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1)
신화길드에 긴급 임원 회의가 열렸다.
보통 긴급회의는 길드 마스터의 주재하에 열렸지만, 이번엔 신화그룹 고위 인사가 찾아와 회의를 소집했다.
신화그룹 회장의 차남 이자걸이었다. 신화금융 대표이사를 맡고 있기도 했다.
“일을 키우지 않길 바라는 게 그룹의 입장입니다.”
이자걸은 계산에 밝고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세련된 외모에 아랫사람들에게도 깍듯이 예의를 갖췄기에 그룹 내 평판이 좋았다.
물론 이면에 기업가로서 냉혹함은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았다. 덕분에 차남임에도 팽팽한 후계자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일을 키우지 않는다니. 신화길드 영역에 와서 난동을 부린 놈을 오냐오냐해서 보내잔 말이야?”
신화길드 마스터 이자웅이 버럭 했다.
신화그룹 회장의 삼남. 신화건설 대표이사이면서 신화길드 마스터를 겸직하고 있었다.
이자걸과 달리 우락부락한 외모에 성미도 거칠었다. 레벨 5의 각성자로 형제 중 가장 상위 레벨이었다.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능력이 탁월해 건설과 길드 쪽과 잘 어울렸다.
“오빠가 일을 너무 키운 감이 있지. 어글리 썬더를 보내는 건 아니었어. 신화랑 얽혀선 안 되는 놈이야.”
신화그룹 회장의 막내딸 이나연. 신화패션과 신화엔터테인먼트를 맡고 있었다. 빼어난 용모 덕분에 소속 배우나 가수 못지않은 인기 셀럽으로도 명성이 높았다.
레벨 4의 각성자로 알려져 있기도 했다. 이자웅에 비해 한 단계 아래로 여겨졌지만, 실력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았다는 설도 있었다. 레벨 5를 넘어 레벨 6에 근접했다는 소문이었다.
“확실히 처리하려고 그랬던 거잖아! 그럼 우리 길드 인력으로 해결하라고? 그런 지저분한 일들 처리하려고 빌런 놈들한테 약 쳐놓은 거 몰라서 그러는 거야?”
“제대로 처리가 안 됐으니 문제 아니겠어?”
“딴따라들이랑 어울리기나 하는 계집년이 뭘 안다고!”
분위기가 험악해지려 하자 이자걸이 나서 만류했다.
“우리끼리 왈가왈부할 일이 아닙니다.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제대로 된 대응책을 세워야죠. 김창용 건은 어떻게 된 겁니까?”
“연락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신화길드 전략이사 장중호가 대답했다.
“두더지의 제보를 받고 바로 김창용 쪽에 의뢰했는데 소식이 없습니다. 요원들을 현장으로 보냈지만, 단서를 찾지 못했습니다.”
“김창용이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만에 하나 국가안전본부 쪽에 잡히더라도 신화와 연루됐다고 하진 않을 겁니다.”
“그래도 썩 좋지만은 않은 시그널이군요. 레벨 6의 각성자가 해결하지 못한 상대라는 의미니···.”
이자걸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이자웅이 무시하듯 코웃음을 쳤다.
“흥! 뭘 그렇게 버러지 같은 비각성자 놈한테 겁먹고 그래? 던전관리국에서 동행했겠지. 김창용은 버러지 놈만 신경 쓰다가 당한 거고.”
“던전관리국에서 개입했단 말입니까?”
부연 설명은 장중호의 몫이었다.
“두더지의 전언에 따르면 탐사 3팀장이 그쪽으로 간 모양입니다.”
“탐사 3팀장이면 강은영, 레벨 5의 각성자 아닙니까? 김창용의 상대는 아닐 텐데요?”
이자걸의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추가 병력이 동원된 점도 배제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더 문제로군요. 두더지의 통제에서 벗어난 움직임이었다는 의미니까요.”
장중호의 대답에 이자걸의 눈빛이 한층 깊게 가라앉았다.
두더지는 신화그룹에서 국가안전본부 내에 심어둔 고위 인사를 의미했다. 신화그룹을 위해 스파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신경 쓸 거 없어. 정리하라고 따끔하게 일러뒀으니까.”
이자웅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이자걸은 조심스러웠다.
“유념해야 할 부분입니다. 강은영은 5년 전에도 신화그룹을 향해 날을 세웠습니다. 쳐내려 했지만, 좌천으로 마무리됐죠. 국가안전본부에서 버릴 수 없는 인재로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뭐해. 퇴출 대상자 집합소까지 몰렸는데. 곧 쫓겨날 거야.”
“그래도 유의해야 합니다. 그룹 차원에서 추진해온 10년 대사가 마무리 단계입니다. 떨어지는 낙엽 하나도 조심해야 할 시점이에요.”
“돈이나 주무르는 형이나 조심하든가. 이쪽은 밀어붙일 땐 과감하게 끝장을 봐야 하는 동네야. 형 같은 샌님한테는 어울리지 않겠지만.”
이자걸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빙긋 웃었다.
“그런 길드 마스터의 입장도 십분 이해합니다. 다만 이번엔 그룹 전체의 방향을 따라주길 바랍니다.”
이자걸의 시선이 장중호를 향했다.
“피해 당사자의 요구가 얼마라고 했죠?”
“19억5000만 원 정도입니다. 5억 원은 호광길드 내부 자금으로 지급했고, 나머지는 신화길드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으로 합시다. 그리고 그룹 차원에서도 위로금을 지급하도록 하세요.”
회의가 마무리됐다. 인력지원팀장 유형석이 직접 호광길드를 방문해 절차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이자웅은 불만스러웠지만, 그룹 차원의 방침을 거부할 순 없었다. 대신 이자걸이 신화길드를 나선 뒤 조용히 타격본부장을 불렀다.
타격본부장 김연학. 레벨 7의 각성자. 신화길드 최고 레벨 헌터였다.
“본부장은 마음에 들어?”
“뭐가 말씀이십니까?”
“이렇게 처리하는 거 말이야. 건방지게 신화길드를 건드린 놈한테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고.”
“저는 지시를 따를 뿐입니다.”
“내가 지시하면 따르겠다는 의미로 들리네?”
김연학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자웅이 만족스럽다는 듯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좋아. 생각 같아서는 두 양반 중 하나를 투입하고 싶은데. 번거로워질 수 있어서 김 본부장한테 맡길게.”
이자웅이 언급한 두 양반. 신화길드가 동원할 수 있는 최강의 전사들을 의미했다. 레벨 8의 각성자 탁세훈과 마철진.
소위 초인이라 불리는 레벨 8의 각성자는 국가 자원으로 분류되는 관리 대상이었다. 전세계에 200명이 안 되는 절대 강자들로 국력을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은 5명의 초인을 보유했다. 장관급의 신분을 보장했고, 대기업 CEO 수준의 연봉을 지급했다. 정부 차원에서 귀족 예우를 했다.
다만 초인은 길드 소속이 될 수 없었다. 정부 승인하에 길드와 협력해 임무를 수행하게 돼 있었다. 정부 통제를 넘어선 길드의 거대 세력화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신화길드는 엄청난 자금을 동원해 탁세훈 마철진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었다. 사실상 신화길드 소속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다만 이들을 임무에 투입하려면 정부를 거쳐야 했다. 이들 다음으로 강력한 카드가 김연학이었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인력관리팀장이 일 마치는 대로 적당히 손 좀 봐줘. 죽일 필요까진 없는데, 굳이 힘 조절은 하지 말고.”
“보상은 회수하는 것으로 합니까?”
“뭐 하러. 몇 푼이나 한다고.”
김연학이 본부로 돌아가려 할 때 이자웅이 추가로 지시했다.
“아! 가면 국가안전본부 애들 몇 있을지도 몰라. 걔들도 처리해. 적당히 알아서 하면 두더지 쪽에서 정리할 거야.”
김연학의 눈매에 힘이 들어갔다.
살인 명령이었다. 보상을 요구한 녀석과 국가안전본부 요원들 모두. 만에 하나 문제가 됐을 때를 대비해 에둘러 지시한 것이었다.
확실히 처리해야 했다. 목격자가 될 수 있는 인물들까지.
서둘러 본부로 돌아와 인원을 꾸렸다. 네 개 타격대의 에이스 여덟을 추려 출격에 나섰다.
***
호광길드 마스터 박찬수는 신화길드에 연락을 취한 이후 연신 안절부절못했다.
20억 원은 호광길드 연 매출의 30%에 육박하는 금액이었다. 순익으로 치면 90%에 달했다. 매출의 20%를 신화길드에 상납해야 하는 점을 감안하면 올 한 해 사업은 완전히 망치는 셈이었다.
문제는 호광길드가 신화길드 산하 길드 중 성과가 3년 연속 최하위라는 점이었다. 자칫 길드 폐쇄로 이어질 수 있는 사안이었다.
승인을 요청하면서 은근히 거절을 바랐다. 신화길드에서 해결해주겠다는 답이 들려오길 원했다.
왠지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듯했다. 와서 당사자 면담 후 승인하겠다는 뉘앙스로 들렸다.
이제 방법은 하나였다. 신화길드에서 오기 전 놈을 처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마나를 회복해 블레스트 스피어만 구사할 수 있다면···.
국가안전본부 팀장이 걸리긴 했지만, 여차하면 한꺼번에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저질러 놓고 신화길드에 수습을 요청하면 못 본 척하진 않을 터였다.
그런데 마나의 준동이 감지되지 않았다. 아무리 용을 써도 몸속에선 피식피식 바람 빠지는 느낌이 전부였다.
“뭐 하는 거야?”
유지훈이 비실비실 웃으며 조롱하듯 물었다.
박찬수는 애써 시선을 피하면서 은밀히 마나를 끌어모으려 했다. 소용없었다. 헛일이었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몰라서 물어? 쥐어팼잖아. 다시 알려줘? 좀 더 때려줄까?”
“그, 그런 게 아니라···.”
“알려고 하지 마. 다쳐. 그리고 앞으로 착하게 살고. 사람들은 물론이고, 몬스터들한테도 친절하게.”
박찬수는 어렴풋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일시적일지 영구적일지는 모르겠지만, 마나의 소멸이었다. 아울러 특성까지 사라졌다.
박찬수가 나라 잃은 표정을 지을 때 강은영이 유지훈에게 물었다. 그녀 또한 대략 상황을 눈치챈 상황이었다.
“혹시 디버프 계열의 특성을 보유한 건가요?”
“디버프? 그건 또 뭐야?”
“각성자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약화시키는 특성이죠.”
“몰라. 그런데 나는 비각성자잖아. 특성이 있을 수 있어?”
“검사 결과가 잘못됐을 수도 있잖아요.”
“검사라는 게 마나를 측정하는 거 아니었나? 나한테서는 마나가 전혀 측정되지 않은 거고?”
“그건 맞아요. 그런데 유지훈 씨 격투 실력이 예사롭지 않아서요.”
“수십 년에 걸친 뼈를 깎는 단련과 죽음을 넘나든 실전 경험 덕분이야. 굳이 하나 더하자면 화공대법이라고 하던가?”
“수십 년은 무슨···. 그나저나 화공 어쩌고는 또 뭐예요?”
강은영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나도 잘 몰라. 아니라고 했는데 기어코 그렇다고 우기더라고.”
“누가요?”
“있어. 고지식한 양반들. 대부분 맞아서 떡이 됐지.”
“떡이요?”
“응. 떡은 사람이 될 수 없지만. 사람은 떡이 될 수 있더라고.”
“당최 무슨 소리인지···.”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단정한 양복 차림의 중년 사내와 세련된 정장의 미녀 그리고 전투복을 갖춘 사내 셋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신화길드에서 나왔습니다.”
중년 사내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유지훈을 바라봤다.
“유지훈 씨 맞으십니까?”
“그런데요.”
“신화길드 인력관리팀장 유형석입니다.”
유지훈에게 명함을 건네고는 강은영에게도 눈인사를 건넸다.
“강 팀장님은 저와 구면이지요?”
“의외네요. 승인만 해주시면 될 일을 팀장님이 직접 오시고.”
“유지훈 씨가 고초를 겪은 데에 신화길드의 책임도 없다고 할 수 없어서요. 당연히 직접 뵙고 인사를 드려야 마땅하지요.”
유지훈이 삐딱한 시선으로 전투복 사내들을 쳐다봤다.
“인사하러 오신 것 치곤 분위기가 영 험악하네요.”
“죄송합니다. 보안 관계상 길드를 방문할 때엔 전투 요원이 동행하는 게 절차라서요.”
유형석이 전투복 사내들에게 눈짓했다.
사내들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유형석이 정장 미녀에게 손짓했다.
“이쪽은 신화길드 법무팀 하지혜 변호사입니다. 보상 절차 마무리를 진행하러 함께 왔습니다. 이제 변호사님께서 말씀하시죠.”
하지혜가 브리프 케이스에서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호광길드에서 요청한 자금 사용 승인은 완료됐습니다. 유지훈 님 계좌에 입금됐을 겁니다. 확인하시고 여기 서명 부탁드립니다.”
유지훈이 강은영을 바라봤고, 강은영은 툴툴거리며 태블릿 PC를 꺼내 조회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유지훈이 서류에 서명하자, 하지혜가 서류 한 장을 또 꺼냈다.
“신화길드 차원에서도 사죄 차원에서 준비했습니다. 사내 규정에 따른 금액이라 약소하긴 합니다. 작게나마 위로가 되길 바라겠습니다.”
“오호! 뭐야. 신화길드 듣던 거랑 다르잖아.”
“입금 확인하신 뒤 서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공돈인데 확인은 뭐하러.”
유지훈이 쓱쓱 서명을 마쳤다.
유형석과 하지혜가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앞으로 유지훈 씨 앞날에 좋은 일만 있길 기원하겠습니다.”
유형석과 하지혜가 사무실을 나섰고, 유지훈도 일어설 채비를 갖췄다. 두둑해진 잔고 덕분에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갑자기 사무실 밖이 소란스러웠다. 비명이 난무했다.
“또 뭐야? 몬스터라도 쳐들어온 거야?”
벌컥 사무실 문이 열렸다.
우람한 체구에 각진 얼굴의 장년 사내가 천천히 사무실로 들어섰다.
“상을 줬으니, 이제 벌을 내릴 차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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