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
반년의 시간이 어찌 흘렀는지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여행이 이리도 즐거운 일인 줄 알았다면 진즉 몇 번이고 다녔을 테다. 여행 마지막 날 아쉬운 마음을 드러내자 유피테르는 웃으며 말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에 권태를 느낄 즈음 또 여행을 가자고. 그 말에 다시금 깨달았다.
“그러네요. …시간은 많으니까.”
이제 우리에겐 끝이란 없고 다음만 존재한다. 해가 지날수록 나이를 세는 게 무의미해지고, 계절의 변화에도 무감해질 것이다. 그러니 언젠가 반드시 삶이 지루해질 것을 알기에 다음을 기약하는 유피테르의 제안은 무척 달콤하게 들렸다.
그렇게 르브하의 여행이 끝나고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도 여유가 생기면 쿠네 숲에 가서 티타임을 즐기곤 했다. 그럴 때마다 히페리온은 기다렸다는 듯 내게 차를 내어주고, 가끔은 숲의 공기를 마시러 온 오케아노스를 만나기도 했다.
바로 오늘처럼.
“어서 와요!”
[…꼭 제 집처럼 반겨 주는군.]
“하하, 방금 왔거든요. 잘 지내셨어요?”
오케아노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손님이 둘씩이나 찾아왔지만, 히페리온은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싱그러운 열매와 허브 차를 내어주었다. 은은한 허브 향기를 맡으며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히페리온은 오케아노스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요즘 바다는 어떤가.]
[어느 때와 같이 아름답고 귀하지.]
[후후,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은 친구로군.]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예전 오케아노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옛날엔 히페리온과 종종 담소를 나눴었다고 했던가.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아예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지만, 요즘 들어 부쩍 함께 지내는 모습을 많이 보니 신기했다. 다시는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고 비관하던 오케아노스의 생각은 과연 바뀌었을까.
“저, 오케아노스.”
[음?]
찻잔을 들고 허브 향기를 맡던 오케아노스가 흘끔 시선을 들었다. 차갑게 빛나는 물색 눈동자와 마주하니 왠지 물어보지 않고도 답을 알 것 같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겠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싱겁긴.]
가볍게 코웃음을 친 오케아노스는 이내 차를 홀짝 마셨다. 여전히 대하기 어려운 마물이긴 하다만 예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마주치기만 해도 날을 세우던 그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사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간의 변화에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히페리온이 느닷없이 심각한 투로 물었다.
[그대. 이제는 괜찮아진 건가?]
“네? 뭐가요?”
[얼마 전에 목소리가 들린다고 하지 않았나.]
“아…. 그건 여전히 그래요. 조금 익숙해졌지만요.”
히페리온이 고생한다며 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눈빛을 보곤 어제도 밤에 갑자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당황스러웠단 말을 속으로 삼켰다. 무섭기는 하지만 그 목소리가 무엇 때문에 들리는지 알기에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오케아노스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목소리?]
“아, 그게… 신도들의 기도 소리가 가끔씩 제게 닿거든요.”
[기도 소리라…. 그건 그거대로 귀찮겠군.]
“괜찮아요. 어차피 관여하지는 못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할 뿐이니까요.”
조용히 찻잔을 들여다보자 잔잔한 수면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 비쳤다.
유피테르와 약속했다. 어떤 가슴 아픈 기도가 들려와도 절대 관여하지 않기로. 그는 내게 사람들을 돕는 건 사제의 몫이니 그저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라고만 했다. 처음엔 간절한 목소리를 무시하기가 어려웠지만, 유피테르가 왜 그런 조언을 했는지 이해하기에 순순히 따랐다. 데우스로 인해 고대 이아페에서 일어났던 재앙이 재발하지 않기 위한 방안이었다.
착잡한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히페리온은 차분한 어조로 나를 위로했다.
[이야기를 들어줄 이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될 걸세.]
“그랬으면 좋겠네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허브 향이 가득한 차를 마셨다. 목으로 넘어가는 따스한 찻물이 마음에 진 응어리를 녹여 주는 듯했다. 한창 향에 취해 있는데 갑자기 테이블 밑에서 금빛이 흘러나왔다. 화들짝 놀라 찻잔을 내려놓는 다음 순간 그림자에서 금빛 날개 가진 매가 나타났다.
유피테르의 전령, 헤르메스였다.
[저건….]
쉬이 평정심을 잃지 않는 오케아노스도 헤르메스를 보고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가 유피테르를 닮았음을 물론 유피테르의 마력까지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내밀자 헤르메스가 다가와 날렵한 부리를 손바닥에 비볐다.
“헤르메스, 무슨 일이야?”
처음 내게 본모습을 드러낸 이후로 나타난 적이 없었기에 궁금할 따름이다. 이윽고 낮게 내려온 나뭇가지에 자리 잡은 헤르메스가 입을 열었다.
[헤메라. 거기 있었군.]
부리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유피테르의 것이라 흠칫 놀랐다.
“어, 유피테르예요?”
[그래. 언제쯤 집으로 돌아올 건가?]
“해가 지기 전에 갈게요. 내일 중요한 약속도 있으니까요.”
티타임을 즐기다가 잠시 동안 잊고 있던 일이 떠올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지 히페리온이 자못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중요한 약속이라니?]
“아, 황실에 가야 하거든요.”
그것도 무려 칼리온의 생일 연회에 초대받았다. 이제는 태자가 아니라 어엿한 황제가 되었으니 그 규모가 얼마나 성대할지 가늠이 잡히지 않는다. 아쉽게도 칼리온은 아예 ‘태오’를 잊어버렸기에 나는 유피테르의 조수 신분으로 참석하는 거지만, 그래도 준비할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굳은 표정에 긴장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유피테르는 부담 갖지 말라고 당부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불편하면 참석하지 않아도 되네.]
“아니에요. 저도 오랜만에 칼리온을 보는 거니까요.”
능청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공식적인 연회자리는 어떻게든 피하려 했지만, 최근 또 유피테르 앞으로 날아오는 혼담에 내심 불안해졌다. 내가 없는 사이 누가 ‘아스레인 백작’에게 접근할지 모르니 겸사겸사 얼굴을 비추러 가는 거였다. 정작 당사자인 유피테르는 모르겠지만.
유피테르는 내 웃는 얼굴을 보고 안심한 듯 한결 풀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자네와 만나기를 고대하는 이에게 그리 전해 두겠네.]
응? 나와 만나기를 기다리는 사람? 그게 누구냐고 물어보려는 차에 헤르메스는 다시 그림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 후로 집에 돌아가서도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로 다음 날이 찾아왔다.
거울 앞에 서서 매무새를 가다듬다말곤 유피테르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 괜찮아요? 어색하거나 그러진 않아요?”
“헤메라. 벌써 다섯 번째 같은 질문이네.”
“그래도 긴장된단 말이에요.”
한숨을 푹 내쉬며 앞을 보니 거울 속에는 예전 ‘태오’가 서 있었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다. 단지 연회장에서까지 로브를 뒤집어쓸 순 없었기에 유피테르의 마법으로 도움을 받았다. 머리카락부터 속눈썹까지 새하얗다가 오랜만에 ‘태오’일적의 모습으로 돌아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게다가 오랜만에 정장까지 갖춰 입으니 긴장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무쪼록 실수만 안 했으면 좋겠네요….”
불안한 나머지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유피테르가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여태 실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 않았나.”
“그렇긴 하지만… 긴장하고 있었거든요.”
“힘들면 신경 쓰지 말고 언제든 말하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함께 마법진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황성과 가까운 안겔루스 대학으로 이어진 마법진 위에 올라서며 슬쩍 유피테르를 떠보았다.
“그런데 절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예요?”
“그건 가보면 알게 될 걸세.”
결국 끝까지 답은 듣지 못했다.
얼마 후 도착한 황성은 지금껏 내가 본 어떤 축제보다도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황성 중심부에 마련된 연회장으로 향하니 벌써부터 귀족들이 보였다. 그때 마차가 오가는 길목에서 기다리던 하인 하나가 유피테르를 보자마자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인은 연회장 정문을 지나쳐 인적이 없는 뒷문으로 안내했다. 조용한 계단으로 올라가니 커다란 문 앞에 두 명의 기사가 지키고 서 있었다. 저 안에 황제가 된 칼리온이 있음에 틀림없었다. 이윽고 하인은 문 앞에 서서 공손한 자세로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아스레인 백작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하게.”
엄중한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무거운 문이 스르르 열렸다. 접견실처럼 꾸며진 방은 한쪽 벽이 어두운 유리로 되어 있어 한 눈에 연회장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연회장을 살펴보던 칼리온은 이내 유피테르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어서 와요. 아벨.”
누구에게도 감시 받지 않는 방이라 그런가. 칼리온은 황제로서의 엄격한 모습은 잠시 버리고 예전의 친근한 태도로 반겨 주었다. 어색하게 유피테르 옆에 서 있다가 틈을 봐서 곧바로 인사를 올렸다.
“축하드립니다. 폐하.”
칼리온은 마치 나를 처음 본 그때처럼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헤메라… 라고 했던가?”
“기억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하하, 기억해야지. 그 까다롭기로 소문난 아벨이 직접 선택한 조수이니까.”
정말로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나름대로 비밀 편지도 주고받으며 친구라고 부를 만한 관계였는데…. 그래도 유피테르가 ‘그 마물’이라는 사실만큼은 여전히 기억하는 모양이다. 마치 부자지간처럼 유피테르와 친근하게 말을 주고받던 칼리온은 이내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아스레인 가문을 이을 후계자가 정해졌다면서요?”
뭐? 아스레인 가문의 후계자? 전혀 듣지 못한 이야기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흘끔 시선을 던졌지만, 유피테르는 일부러 인지 정말 모르는 건지 태연하게 답했다.
“음. 나보다 먼저 여기 도착해 있네.”
“안 그래도 보고 있었어요. 벌써부터 연회장이 떠들썩해졌더군요.”
뭐야. 나만 빼고 다 아는 이야기인건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어 실례를 무릅쓰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후계자…라뇨?”
영문을 모르겠다며 눈만 끔뻑이니 칼리온이 곤란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그가 말해 주지 않던가?”
“네. 지금 처음 듣는 얘기예요.”
역대 아스레인 가문은 언제나 유피테르가 도맡아 왔다. 예전엔 에녹, 지금은 디아벨. 그리고 그 이전에도 수많은 다른 이름이 있지만 전부 동일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아예 다른 사람에게 가문을 물려 주려는 걸까? 설마 내가 없는 사이에 입양 절차를…? 아니, 그건 아니겠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멍하니 있자 유피테르가 유리 벽 너머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있잖나.”
“…예?”
“자네도 아는 사람이네.”
내가 아는 사람이라기에 서둘러 벽으로 다가가 연회장을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가득했지만, 유피테르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유독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의 한가운데에 누군가 서 있었다. 다만 인파에 묻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 옆에서 함께 연회장을 내려다보던 칼리온은 입가를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아, 다른 대신들이 눈독들이기 전에 어서 가야겠네요.”
칼리온은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해 마냥 즐거운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잠시 후 연회의 주인공인 황제가 나타나자 연회장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황제에게 쏠린 덕분에 우리는 조용히 연회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황제에게 축하의 말을 올리는 사이 나는 조용히 후계자를 찾았다. 그제야 흩어진 인파 사이로 보이는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뱀의 꼬리처럼 어깨를 타고 길게 흘러내린 회색머리에 청아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말도 안 돼….”
그건 미래를 보는 눈이었다.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아 손등으로 눈을 벅벅 비볐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제자리에 서있었다. 내 기억 속 소년의 모습이 아니라 어엿한 청년이 되어 있었지만, 미소가 잘 어울리는 정갈한 이목구비는 그대로였다.
“어, 어떻게 그가 여기 있는 거예요?”
말까지 더듬어가며 묻자 유피테르는 데우스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마지막 남은 기억의 파편을 토대로 만들었네.”
“아스레인 가문을 이을 후계자가 필요했던 건가요?”
“아니. 분명 모든 기억을 지웠을 텐데, 그가 먼저 마물과 인간을 잇는 중재자가 되고 싶다고 하더군.”
마물과 인간을 잇는 중재자. 그건 프로메테우스가 처음 태어날 때 부여받은 사명이었다. 그때도 사명을 다하고자 했으나 오해가 쌓이고 쌓여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번에도 똑같은 길을 걷게 되면 어쩌나 불안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시 데우스를 만나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섰다. 복잡 미묘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질끈 쥐었다. 그때 따스한 손길이 잘게 떨리는 내 손을 감쌌다.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유피테르가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걱정 말게. 이번엔 어긋나지 않을 테니.”
“…유피테르.”
“물론 처음부터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못하겠지. 그러니 나와 함께 그를 곁에서 지켜보지 않겠나.”
데우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바로잡는다, 라. 비극적인 과거를 엿보며 끊임없이 들었던 생각이었다. 그때는 단지 안타까움만 남은 상상으로 그쳤으나 지금 기회가 현실로 찾아왔다.
만약 그가 과거의 잘못을 속죄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자신이 어지럽혔던 세상을 바꾸어 나갈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럴게요.”
그 어떤 어려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해내고 말 것이다.
그제야 우리의 시선을 느낀 건지 데우스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유피테르를 발견하자마자 투명한 하늘색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여전히 유피테르를 가장 좋아하는구나. 그를 향한 애정이 담뿍 느껴져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그려졌다.
“아버지.”
유피테르만 보고 다가오던 데우스가 뒤늦게 나를 발견하곤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갑자기 예의를 차리는 모습에서 이제 막 사회에 나온 초년생 같은 풋풋함이 느껴졌다. 긴장을 풀어 줄 겸 싱긋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아, 당신이 아버지의 연인….”
“조수요.”
황급히 정정하자 데우스가 아차 싶었는지 입을 꾹 다물고 눈치를 살폈다. 때 묻지 않은 청정한 반응이 내 기억 속의 데우스와는 한참 달랐다. 어수룩한 모습이 귀엽게만 느껴져 얼굴 가득히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자기소개를 했다.
“헤메라라고 해요.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제 이름은 프로메테우스라고 해요.”
“좋은 이름이네요.”
마치 처음 만난 것처럼 악수를 청하자 데우스는 선뜻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부디 데우스라고 불러 주세요.”
“좋아요. 데우스. 우리 앞으로 잘 해 봐요.”
그날부로 하루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매일 같이 귀족들이 데우스에게 인사를 한답시고 저택으로 찾아오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다. 벌써부터 황제의 눈에 들었다며 어떻게든 연줄을 두려는 듯했다. 그 탓에 지금껏 유피테르가 하던 일을 넘겨주는 건 뒷전이 되었다.
그래도 역시는 역시였다. 데우스는 유피테르가 만들어 낸 기둥답게 살벌한 정계에 곧잘 적응해 나갔다. 어느새 유능함이 그 아비를 쏙 빼닮았다는 평을 듣는 것은 물론이요, 오히려 선조인 디아벨보다는 인간미가 느껴진다며 도움을 청하는 이가 배로 늘어 버렸다.
그 덕분일까. 짧은 기간 동안 제국 내 마물의 대우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지금껏 인류에게 얼마나 위험한가를 기준으로 나뉘던 마물은 이제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멸종 위험 정도로 분류되었다.
마침내 ‘유익한 이용’을 위한 연구가 아니라, ‘세계를 위한 공존’으로 한걸음 나아간 것이다.
그렇게 폭풍 같은 나날이 지나고 나는 내려 두었던 팬을 다시 들었다. 바쁜 나머지 멈춰 두었던 글을 이제는 마무리하고 싶었다. 비록 더는 학생의 신분이 아니기에 안겔루스 대학 날인은 받지 못하겠지만, 책으로 나오면 여러 사람에게 널리 알려질 것이다.
마지막 문장을 쓰고 마침표를 찍고 나니 유피테르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다 된 건가?”
“네! 드디어 끝났어요.”
기지개를 쭉 펴며 고개를 들자 한껏 호기심이 묻어나는 얼굴이 보였다. 한때 자신의 이야기는 쓰지 말라고 반대했던 사람의 표정이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끝내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도록 각색하겠다고 약속을 한 후에야 허락을 받을 수 있었지. 아쉽긴 해도 이렇게 완성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래서 제목은 뭐로 정했나?”
“여러 가지 생각해봤지만, 역시 이게 가장 마음에 드는 것 같아요.”
마구잡이로 흩어진 원고를 모아 유피테르에게 건네주며 웃었다.
“그 마물에 대한 논문. 어때요?”
이것은 오래도록 외로움과 싸우며 세계를 지켜온 그 마물의 일대기.
…아니, 앞으로도 이어질 우리의 이야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