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1화
#1 백일몽
“뭔가……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갑자기 머릿속에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이 나타난 느낌이다. 자욱한 안개가 드리워 호기심에라도 발을 들였다간 영영 빠져나올 수 없는 구렁 말이다.
의사는 일시적인 사고 후유증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의사의 조언대로 우물 속을 들여다보지 않고 그대로 덮어 버리기로 했다. 잊어선 안 될 기억이라면 언젠가 스스로 떠오를 테니까.
다행히 기억에 문제가 생긴 것 외에는 전부 멀쩡했다. 무려 트럭에 치여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도 타박상이 전부였다. 게다가 항상 나를 하대하던 교수가 사고 후로는 이상하리만치 친절해졌다.
“이대로 진행해 보게. 분명 대단한 논문이 될 거야…!”
사고를 기점으로 일이 잘 풀리기 시작한다니, 퍽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행운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하지 않던가. 신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상을 내려 주신 게 틀림없었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교수가 학회에 간 덕분에 연구실은 조용한 낮을 맞이했다. 후덥지근한 햇볕을 등지고 선풍기 앞에서 책을 읽고 있으니 신선놀음이 부럽지 않았다. 이러다 오늘 할 일마저 까먹을까 봐 반납할 책을 챙겨서 연구실을 나섰다.
방학이라 그런가. 캠퍼스가 평소보다 텅 비어 있었다. 왠지 힘이 빠져 터덜터덜 도서관으로 향하는데, 광장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아니, 발견했다기보다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시선이 그쪽으로 끌려갔다.
한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정장. 훤칠한 키. 그리고 허리춤까지 흘러내리는 긴 금발. 현실감 가득한 캠퍼스 내에서 그의 주변에만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마치 다른 세계인 것처럼.
“……연예인인가…?”
무언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둘러보기에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차갑기 그지없는 금색 눈동자와 마주치자마자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난생 이렇게 잘생긴 사람은 또 처음 본다. 날렵한 선에 완벽한 비율을 가진 조각상을 보는 듯했다. 속으로 연신 감탄하다가 뒤늦게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는 걸 알아챘다.
“아, 이상한 사람은 아니구요. 이 학교 학생인데… 혹시 건물을 못 찾으신 건가 해서요.”
나름대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풀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일그러진 그대로였다. 불편하거나 불쾌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살짝 벌렸다가 다물거나 주먹을 꽉 쥐는 등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 보였다.
잠깐. 설마 우리말을 모르나?
“저…….”
흘끗 눈치를 살피자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도서관.”
“네?”
“도서관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겠나?”
신도 참, 무심하시지. 어떻게 목소리까지 좋을 수가 있나. 방학이 아니었다면 이 사람 하나로 캠퍼스가 시끄러워졌을지도 모르겠다.
“잘됐네요. 마침 저도 도서관 가는 길이었거든요.”
따라오라는 의미로 가볍게 눈짓을 하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그는 자연스럽게 내가 들고 있던 책더미를 가져갔다. 초면인 데다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빚을 질 수는 없었다.
“엇, 제가 들게요!”
다시 가져가려고 했지만, 그는 책을 넘겨 줄 생각 따위 추호도 없어 보였다. 어서 도서관으로 앞장서라는 듯 조용히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결국 어색하게나마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곤 걸음을 옮겼다.
도서관으로 가는 내내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뭐라도 물어볼까 싶을 때마다 내게 쏘아오는 눈빛이 입을 틀어막았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왜 저렇게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지 궁금하면서도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쉬운 대로 분위기라도 풀어 보려 슬쩍 말을 걸었다.
“근데 도서관엔 어쩐 일로 가시는 거예요?”
“만나야 하는 사람이 왠지 그곳에 있을 것 같았거든.”
“아…. 혹시 누굴 찾으시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이면 연락이라도 취해 볼까 싶었다. 그러나 그는 부드럽게 거절했다.
“괜찮네. 이미 찾았으니까.”
벌써 찾았다고? 예상외의 말에 고개를 들자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경직되어 있던 얼굴이 어느새 풀려 있었다.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그는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그건… 다행이네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생판 모르는 사람의 사연이 궁금해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당연히 물어보지는 못했다. 다만, 만나야 하는 사람을 찾아가지 않고 꿋꿋이 나를 따라오는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혼자서 곰곰 생각하다 보니 벌써 도서관에 다다랐다. 입구로 들어갈 때까지도 책을 건네주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양손을 내밀었다.
“저기….”
“음?”
“그 책들 다시 주시겠어요? 제가 반납해야 돼서요.”
그제야 그는 내 팔 위에 책을 올려 주었다. 그때 스치듯 닿은 손이 이상하리만치 차가웠다. 한여름, 그것도 뙤약볕 아래서 정장을 입고 서 있던 사람치고는 너무도 낮은 체온이었다. 꼭 살아 있지 않은 무언가를 만지는 것만 같았다.
“아무튼 여기가 도서관이에요. 저는 이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계단을 올랐다. 이제 그는 만나야 하는 사람을 찾으러 가겠지. 마음 한구석에 남은 찜찜한 느낌을 뒤로하고 카운터로 향했다. 바쁘게 일하던 사서가 날 알아보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태오 씨. 설마 방학인데, 출근했어요?”
“하하, 네에. 저번에 빌렸던 책 반납할 겸 왔어요.”
카운터에 빌린 책을 한꺼번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코드만 찍어 주시면 책은 제가 갖다 놓을게요.”
“그럼 저야 고맙죠.”
표지에 붙은 바코드를 차례대로 찍던 사서는 대뜸 눈짓으로 뒤편을 가리키며 물었다.
“근데… 저분은 누구예요?”
“네?”
뒤를 돌아보니 그 남자가 벽에 기대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몸의 윤곽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햇빛과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꼭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보다 왜 아직도 안 간 거지? 그냥 여기서 만나기로 한 건가. 무엇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었기에 어깨를 으쓱이며 뒷말을 흐렸다.
“글쎄요. 저도 잘…….”
“태오 씨랑 같이 들어온 거 아니에요?”
“저분이 도서관이 어딘지 물어보셔서 같이 온 것뿐이에요.”
“그래요? 아쉽네요. 아는 사람이면 소개해 달라고 하려 했는데.”
“하하….”
어색한 미소로 얼버무리며 다시 책더미를 안고 걸음을 돌렸다. 그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내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또다시 책을 가져가려는 것 같아 한걸음 물러섰다.
“두 번씩은 죄송하죠. 제가 들게요.”
거절의 의미로 웃으며 고개를 내젓자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또 묘하게 귀여운…. 아니, 처음 보는 사람에게 들 생각은 아니지. 아무튼 다른 사람의 눈에는 내가 그와 영락없이 아는 사이로 보일 터였다.
혹시나 하고 슬쩍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사서들끼리 모여서 그를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를 향한 눈빛엔 저마다 호기심과 호감이 담뿍 느껴졌다. 왠지 나 혼자 이 사람을 독점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불과 몇 분 전에 만나서 이름조차 모르는 남이다.
“만나기로 한 분은 아직 안 오셨나 봐요.”
“…음.”
긍정도 부정도 아닌 굉장히 애매한 대답이었다.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엇보다 보는 눈이 많은 데다가 수상한 사람 같진 않으니 친절하게 대해 줘서 나쁠 건 없었다.
“그럼 일행 분 오실 때까지 저랑 같이 있으실래요?”
“바쁜 거 아니었나?”
“책만 정리하면 돼요. 그보다 더운 날에는 연구실보다 도서관이 훨씬 시원하거든요.”
장난스럽게 코를 찡그리며 말하자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처음 봤을 땐 마냥 무표정하고 냉랭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표정이 다양하다. 무엇보다 그가 웃을 때면 세상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첫눈에 반했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소설처럼.
“금방 끝낼게요.”
책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려 기억해 두었던 책장으로 향했다. 한 권씩 차근차근 꽂아 두는데 바닥에 있던 발판을 미처 보지 못하고 그만 발을 헛딛고 말았다. 그때 바로 옆에 있던 그가 내 등에 팔을 둘러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걱정으로 얼룩진 얼굴이 제법 가까이 보였다.
“다친 곳은 없나? 태오.”
“아, 네. 덕분에요.”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지만, 의도치 않게 그의 품에 반쯤 안겨 버렸다. 길게 흘러내린 금발이 내 어깨에 닿아 바람이 손짓하듯 살랑살랑 흔들렸다. 게다가 얼굴은 또 왜 이렇게 가까운 걸까. 갑자기 민망해져서는 큼! 헛기침을 내뱉으며 어색한 기류를 날려 보냈다.
“하하, 죄송해요. 제가 가끔 이래요.”
책을 마저 꽂아 두려다가 뒤늦게 이상한 점을 떠올렸다. 방금… 나를 태오라고 부르지 않았나? 이상하다. 나는 그에게 이름을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착각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정확한 발음이었다.
“근데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