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05화 (304/305)

#외전 05화

#3 기적

오늘은 오랜만에 안겔루스 대학에 가는 날이다. 세잔에게서 검술을 배우는 겸, 다른 친구들도 시간을 내서 얼굴을 보기로 했다. 놀러 가는 것도 아닌데 왠지 나들이를 가는 기분이 들어 미리 샌드위치도 만들어 두었다.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식사가 필요하지 않은 몸이 된 후로 이 나이 대 성인 남성이 얼마나 먹는지 감이 오질 않는다. 대충 샌드위치의 산을 만들어 가면 되겠지.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마법진이 있는 방으로 가다가 서재 앞에 멈춰 섰다. 문틈으로 보니 유피테르는 오늘도 석상과 함께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유피! 저 이만 갈게요.”

유피테르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서류를 미뤄 두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벌써 가는 건가?”

“오히려 늦었어요. 아이리스한테 한 소리 듣기 전에 얼른 가야죠.”

샌드위치를 담은 가방을 살짝 들어 보이곤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저 없다고 너무 일만 하지 말고 쉬기도 해야 돼요. 알았죠?”

“알겠네. 그 얘긴 어제도 하지 않았나.”

“그만큼 걱정한다는 거죠.”

일이 바쁘면 마저 하라고 말하려 했는데 유피테르는 자연스럽게 나를 따라왔다. 배웅은 포기할 수 없다나? 마차를 타지도 않고 단순히 마법으로 이동하는 것뿐이라고 해도 그에겐 통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 그랬나?”

“네. 세잔이 검술을 가르쳐 준다고 했거든요.”

“검술은 나도 가르쳐 줄 수 있다만….”

흘끔 위를 올려보니 유피테르가 조금 섭섭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용에게는 귀 같은 건 달려 있지도 않은데, 왜 이렇게 강아지처럼 보이는지 모르겠다. 이럴 때면 마냥 귀엽기만 한 그의 뺨을 감싸 쥐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럼 다음엔 유피가 가르쳐 줘요. 아, 물론 바쁘지 않을 때 말이에요.”

“일이라면 지금 당장도 때려치울 수 있네.”

“하하, 황제께서 들으시면 슬퍼하시겠어요. 데우스도 아직 일에 익숙해지진 않았잖아요.”

“그 아인 예전부터 어리광이 심했지.”

“그걸 받아 주는 게 우리의 일이구요.”

싱긋 눈웃음을 짓자 유피테르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이윽고 그의 팔이 나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고작 하루 떨어져 있는 것뿐인데, 매번 애틋해지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단단한 가슴에 기대어 조용한 숨소리를 느끼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있죠.”

전부터 줄곧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던 화제를 꺼냈다.

“아무래도… 기억이 돌아오긴 힘들겠죠?”

“헤메라.”

“저도 힘들단 거 알고 있어요. 슬슬 포기할 때도 됐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네요.”

이전 세계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모든 걸 얻었다고 생각했다. 충분한 힘, 영원한 시간, 유피테르, 소중한 마물들, 그리고 무사히 살아 있는 친구들까지.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풍족한데도 역시 인간일 적의 버릇은 그대로였다. 친구들에게 나에 대한 기억이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사라지질 않았다.

“이론상으로는 불가능하지. 이전의 흔적은 더 이상 이 세계에 남아 있지 않으니까.”

“역시 그렇겠죠…?”

미련을 버리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면 그만이다. 그리운 추억보다 더 중요한 건 함께 있는 지금이니까. 다시 한 번 되새기며 단념하려는데, 유피테르가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론이 깨지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지.”

“깨질 수 있는 건가요?”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한 우리도 지금 이렇게 함께 있지 않나.”

맞아. 그랬었지. 모든 걸 내려놓고 돌아간 순간 유피테르가 나를 찾으러 왔었다. 오직 ‘다시 만나겠다’는 일념 하에 차원까지 넘었는데, 벌써 포기할 수는 없었다.

비록 그들은 태오와 헤메라가 동일 인물인 걸 모르지만, 내가 태오일 적에 ‘헤메라’로 변한 모습을 마주친 적이 있다. 그게 기억을 되찾을 실마리가 된다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네요. 포기하긴 아직 이르죠…!”

마음을 담은 염원은 기적을 낳는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눈으로 봐 왔었다. 앞으로 몇 년, 혹은 수십 년이 걸려도 상관없다. 다시 한 번 추억을 나눌 수만 있다면- 나는 헤메라로서 영원히 그들의 곁에 있을 테니까.

“그럼 다녀올게요.”

마법진 앞까지 나와 준 유피테르를 뒤로하고 안겔루스 대학으로 향했다. 서둘러 훈련장으로 향하니 그늘막 아래 앉아 있는 무리가 보였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보라색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이쪽을 돌아보았다.

“지각~”

“죄송해요. 간식 좀 만들어 오느라.”

“웬 간식?”

샌드위치가 담긴 바구니를 보여 주자 옆에 있던 진이 화들짝 놀랐다.

“뭘 이런 걸 다 만들어 왔어요. 게다가 이 많은 양을 혼자서 준비한 거예요?”

“네! 점심 식사는 중요하니까요.”

“하여간 예전부터 끼니는 절대 못 거르게 한다니까.”

아이리스는 질렸다는 듯 나를 쳐다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사이 운동장에서 몸을 풀고 있던 세잔이 다가왔다. 늘 후작이란 작위에 걸맞게 정장을 입고 있던 세잔이 오늘만은 편안한 차림새였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학생일 적의 그가 떠올랐다.

“세잔. 오늘은 잘 부탁해요.”

“좋습니다. 일단은 이걸로 시작하죠.”

세잔은 미리 준비해 온 검을 내게 내밀었다. 손잡이는 쇠로 되어 있지만 날은 위험하지 않게 나무로 만들어진 연습용 검이었다. 나름대로 신의의 검을 써 봤기에 이 검도 간단하게 휘두를 수 있을 줄 알았건만, 크나큰 오산이었다. 상상 이상으로 묵직한 느낌에 저절로 어깨가 축 늘어졌다.

“우와, 생각보다 무겁네요.”

“이게… 무겁다고요?”

“음……. 네.”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세잔의 표정이 점차 심각해졌다. 착잡하게 눈을 깜빡이는 표정만 봐도 ‘설마 이 정도도 힘들어할 줄은.’이라는 생각이 금방 읽혔다. 우선은 검 손잡이에 익숙해지려 이래저래 잡아 보는데, 그늘막 아래 앉아 있던 아이리스가 쯧쯧 혀를 찼다.

“거봐, 내가 말했잖아. 쟤는 평생 책만 들고 다녔다니까.”

정곡이 찔려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인간일 적에 비해선 신체적 능력이 좋아진 편인데…. 할 말이 없어 괜히 입맛만 다시자 세잔이 의심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예전에 검을 다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그건 그런데….”

신의의 검은 손잡이만 남아 있어 검날은 내 신력으로 만든다. 그 덕분에 평범한 장검보다 훨씬 가벼워 나 같은 약골도 휘두르기 편하다. 게다가 대련용으로 쓴 적이 없고 거의 막거나 일격을 가하기만 해 봤다. 즉 세잔의 기대에 한참 못 미칠 거란 말이었다.

“일단 실력을 한번 보겠습니다.”

세잔은 나와 같은 목검을 쥐고 익숙하게 자세를 잡았다. 역시 그는 검을 쥐면 다른 사람이 된다. 평소에도 차분한 눈동자는 더욱이 고요해져 꼭 심해를 마주한 것 같았다. 예사롭지 않은 기백에 긴장하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산통을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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