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는 각성을 압살한다-1화 (1/150)

이방인

지옥도가 펼쳐졌다.

시신이 쌓여 산이 됐고, 피는 흘러 바다를 이뤘다.

살아남은 이는 단 두 명. 백발이 성성한 선풍도골의 노인과 준수한 용모의 청년이었다.

노인의 상태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연신 피를 토했다. 머지않아 산을 이룬 시신에 합류할 양상이었다.

반면 청년의 안색은 편안했다. 입가의 은은한 미소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무심하기만 했다.

노인과 청년의 표정은 묘한 대조를 이뤘다.

노인은 격정에 휩싸인 분위기였다. 일생일대의 대업을 완성하기라도 한 듯한 모습.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였지만, 도약을 향한 의욕도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었다.

청년은 초탈할 듯한 표정이었다. 어쩌면 눈앞의 상황을 귀찮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노인의 눈빛은 미련으로, 청년의 눈빛은 초월로 설명할 수 있을 법했다. 서로 바꿨을 때 잘 어울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마침내 끝을 보고야 말았군.”

노인의 시선은 처참한 몰골의 시신에 고정돼 있었다.

천마(天魔)라 불리던 사내였다. 무림의 절대자로 군림하던 인물. 마교를 이끌며 강호를 죽음의 공포에 몰아넣었던 절대 강자였다.

노인은 무신(武神)이라는 별호로 불렸다. 정도 무림의 수호신으로 추앙받았다. 그런 그도 천마의 상대는 아니었다. 정파의 결사대를 이끌고 천마와 마교에 맞섰지만, 몰살의 위기에 몰렸다.

그런 그를 도운 이가 청년이었다.

투귀(鬪鬼)라 불리던 인물. 사이한 무공으로 무림 공적으로 여겨지던 청년이 나타나 전세를 뒤바꿔 놓았다.

노인은 청년의 도움 덕분에 천마와 마교 무리를 격살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정파 결사대의 안타까운 희생은 어쩔 수 없었지만.

“어떠냐? 속이 후련하냐?”

청년이 툴툴거리듯 물었다.

오십 살은 어려 보였지만, 동년배를 대하는 듯한 말투였다. 아니 하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자네는 도무지 노인을 공경할 줄 모르는군.”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네놈보다 더 오래 살았잖아. 어린놈이 형한테 꼬박꼬박 반말이냐.”

“허허허.”

노인은 반박하지 않았다.

청년의 말이 맞았다. 두 사람의 인연은 오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약관의 후기지수였던 노인이 처음 만난 청년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지금 노인 앞에 있었다.

“자네는 정말 신비로운 존재야. 반로환동을 한 것도 아닐진대 어찌 그리 한결같은 모습일 수 있는지.”

청년은 말없이 빙긋 웃기만 했다.

노인이 쓴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그래. 어찌 나를 도울 생각을 했는가?”

“왜? 친구 돕는 게 뭐 이상해?”

“그런 게 아니라 자네는 무림 공적으로 몰려 갖은 고초를 겪지 않았는가? 나 또한 자네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네 녀석 처지에서 어쩔 수 없었잖아. 이해해. 네놈 마음만은 그렇지 않았던 것도 잘 알고.”

“휴우.”

노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의 화공대법만 아니었어도 자네는 정파 무림의 희망으로 추대됐을 수도 있었을 텐데···.”

“화공대법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는군.”

청년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화공대법이라 불리는 무공. 상대의 내공을 소멸시키는 능력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청년에겐 무림 공적이란 낙인이 찍혔다.

손이 닿는 순간 내공이 사라지는 사특한 능력이었으니, 무림인들 사이에서 그는 기피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정사를 막론하고 그를 적대시했고, 궁극엔 무림 공적으로 배척되기까지 했다.

“자네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모두가 화공대법이라고 하면 그건 화공대법인 걸세. 금기시되는 저주받은 무공 말이야.”

“거부할 생각은 없어. 중요한 건 나는 화공대법인지 뭔지를 익힌 적이 없다는 사실이지. 믿건 안 믿건 상관없이.”

“선천적인 능력이라는 게지. 나는 자네를 믿네. 세인들이 자네를 믿건 안 믿건 말일세. 쿨럭쿨럭.”

노인이 격하게 기침했다.

토해내는 피 사이로 내장 조각이 섞여 나왔다. 죽음에 한 걸음 더 다가간 모습이었다.

노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삶을 마지막을 맞이하려는 듯했다. 눈가의 주름이 사뭇 장엄했다.

청년이 노인을 붙잡아 흔들었다.

“아직 가면 안 돼. 네 녀석한테 할 말이 남았단 말이야.”

“무, 무슨···?”

“고맙다는 인사. 덕분에 지금껏 살아 있을 수 있었잖아. 화공대법인지 뭔지 알면 뭐해. 맞아 죽으면 그만인데. 네가 무공을 가르쳐준 덕분에 죽지 않았어. 물론 그 덕에 무림 공적이 되기도 했지만.”

“허허허. 후회하네. 내가 세상 둘도 없는 악적을 키운 셈이니.”

노인이 과거를 떠올렸다.

청년은 내공을 쌓을 수 없는 몸이었다. 서른에 가까워 심법을 익히기 늦은 나이이기도 했지만, 혈맥에 켜켜이 쌓인 탁기가 너무 짙었다.

생존을 위해 무공을 가르쳐달라는 청년에게 전수할 수 있는 건 체술, 그러니까 박투가 전부였다. 그나마 대성하긴 어려워 보였다.

청년의 집념은 대단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수련했다. 기어코 십 성의 경지를 넘어섰다. 내공 없이 구사할 수 있는 무공의 극이었다. 박투에 관해선 신이라 불릴 만한 수준이었다.

거기에 난데없이 체득한 화공대법까지. 내공이 사라진 상태에서 청년을 상대할 자는 무림을 통틀어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청년은 투귀로 불렸다. 심지어 나이를 먹지도 않는 모습이었으니, 무림인들은 그를 사이한 존재로 낙인찍기에 이르렀다.

정사를 막론하고 숱한 고수들이 청년을 제거하기 위해 나섰고, 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결과가 무림 공적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노인은 청년을 무림 공적으로 만든 책임이 있었다.

“그 악적 덕분에 무림은 천마와 마교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됐지.”

“그 말도 맞군. 자네 덕분에 강호가 평화롭게 됐어. 정작 내가 그 평화를 누릴 수 없어 아쉽긴 하지만.”

노인이 쓸쓸하게 웃더니 돌연 눈빛을 빛냈다.

“묻고 싶은 게 있었네.”

“뭐야?”

“자네 인간이 맞긴 한 건가?”

“후훗.”

청년이 실소를 흘렸다.

“설마 신이냐고 묻는 건 아니겠지?”

청년이 우스개로 받아넘기려 했지만, 노인의 눈빛은 진지했다.

청년이 뒷덜미를 긁적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심이구나. 신은 아니야. 다만 이 세상 사람도 아니지.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다른 차원에서 왔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

“역시 그랬군.”

“믿는 거야?”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굳이 거짓을 말하진 않겠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는 질문을 이어갔다.

“이제 어쩔 텐가? 돌아갈 텐가?”

“돌아갈 때가 된 것 같기도 해.”

“돌아갈 방법은 있고?”

“음.”

청년이 빙긋 웃었다.

“돌아갈 방법은 진즉에 찾았어.”

“그런데 왜 아직 여기에?”

“그곳에서 나는 존재의 의미를 찾기 힘들었거든. 여기에선 달랐지. 무림 공적이긴 했지만, 치열하게 살 수 있었어. 그리고 무엇보다.”

노인을 바라보는 청년의 눈빛에 힘이 실렸다.

“너에게 보답하고 싶었어.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줬잖아. 그래서 네 소명을 완수하는 순간만큼은 반드시 함께하겠다고 마음먹었지.”

“그래서였군.”

“그래. 그곳에서 난 주변조차 맴돌지 못하는 이방인이었거든. 이곳에선 무림 공적이긴 했지만, 존재의 의미만큼은 뚜렷했잖아.”

청년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가려는가?”

“가봐야지. 이곳에 남을 이유가 없잖아. 연이 있던 이들은 모두 떠났으니. 너도 곧 떠날 테고. 남아봐야 다시 이방인밖에 더 되겠어?”

“배웅은 안 해줄 텐가?”

“기억 속의 네 마지막 모습을 죽음으로 남겨두고 싶진 않아. 너무 슬플 것 같거든.”

청년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노인이 쓸쓸하게 고개를 떨궜다.

“자넨 너무 지독해. 항상 죽음과 투쟁하는 것 같았지. 덕분에 그 몸으로 그렇게 강해질 수 있었겠지만. 돌아가면 그렇게 살지 말게. 이방인이면 좀 어때. 즐기면서 살라고.”

노인의 마지막 당부를, 청년은 못 들은 척 휘적휘적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간 뒤, 노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청년은 뒤를 돌아봤다. 나직이 되뇌었다.

“나도 너무 지독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해. 이제 숨 좀 돌려도 될 것 같은데, 여기선 그럴 수 없잖아.”

청년이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돌아가면 나는 기억에서 지워진 존재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야. 여전히 이방인이겠지만, 이번엔 즐길 수 있을 것 같군.”

청년이 다시금 걸음을 내디뎠다. 무거우면서도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50년 전 쫓겨나듯 무림에 내던져졌던 유지훈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

“이번엔 또 무슨 똥개 훈련을 시키려는 거야?”

대한민국 국가안전본부 산하 던전관리국 탐사 3팀장 강은영은 한껏 눈살을 찌푸린 채 눈앞의 사내를 노려봤다.

“차원 에너지의 변동이 감지돼 조사하라는 지시입니다.”

본부 직속 전략지원부 과장 이승호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강은영이 짜증스러운 어조로 되물었다.

“5년 전에 폐쇄된 던전이잖아. 이후에 일곱 차례나 가서 확인했고. 생명체의 흔적까지 사라졌는데 뭔 놈의 차원 에너지 변동이야? 이게 똥개 훈련이 아니고 뭐야!”

“감지된 건 사실입니다.”

“오작동이겠지. 지난번에도 그랬잖아?”

“탐사팀에겐 확인할 의무가 있습니다.”

“왜 이런 쓰잘때기 없는 탐사는 항상 우리 3팀이냐고!”

“모든 던전 탐사는 경중을 따질 수 없을 만큼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우리한테도 중요한 탐사 좀 맡겨달란 말이야.”

“저는 그저 지시를 전달할 뿐입니다.”

이승호는 무뚝뚝한 한 마디를 남기고는 떠나갔다.

강은영은 책상을 내리쳤다.

“저게 상급자 말도 안 끝났는데 가 버리는 거야? 너 거기 안 서!”

강은영이 길길이 날뛰자 팀원들이 붙잡아 말렸다.

“팀장님 참으세요. 이러다가 또 징계받으십니다.”

“팀장님 이번에 경고 이상 징계면 강등이에요. 그럼 팀장직 박탈이고, 자칫하면 우리 팀 없어진다고요.”

팀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말에 강은영이 가까스로 분을 삼켰다.

탐사 3팀은 업무 평가 최하위 직원들이 모인 곳이었다. 팀이 사라지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이들이었다.

남은 건 권고사직. 그건 막아야 했다.

“일단 다녀오시죠. 혹시 알아요? 말라죽은 나무에 꽃이 필지.”

김인구 과장이 애써 의미를 부여했다.

강은영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출동 준비들 해. 후딱 마치고 고기나 먹으러 가자.”

“좋죠. 안 간다고 딱히 할 일도 없잖습니까.”

“그 말 왜 안 하나 했다. 고기는 네가 사.”

강은영과 김인구 그리고 팀원 둘이 탐사에 나섰다.

차원 에너지의 변동이 감지된 곳은 남양주에 위치한 17호 던전이었다. 격변의 시대 초창기에 생성돼 상급 몬스터 여럿을 쏟아낸 고위험 던전이었다.

5년 전 던전 내부에서 발생한 의문의 폭발 이후 폐급으로 전락했다.몬스터는 사라졌고, 얼마 남지 않은 부산물 또한 채집을 마쳤다.

이따금 차원 에너지 변동이 감지돼 탐사에 나섰지만, 번번이 오류만 확인하고 돌아와야 했다.

“좌표는 확인했어?”

“따로 안 했는데요. 이승호 과장이 17호 던전이라고 했으니 맞겠죠.”

운전대를 잡은 막내 정성우의 대답에 강은영은 혀를 내심 찼다.

매사에 똑 부러지는 게 없었다. 대충대충 건성건성. 업무 평가 최하위는 당연지사였다.

“제가 확인은 해뒀습니다. 17호 던전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긴 한데요. 지도상으로 허허벌판이라 전략지원부에서 17호 던전으로 가보라고 한 모양입니다.”

그나마 쓸만한 녀석은 김인구 과장뿐이었다.

김인구 과장은 업무 평가 상위권임에도 굳이 탐사 3팀을 지원한 인물이었다. 강은영은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든든한 한편으로 부담스러운 이유였다.

한 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17호 던전은 역시 헛방이었다. 폐허의 모습 그대로였고, 차원 에너지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역시나네요. 오늘 일과는 여기서 째고 고기나 먹으러 가시죠.”

벌써부터 침을 삼키는 최민수 주임을 강은영은 무시했다. 김인구 과장을 쳐다봤다.

“좌표가 어디라고 했지?”

“가보시게요? 허허벌판이라 따로 탐사할 것도 없을 텐데요.”

“맞아요. 전략지원부에서도 17호 던전을 지목했잖아요. 굳이 찾아서 고생할 필요까지는···.”

“시끄러! 그래서 당신들 업무 평가가 그 모양인 거야. 던전이 생성될 조짐이었으면 어쩔 거야? 포털 열려서 몬스터들 쏟아져 나오면 당신들이 책임질 거야?”

격렬하게 쏘아붙인 뒤 강은영은 김인구를 앞세워 좌표가 가리키는 위치로 향했다.

도달할 무렵 눈에 들어온 광경에 강은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저건 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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