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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06화 (305/305)

#외전 06화

“힘내요~ 이기는 편 우리 편!”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그늘막에 자리 잡은 휘브리스가 손을 흔들었다.

“휘브! 이건 대련이 아니에요.”

애초에 검술의 귀재라고 불리는 세잔과 대련 상대가 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휘브는 콜로세움에 구경 온 사람이라도 된 양 환호성을 질렀다. 애초에 신의 대리인이라는 자가 저렇게 싸움을 좋아해도 되는 건가 싶다.

“이쪽.”

“네?”

“상대는 접니다. 집중하셔야죠.”

단호한 세잔의 태도에 몸이 잔뜩 굳었다. 그래도 상대가 초보인데 적당히 봐주긴 하겠지. 안일한 생각으로 검을 쥐고서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실력을 보겠다’는 세잔의 말뜻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진심으로 상대해서 어느 정도의 힘이 있는지 테스트하겠단 의미였다.

“우왁!”

세잔이 일격에 검을 받아치자 날을 타고 손잡이까지 진동이 느껴졌다. 그 반동을 이겨 내지 못하고 그만 검을 놓치고 말았다. 퍽! 마치 도끼로 나무를 내려치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목검이 뒤쪽으로 날아갔다. 아차 싶어 뒤를 돌아보니 검은 정확히 그늘막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헤르메스…!”

조용히 이름을 부르자 그림자에 숨어 있던 그가 불쑥 튀어나와 검을 옆쪽으로 튕겨 내고 사라졌다. 워낙 눈 깜짝할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사이 날아오는 검을 피하려 뒷걸음질 치던 아이리스가 넘어지고 말았다.

“아이리스!”

“깜…짝이야. 검 맞고 뒤지는 줄 알았네.”

“괜찮아요?”

다급히 달려가서 상태를 살피자 아이리스는 퉁명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어. 그냥 나 혼자 자빠진 거야.”

아이리스는 진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선 엉덩이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 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죄송해요. 제가 놓칠 줄은 몰랐는데….”

“저도 죄송합니다. 나름대로 힘을 빼고 받아친 건데.”

곁에 다가온 세잔이 진심으로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아니, 그런데 그게 힘을 뺀 거였어? 대체 내가 약한 거야, 세잔이 강한 거야? 지금껏 검을 맞대어 본 상대가 없었기에 비교할 방법도 없었다.

갑자기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아이리스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됐어. 안 다쳤으니까 마저 대련이나 해라.”

그때 옆에서 구경하기만 하던 휘브가 얄밉게 말을 덧붙였다.

“아쉽네요. 날아가는 검을 맞고 다쳤으면 내가 치료라도 해 줄까 싶었는데.”

“미쳤냐? 곧 뒤진다고 해도 너한테 손은 안 빌려.”

아이리스가 기겁하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는데도 휘브는 킥킥 웃기만 했다. 그 후로도 정말로 괜찮은지 몇 번이고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다시 세잔과 대련하려고 걸음을 돌리는데, 아이리스의 혼잣말이 발목을 붙잡았다.

“근데 아까 뭐 지나가지 않았냐?”

“……네?”

“뭔가 슉 하고 나타나서는 검을 튕겨 내 준 것 같은데.”

설마…… 본 거야? 그 찰나의 순간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려고 해 봤지만 세잔까지 나서서 가세했다.

“실은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중이었습니다.”

“응? 그래요?”

“예. 기분 탓인지 몰라도 검이 날아가는 방향이 갑자기 바뀌었습니다.”

다들 동체시력이 뭐 이리 좋은지 모르겠다. 원래는 진 같은 반응이 평범한 거란 말이다. 이윽고 그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너도 봤지?”라고 묻는 것 같았지만, 그만 제 발 저리고 말았다.

“실은….”

조용히 그림자를 내려다보자 헤르메스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곤란한 내 마음을 아는 건지 정말 고맙게도 자그마한 고양이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맹금류나 늑대가 아니어도 그림자에서 무언가가 나타난다는 건 제법 경악스러운 상황이었다.

“이, 이건 뭐예요?”

여유롭게 상황을 지켜보던 휘브마저 화들짝 놀라며 슬금슬금 물러섰다. 괜한 오해를 사기 전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헤르메스를 소개했다.

“제 그림자에 살고 있는 마물이에요. 방금 전에 검을 쳐 낸 것도 이 아이구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마물이요?”

“뭔 마물이 그림자에 살아?”

“신이시여….”

“우와~ 귀여워라.”

제각기 다른 반응에 어디서부터 납득시켜야 할지 모르겠다. 작은 동물을 좋아하는 진은 벌써 헤르메스를 쓰다듬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그 마물의 유일한 분신이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한동안 멀리서 구경하던 아이리스가 슬그머니 헤르메스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하더니 대뜸 뜬금없는 소릴 늘어놓았다.

“너… 예전에 혹시 나 만난 적 있냐?”

그건 내가 아니라 헤르메스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헤르메스는 고개만 갸우뚱 기울였다. 옆에 있던 진마저도 의아하게 아이리스를 흘겨보며 말했다.

“지금 마물한테 뭔 소릴 하는 거야?”

“아니, 예전에 얘랑 비슷한 기운을 가진 마물을 만난 적 있던 것 같아서.”

“진짜?”

“어. 근데 이렇게 생기진 않았었어.”

아이리스는 조용히 턱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늑대였나? 곰… 이었던 거 같기도 하고.”

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이 세계로 돌아온 이후로 헤르메스가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그러니 아이리스는 그림자 마물에 대해서 전혀 기억하지 못해야만 한다. 게다가 헤르메스는 유피테르가 만들어 낸 분신. 세상에 단 하나뿐인 마물이다.

그런데 늑대나 곰의 형상을 기억하다니, 그건. 그건…….

“그새 따르는 주인을 바꾼 거냐? 아니면, 종족만 같은 건가?”

나와 함께 있던 시절의 아그누스를 기억한다는 의미였다.

“그 얘기, 좀 더 자세하게 해 줄래요?”

“응?”

“이 아이에게 동족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아서요.”

혹시 아그누스와 함께 나를 떠올리진 않을까. 기대감에 부푼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아니, 이럴 때일수록 차분해야 한다. 너무 기대하면 그만큼 실망도 커지니까. 잠시 기억을 더듬는지 헤르메스를 바라보던 아이리스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자세히 기억은 안 나는데, 얘처럼 그림자에서 튀어나오곤 했어.”

“누구의 그림자였는지도 기억해요?”

“그러니까…… 뭐더라? 기억이 날락 말락 하는데….”

역시 착각이었던 건가. 그래도 아그누스라도 기억하는 게 어디야. 조금씩 기억을 맞춰 나가면 언젠가 흐릿하게나마 나를 떠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순간에 기대가 무너져 침울해진 표정을 애써 감추려는데, 아이리스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 딱 너만 한 또래였던 거 같아.”

반짝이는 회색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이루 말 못할 감정이 북받쳤다. 이게 뭐라고, 아예 나를 떠올린 것도 아닌데…. 고작 ‘나만 한 또래’란 말 하나 들었다고 눈가에 눈물이 팽 돌았다. 고개를 툭 떨어뜨리며 숨죽여 울자 당혹감이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야. 너… 지금 우는 거냐?”

“아뇨. 아니에요.”

“뭘 아니야. 인마. 너 지금 얼굴이 엉망이야.”

손등으로 눈물을 슥슥 닦자 나보다도 더 일그러진 아이리스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아프거나 힘들 때면 딱 저 표정으로 나를 걱정해 주었었지. 그 생각에 또다시 울음이 터져 버렸다. 아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선 숨죽여 울자 어깨와 등 뒤로 다수의 손길이 닿았다.

“우는 사람한테 얼굴이 엉망이라뇨. 너무하시네.”

휘브는 나를 위로해 주는 듯하면서도 아이리스를 놀렸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이리스가 잘못한 거 같아요.”

“잠깐만. 이유를 모르겠는데 왜 내 탓을 해?”

“역시 사과하는 게 좋겠습니다.”

“대체 뭔 소리야! 난 억울하다니까?”

진과 세잔은 나를 달래 주기 급급했다. 정말로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서로 역경과 행복을 나눈 ‘태오’였던 시절로. 그렇게 한참을 훌쩍거리다가 겨우 고개를 들자 아이리스가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갑자기 왜 울어. 지, 진짜 내가 잘못한 거야?”

“아뇨. 그냥…… 그냥 기뻐서요…….”

그 후 아이리스의 손을 기도하듯 꽉 잡고서 눈을 감았다. 유피테르의 말대로 이론이 깨지지 않으리란 법은 없으니 간절한 염원이 담긴 기도를 몇 번이고 올렸다. 부디 이 체온을 타고 나의 바람이 이어지기를. 더 이상 욕심은 내지 않을 테니, 언젠가는 나를 떠올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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