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육의 신세계 (1)
“누가 내 욕하나?”
유지훈이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벼댔다. 열심히 손을 놀렸지만 그럴수록 더 간지러웠다.
“갑자기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럽냐. 누가 제대로 내 욕하나 보다.”
“칭송 아닐까요? 형님처럼 법 없이도 살 분을 누가 욕하겠어요.”
딸랑이는 엄덕대 덕분에 간지럼증은 한층 심해졌다.
“아니야. 칭찬하면 오른쪽 귀가 가려워야 해. 지금은 왼쪽 귀야. 와 점점 심해지네. 너 면봉 같은 거 안 가지고 다니지?”
“그럴 리가요.”
엄덕대가 손가방에서 면봉을 꺼내 척 내밀었다.
“오호! 근데 너 면봉은 왜 가지고 다니냐?”
“형님을 곁에서 모시려면 뭐든 준비하고 있어야죠.”
이모저모로 쓸모가 많은 엄덕대였다.
면봉으로 후비니 한결 시원했다. 유지훈은 대견한 미소를 지으며 엄덕대를 쳐다봤다.
“근데 너 그 일수 가방 좀 안 들고 다닐 수 없냐? 어둠의 자식 같잖아. 네가 형님 형님 하는 나는 뭐로 보이겠냐? 요즘 클러치백도 이쁜 거 많던데 하나 사줘?”
“안 그래도 하나 주문해뒀습니다. 내일쯤 올 겁니다.”
빠릿빠릿하기까지 한 엄덕대였다.
“그런데 형님 욕하는 거요. 형식이 녀석 아닐까요?”
“형식이가 왜?”
“하루 종일 형님 심부름한다고 뺑이 돌고 있잖아요.”
“내가 시켰냐? 지가 좋아서 하는 건데···.”
유지훈과 엄덕대가 있는 곳은 국가안전본부 청사 앞이었다.
동생 연락처를 확보하기 위해 강은영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
원래 직접 찾아올 생각은 없었다. 보안이 철저한 곳이라 온다고 만난다는 보장도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박형식이 딴에는 각성자라며 몇 번 와본 적이 있다고 했다. 자기가 나서서 만남을 성사시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호기롭게 들어가긴 했는데, 여태 안 나오는 걸 보니 튼 것 같다.”
“제가 뭐라 했습니까? 별 쓸모없는 놈이라니까요. 가끔 몬스터 사냥이나 주선하는 게 그놈한텐 딱입니다.”
“너희 친구 맞냐?”
사냥을 함께한 이후, 박형식은 지근거리에서 모시고 싶다며 유지훈을 졸졸 쫓아다녔다.
유지훈은 철벽을 쳤다.
“안돼. 집에 방 없어.”
정말 그 이유였다.
집에 방이 셋인데, 하나는 유지훈이, 또 하나는 엄덕대가 차지하고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여동생의 방이니 박형식을 들일 수 없었다.
박형식은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유지훈을 수발했다.
엄덕대와 경쟁이 붙었다. 집을 나가면 갈 곳이 없는 엄덕대는 결사적으로 방을 사수하려 했다. 10년 우정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30분 만에 박형식이 청사에서 나왔다.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실패구나 짐작이 가능했다.
“오늘 출근 안 했다는데요?”
“나를 피하려는 건가? 만나기 싫어서 둘러댄 거 아냐?”
“아니에요. 제가 민원실에서 떼를 써서 사무실까지 올라갔는데, 없었어요. 어제 오후에 외근 나간 다음에 잠수탔다는 것 같았어요.”
“연락처는 확보했어?”
“그건 알려줄 수 없대요. 대신 제가 보는 앞에서 전화했는데, 수화기가 꺼져있다고 나왔어요.”
제법 애를 쓴 듯 박형식의 이마엔 굵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고생했다. 그나저나 이 여인네 왜 이리 연락하기 힘드냐. 집도 번듯한 놈으로 구했겠다, 당당하게 오빠 노릇 좀 하려고 했더니···.”
“제가 잘 아는 흥신소 있는데, 의뢰라도 해볼까요?”
“흥신소면 어둠의 계열 아니냐? 놔둬. 내 동생 가냘프고 여린 애야. 어두운 놈들 만나면 경기 일으킬지도 몰라.”
유지훈이 국가안전본부 청사를 흘깃 보며 입맛을 다셨다.
“어찌 됐든 애썼다. 순댓국이나 먹으러 가자.”
무림에서 지낸 50년 동안 가장 그리웠던 음식이 순댓국이었다. 돌아와서 집을 구한 이후 닷새 동안 매일 한 끼는 순댓국을 먹었다. 물론 엄덕대도 함께 먹었다.
조금 눈치가 보였다. 계속 같은 메뉴만 강요하면 꼰대 취급당할 것 같았다. 며칠 참았는데, 헛걸음으로 인해 속이 허해지자 순댓국이 떠올랐다. 절실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엄덕대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박형식도 좋은 모양이었다.
역시 순댓국은 전국민의 소울 푸드였다.
“순댓국 좋죠! 근처에 제가 잘 아는 맛집 있습니다. 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엄덕대가 앞장섰다. 발걸음이 상쾌해 보였다.
그런데 고급 스포츠가 한 대가 굉음을 내며 일행 쪽으로 달려왔다.
끼이익! 급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멈춰섰다. 하마터면 엄덕대를 칠 뻔했다. 뒤이어 시커먼 승합차까지 위협적으로 달려와 정차했다.
“뭐야! 운전을 왜 이따위로 하는 거야?”
엄덕대가 스포츠카를 노려보며 항의했다.
운전자가 내렸다. 엄덕대와 비슷한 또래, 20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고급 양복을 잘 갖춰 입었지만, 짝 달라붙게 빗어넘긴 머리에 찢어진 눈매까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족제비였다.
족제비가 경멸의 눈초리로 엄덕대를 쳐다봤다.
“별 시답잖은 새끼가 앞에서 걸리적거려! 차에 흠집 나면 책임질 거야? 너 같은 새끼가 평생 번다고 될 것 같아?”
“뭐야!”
엄덕대가 고분고분 물러설 리 없었다. 얼마 전까지 어둠의 세계에서 활약했던 기세를 한껏 펼치려 했다.
족제비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꼴에 지렁이는 되는 모양이지? 밟으니까 꿈틀하는 거냐?”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그때 검은색 승합차에서 내린 사내 다섯 명이 엄덕대 주위로 몰려들었다.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유지훈과 박형식도 엄덕대에게 다가갔다.
가소로운 듯 바라보던 족제비의 시선이 박형식에게 멈췄다. 비소를 머금은 음성이 튀어나왔다.
“이게 누구야? 박형식이 아니야?”
“어! 너··· 이준호구나.”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몸 좀 풀어야 하나 생각했던 유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몹시 재수 없긴 했지만, 지인이면 말로 정리하는 게 낫다고 여겼다.
“네가 국가안전본부엔 웬일이냐? 꼴에 각성자라고 온 거야? 왜? 알바 자리라도 구하려고?”
“그건 아니고···.”
깊은 빡침을 부르는 족제비의 언행이었지만, 박형식은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었다.
“그래. 돈 갚으려면 뭐라도 해서 열심히 벌어야지. 이자가 제법 불었다는 것 같던데, 이자는 제대로 내고 있냐?”
“······.”
“그러지 말고 내 밑에 들어와라. 내가 오늘 특성 개화 테스트받으러 왔거든. 레벨 4에 오른 것 같아서 말이야. 통과하면 길드 하나 차릴 생각이야. 와서 내 밑이나 핥아라. 후하게 쳐줄게. 하하하.”
족제비의 조롱을 따라 사내들도 낄낄거렸다.
박형식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딱히 대응하지 못했다. 이를 악물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 가볼게. 생각 있으면 연락해라.”
청사로 향하려던 족제비가 엄덕대를 힐끔 쳐다봤다.
“저 새끼 네 일행이냐. 너 봐서 이번에 봐준다. 앞으로 어디 가서 나대지 말라고 해라.”
비릿하게 웃으며 청사로 향하는 족제비의 앞을 유지훈이 막아섰다.
“잠깐.”
“이건 또 뭐야?”
“옷에 뭐가 묻어서.”
유지훈이 양복 가슴 부위를 살살 털어줬다. 이어 양팔을 잡고는 가볍게 쓰다듬었다.
“주름이 잡혔네. 비싼 옷 같은데.”
유지훈이 족제비를 향해 씩 웃고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파이팅!”
“허! 별 같잖은 게. 파이팅? 니 뽕이다.”
족제비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치더니 청사로 향했다. 사내들은 유지훈을 한 차례씩 노려보고는 족제비의 뒤를 따랐다.
“쟤들 뭐냐?”
유지훈의 질문에 박형식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분을 삼키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대학교 동창이에요. 명동에 유명한 사채업자 아들인데, 돈으로 쳐발라서 레벨 끌어올린 모양이에요. 원래 저랑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그렇다고 그렇게 쪽도 못 쓴 거냐?”
“그건 아니고요. 제가 쟤네 아버지한테 빚이 좀 있어요.”
“빚? 너 사채 썼어? 얼마나?”
“1억 좀 넘는데, 정확하게는 몰라요. 이자가 계속 붙어서···.”
박형식이 고개를 푹 숙였다.
유지훈이 혀를 끌끌 찼다.
“젊은 놈이 어쩌다가 사채는 써가지고···. 그나저나 너 대학 나왔냐? 사냥이나 다니길래 힘쓰는 동네에 있는 줄 알았더니.”
엄덕대가 아는 체하며 끼어들었다.
“형식이 대학원생이에요. 그것도 Y대. 공부 잘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반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었을 정도로요.”
“호오~. 대학원까지 다니는 녀석이 왜 사냥이나 하고 있어? 좋은 데 취직해서 돈 많이 벌어야지. 그래야 사채도 빨리 갚지.”
박형식이 멋쩍은 듯 웃었다.
“돈 안 되는 전공이라서요. 철학과거든요.”
“철학? 갈수록 안 어울리네. 하하하. 몬스터 정신세계 연구하는 거냐? 아. 미안하다. 농담, 농담.”
“생각 같아선 박사 과정까지 밟고 싶은데, 빚 때문에 쉽지 않네요. 그래도 이번에 형님 덕분에 제법 갚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꾸벅 인사하는 박형식의 미소가 쓸쓸했다.
엄덕대가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
“쟤네가 네가 전에 말했던 그 대부업체냐? 돈 갚으러 가면 잠수타고 방해하고 그런다던?”
박형식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덕대가 욕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형님. 저 새끼들 완전히 개새끼들이에요. 원금 못 갚게 해서 이자 산더미처럼 불어나게 수작 부리는 새끼들이라고요. 형식이도 돈 마련해놓고도 못 갚아서 이 꼴 난 거고요.”
엄덕대가 씩씩거리더니 박형식에게 물었다.
“너 원금이 얼마였지?”
“처음엔 500. 주식 투자한다고 빌렸다가 다 꼴아박고 두어 번 더 빌려서 다 합치면 2300쯤 될 거야.”
“병신. 세상 물정도 모르던 놈이 주식은 왜 했냐?”
“확실한 소스 있다고 적어도 두 배는 벌 수 있다고 해서···.”
“누가? 아까 그 새끼지?”
박형식이 참담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이 모지리야. 주식 사기에, 사채 사기까지 골고루 쳐맞았구나. 한심한 새끼. 어디 가서 나 안다고 하지 마라.”
잠자코 듣고 있던 유지훈이 나설 타이밍이었다.
“그래서 원금은 2300쯤이었는데, 갚을 돈이 1억이 넘는다고? 이자는? 꼬박꼬박 잘 냈나?”
“초반엔 잘 냈는데요. 한동안 형편이 안 좋아서 띄엄띄엄 냈어요. 사냥 시작한 이후로 이자는 안 밀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자는 전부 다해서 얼마 정도 냈는데?”
“글쎄요···.”
박형식이 머릿속으로 계산하더니 떠듬떠듬 말했다.
“평균적으로 한 달에 300~400씩 3년 동안 냈으니까···. 어림잡아 1억3000 정도 되겠네요.”
“뭐? 원금이 2300인데, 이자를 1억3000쯤 갚고도 아직 1억 넘게 갚을 게 남았단 말이야? 이거 진정 창의적인 개새끼들이네.”
유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편으로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오호! 이런 기적의 셈법이 다 있었구나. 마음에 들어.”
“네?”
“아니야. 혼자 뭐 좀 생각한 거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가자.”
“어디로요? 순댓국 먹으러요?”
“아니. 응원하러.”
“응원이요? 누구를요?”
유지훈이 씩 웃더니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누구긴 형식이 네 친구지. 아까 파이팅! 해줬잖아.”
“그 새끼 응원을 왜 해요?”
격한 항의가 엄덕대에게서 튀어나왔다.
유지훈이 준엄하게 타일렀다.
“친구라잖냐. 친구가 특성 개화한다는데 마땅히 응원해줘야지. 각성자 개화 테스트는 공개적으로 진행되는 거 맞지?”
“그렇긴 한데요. 꼭 가야 해요? 전 걔 얼굴도 보고 싶지 않은데요.”
박형식의 불평에 다시금 유지훈의 꾸중이 이어졌다.
“너도 마음 곱게 써. 혹시 아냐? 열심히 응원하면 이자 깎아줄지?”
“그럴 놈이 아닌 거 형님도 모르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
“그러지 말고 가자. 내가 아까 잘 어루만져 줬잖아. 먼지도 털어주고. 볼 만할 거야.”
“그딴 새끼 뭐가 예쁘다고 먼지는 털어주셨어요? 주름은 뭐하러 펴주시고. 꼬깃꼬깃하게 들어가게 두시지 않고.”
엄덕대가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자 유지훈이 딱밤으로 응징했다.
딱콩!
“훈육의 신세계였다. 닥치고 따라오기나 하거라. 계속 쫑알거리면 네 얼굴을 꼬깃꼬깃하게 만들어줄 테니.”
그제야 엄덕대가 조용해졌다.
휘적휘적 상쾌하게 걸어가는 유지훈의 뒤를 무거운 발걸음의 엄덕대와 박형식이 따랐다.
“그런데 돈 쳐바르면 레벨이 올라가기도 하냐?”
“그런 약이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엄청 비싸서 아무나 먹을 순 없을 텐데요. 그놈 집 부자인데다 외아들이라 돈질 무지하게 했나 봅니다.”
“무지막지한 돈질이 어디로 갔는지 보는 것도 재미있겠구나.”
시험장이 가까워질수록 유지훈의 유쾌함은 강도를 더했다.
당최 영문을 모르는 엄덕대와 박형식은 고개만 갸웃할 뿐이었다.
훈육의 신세계는 또 뭘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