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
“다들 모이라고 해. 계산할 거부터 빨리 끝내자.”
“네? 무슨 계산이요?”
유지훈의 지시에 박형식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저놈들한테 뜯긴 거 돌려받아야 할 거 아냐. 그냥 갈까?”
“아닙니다. 형님. 받아내야죠.”
박형식이 일행에게 전달하는 사이 유지훈은 뱀눈의 웃옷을 뒤적여 지갑을 찾아냈다. 카드 몇 장을 꺼냈다.
어딘가 한 군데씩 썰려 신음하고 있는 깍두기들을 둘러보고는 돈 만지는 놈을 향해 손짓했다.
“뭘 꾸물거리고 있냐? 냉큼 단말기 들고 안 오고.”
발목을 썰린 놈이 데굴데굴 굴러왔다. 공손하게 단말기를 내밀었다.
“나더러 하라고? 너 팔목도 썰렸냐? 썰어줘?”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유지훈이 툭 던지듯 놈에게 카드들을 건넸다.
“비밀번호 알지?”
“비밀번호는···.”
“어디 썰면 알 수 있으려나?”
“아닙니다! 알아내겠습니다.”
놈이 사색이 돼 단말기를 만지작거리더니 환희에 찬 미소를 지었다.
“저희 두목님이 단순하셔서 생일을 비밀번호로 하셨습니다.”
“장하다.”
이윽고 일행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500만 원입니다.”
“360만 원이요.”
“770만 원이요.”
“저는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는데 어쩌죠?”
“그럼 대충 받고 싶은 금액 불러.”
일행이 부르는 금액이 차례차례 이체돼 계좌로 돌아왔다.
여섯 명째 반환할 때 단말기 만지는 놈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잔고가 부족하다고 나오는데요?”
아직 돌려받지 못한 이들이 낙심했지만, 유지훈에겐 명쾌한 해답이 있었다.
“거기 카드 더 있잖아?”
“비밀번호를···.”
“너희 두목 단순하다며! 썰어줘?”
“아닙니다! 역시···. 단순합니다.”
비밀번호는 생일이었다.
나머지 넷도 그동안 뜯긴 돈을 말끔히 돌려받았다. 일행 중 승자는 정확한 금액을 기억하지 못한 이였다.
마지막은 유지훈이 이체받을 차례였다.
“그럼 이제 나한테 이체해야지.”
“선생님 돈은 뜯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수수료! 고생은 내가 다하고, 빈손으로 갈까?”
“아닙니다! 얼마 이체하면 되겠습니까?”
“잔고가 얼마냐?”
“1200쯤 됩니다.”
“그거 다 보내.”
계산도 끝났다.
가까스로 정신줄을 붙잡고 있던 뱀눈은 잔고가 완전히 사라진 순간 욕설을 퍼붓다가 유지훈에게 불꽃 파운딩을 허용했다.
기어코 떡실신하고 말았다.
“이놈이랑 할 일 남았는데···.”
“아직 뭐가 남았습니까? 형님. 그만 고기 드시러 가시죠. 오늘은 제가 쏘겠습니다.”
박형식이 호기롭게 가슴을 탁탁 쳤다.
다만 유지훈의 사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건 당연한 거고. 우선 사냥부터 마저 끝내야지.”
“사냥이요? 또 어디 던전에 가시려고요?”
“빌런 사냥은 끝냈으니까 이제 쥐새끼까지 잡아야 할 거 아냐.”
유지훈이 떡실신한 뱀눈의 머리채를 질질 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엄덕대와 박형식을 비롯한 일행이 어리둥절하며 뒤를 따랐다.
당도한 곳은 용역업체 직원들이 근무하는 던전관리소였다.
사무실로 들이닥친 유지훈이 소리쳤다.
“동작 그만! 다들 양손 들고 책상에서 일어선다. 실시!”
직원들은 어안이 벙벙해 멀뚱멀뚱 쳐다봤다. 초주검이 된 뱀눈의 머리채를 잡은 유지훈의 기세에 눌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신 뭐야?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는 거야?”
직원 중 하나가 인상을 구기며 목청을 높였지만, 유지훈은 한층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대응했다.
“용역업체 직원이라며. 알고 왔으니까 그 입 다물라.”
유지훈이 뱀눈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최근 수신 번호로 전화를 건 것이었다.
삐리리리리리~.
경망스러운 벨소리와 함께 직원 중 하나가 전화를 받았다.
“일단 쥐새끼는 잡았고.”
유지훈이 직원에게 다가가 머리채부터 움켜쥐었다.
“할 말 있냐?”
“그, 그게 무슨···.”
“얼마나 받아 처먹었냐?”
그때 직원들이 유지훈 주위로 모여들었다.
“당신 뭔데 공무집행하는 데 와서 행패야! 콩밥 먹고 싶어?”
“선량한 시민들을 빌런 놈들한테 팔아넘기는 것도 공무집행이냐?”
순간 직원들의 표정에 당황하는 기색이 스쳤지만, 이내 뻔뻔하게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모두 한통속이었지만, 적반하장으로 대응하려는 분위기였다.
“증거 있어? 어디서 누명을 씌우려고.”
“증거도 없이 내가 이러겠냐?”
유지훈이 뱀눈의 휴대폰을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삐리리리리리~.
휴대폰 주인인 직원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어갔지만, 나머지 직원들은 한층 뻔뻔한 발뺌을 택했다. 물러서면 진다고 생각한 양상이었다.
“그게 무슨 증거야? 지인한테 안부 전화도 못 걸어?”
제법 설득력 있는 발뺌이었지만, 유지훈에겐 또 한 장의 히든카드가 있었다. 구르다시피 해서 쫓아온 돈 만지는 놈이었다.
“제가 증인입니다. 여기 직원분이 저희 두목님한테 손님 나오신다고 연락 주셨습니다.”
“무슨 개소리를! 우린 네가 누군지도 몰라.”
“그러시면 곤란하죠. 엊그제 저희가 여러분들 모시고 회식도 했잖아요. 용돈도 드렸고요. 그 돈 봉투 제가 준비한 거였어요.”
“우린 오늘 너 처음 봐. 누군지 알지도 못한다니까!”
“자꾸 그러시면 곤란하다니까요. 영수증도 꼼꼼하게 챙기고, 기념사진까지 찍었는데요···.”
돈 만지는 놈이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들어 보였다.
용역업체 직원들과 뱀눈 졸개들이 어깨동무하고 파이팅을 외치는 순간이 생생하게 포착돼 있었다.
“휴대폰 뺏어!”
직원들이 손을 쓰려 했지만, 유지훈의 벽을 넘을 순 없었다.
뻗은 손은 부러졌고, 들이민 다리는 꺾였다. 어디 한 군데씩 부러진 채 내던져졌고, 집기가 부서진 사무실은 난장판이 됐다.
“이제 계산 들어가야지.”
“무, 무슨 계산···?”
“조무래기랑은 할 말 없고. 사장 오라 그래.”
이윽고 용역업체 사장이 달려왔다.
투실투실한 체구에 볼살이 축 처진 중년남이었다. 볼살에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게 선량한 시민들을 빌런에게 팔고도 남을 면상이었다.
물론 얌전히 나타나진 않았다. 떡대들 대여섯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너희들 뭐야!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이놈의 나라엔 내가 누군지 아냐 묻는 인간이 왜 이리 많아? 알아. 용업업체 사장이잖아.”
“이 자식이! 일단 제압해!”
기세등등하게 떡대들에게 지시했지만, 제압이 될 리가 없었다.
떡대들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지훈이 움직였다. 유령처럼 표홀히 떡대들 사이를 휘저었다.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때, 떡대들은 턱 또는 코 아니면 광대뼈가 부서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
“자꾸 이러면 계산만 복잡해진다.”
“무슨 계산! 너희들 약탈자야? 빌런이야?”
“빌런은 그쪽이랑 더 친한 거 아니었어? 선량한 시민 팔아넘기면서 빌런이랑 친목 단단히 다졌잖아. 해 처먹기도 많이 해 처먹고. 그거 계산하자는 말이야.”
“이게 어디서 개수작이야! 증거 있어?”
사장은 적반하장의 철면피 신공으로 맞섰지만, 직원에게서 나온 한 마디에 털썩 주저앉아야 했다.
“증거···. 있는데요.”
“뭐?”
“있어요. 증거. 빼도 박도 못하는.”
본격적인 계산의 시간이 찾아왔다.
사장은 넙죽 엎드려 처분을 기다렸다.
“저희가 어떻게 해드리면 작게나마 위안이 될 수 있을지···?”
“돈이지 뭐. 그거 말고 그쪽이 딱히 할 수 있는 게 뭐 있나?”
“그럼 얼마나···?”
금액은 유지훈이 정하기 힘들었다. 일행에게 정하도록 넘겼다.
박형식 주재로 회의하더니 1인당 1000만 원으로 책정했다.
“그건 좀 많은 것 같은데···.”
“그럼 1500.”
“당장 그만한 현금을 동원할 능력이···.”
“그럼 2000. 신용대출이라도 받아.”
사장은 입을 다물었다. 더 말해봤자 나갈 돈만 늘어나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돈 만지는 놈의 현란한 단말기 작동 덕분에 계산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길었던 사냥이 마무리된 순간이었다.
이어지는 건 칭송이었다.
“오늘 우리가 은인을 만났네.”
“은인이 뭡니까. 하늘에서 내려주신 귀인입니다.”
그럴 만도 했다. 사냥에 참가한 이들은 딱히 한 것도 없이 쫓아다니기만 하면서 1년 치 수입에 버금가는 돈을 벌었다.
“형식 씨. 아까는 내가 말이 심했습니다. 다음번에 귀인께서 사냥 참가하실 때 저도 꼭 불러주세요.”
“그런 건 고기 먹으러 가서 상의하시죠.”
“고기는 제가 사겠습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요.”
박형식은 참 빨리 배우는 사내였다.
***
“호오!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친구였군요.”
신화그룹 회장의 차남 이자걸이 턱을 쓰다듬으며 감탄을 토해냈다.
냉철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굳은 표정으로 그와 마주하고 있었다.
신화그룹 미래전략실장 조준성. 그룹 전체를 총괄하며 전략을 수립하는 조직의 수장이었다.
“저희가 파악하기로는 상상하시는 것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겠죠. 어글리 썬더에, 스톤 헤드에, 호광길드 마스터 박찬수 외에도···. 힘깨나 쓴다는 자들을 손바닥 뒤집듯이 해치웠다는 말씀이니. 그것도 비각성자로 판명된 친구가요.”
이자걸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따닥따닥 두드리며 뭔가 생각하더니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김연학 본부장도 그 친구한테 당한 거 맞습니까?”
“정황상 그렇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물증은 없습니다.”
“그러게요. 호광길드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싹 치워진 상태였다고 했으니. 혹시 유지훈이란 친구가 청소부까지 동원할 수 있는 걸까요?”
“그렇진 않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만. 배후에 어떤 조직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습니다. 다각도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흐음···.”
이자걸이 침음을 흘렸다.
“뭔가 있을 듯싶어서 자웅이한테 자극하지 말라고 했던 건데요. 기어코 건드리고 말았네요.”
“정황상 그렇습니다.”
“심지어 또 건드리려고 하고 있고요. 부속실 요원까지 동원해서요.”
“표면적으로는 김연학 본부장을 해친 빌런 조직에 대한 복수를 내걸고 있긴 합니다만. 궁극적으로 유지훈까지 겨냥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웅이가 악수를 반복하는군요. 5년 전부터.”
이자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그룹에서 추진하는 사안에 영향이 있을까요? 실장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현재 유지훈의 움직임만 봐서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있더라도 극히 제한적이긴 할 텐데···.”
“좀 더 자극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룹 차원에서 제어하기 힘들 정도일까요?”
조준성의 표정이 굳어졌다.
“신화의 역량은 뛰어납니다. 다소 시끄러워질 순 있겠지만, 제어 자체는 가능할 것입니다.”
“하긴. 실장님께서 지휘하실 텐데, 제어가 안 되는 게 이상한 일이겠죠. 그동안 실장님의 업적들을 보면요.”
“대단할 것도 없었습니다. 신화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이자걸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최선은 실장님께서 나서지 않도록 하는 거겠죠. 조금이라도 잡음이 생기는 건 좋지 않잖아요.”
조준성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이자걸이 말을 이어갔다.
“부속실의 개입을 최소화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부속실은 이자웅 대표 산하 조직이라···.”
“원천적으로 동원을 막을 순 없죠. 대신 투입되는 인력은 조정할 수 있잖아요. 실장님께서 부속실장에게 그 정도 영향력은 있으시죠?”
“안 그래도 관련해서 계속 커뮤니케이션하고 있습니다.”
“핵심 인력은 투입되지 않도록 힘써주세요. 보아하니 손실이 적지 않을 텐데, 어쩌면 모두 잃을 수도 있고요. 핵심 인력은 지켜야죠.”
“핵심 인력을 배제하면 이자웅 대표의 계획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신화길드의 타격이 작지 않을 텐데···.”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이자걸의 입가에 드리워진 묘한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그렇다고 유지훈이라는 친구의 기세를 너무 등등해지게 할 순 없겠죠. 적당히 제어 가능한 수준으로 관리해둬야죠.”
“무슨 묘안이라도···?”
“마철진 초인이랑 자리 한 번 만들어주세요.”
조준성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마철진. 레벨 8의 각성자. 대한민국을 통틀어 다섯 명에 불과한 초인 중 하나였다. 신화길드와 협력 관계이긴 했지만, 통제를 따르진 않았다. 오히려 공동 작전에서 신화길드가 마철진의 지휘를 따랐다.
“마철진 초인을 움직이시려는 겁니까? 기업의 활동에 초인을 동원하려면 정부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움직이다뇨. 마철진 초인이 제가 움직이란다고 움직일 분인가요?”
“그럼···?”
“상의 좀 드리고 싶어서요. 현 정세에 대해 말씀드리고, 고견도 청해 듣고요. 평소에 마철진 초인이 김연학 본부장을 아꼈다는 말도 들은 것 같아서요. 관련해서 조언을 구하는 것도 괜찮을 듯싶네요.”
이자걸이 입꼬리를 한껏 말아 올리더니 당부 하나를 추가했다.
“국가안전본부의 강은영 팀장도 세심히 지켜봐 주세요. 유지훈이라는 친구를 골치 아픈 존재로 만들 수 있는 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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