초인님 마음 가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만나서 어떤 친구인지 알아보셔도 좋고, 마음에 드시면 함께 뭔가를 도모하셔도 좋습니다. 저희는 초인님의 행보에 전혀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장사꾼답지 않은 태도로군. 뭔가 바라는 것이 없지 않을 텐데?”

“그 친구에 관해선 초인님의 판단이 곧 저희의 판단이라 생각하셔도 될 것입니다. 다만.”

이자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초인님 판단에 그 친구가 국가에 위험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지신다면 손을 쓰실 수 있도록 그룹 차원에서 돕겠습니다. 만일 그 친구에 관해 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시면 그 역시 지원하겠습니다.”

“흥! 내 손을 빌리겠다는 말을 어렵게도 하는구나.”

마철진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 친구를 만나보겠다. 단. 신화 네놈들을 위해 그 친구에게 해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판단하신다면 그것으로 저희는 만족입니다.”

“흥! 재수 없는 놈. 오늘 국수는 잘 먹었다. 보답은 다른 방식으로 하도록 하겠다.”

마철진이 벌떡 일어나 막국숫집을 빠져나갔다.

이자걸이 배웅을 위해 따라 나갔지만, 이미 마철진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만나보기만 한다고요? 과연 뜻대로 될까요?”

이자걸의 괴랄한 미소가 마철진이 사라진 어둠 사이로 스며갔다.

***

강은영은 닷새째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자신의 휴대폰이 아니었다. 떠맡기듯 전해진 휴대폰이었다.

납치당하듯 의식을 잃고 어딘가로 가서 유지훈에 관한 대화를 나눈 뒤 휴대폰과 함께 돌아왔다.

돌아올 때도 같은 방식이었다.

어! 하는 사이에 정신을 잃었고, 눈 떠 보니 집이었다.

머리가 깨질듯한 두통, 목이 타는 갈증과 함께 깨어났다. 이번에도 역시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차이는 침대에 누워있었다는 점이었다.

육두문자와 함께 물을 마시려는데, 식탁 위에 낯선 휴대폰 한 대와 쪽지가 놓여 있었다.

[은밀히 모셔야 해 부득이 결례를 범했습니다. 유지훈 씨 관련해 정리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휴대폰을 남겨뒀습니다. 보안 관계상 저희와 연락 외엔 사용해선 곤란합니다.]

“결례 좀 그만 범해라. 개잡놈의 새끼야.”

이후로 닷새 동안 휴대폰은 울지 않았다.

사무실에도 가지고 다녔지만, 그 흔한 스팸 문자 한 통 오지 않았다.

“개통 안 된 거 던져놓고 간 거 아니야?”

시험 삼아 전화 한 통 걸어보려다가 보안 문제를 언급한 쪽지를 떠올리고 참았다.

사무실에선 일이 없었다. 안 그래도 일은 없었는데, 의문의 만남 이후 더 없었다. 격렬하게 없었다.

“이놈들이 뭔가 손이라도 썼나? 제법 힘이 있는 놈들이었나 봐?”

일이 없으니 더욱 연락이 기다려졌다.

유지훈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면 연락이 오려나 싶기도 했다.

역시 참았다. 도움이 될 것 같은 자들인데, 하지 말라는 일은 굳이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닷새째가 다 지나갈 저녁 무렵 퇴근해 집에 돌아와서 샤워하는 중에 벨이 울렸다. 행여나 놓칠세라 벨소리를 맥스로 해뒀기에 집이 떠나갈 듯했다. 허둥지둥 알몸으로 달려 나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접니다. 연락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때 그 사내였다.

“연락 같은 거 안 기다렸는데요.”

[그러시군요. 지난번에 귀가하실 때도 부득이하게 결례를 범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그 결례라는 거 그만 좀 범하시면 안 될까요?”

[아직 저희를 드러낼 수 없는 형편이라···. 노력해보겠습니다.]

“됐고요. 용건이 뭔가요? 제가 지금 업무 중이라.”

업무 중도 아니었거니와, 업무랄 것도 없는 나날들이었지만, 없어 보일 순 없다는 본능이 업무를 들먹였다.

[물론 그러시겠죠. 유지훈 씨 관련해서 저희 입장이 정리됐습니다. 귀환자로 인정하고 접근하기로 했습니다.]

“잘됐네요. 그럼 앞으로 저는 어떻게 하면 되죠?”

[저희 움직임에 보조를 맞추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저희를 도와주십사는 말씀입니다.]

“어떻게요? 제가 그쪽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어서요.”

[저희 쪽에서 내일쯤 팀장님을 찾아뵐 겁니다. 물론 은밀하게요. 자세한 건 그분과 상의하시면 될 겁니다.]

“은밀하게면···. 또 뭔가로 찌를 건가요?”

[하하하. 그렇진 않을 겁니다. 이번엔 당당하게, 팀장님과 구면일 수도 있는 분입니다.]

구면이면 누굴까?

생각하는 찰나 수화기 너머로 웃음을 참는 느낌이 전해졌다.

“왜요?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그런 게 아니라···. 욕을 참 찰지게 하셨던 기억이 떠올라서요.]

“욕이라고요···?”

강은영의 뇌리에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개잡놈 어쩌고 하는 욕이 귀에 짝짝 달라붙더군요.]

“뭐라고요! 혹시 도청하는 거예요?”

[팀장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곤란해서요. 죄송합니다.]

“그럼 혹시 카메라도···?”

[팀장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곤란해서 부득이 결례를 범했습니다.]

“야 이 개잡놈의 새끼야! 결례 좀 그만 범하란 말이야!”

[죄송합니다. 바쁘실 텐데 하던 일마저 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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