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되찾다 (1)
호광길드에 도착했다.
5년 만이었다. 심정적으로는 50년 만이었고. 위치는 그대로였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예전엔 5층 건물의 두 개 층만 사용했지만, 지금은 건물 전체가 호광길드의 영역이었다.
사무실도 리모델링을 마쳐 한층 고급스러워졌다. 초현대식 IT업체 사무실을 연상케 하는 세련된 모습이었다.
“내 피 같은 집 뺏어가서 사무실 잘 꾸며놨네. 개자식들.”
유지훈은 속이 쓰렸지만,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사무실이 이토록 훌륭한 걸 보니 길드에 자금이 풍족할 테고, 집을 되찾고, 보상금이랑 퇴직금 받아내기 어렵지 않으리라 여겼다.
적어도 돈 없으니 배 째라고 나올 일은 없을 테니.
그런데 옆에 강은영이 있었다.
“왜 쫓아 온 거야? 혼자 오겠다고 했잖아.”
“쫓아오다뇨. 말은 바로 해야지. 내 차로 내가 운전해서 왔잖아요. 내가 유지훈 씨를 데리고 온 거라고요.”
“태워주기만 한다며?”
“태워준 다음에 가겠다는 말도 안 했어요.”
호광길드를 향해 유지훈이 휘적휘적 걸어갈 때, 강은영은 옆에서 슬금슬금 차를 몰고 따라갔다.
“걸어가면 한 시간도 더 걸릴 텐데요.”
“아무리 그래도 안 넘어가. 혼자 갈 거야.”
“그러지 말고 타요. 나도 같은 방향으로 가요.”
“그럼 태워주기만 하는 거다.”
안 그래도 택시비라도 빌릴 걸 아쉬워했던 유지훈은 태워주기만 하겠다는 약속을 믿고 냉큼 차에 올라탔다.
그 결과가 옆에 졸졸 따라붙은 강은영이었다.
“방향만 같다며?”
“맞잖아요. 같은 방향. 나도 호광길드에 볼일 있어서 온 거예요.”
“자꾸 따라붙어도 소용없다니까. 나 그쪽이랑 같이 안 해.”
“누가 따라붙었다는 거예요. 유지훈 씨는 유지훈 씨 일 봐요. 나는 알아서 내 일 볼 테니까.”
“나 원 참···.”
무시하기로 하고 길드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 데스크의 직원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총무부장님 좀 만나러 왔습니다.”
“약속은 돼 있으십니까?”
“약속은 없는데···.”
“약속이 없으면 만나실 수 없습니다.”
안내 직원이 매몰차게 돌려보내려 할 때 불쑥 강은영이 나섰다. 신분증을 꺼내 들이밀었다.
“던전관리국에서 나왔습니다.”
“아! 그러시면···.”
안내 직원이 흠칫 놀라더니 게이트를 열어줬다.
“3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강은영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게이트를 통과했고, 유지훈이 냉큼 뒤를 따랐다.
“왜 따라붙고 그래요?”
“거 좀 서로 돕고 살고 그럽시다.”
“누가 할 소리를···.”
3층에 들어섰더니 대여섯 명의 직원들이 눈에 띄었다. 낯익은 얼굴들, 호광길드 소속 헌터들이었다.
“어! 저게 누구···?”
유지훈을 바라보는 표정이 괴이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보는 듯했다.
강은영이 유지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유지훈 씨 살아있는 거 몰랐던 모양이네요. 김창용을 보낸 건 호광길드가 아닌가 봐요.”
“누가 뭐래? 내 일에 관심 끄고 그쪽 볼일이나 보라고.”
강은영에게 호광길드에서 볼일은 딱히 없었다.
있다면 유지훈의 횡령 문제가 어떻게 정리되는지 지켜보는 정도. 그것만 확인해도 17호 던전 관련 의혹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을 테니.
또 한 가지 있다면 유지훈 그 자체였다.
비각성자라는 결과가 나왔는데, 레벨 6의 빌런을 장난치듯 때려잡았다. 심지어 뇌기에 가격당하고도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듯했다. 호기심이 격하게 발동했다.
“누구세요? 저 아세요? 저한테 왜 이러세요?”
“나 참 뭐 하자는 건지···.”
유지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길드 직원들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네요. 나 기억하죠?”
“어! 네가 어떻게···.”
직원들의 눈이 일제히 튀어나올 듯 커졌다.
유지훈이 빙글빙글 웃으며 양손을 들어 보였다.
“왜요? 내가 살아있어서 많이 이상한가?”
직원들의 반응은 경악에서 경계로 그리고 경멸로 바뀌어 갔다.
죽은 줄 알았던 유지훈이 살아 돌아와 놀랐고, 그가 당한 일을 알기에 경계했지만, 하찮은 비각성자는 결국 경멸의 대상에 불과했다.
“네가 어디라고 여길 찾아와!”
눈을 부라리며 고함친 이는 선임 헌터 박중민이었다.
레벨 3의 각성자. 실력으로는 길드 내 중위권이었지만, 길드 마스터의 육촌 동생이라는 배경으로 선임 헌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왜? 내가 못 올 데를 온 건가? 다니던 직장에 왔는데?”
“네가 저지른 짓이 있는데 그런 말이 나와!”
“무슨 짓? 등골이 휘도록 일하고 그 꼴 당한 거? 하긴. 내가 어리석긴 했지.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버러지만도 못한 놈이···.”
박중민이 호통치려는 찰나, 유지훈이 말을 끊었다.
“됐고. 조무래기들이랑 노닥거릴 시간 없어. 총무부장이나 나오라고 해. 정리할 것만 하고 조용히 갈 테니까.”
“이 새끼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박중민이 냅다 달려와 주먹을 날렸다.
비각성자를 상대한다고 여겼기에 각성자의 초자연적인 힘, 마나는 일으키지 않은 양상이었다. 그래도 주먹에 실린 기세는 사뭇 흉흉했다.
“얌전히 볼일만 본다는데, 굳이 매를 버는 놈이 있다니까.”
유지훈이 피식 웃었다.
무림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에겐 내공이 없었다. 무림인들은 그를 얕잡아봤다. 경시하며 손찌검에 나섰다가 호되게 두드려 맞고 죽거나 병신이 됐다.
맹렬하게 날아오는 박중민의 주먹.
고개를 슬쩍 뒤로 젖혀 피했다. 동시에 수도로 팔꿈치를 내리쳤다.
콰직!
손쉽게 팔꿈치 뼈를 으스러뜨린 뒤 주먹을 내질러 턱을 올려붙였다.
빠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박중민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우당탕탕!
피를 뿜으며 사무실 구석에 처박혔다.
“모처럼 찾아와서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유지훈이 나머지 직원들을 향해 눈짓했다.
총무부장을 불러오거나, 덤비거나 선택하라는 의도였다.
물론 직원들은 도발로 받아들였다.
“건방진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다섯 명의 직원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유지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강은영은 나서서 도와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지켜보기로 했다.
덤벼드는 직원들 모두 레벨 3 이하로 판단됐다. 마나는 지녔을지언정 특성은 보유하지 못한 저능력 각성자라는 의미였다.
비각성자 판명을 받은 유지훈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좋은 기회라 여겼다.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떻게 저게 가능할 수 있지?”
달려드는 장정 다섯을 몹시 단조로운 움직임으로 상대했다.
발은 반보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상반신은 슬쩍 젖히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벌레를 쫓는 듯한 손놀림. 직원들의 맹공은 속절없이 허공으로 스쳐 갈 뿐이었다.
이어 절도있게 뻗은 다섯 차례의 권격. 정확하게 급소를 가격했다. 직원들은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유지훈의 움직임에서 마나의 흐름은 감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직원들이 마나를 일으켜 공격에 나섰다. 비각성자가 각성자 다섯을 상대했다는 의미였다.
결과는 떡이 돼 나뒹구는 각성자들이었다.
“무슨 일이야!”
“저, 저놈 뭐야!”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소란을 감지한 길드 직원들이 몰려들었다. 열댓 명이 한꺼번에 유지훈을 덮쳤다.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간결한 손짓 한 번에 깔끔하게 한 명씩. 여덟이 내동댕이쳐졌을 때 들려온 외침이 아니었으면, 길드 소속 헌터 전원이 묵사발 났을 수도 있을 터였다.
“다들 멈춰!”
정수리가 훤한 중년 사내가 등장했다.
유지훈이 반가운 듯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총부부장님! 이제야 나타나셨네. 진작 나오지 그러셨어. 그랬으면 이 지경은 안 됐을 텐데.”
사무실이 난장판이 됐다.
유지훈의 움직임은 간결했지만, 나가떨어지는 직원들은 그렇지 않았다. 여기저기 처박힐 때마다 사무실 집기가 박살 났다.
“살아있었구나.”
“운 좋게도 그렇게 됐네요. 부장님한테는 불운이려나?”
“으음···.”
중년 사내가 침음을 흘렸다.
표정은 일그러졌지만, 자랑하듯 한마디 던졌다.
“부장 아니다. 이사 됐다.”
중년 사내가 자신의 방을 가리켰다.
‘관리이사 김석진’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오! 관리이사님! 잘됐네. 일이 한결 쉽게 풀리겠어.”
“무엇 때문에 이 난리를 피운 거냐?”
김석진이 짧게 한숨을 내뱉은 뒤 물었다.
유지훈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걸 몰라서 물어요? 우리 사이에 모를 수가 없지 않나?”
“너 그 일 당한 뒤 내가 얼마나 신경 많이 써준 줄 모를 거다.”
“신경 많이 써줘서 있지도 않은 횡령을 뒤집어씌운 건가? 빚을 떠넘겨서 집도 빼앗아 가고?”
“집? 네가 그 당시 회사에 끼친 피해는 그깟 집 열 채로도 부족했다. 그나마 내가 신경 써서···.”
유지훈이 손을 들어 말을 끊은 뒤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져와 봐요.”
“뭘?”
“증거. 피해를 입증할 장부 그리고 뭘 횡령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내가 취했다는 증거 말이에요.”
“그, 그건···.”
“못 가져오겠지. 장부 가져오면 불리한 건 이사님일 테니까. 그때 장부는 내가 다 관리했잖아. 뜯어보면 뭐가 문제인지 나보다 잘 아는 사람도 없을걸?”
유지훈이 주위를 둘러봤다.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눈에 띄지 않는 듯 쯧 혀를 찼다.
“내 생각에 실제 횡령한 사람은 따로 있을 거야. 그게 누굴까? 누구보다 이사님이 잘 알 것 같은데.”
김석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길드의 장부는 국가안전본부와 연결된 전산 시스템으로 관리됐다. 원천적으로 조작이 불가했다.
당시엔 던전 폭발 사고로 어수선한 틈을 타서 어영부영 횡령을 떠넘길 수 있었다. 당사자들이 죽었기 때문에 소명 절차도 건너뛰었다. 제대로 뜯어보면 밝혀질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이제 방법은 유지훈의 입을 영영 다물게 하는 것 외엔 없었다.
“너 못 보던 새 많이 건방져졌구나. 어디서 막싸움 좀 배운 모양인데. 아무 데서나 그렇게 까부는 것 아니다.”
김석진이 재킷을 벗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각성자가 비각성자를 상대할 때 특성이나 마나를 사용하는 건 위법이지. 하지만 비각성자라 해도 빌런에 해당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왜? 이제 나를 빌런이라 몰아붙이게? 횡령으로 부족해서?”
“국민의 안전을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길드 사무실에 쳐들어와서 이 지경으로 만들어놨으면 빌런 맞지.”
김석진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마나를 끌어모으는 동작이었다. 사방에 오싹한 한기가 번져갔다.
그는 빙공을 특성으로 하는 레벨 4의 각성자였다. 손에 닿는 물질을 얼어붙게 만드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네놈 입부터 꽁꽁 얼려주마. 나불대지 못하게.”
김석진이 유지훈에게 달려들어 팔을 잡으려 했다. 유지훈은 살짝 물러서며 손을 쳐내는 움직임으로 맞섰다.
김석진이 피식 웃었다. 환영할 만한 동작이었다. 어쨌든 손이 닿기만 하면 얼어붙게 만들 수 있다고 여겼다. 뻗어오는 유지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서로 양손을 맞잡은 양상이 됐다.
김석진이 마나를 쏟아냈다. 2~3초 후면 유지훈이 꽁꽁 얼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네놈이 당한 건 약해서다. 게다가 주제를 모르고 까불었지. 장부 정리하랬더니 장부 검사나 하고 말이야. 그러니 그 꼴을 당한 거야. 이번에도 마찬가지고.”
의기양양한 김석진의 말투와 달리 분위기는 묘하게 흘러갔다.
유지훈은 잠시 부르르 치를 떠는 듯하더니 이내 표정이 평안해졌다. 손바닥이 간지럽기라도 한 비실비실 웃기까지 했다.
김석진의 예상보다 조금 긴 5초가량 지난 뒤 유지훈이 손을 털어내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재주 가지고 유세 떨긴···.”
김석진이 어리둥절해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다가 날렵하게 유지훈의 어깨를 잡아챘다. 다시금 마나를 쏟아내려 했다.
“대단할 것 없다는데 왜 자꾸 붙잡고 지랄이야!”
유지훈이 김석진의 손을 뿌리치고는 머리채를 잡았다. 안 그래도 정수리가 훤한 김석진의 머리털이 수북이 뽑혔다.
“내가 빌런에 해당한다고? 그럼 그렇게 대접해 줄게.”
뺨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짝! 짝! 짝! 짝! 짝!
찰진 타격음이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살이 터지고 피가 튀었다.
“내가 잘못했···. 그만 때려···.”
김석진이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유지훈에게 자비는 없었다. 기어코 손을 바꿔 반대쪽 뺨을 가격하기까지 했다.
짝! 짝! 짝! 짝! 짝!
김석진은 의식을 잃었고, 양쪽 뺨 모두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됐다. 그제야 비로소 유지훈의 구타가 중단됐다.
“그러니까 평화롭게 말로 했으면 좋았잖아.”
유지훈이 손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투덜거렸다. 순간 묵직한 기운이 그의 뒤쪽을 덮쳐갔다.
쾅!
둔중한 타격음과 함께 유지훈이 날아갔다.
와장창창!
집기들을 박살 내며 사무실 구석에 처박혔다.
“운 좋게 살아있었으면 조용히 찌그러져 살 일이지. 기어코 죽겠다고 찾아온 거야?”
육중한 체구의 중년 사내가 주먹을 꺾으며 유지훈을 노려봤다.
레벨 5의 각성자인 호광길드 마스터 박찬수가 유지훈의 후방을 기습한 것이었다. 특성인 블레스터 스피어를 극대치로 끌어올린 채로.
“흐흐흐흐. 이게 뭐야. 이상하잖아.”
유지훈이 처박힌 곳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웃음소리에 박찬수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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