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3)
“어떻게 된 거예요?”
허겁지겁 호광길드에 도착한 강은영이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대외협력팀 인원들은 철수하려던 참이었다.
“직접 확인해.”
각성자관리국 대외협력팀 팀장 박창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깨끗했다. 시신이고 부상자고 전혀 없었다. 심지어 책상 등 집기까지 싹 사라진 상태였다. 호광길드 건물이 완전히 비어있었다.
“그나저나 얘들 야반도주라도 한 거냐? 엊그제도 통화했는데, 아예 전화도 안 받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뭐가 이런 일이야? 너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냐? 아니 우리 팀한테 무슨 불만이라도 있었던 거야?”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뭐야? 웬 난데없는 똥개 훈련이야?”
“선배 나랑 잠시 얘기 좀.”
강은영이 구석진 조용한 곳으로 박창진을 데리고 갔다.
그녀에게 박창진은 절친한 선배였다. 국가안전본부 내에서 그나마 몇 안 되는 흉금을 터놓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사망자로 여겨졌던 17호 던전 폭발사고 피해자가 보상 문제로 호광길드를 방문해 벌인 일들을 소상히 전했다.
신화길드 타격본부장을 비롯한 대원들 관련해서도 빼놓지 않았다.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조용히 좀 말해요. 누가 듣겠어요.”
“하아! 레벨 7 김연학이가 비각성자한테 맞아 죽은 걸 믿으라고? 대한민국에 김연학이 때려죽일 수 있는 사람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해. 그런데 비각성자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내가 왜 선배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럼 다 어디 간 거야? 김연학이도 없고, 호광길드 마스터 녀석도 없잖아. 호광길드 직원도 서른은 될 텐데 하나도 안 보이고.”
“혹시 신화길드에서 정리한 거 아닐까요? 흔적을 지우려고요.”
박창진이 눈매를 좁혔다.
“가능성이 작아. 우리 네 전화 받고 바로 왔거든. 30분도 안 걸렸어. 신화길드에서 상황 파악하고 와서 정리할 시간은 안 돼.”
“근처에 대기하고 있다고 왔을 수도 있잖아요.”
“엄청난 인원이 동원됐을 거야. 시신만 처리한 게 아니라 건물 전체를 싹 치웠잖아. 신화길드에서 그 정도 인원을 대기시켰으면 우선 너부터 처치했을 거야. 그 요상한 피해자랑.”
“그렇긴 한데···.”
그래도 강은영의 의심은 신화길드를 향했다. 아니면 그룹 차원에서 나섰을 수도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네 말이 사실이라면 상황이 고약해지겠는데?”
박창진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피해자의 행적을 본부에서 흘렸다는 의미잖아. 신화길드가 됐든, 어디가 됐든.”
“그건 확실한 것 같아요.”
“그 의미는 17호 던전 사고 관련된 의혹들이 사실일 수 있다는 거고. 신화 쪽만 문제가 아니라 본부에도 결탁한 자들이 있다는 뜻이고.”
강은영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겐 아픈 손가락이었다. 17호 던전 사고 관련해서 물고 늘어졌다가 커리어가 완전히 망가졌다. 손꼽히는 인재로 인정받던 그녀가 지금은 퇴출 직전까지 몰렸다.
“의심 가는 사람은 있어?”
“뭐가요?”
“정보 흘린 사람.”
“심증만 있어요. 그런데 관련 보고가 어디까지 올라갔는지 모르니 확신할 순 없어요.”
“그렇다고 지난번처럼 들이대진 말아라.”
박창진이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에 다치면 챙겨줄 사람도 없다. 본부에서 쫓겨나는 건 둘째 치고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어.”
“그래야겠죠. 저도 알아요.”
말투는 처연했지만, 눈빛만큼은 결의에 차 있었다.
박창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또 들이박을 기세구먼. 패기 하나는 참 오지다.”
“선배한테는 폐 안 끼칠게요.”
“끼쳐도 악착같이 피할 거다. 난 부양가족이 많다.”
실실 웃던 박창진이 뭔가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나오다가 고 국장 만났다.”
“저희 국장님을요?”
고규대 던전관리국 국장을 지칭했다.
박창진이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모르게 네 연락받고 나간다고 말했지 뭐겠냐. 너 보면 잡아 오라고 하더라. 말없이 사라져서 연락도 안 된다고.”
“아···.”
휴대폰을 살펴보니 고규대로부터 세 통이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유지훈의 활극 중에 와서 인지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른 말씀은 없으셨어요? 낌새가 이상하다거나.”
“몰라. 네가 하도 급하다고 난리 쳐서 서둘러 나오느라 제대로 못 봤네. 봐도 몰랐을 거야. 그 양반 원체 포커페이스잖냐.”
박창진이 앞장서 갔다.
“난 우리 팀 애들이랑 같이 들어갈게. 너도 따라와라. 이번엔 어디로 새지 말고.”
“알겠어요.”
강은영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뭔가 흔적이라도 남지 않았나 찾으려던 찰나 돌연 뭔가 떠올랐다.
다급하게 박창진을 불렀다.
“선배. 혹시 화공대법이라고 들어봤어요?”
“화공대법? 그거 무협 소설에 나오는 용어인데. 너 요즘 무협 소설 읽냐? 아니면 무협 게임이라도? 하긴 일 없을 때 무협 소설이나 무협 게임 만한 것도 없지.”
“그럼 성명절기도 무협 소설에 나오는 말이에요?”
“그, 그렇지. 그 사람의 이름을 걸 정도로 대표적인 무공이라는 뜻이야. 요즘 말로 하면 트레이드 마크라고 하면 되려나.”
강은영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이어갔다.
“화공대법이 뭐예요?”
“화공대법이라···. 어떻게 설명해야 무협 초심자 강은영 팀장 머릿속에 쏙쏙 들게 할 수 있을까.”
박창진은 어마어마한 무협 소설 애호가였다. 독파한 무협 소설만 수백 권에 이를 정도였다. 장황한 설명이 줄줄 쏟아져 나왔다.
“화공대법은 천룡팔부라는 무협 소설에 등장하는 무공으로 성수노괴 정춘추의 독문 무공이지. 상대의 내력에 악영향을 미치는 독공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데.”
박창진이 알아듣겠냐는 눈짓을 보낸 뒤 설명을 이어갔다.
“원래 근원은 소요파의 북명신공에서 어쩌고저쩌고. 소요파 제자였던 정춘추가 사부를 배신하고 얼씨구절씨구. 북명신공은 훗날 소오강호의 흡성대법으로 계승돼서 주저리주저리···.”
강은영은 당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눈만 깜빡이다가 박창진을 멈춰 세웠다.
“그래서 화공대법이 뭘 어떻게 한다는 거예요?”
“아. 내 설명이 좀 심오했나? 요약하면 내력을 사라지게 만드는 거야. 진기를 묶어서 흐름을 막아놓는다는 해석도 있고.”
“여기서 내력은?”
“흔히들 말하는 내공이지. 요즘으로 치면 마나.”
순간 강은영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거였구나! 선배 먼저 들어가세요!”
“야! 너도 들어가야 해. 큰일 나.”
강은영이 차를 향해 내달렸다. 부리나케 시동을 켰다.
“아. 그런데 지금 이 인간이 어디 있는 줄 알고.”
휴대폰을 꺼냈다.
조금 전에 유지훈이 휴대폰을 구입했으니 연락할 방법도 있었다.
“아차! 전화번호를 안 물어봤네.”
기껏 수행비서 노릇을 하며 개통까지 도맡았는데 말짱 헛일이었다.
다행히 마지막 수단이 떠올랐다. 주머니를 뒤적였다. 메모지 한 장을 꺼내 펼쳤다.
유지훈의 유일한 가족, 여동생 유지연의 주소와 연락처였다.
“굳이 집을 장만한 다음에 알려달라는 이유가 뭔지. 안 그래도 될 텐데. 참 이상한 사람이야.”
아쉬운 대목이 있다면 전화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집을 계약한 다음 연락한다며 명함을 받아갔으니.
“그래. 일단 본부로 복귀하자. 깨지고 있으면 연락 오겠지. 고 국장 또 뭐라고 지랄하려나.”
무거운 마음으로 사무실로 향했다.
***
유지훈은 몹시 언짢았다. 기대에 부풀었던 게 불과 1시간 전이었기에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백화점에서 쇼핑 도중 강은영이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순간부터 핀트가 살짝 어긋나기 시작했다.
옷 입어보러 탈의실에 들어간 틈을 타 도망쳐 버리다니. 남자 혼자 옷 사러 다니는 것만큼 뻘쭘한 일도 없는데.
운전기사도 있는 김에 넉넉하게 여러 벌 장만하려던 계획도 접어야 했다. 여기저기 다닐 곳도 많은데 주렁주렁 짐을 들고 다닐 순 없었다.
당장 입을 옷과 백팩 그리고 트래킹화만 구매해 착장한 뒤 백화점을 나섰다. 나오는 길에 거울을 보니···. 등산객 아저씨였다.
‘이래서 옷은 여성분과 함께 사야 하는 건데···.’
이제 가장 중요한 집을 사야 할 차례였다. 그래야 당당하게 동생을 찾아갈 수도 있을 테니. 5년 만의 해후. 가슴이 떨렸다.
동생아 그동안 고생 많았지? 집 날렸다고 오빠 원망도 많이 했고. 오빠 잘못이 아니었다. 집도 한층 번듯한 놈으로 찾아왔어.
집을 사려고 보니 앞서 필요한 게 있었다.
‘집을 보러 다니려면 차가 한 대 있어야겠군.’
넉넉한 주머니 사정 덕분에 신차에 대한 욕심도 없지 않았지만, 출고까지 한두 달은 걸릴 터라 중고차를 사기로 했다.
태블릿 PC를 켜고 중고차 매매 사이트에 접속해 탐색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쏙 들어오는 매물을 발견했다.
‘내가 꿈에 그리던 차 아니야! 한때 인생 목표였는데.’
독일 P사의 2020년식 중형 SUV였다. 2년밖에 안 된 데다가 주행거리도 8000km에 불과했다. 새 차나 다름없었다.
가격은···. 3000만 원? 착하다 못해 천사였다.
자선사업 하시나?
“그래! 너로 결정했어!”
누가 채가지나 않을까 부리나케 전화했다.
[고객님 운 좋으십니다. 매물 올리자마자 바로 연락 주셨네요. 물건 잡아놓겠습니다. 얼른 오십시오.]
부푼 가슴을 부여잡고 거래 장소로 달려갔다.
8면 남짓의 주차장과 컨테이너 사무실로 이뤄진 곳이었다. 일단 사이트에서 본 P사 SUV는 보이지 않았다.
“전화 주신 고객님이십니까? 카OO 찾으시는.”
능글능글한 외모의 30대 사내가 사무실에서 나와 반겼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차는 안 보이네요?”
“귀한 매물을 아무 데나 둘 수 있나요. 잘 모셔둬야죠. 흐흐흐.”
사내가 느물느물하게 웃더니 물었다.
“고객님 혹시 각성자는 아니시죠?”
“검사는 받아봤는데 아니라고 나오더군요. 그건 왜 묻는 거죠?”
“저희가 각성자 놈들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꼴 보기 싫어하거든요. 이렇게 좋은 혜택을 각성자 놈들이 보게 할 순 없죠. 힘없는 서민들을 위한 가격입니다.”
“그건 마음에 드네요.”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사내가 질문을 추가했다.
“그리고 그 가격은 현금 거래일 때만 해당하는 건데요. 사이트 내용 확인하셨나 모르겠네요?”
“봤어요. 안 그래도 현금 찾아왔어요.”
유지훈이 어깨에 둘러멘 백팩을 가리켰다.
사내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잘 하셨습니다. 그럼 거래 시작해볼까요? 따라오시죠. 고객님.”
왠지 ‘고’가 ‘호’로 들리는 기분이었지만, 유지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내의 뒤를 따랐다.
이때가 본격적으로 틀어진 순간이었다. 유지훈의 기분이 틀어졌고, 사내의 운명은 한층 거세게 뒤틀어진.
“고객님. 이 매물은 어떠십니까? 사실 카OO보다 저희가 미는 게 이 매물인데 말씀입니다.”
사내가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엉뚱한 매물을 권하기 시작했다.
“됐어요.”
“그러지 마시고 시운전이라도···.”
“아닙니다.”
“그럼 이 매물 한 번 보시죠.”
“됐다니까요.”
유지훈은 철벽으로 대응했다.
능글능글 웃어대던 사내의 표정도 굳어지기 시작했다.
“카OO은 여기 없습니다. 모시고 가겠습니다.”
사내가 유지훈을 차에 태우고는 어디론가 이동했다.
바로 P사 SUV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진 않았다. 차를 세울 때면 여지없이 엉뚱한 차가 있었다.
“정말 고객님을 위한 마음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 매물 신중하게 생각해 보시죠.”
“필요 없습니다.”
“저희가 손해 단단히 보면서 내놓은 매물입니다. 고객님 인상이 좋아서 보여드리는 거예요.”
“손해 보지 마세요.”
서너 차례 엉뚱한 곳으로 끌려다닌 뒤 유지훈이 버럭 했다.
“이봐요! 나 바쁜 사람이에요. 다른 차 살 생각 없다고요. 카OO 없으면 말해요. 그냥 갈 테니까.”
“아이고. 우리 고객님 성미가 급하시구나. 알겠습니다.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런데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닐 텐데요.”
차에 태우는 사내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모시고 가는 게 아니라 끌고 가는 듯한 양상이었다.
이윽고 도착한 곳. 외진 공터였다. 역시 P사 SUV는 보이지 않았다. 너저분한 차들 대여섯 대만 눈에 띄었다.
그리고 험상궂은 외모의 떡대들 여남은 명. 나라 잃은 표정으로 망연자실 주저앉아 있는 사내 두엇의 초췌한 표정이 생생했다.
사내가 잡아채듯 유지훈을 차에서 끌어 내렸다.
“그러길래 좋게좋게 말씀드릴 때 알아들으셨어야지. 이렇게 되면 모시고 다닌 내 수고비가 찻값보다 더 나오게 생겼잖아. 고객님.”
사내가 비릿하게 웃었고, 떡대들이 뚝뚝 목을 꺾으며 다가왔다.
유지훈이 피식 웃었다.
“장난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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