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03화 (302/305)

#외전 03화

#2 여행

풍성한 갈색의 꼬리와 토끼처럼 위로 뾰족한 귀, 턱까지 내려오는 두 개의 엄니. 이것이 우리 자랑스러운 ‘페넥’ 일족의 특징입니다. 지금은 아직 작아서 혼자 있다 보면 지나가는 고양이한테도 시비가 걸리기도 하지만 괜찮습니다. 엄마가 조금만 있으면 바위만큼이나 크게 자랄 거라고 했습니다.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큰 기대를 받는 건 바로 저! 페넥 일족의 막내입니다. 다른 형제들보다 왜소한 편이지만, 엄마는 제가 멋지게 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열심히 뛰어다니며 언젠가 우두머리가 되어야 합니다. ……되어야 하는데.

[엄마!]

그만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누나? 어디 갔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 함께 있었는데, 잠시 나비를 구경하는 사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같이 걸어가던 형제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열심히 코를 벌름거려 봤지만 근처에서 엄마의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벌써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은 걸까요? 큰일입니다. 혹시 인간이라도 마주쳤다가는 영영 가족을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숨을 곳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다가 호수에 떠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습니다. 엄마가 ‘아무튼 숲에서 보지 못했었던 것은 반드시 인간의 산물’이라고 했는데, 네모나고 거대한 그것에선 위험한 분위기가 풍겼습니다. 맞아요. 저건 인간의 보금자리가 틀림없습니다.

여기선 얼른 목만 축이고 도망쳐야겠습니다. 몸을 숙여 허겁지겁 물을 마시는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물방울 소리가 났습니다. 귀를 쫑긋 세우며 고개를 들자 하늘색 갈기를 길게 늘어뜨린 인간이 앞에 서 있었습니다.

[넌 뭐냐.]

아니,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쏟아 내는 마력은 꼭 몸을 짓누르는 거대한 바위와 같았습니다. 마물입니다. 그것도 아주 강한 마물…! 매섭게 이쪽을 내려다보는 그에게서, 숲에선 전혀 맡아 보지 못한 낯선 향기가 느껴졌습니다. 설마 이 호수의 주인인 걸까요? 최대한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곧바로 땅바닥에 바짝 엎드리곤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저, 그게, 그러니까… 저는 여기서 물만 마시고 가려고….]

[물?]

[네! 다른 짓을 할 생각은 없어요….]

솔직하게 말하니 뾰족한 가시가 날아다니는 듯 따끔따끔하던 공기가 한결 누그러들었습니다. 도망치려거든 지금뿐입니다. 엄마에게 배운 대로 뒷다리에 힘을 잔뜩 주고서 단숨에 뒤쪽으로 뛰어가면-

“오케아노스 님!”

……망했습니다. 하나도 뿌리치기 힘든데 둘이라뇨. 이미 도망치는 건 글렀습니다. 그사이 뱀처럼 몸이 긴 마물이 물 위를 건너 이쪽으로 다가왔습니다. 등을 따라 돋은 뾰족한 지느러미와 이마에 박힌 비늘만 봐도 엄청난 힘을 가진 마물이 분명했습니다. 설상가상 그 마물의 등 뒤로 온통 새하얀 무언가가 올라타 있었습니다.

“갑자기 나가셔서 놀랐잖아요.”

그건 인간의 형체를 하고선 인간도 마물도 아닌 이상한 생물이었습니다. 뱀처럼 생긴 마물과 ‘오케아노스’란 이름을 가진 그에게까지 친근하게 대하는 것 보면, 그 또한 마물일 텐데… 이상하게 마력과는 다른 힘이 느껴졌습니다. 아무렴 호기심과는 별개로 저는 이제 죽은 목숨입니다. 영역에 허락 없이 발을 들인 데다가 엄마보다 강한 존재가 셋이나 된다니, 이렇게 운이 나쁠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엄마. 형 누나들. 막내는 갑니다. 다음 생에는 꼭 나비한테 한눈팔지 않을게요. 망연자실해서 모든 걸 포기한 채로 가만히 있는데, 그들은 아랑곳 않고 잡담을 나눴습니다.

“여기서 뭐 하고 계셨어요?”

[웬 어린 마물이 있길래.]

“…네?”

몸에 힘이 쭉 빠져 바닥에 늘어져 있는 탓일까요. 새하얀 갈기가 그제야 저를 발견했습니다. 헉 소리를 내며 놀란 그가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처음으로 느끼는 가족 외의 손길이었습니다.

“육안으론 건강해 보이는데…. 혹시 발견하셨을 때부터 쓰러져 있었어요?”

[아니, 방금 전만 해도 멀쩡했다.]

“그럼 그냥 배가 고픈 걸까요?”

아뇨. 겁을 먹은 것뿐이에요.

왠지 비실비실해 보이면 안 잡아먹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눈을 질끈 감고 파들파들 떨고 있는데, 갑자기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습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새하얀 갈기가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렸습니다.

“괜찮니?”

꼭 겨울에 쌓인 눈 같은 그가 저를 품에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길을 잃은 거야? 엄마는? 무리는 어디 있어?”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꼭 엄마가 불러 주는 자장가 같았습니다.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형제들과 있을 때처럼 편안한 느낌이 드는 건지 신기했습니다. 아니, 그보다 마물인 제가 어떻게 그의 말귀를 알아듣는 걸까요?

궁금한 게 산더미 같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불리할 것 같으면 말을 아끼라고 했었으니까요. 하지만 배 속은 제 의지와는 달랐습니다. 꼬르륵 소리가 우렁차게 퍼지자 흰 갈기가 해맑은 웃음을 흘렸습니다.

“많이 배고팠구나. 잠깐 나랑 같이 갈래? 이따가 엄마는 꼭 찾아 줄게.”

엄마가 모르는 마물은 따라가지 말라고 했는데…. 아무튼 마물이 아니니까 괜찮은 거 아닐까요? 무엇보다 지금 이 사람을 따라가지 않으면, 호수의 주인에게 분노를 살 것만 같았습니다. 얌전히 품에 안기자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뱀을 닮은 마물에게 말했습니다.

“나르키소스. 이 아이를 찾는 무리가 온다면, 나한테 전해 줄래?”

뱀…. 아니, 나르키소스는 무시무시한 몸집을 가지고서도 불평 하나 없이 꼬리를 살랑거렸습니다. 아무래도 나를 안고 있는 이 사람의 부하인가 봅니다. 흰 갈기가 셋 중에서 가장 약해 보였는데,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닌 것 같습니다.

흰 갈기의 품에 안긴 채로 호수를 건너 자그마한 섬에 도착했습니다.

[그분께서는?]

“아직 닉스랑 차 마신다고 했어요. 왜요?”

[대체 그놈은 언제 지하로 돌아가려는 건지 모르겠군.]

“하하…….”

뭐죠? 그들은 이 거대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걸까요? 물론 그들에게서도 엄청난 마력이 느껴지지만- 이 인간의 집으로 보이는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태어나서 이렇게 순도 높은 마력을 마주한 건 처음입니다. 이 안에 괴물이라도 살고 있는 걸까요?

“어서 들어가죠. 유피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귀찮게 됐구나.]

웬만해선 들어가고 싶진 않지만, 어쩌겠어요. 저는 형들 없이는 나약한 새끼 페넥일 뿐입니다. 혼자가 된 지금 저를 지켜 줄 방패는 흰 갈기밖에 없습니다. 털을 잔뜩 부풀리고 품에 얼굴을 묻자 흰 갈기는 가볍게 웃으며 속삭였습니다.

“괜찮아. 아무도 널 해치지 않아.”

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니 서서히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이윽고 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빗방울을 흠뻑 머금은 흙의 냄새가 흘러나왔습니다.

[어서 와. 헤메라.]

깊은 지하에서나 느낄 법한 음험한 기운이 금세 몸을 휘감았습니다. 일순 숨이 턱 막혀 와 고개도 들 수 없었습니다. 역시 이곳은 괴물의 소굴임이 분명합니다. 배고픈 흰 갈기는 상냥한 목소리로 저를 꾀어 낸 거고요!

[그 아인 뭐야? 한 입 거리도 안 되겠네.]

이, 이, 이, 이, 이것 보세요. 저보고 한 입 거리라고…….

“호숫가에서 오케아노스가 발견한 것 같아요.”

[뭐어? 오케아노스가? …용케 살아 있네.]

검은 마력으로 온몸을 치장한 마물이 다가왔습니다. 어째선지 오케아노스란 마물처럼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지만, 제게는 어렴풋이 보였습니다. 절벽 사이에 촘촘히 얽힌 함정을 두고는 먹잇감을 오기만을 기다리는 검은 그림자가.

[조약돌아. 너는 헤메라 덕분에 산 거란다.]

저는 조약돌이 아니라 어엿한 페넥 일족인데, 그의 말에 토를 달 엄두도 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에 온몸이 잔뜩 얼어붙었습니다. 그런데도 흰 갈기는 눈앞의 그림자가 두렵지 않은지 웃고만 있었습니다. 역시 이 괴물들의 만찬에 제가 꼬여 들어온 게 확실합니다.

어떻게든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던 그때였습니다.

[짐이 꼭 이 아이를 위협했을 것처럼 말하는군.]

[왜? 네 평소 행실을 보면 답 나오잖아.]

[생각하는 수준 하고는….]

갑자기 두 기운이 팽팽하게 부딪치더니 소용돌이치기 시작했습니다. 양옆에서 태풍과 산사태가 몰려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들과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던 제게 더 이상은 무리였습니다. 흰 갈기의 품에서 빠져나와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엇, 잠시만!”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햇빛이 들어오는 네모난 창을 향해 뛰어 올라간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기다란 물체에 퍽! 하고 부딪쳐 버렸습니다. 머리가 핑 돌아 뒤로 넘어가자 제 앞을 가로막은 이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음? 너는…?”

금빛 갈기를 휘날리는 그자는 한낮의 햇빛이었습니다. 추운 겨울도 잊게 해 주는 그런 태양 말입니다. 게다가 방금까지만 해도 양쪽에서 저를 향해 쏘아 오던 기운도 말끔하게 사라졌습니다. 마치 폭우가 오는 밤에 거대한 동굴 안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는 것 같았습니다. 높은 곳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 저절로 머리가 숙어졌습니다.

“유피. 잡아요!”

잠시 멍하게 있는 사이 흰 갈기가 지척까지 다가왔습니다. 서둘러 도망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그가…. 아니, 그분께서 손을 뻗어 제 뒷덜미를 잡아 올렸습니다. 아주 어릴 때 엄마가 저를 옮기던 방법과 비슷했습니다.

“하아, 다행이다. 다치는 줄 알았네….”

결국 그분의 손에 들려 다시 흰 갈기의 품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내 흰 갈기는 투명하고 네모난 물건을 가리키며 “저 유리창은 닫혀 있으니 뛰어들면 다칠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데, 어째 저를 걱정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헤메라. 이번엔 또 뭘 주워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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