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육의 신세계 (3)
명동 대부업계의 큰손인 이영철 평화파이낸셜 대표는 작금의 상황이 영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일단 형편없이 두드려 맞아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된 아들부터.
수억을 쏟아부어 레벨 4까지 끌어올렸는데. 특성 개화 테스트를 받으러 간다던 놈이 왜 저토록 얻어터진 채 돌아왔단 말인지.
처음엔 아들인지 알아보지도 못했다. “아빠!” 하며 흐느낄 때야 비로소 아들임을 인지할 수 있었다.
다음에 떡하니 상석을 차지하고 앉은 사내.
아들을 끌고 와서 옆에 무릎 꿇려 놓고는 빚 갚으러 왔다고 비실비실 웃어대고 있었다.
저런 인간한테 돈을 빌려준 기억은 없는데···.
알고 보니 돈 빌려 간 놈은 따로 있었다. 아들의 친구 놈이었다.
아들이 재수 없다며 작업해달라고 부탁했던 놈. 골수까지 쪽쪽 빨아먹겠다고 작정하고 작업 친 놈이었다.
그런데 돈을 갚겠다며 여기 와서 앉아 있다고?
그럴 순 없었다. 그에겐 원칙이 있었다. 작업 대상에겐 돈을 갚을 기회도 주지 않는다는. 원금 상환을 차단하고 이자를 먹여 산더미로 만들어야 했다. 종국엔 장기까지 팔아먹게 해야 작업 완료였다.
어떻게 들어왔을까? 돈 갚으러 오는 작업 대상을 처리하기 위해 사무실 주변에 어깨들 20여 명을 대기시켜 뒀는데.
이영철은 상황을 판단하는 감각이 빼어났다. 특히 위험에 대해서.
거친 사채업계에서 수십 년을 구르며 큰손으로 자리매김한 배경엔 이 같은 감각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런 감각이 눈앞의 사내는 몹시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젊었을 때 힘깨나 썼던 그였기에 사내와 일행이 들어섰을 때 본능적으로 골프채에 손이 갔지만, 감각의 경고에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처참하게 망가진 아들의 몰골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역시 눌러둬야 한다고 감각은 주장하고 있었다.
“그래. 빚을 갚으러 오셨다고?”
그렇다고 아무런 준비 없이 응접실로 들인 건 아니었다.
탁자 아래 버튼을 누르면 지원군이 들이닥치게 돼 있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그는 빌런 조직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서너 개 조직에 적지 않은 돈을 뿌려뒀다.
버튼을 눌렀으니 그들이 와서 깔끔히 정리할 터였다.
드럼통에 넣어 시멘트를 바른 뒤 인천 앞바다에 던져버릴 테니 흔적도 찾을 수 없겠지. 그야말로 없던 일로 만드는 냉혈한들이었다.
그가 할 일은 적당히 시간만 끌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 빚 갚으러 왔다고. 왜 자꾸 했던 말 반복하게 하는 거야?”
“확실하게 해두려고 하는 거요. 이렇게 찾아와서 빚 갚겠다는 분이 드물어서. 귀한 고객이기도 하고.”
“시끄럽고. 장부나 가져와. 배고파. 순댓국 먹으러 가야 해.”
“명동에 와서 웬 순댓국을? 이 동네는 곰탕이 유명한데···. 그나저나 장부는 왜 찾으시는지?”
이영철의 질문에 유지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왜긴. 확실하게 해두려는 거지. 이렇게 빚 갚겠다고 찾아온 사람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채업자는 드물어서.”
“허허허. 철저한 양반이군. 좋소. 보여드리지. 준비하는 동안 다과를 내오겠소. 즐기면서 기다리시오.”
이영철이 비서를 불러 귀엣말을 했다.
비서 역시 귀엣말로 답하더니 다과를 준비하겠다며 나갔다.
이영철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놀란 기색을 감추려는 모습이었다.
유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피식 웃었다.
“누구 오기로 했어? 기다리고 있는 거야?”
“허허허. 귀한 손님이 와 계시는데, 오긴 누가 온다고···.”
“누가 오기로 해서 시간 끄는 거면 안 그러는 게 좋을 거야.”
유지훈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더니 탁자에 콱 꽂았다.
“밖에 있던 놈들은 뭣 모르고 덤벼서 손만 봐주고 끝냈지만, 작정하고 덤비는 놈들은 손 봐주는 걸로 안 끝나.”
유지훈이 씩 웃더니 허공을 향해 엑스자로 손날을 그었다.
“닥치는 대로 썰어버리지.”
순간 이영철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이내 미소로 바뀌었다.
어색함과 여유로움이 공존하는 미소였다.
“장부도 가져오라 일렀으니 곧 내올 거요.”
이영철이 소파에 몸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박형식이 걱정되는 듯 유지훈의 귀에 대고 물었다.
“괜찮을까요? 누가 올 것 같은데요.”
“알아듣게 말했으니 잘 알아서 하겠지. 못 알아들었으면 할 수 없고. 그런데 왜 속삭이냐?”
“작전 회의는 안 들리게 해야···.”
“여기서 작전 회의가 뭐가 필요하다고. 썰거나, 안 썰거나 둘 중 하난데. 넌 잠자코 있다가 장부나 꼼꼼히 봐.”
잠시 후 유지훈이 목을 뚝뚝 꺾으며 일어났다. 눈살을 찌푸리더니 탁자에 꽂힌 단검을 집어 들었다.
“강호에서도 그러더니, 알아듣게 말해도 애먼 짓 하는 놈은 어디에나 있네. 관을 봐야만 눈물을 흘리는 족속들.”
탁자를 타고 넘어 입구로 향하더니 굳게 닫힌 문을 단검으로 툭툭 건드렸다.
“이봐. 사채업자 양반. 당신은 기본이 안 돼 있어.”
“무, 무슨···?”
“여기 들어오려면 한 명씩 이 문을 통해야 하잖아. 난 여기 가만히 서서 슥슥 썰기만 하면 돼. 이렇게 말이지.”
유지훈이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순간 문을 박차고 들어오려던 사내가 헛발질로 휘청이며 들어섰다.
서걱!
다리부터 하나 썰었다. 활극의 시작이었다.
문을 통해 밀려드는 험악한 분위기의 사내들. 유지훈은 단순한 손놀림만으로 차례차례 썰었다. 일단 다리 위주로.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상황을 파악한 사내들이 응접실로 진입을 멈췄다. 유지훈이 나갈 차례였다. 아래쪽으로 파고들어 썰어댔다.
열댓 명이 다리를 움켜쥐고 나뒹굴었다. 물론 나뒹굴기만 하진 않았다. 근성이 있는 사내들이었다. 몸을 일으켜 덤벼들었다.
유지훈은 코웃음을 아끼지 않았다.
“다리 병신으론 부족해서 그러냐?”
귀신 같은 움직임으로 사내들 사이를 파고들어 다시금 썰었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이번엔 팔, 옆구리, 허벅지···. 목을 제외하고는 가리지 않고 썰었다.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열댓 명 모두가 전투 불능 상태로 나뒹굴 즈음이 돼서야 유지훈이 단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러게 오지 말라니까···. 나 말고 저 사채업자를 탓해. 당신들 함정에 몰아넣은 양반이니까.”
무심한 한마디 던져놓고는 이영철에게 향했다.
“아직 장부가 안 보이네? 어디 한 군데 썰면 보이려나?”
“아, 아니오. 가져오겠습니다. 뭣들 하고 있어! 당장 박형식 님 대출 장부 안 가져오고!”
이윽고 장부가 탁자 위에 놓였다.
유지훈이 엄덕대에게 손짓했다.
“너는 저기 골프채 들고 가서 일어서려는 놈 있으면 사정 봐주지 말고 후려 패.”
“알겠습니다.”
엄덕대를 따라 박형식도 골프채를 잡으려 했다.
“넌 왜 가? 여기서 장부 봐야지. 네가 빌린 돈이잖아!”
“아. 네···.”
계산의 시간이 찾아왔다.
유지훈이 가장 즐거워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자, 그럼 빚을 갚읍시다. 후련하게.”
장부를 세심히 살펴본 결과 박형식은 생각보다 더 당했다. 빨아 먹히다 못해 등골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였다.
최초 원금은 2370만 원. 현재는 이자에, 이자에, 이자에···, 이자가 더해져서 갚을 원금이 1억4750만 원으로 불어 있었다.
문제는 그동안 갚은 이자였다. 1억3200만 원. 현재 갚을 원금이랑 합치면, 최종적으로 갚을 돈이 2억8000만 원에 달한다는 의미였다.
“아! 내가 이 정도로 호구였나···.”
“말해 뭐하냐. 넌 그냥 호구의 전설이다.”
사색이 된 이영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계산에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자율도 잘못 책정된 듯하고요. 다시 계산해서···.”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유지훈이 단칼에 잘랐다.
입가에 기괴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마음에 들어 이 셈법. 기적 같아 좋아. 이대로 하자고.”
“네?”
“단 계산은 내 방식대로.”
“그게 무슨···?”
유지훈이 박형식에게서 장부를 받아들었다.
“자, 봅시다. 죽 훑어보니 평균적으로 월 이자율이···. 30%쯤 되는구나. 와! 그럼 넉 달이면 이자가 원금을 넘어서네!”
유지훈이 박형식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콱!
“넌 어쩌자고 이걸 빌려 쓸 생각을 했냐?”
“한 달 안에 갚으려고요. 쟤가 추천한 종목이 한 달이면 두 배로 뛸 거라고 해서···.”
박형식이 이준호를 가리켰다.
퉁퉁 부어있던 얼굴이 서서히 거무죽죽한 멍으로 뒤덮여가고 있었다.
“그렇지. 사기까지 처맞았다고 했지. 그건 좀 있다가 계산하기로 하고···. 일단 사채 쓴 것부터 정리하자고.”
“이자율 책정에 실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바로 바로잡도록···.”
“아니야. 좋다니까. 자꾸 같은 말 반복하게 할래? 또 그러면 혀를 썰어버린다?”
이영철이 입을 꽉 다물었다.
이제 본격적인 계산의 시간이었다.
“형식이 네가 원금 갚으러 왔던 때가 언제였냐?”
“그게···. 빌리고 두 달쯤 지나서였습니다. 이후에도 두어 번 더···.”
“왔는데도 못 갚았다는 이야기네? 돈은 다 준비했는데?”
“네. 여기 사장님 회의 중이래서 밖에서 기다렸더니, 외출해서 없다 그러고. 다음번엔 사무실이 문이 닫혀 있었고···.”
유지훈이 주저리주저리 설명하려는 박형식을 제지했다. 그리고는 이영철을 쳐다봤다.
“이 친구는 돈 잘 마련해서 갚으러 왔는데, 그쪽 사정으로 못 받았다고 봐야겠지?”
“그, 그게···.”
“그럼 갚은 것으로 간주해야지. 3년 전에 이미 원금 상환 완료.”
“나, 나는 받은 게 없는데···.”
“걱정할 것 없어. 정확하게 계산할 테니까. 내 방식대로.”
유지훈이 장부를 들여다봤다.
“갚을 돈은 해결했으니까, 이제 나간 돈 차례지? 그동안 이 친구한테서 그쪽으로 간 돈이 1억3200만 원이니까, 월 30%로 계산하면···.”
머릿속으로 계산이 될 리 없었다.
탁자 위에 놓인 계산기를 두드렸지만, 역시 쉽게 계산되지 않았다. 복리의 세계는 심오했다.
박형식에 엄덕대까지 머리를 맞댄 끝에 얻은 답이.
“정확하게 계산하려니 너무 복잡하다. 양보할 거 다 양보하고···. 15억3000만 원으로 정리하자.”
“마, 말도 안 돼···.”
“그렇지. 말도 안 되지. 계산이 아직 안 끝났으니까.”
이준호가 박형식에게 주식 정보로 사기 친 금액도 포함해야 했다. 다시 계산했다. 역시 기적의 셈법으로.
“다 해서 18억8000만 원인데, 여기서 아까 말한 원금 갚은 부분을 정산해야지. 2300만 원 빼니 18억5700만 원. 기분이다. 700만 원은 팁. 18억5000만 원만 주면 되겠다.”
이영철은 차라리 죽이라며 몸부림쳤다.
눈빛이 사뭇 비장했지만, 유지훈이 우아한 손짓 몇 번으로 정돈했다. 손가락 두 개 썰고, 혈도 몇 군데 만져주고···.
금고가 활짝 열렸다.
“와! 역시 사채업자들은 현금을 사랑하는구나.”
사무실에 굴러다니는 보스턴 백에 쓸어 담았다. 꽉꽉 눌러 담고도 남는 돈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형님. 저 이거 다 못 받습니다. 전 2억 정도면 충분합니다.”
“네 돈이 종잣돈이 된 거잖아. 사양 말고 챙겨.”
“그럼 3억. 나머지는 형님이 갖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정 그러면, 내가 사업 하나 구상하고 있거든. 너희들이랑 같이 할. 거기에 투자하는 것으로 하자.”
돈을 싸 짊어지고 떠나는 길에 유지훈은 준엄한 한 마디를 남겼다.
“그러게 자식 교육이 중요한 거야. 아들놈 훈육하려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잖아. 앞으로 행실 똑바로 하고 다니라고 잘 가르쳐.”
유지훈 일행이 사무실을 나선 뒤 이영철은 골프채를 움켜쥐었다. 이준호를 가격하기 시작했다.
퍽! 퍽! 퍽!
“너 이 새끼! 대체 무슨 개망나니 짓을 하고 다닌 거냐!”
망나니 아들놈 평소에도 사고를 치고 나타나면 골프채로 후려 패곤 했다. 레벨 4에 달하는 각성자라 조금 아프기만 할 뿐 별 타격은 없었다. 이번엔 골프채에 좀 더 많은 힘을 실었다.
“아악! 아빠! 잘못했어요.”
“엄살떨지 마! 이 새끼야!”
분위기가 이상했다.
평소엔 비실비실 웃으며 맞던 아들놈의 눈이 뒤집혔다. 급기야 피거품을 물고 혼절하기까지 했다.
“뭐, 뭐야! 너 이 새끼 왜 이래?”
이영철은 미처 몰랐다. 아들의 각성이 소멸된 사실을.
그렇게 이준호는 반신불수가 됐다. 앞으로 운전할 일 없을 거라던 유지훈의 예언이 현실화된 순간이었다.
한편 사무실을 나서 건물까지 벗어난 유지훈 일행의 뒷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는 무리가 있었다.
“저놈. 덕대 아니냐?”
철두파 양아치들이었다.
이영철의 호출에 돈 냄새를 맡고 달려왔지만, 다른 빌런 조직에 밀려 사무실로 진입하지 못했다. 철두파의 주력들이 스톤 헤드 복수에 매달려 있느라 조무래기들만 투입된 탓이었다.
서둘러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전무님. 엄덕대를 발견했습니다.”
[배신자 새끼. 드디어 꼬리를 잡았군. 은밀히 따라붙어.]
철두파가 쾌재를 불렀다. 스톤 헤드 주필운의 복수를 위한 실마리를 잡았다고 여겼다.
다만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들이 잡은 게 보통 꼬리가 아니라는 점을. 호랑이, 아니 용의 꼬리를 붙잡고 희희낙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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