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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02화 (301/305)

#외전 02화

나도 모르게 경계심을 드러냈는지, 그는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교수한테 들었네.”

“엇, 교수님 지인분이셨어요?”

이런. 나 실수한 거 없겠지? 교수가 내 얘기를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예 모르는 사람은 아니라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책을 다 꽂고 나서도 자연스럽게 서고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서 요즘은 어떤가.”

“좋아요. 교수님도 친절하시고, 무엇보다 그 일 있고 난 후로는 편의도 많이 봐주세요.”

“그 일?”

“아, 그게…….”

근황을 전하다가 괜히 말 안 해도 될 사건까지 끌어내 버렸다. 처음 보는 사이에 할 얘기는 아니지만, 뭐. 겉으로는 다 나았으니까 더는 심각한 일도 아니지. 최대한 분위기를 무겁게 하지 않으려 남의 얘기하듯 가벼운 투로 말했다.

“실은 사고를 당했었거든요. 그래서 잠시 입원해 있었어요.”

“뭐?”

사고란 단어가 튀어나오자마자 그가 얼굴을 종잇장처럼 일그러뜨리더니 내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이내 빠르게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시선엔 진심 어린 걱정이 그득 묻어났다.

“지금은 괜찮은 건가?”

“네! 그럼요.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튼튼한 몸은 처음 본다고 하셨어요.”

별일 아니라며 양손을 내저으니 안도감에 얼룩진 그의 목소리가 잔잔히 떨렸다.

“다행이군. ……어도 잘 지냈으면 했으니까.”

뭘까. 내가 뭐라고, 방금 만난 나를 이렇게까지 걱정해 주나 싶다. 그리고 그의 행동이 마냥 부담스럽지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가웠다. 평소엔 친구의 관심조차 불편해서 선을 긋고 살면서, 방금 처음 만난 그의 걱정은 달게만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다. 예전에도 누군가 나를 이토록 소중하게 생각해 줬었던 것 같은데.

“저…….”

혹시 우리 예전에 만난 적 있었나요? 그리 물으려다가 괜히 오해를 받을까 싶어 참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다른 사람의 발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말도 없이 쳐다보는 건 예의가 아니다 싶어 고개를 돌리려는데, 갑자기 그의 손이 내게 다가왔다. 이윽고 차가운 손끝이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가 귀걸이에 닿았다.

“이건….”

귀걸이에 달린 비늘 같은 장식물이 햇빛을 반사해 은은한 빛을 발했다. 그제야 이 손톱만 한 귀걸이가 그의 눈동자 색과 꼭 닮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참, 신기한 우연이었다.

“병상에서 깨어나니까 차고 있더라고요. 이런 걸 선물 받은 기억이 없어서 물어보니, 의사 선생님이 사고로 기억이 온전치 못한 거라고 하셨어요. 아무래도 제가 잃어버린 기억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아직도 의아한 점은 사고를 당한 당시에도 귀를 뚫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혹시 몰라서 한 달 전에 학회에서 찍은 사진을 보았지만 귀걸이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럼 사고가 나고 의식을 찾을 때까지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데, 현실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대체 누가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에게 귀걸이를 채워 준단 말인가.

“제가 생각해도 좀 너무하긴 해요. 이렇게 예쁜 걸 선물 받았는데… 누가 줬는지도 왜 받았는지도 전부 잊어버렸으니까요.”

하다못해 누가 줬는지만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는데, 단편적인 실마리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이 귀걸이를 하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해져요. 절 지켜 주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하나….”

귀걸이를 하고 있으면 잃어버린 기억이 언젠가 떠오를 것만 같았다. 게다가 어쩌면 내게 귀걸이를 선물하고 떠난 사람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비록 기억을 잃었으나 이 귀걸이만큼은 간직하고 있다는 표식을 남기고 싶었다.

“뭐, 저한테는 너무 화려한 것 같기도 하지만요.”

혼자 주절거리다가 뒤늦게 그의 얼굴을 보곤 아차 싶었다. 꾹 다문 입과 비틀린 눈썹은 극심한 고통을 감내하는 듯 슬퍼 보였다. 그럼에도 내게 내려앉는 눈빛과 스치듯 닿는 손길은 한없이 다정하기만 하니,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잘 어울리네.”

“…그런가요?”

다음 순간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한 것처럼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오직 자네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까.”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감정에 머리까지 고장 난 듯했다. 이대로 더 있어선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뒷걸음질 쳐 그에게서 벗어났다. 손길이 닿았던 자리마다 화끈거리는 열이 남아 있었다. 그의 손은, 한없이 차가웠는데도.

“하하…. 더, 덥네요. 음료수 좀 뽑아 올게요.”

일단은 이 자리를 피하고 싶어 황급히 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채 한 걸음도 떼기 전에 그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이 어느새 델 듯 뜨거워졌다. 아니, 열이 오른 건 그가 아니라 나였다.

“태오.”

“네, 네?”

애써 혼란스러운 감정을 감추며 뒤돌아보자 그가 한 걸음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다른 건 잊더라도, 이거 하나만큼은 기억해 주게.”

“무슨…….”

“난 언제나 자네와 함께 있다는 것을.”

나지막이 속삭인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부드러운 감촉이 닿은 순간 현실감을 아득히 뛰어넘어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고동치는 심장이 당장에라도 입 밖으로 울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죄송해요. …실례할게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도망치듯 서고를 빠져나왔다. 그대로 도서관 앞에 있는 자판기까지 멈추지 않고 달렸다. 힘겹게 숨을 돌리니 심장 박동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갑자기 달려서 그런 거겠지. 더워서 그런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도닥였다.

“……왜 이러는 거야….”

이상하다. 뭔가 잘못됐다. 아직도 손등에 열기가 남아 있다. 난생 처음 느껴 보는 것도 아닌데, 남의 입술의 감촉을 자꾸만 곱씹어 보고 있다. 대체 왜 내게 그런 짓을 한 걸까. 그리고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난 언제나 자네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아까부터 느껴지는 기시감은 분명 착각이 아니다. 단순히 길 가다가 마주친 정도의 인연은 아닐 것이다. 사고와 함께 사라진 기억, 머릿속에 갑작스럽게 생긴 우물, 섣불리 들여다보지 못한 심연, 그리고 귀걸이까지. 이 모든 것들과 그 사람이 연관되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후회하기 전에 물어보자. 일단 이름부터 물어보는 거야. 그리고 나에 대해 뭘 알고 있는지, 왜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지, 예전에 나와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캐물어야겠다.

서둘러 음료수 두 캔을 뽑아 발길을 돌렸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그가 있던 곳에 가까워질수록 겨우 진정시킨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결국 책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천천히 심호흡을 한 후에 그의 앞에 섰다.

“기다리셨어……요?”

하지만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벌써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나 싶었는데, 이렇게 쉽게 놓칠 수는 없었다. 음료수를 빈자리에 던지듯 내려놓고 곧장 카운터로 향했다.

“사서님. 혹시 저랑 같이 온 남자분 어디 가셨는지 보셨어요?”

“네? 누구요?”

“그, 있잖아요. 아까…….”

막 설명하려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태오 씨?”

뭐지.

“왜 그래요?”

그 사람… 어떻게 생겼었더라? 모르겠다. 기억나지 않는다. 뭔가, 눈을 마주치면 아름답게 웃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너무 외로워 보여서 볼수록 마음이 쓰였다. 그뿐이다. 정작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심지어 목소리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익숙하다는 느낌만 남았다.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사서가 미간을 꾹 찌푸리며 말했다.

“태오 씨. 갑자기 무섭게 왜 그래요.”

“네?”

“아까 도서관에 혼자 오셨잖아요.”

머리가 띵 하고 울렸다. 분명 그녀는 나를 보고 그와 아는 사이냐고 물었고, 사서들은 그를 관심 어린 눈길을 주었다. 그런데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서들까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마치 정신 나간 사람을 보는 것처럼.

“그… 그럴 리가 없는데….”

의심 어린 시선으로부터 도망치듯 자리를 피해 그와 함께 있던 책장으로 향했다.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내가 꽂은 책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내가 걸려 넘어질 뻔했던 발판도 삐뚤어진 채로 있는데- 가장 중요한 그 사람만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오로지 그에게 닿았던 찰나의 감촉뿐이었다. 그때 그는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무어라 속삭였었다. 아주 중요한 말을, 죽을 때까지 잊어선 안 되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몇 번을 곱씹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떠올리려고 하면 할수록 그의 얼굴은 불로 태운 사진처럼 새까맣게 사라져 가고, 그에 대한 기억은 불필요한 침전물처럼 우물 아래로 점점 가라앉았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서 있으니 더위를 먹은 것처럼 몸이 붕 뜬 기분이 들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더라….”

꼭 이루어지지 않을 백일몽을 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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