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8 (298/305)

#298

나날이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이 이토록 소중할 줄은 몰랐다. 원생에서 조수가 되어도 하는 일은 비슷해서 금세 적응했다. 이따금씩 나 자신을 ‘헤메라’라고 소개해야 할 때면 어색한 나머지 멈칫거리곤 했지만, 그마저도 금방 익숙해졌다. 그리하여 떠나간 ‘태오’의 빈자리는 자연스럽게 ‘헤메라’가 채워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찾아왔다. 유피테르와 옆 나라 르브하로 여행가기로 약속한 날이 되었다. 신이 나서 꼭두새벽부터 짐을 챙기고 있는데, 여행가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닉스와 이카로스가 저택으로 찾아왔다.

“어서 와요!”

[영감은?]

“마지막으로 보낼 서신이 있다고 해서 집무실에 있어요. 불러드릴까요?”

[어후, 됐어. 널 보러 온 거니까.]

닉스는 질색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오히려 안 보여서 다행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러자 이카로스가 집무실을 찾는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무심하게 툭 한 마디 했다.

[그래도 댁에 왔으니 인사는 드려야하지 않겠습니까.]

[아서라, 영감이 우리가 왔다는 걸 모르겠어? 안 보이는 걸 봐선 어지간히 바쁜가봐.]

닉스의 말이 맞았다. 진즉 조각상으로부터 손님이 왔단 소식을 들었을 텐데 조용한 걸 보니 여행가기 전 일처리로 바쁜 모양이다. 그 후 닉스는 뜬금없이 여행 짐을 챙기는 걸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딱히 관심이 없어보이던 이카로스까지 따라오니 부담은 배가 되었다.

“하하… 괜찮은데….”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눈치를 살피자 닉스는 입술을 비죽이며 말했다.

[같이 여행가는 기분이라도 내려고 그래.]

서운한 표정을 봐버렸는데 어찌 밀어낼 수 있겠는가. 결국 그 둘을 데리고 내 방으로 향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방을 둘러보던 닉스가 문득 책상 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곳엔 내가 태오이던 시절에 쓰던 물건들이 놓여있었다. 처음 현장 실습에 나갔을 때 열심히 메모한 종이와 펜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구겨져버린 종이를 천천히 손끝으로 훑는데 닉스가 넌지시 물었다.

[그립니?]

“…네?”

[지금쯤 인간이던 시절이 그리울 법도 하니까.]

그리운…가? 가끔 기본적인 욕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 몸을 보며 신기하기는 했다. 맛있는 음식을 가득 먹은 후의 포만감이나 말끔히 자고 일어났을 때의 행복이 어떤 거였는지 벌써 잊어버렸다. 거의 잠을 자지 않으니 하루는 더욱 길어졌고 종종 사람들의 기도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게 헤메라로서의 고충이기는 하다만…….

“얻은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으니까요. 전 여기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다행이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왠지 모르게 씁쓸해 보였다. 무슨 고민이라도 하는 걸까.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닉스는 이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영감이 차원을 넘어서 널 찾아오겠다고 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이대로 그가 이 세계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어. 널 찾을 수 있다면, 수백수천 년이 걸려도 포기하지 않을 기세였거든.]

“그랬…었군요…….”

[그가 없다면 이 세계는 금세 무너져버리겠지. 그걸 알고 오케아노스와 히페리온은 가지 말라고 말렸어. 하지만 이미 결심을 끝냈는지 우리에게 뒤를 맡긴다고 하고 가버리더라.]

그건 내가 사라진 후의 이야기. 궁금하기는 해도 차마 물어볼 수는 없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닉스의 말대로 균형을 이루는 ‘그 마물’의 부재란 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일일 것이다. 그걸 알고 있기에 오케아노스와 히페리온이 말린 거겠지.

[이카로스야 원래도 영감의 말을 잘 들었으니까 선택을 지지해줬지만…. 나는 끝까지 고민이 되더라. 그가 또 우리를 버리고 가는 건가 싶었어.]

“…닉스.”

[그런데 결국 말리진 못했지.]

깊은 수심에 잠겨있던 눈동자가 어느새 노을처럼 아름다운 붉은색으로 빛났다.

[이 세계가 멸망한다더라도 널 다시 보고 싶었거든. 헤메라.]

닉스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두 팔을 뻗어 나를 끌어안았다. 그 품은 그동안 지내온 밤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곳의 밤은 지독한 악몽과 칼에 찔리는 환각으로 뒤엉켜 차갑고도 외로울 뿐이었다. 그러나 이곳의 밤은 마음에 깊이 남은 상처마저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고마워요. 닉스. 당신이 아니었다면…. 전 이곳에 다시 돌아오지 못했을 거예요.”

[사랑스러운 것. 이 세상 그 무엇도 널 해치지 못할 거란다.]

나도 모르게 그의 품에 파고드니 닉스는 등을 찬찬히 토닥여주었다. 그 손길은 꼭 어릴 적 악몽을 꿨다고 울 때마다 달래주던 부모님과 닮아있었다. 조용히 옆에서 지켜보던 이카로스도 어색하게나마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헤메라. 오케아노스나 히페리온이 당신을 포기한 건 절대 아닙니다.]

“그럼요. 무슨 마음인지 잘 알아요. …저도 유피테르가 데리러 왔을 때, 어서 돌아가라고 했거든요.”

나로 인해 세계가 망가졌다면 그편이 더 괴로웠을 테다. 오케아노스도 히페리온도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을 내렸을 뿐이다. 전부 이해한다며 고개를 주억거리곤 천천히 닉스의 품에서 나왔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영감은 그게 문제라니까. 네가 조금이라도 신경 쓸 법한 일은 전부 묻어버려.]

닉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빈정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나 유피테르나 서로가 곤란할 것 같은 일은 숨겨버리곤 하니 문제였다. 왠지 나까지도 혼이 나는 느낌이라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이카로스로 신경을 돌렸다.

“이카로스도 저번부터 계속 도와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앞으로도 그분을 잘 부탁드립니다.]

“그것만큼은 걱정 안 해도 돼요.”

그 후 셋이 함께 여행 짐을 챙기는데 방문을 열고 조각상이 들어왔다. 끼긱- 이상한 소리를 내며 걸어온 조각상은 곧 우리 앞에 멈춰 섰다. 한참을 조용히 서있기만 해서 슬슬 무서워지려던 차에 조각상의 가슴에 박힌 마석이 빛나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헤메라.”

“유…피테르?”

일부러 직접 오지 않고 전령을 보낸 건가? 꼭 조각상이 유피테르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기괴한 광경에 당혹스럽기도 잠시 유피테르는 제 할 말을 마쳤다.

“이만 짐 챙겨서 나오게. 호수 건너에 마차가 도착했네.”

“아, 네. 갈게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마석의 빛이 사그라졌다. 마지막으로 못 챙긴 물건은 없는지 확인하는 사이, 닉스가 조각상을 툭툭 건드려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조각상이 목석처럼 가만히 있자 연결이 끊겼다고 생각했는지 기다렸다는 듯 이카로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냥 이동 마법으로 가면 될 것을, 왜 마차를 탄대?]

[낭만이 없지 않습니까.]

[낭만~?]

뜻밖의 대답에 닉스는 코웃음을 치며 예리한 손톱 끝으로 이카로스의 턱을 쓸었다.

[네 입에서 낭만이란 말도 나오고,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신혼여행이란 그런 거라고 배웠습니다.]

[어디서 이상한 것만 주워들어선.]

쯧. 옅게 혀를 차는 모습에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이대로 유피테르와 여행을 가면 다른 마물들은 어쩌나 싶었는데, 저 둘이 장난을 치는 걸 보니 안심해도 되겠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조각상이 짐 가방을 들고 먼저 방을 나섰다.

따라 나서려는데 닉스가 내 어깨를 가볍게 붙잡으며 물었다.

[잊은 건 없지?]

“그럼요.”

[잘 다녀와. 우리 헤메라.]

따스한 배웅을 받으며 저택 밖으로 나오니 나르키소스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 유피테르가 보였다. 방해되지 않게 발소리를 죽여 다가갔건만, 눈치 빠른 나르키소스가 금방 나를 알아채고는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다.

“잘 지냈어?”

물기 묻은 머리를 슥슥 쓸어주니 마치 슬라임 같은 감촉이 느껴졌다. 내 손길을 바라듯 달라붙는 나르키소스가 좋아서 웃다가 말곤 아차, 싶어서 유피테르를 돌아보았다.

“많이 기다렸어요?”

“괜찮네. 나도 일을 끝내고 막 나온 참이니.”

“그 산더미 같은 서신을 다 보내서 다행이네요. 맞다! 짐은요?”

“이미 마차에 실어뒀네.”

그의 시선을 따라 호수 건너편을 보니 마차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마부 자리에 로브를 쓰고 떡하니 앉아있는 이는 아무래도 조각상이겠지. 그 모습을 보니 정말로 여행을 떠난다는 실감이 들었다.

“우리 진짜 놀러가는 거예요?”

두 눈을 반짝이며 묻자 유피테르가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네. 가는 거예요.”

내 말투를 따라하는 짓궂은 모습에 왠지 민망해져서 뺨이 홧홧해졌다. 애써 모르는 척 나르키소스에게 인사하곤 유피테르를 따라 호수 위를 걸었다. 인간일 적에는 유피테르의 도움을 받아야 돼서 공주님처럼 안겼었는데, 이젠 동등한 위치에서 나란히 걸을 수 있어 기뻤다.

그와 손을 마주잡고 가다말곤 문득 저택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 안에 이카로스랑 닉스가 있는데, 인사 안 해도 괜찮아요?”

“얼굴 보면 신나서 놀려댈게 뻔한데 굳이 마주해서 뭐하나.”

“하하….”

그건 그렇지. 닉스는 분명 신혼여행 잘 가라는 둥, 이대론 못 보낸다는 둥 조잘조잘 이야기할 것이다. 그럼 그 옆에서 이카로스가 아랑곳 않고 할 말을 보태겠지. 마치 직접 본 것처럼 훤히 상상되는 광경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즐겁게 떠들다보니 마냥 넓어보이던 호수를 금방 건넜다. 마차 앞에 다다르자마자 에스코트하듯 자연스럽게 문을 열어주던 유피테르가 대뜸 물었다.

“멀미약은?”

그 질문을 듣자마자 꾹 다문 입술 새로 스멀스멀 웃음이 비집고 나오려했다. 내가 더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그의 손을 붙잡고 마차에 타며 일부러 속삭이듯 말했다.

“유피테르. 전 이제 인간이 아닌 걸요.”

“…아.”

“후후, 어서 가요.”

그날부로 유피테르와 르브하로 향하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늘 마법진을 쓰다 보니 대륙을 넘는 것만으로 이리도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그래도 마차 안에서의 시간마저 전혀 지겹지 않았다. 예쁜 숲이 있으면 거기서 하루를 묵다가고, 처음 보는 마물과 인사하고, 아기자기한 마을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하여 예상보다 훨씬 늦게 국경을 넘고 말았다. 완만한 언덕을 하나 넘으니 그 아래 시끌벅적한 마을이 보였다. 창문에 딱 달라붙어서 빠르게 가까워지는 풍경을 보니 절로 탄성이 나왔다.

“와, 여기가 르브하구나…!”

국경이 맞닿은 마을에선 마침 축제가 한창이었다. 화사한 꽃이 집집마다 장식되었고, 광장엔 빈곳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길거리엔 악사의 연주 소리와 행인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마치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이한 듯 가슴이 설렜다.

마을 밖에 마차를 세워두고 내리자 유피테르가 내 후드를 씌워주며 말했다.

“인파에 휩쓸리지 않도록 조심하게. 후드가 벗겨지면 곤란해질 테니까.”

“알겠어요. 걱정 말아요.”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발이 흔하지 않아 눈에 띈다던가. 하지만 난 아무리 생각해도 유피테르의 외모 쪽이 더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 같다. 뭐,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괜히 다른 나라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아 얌전히 후드를 쓰고 마을로 들어갔다.

길을 걷다보니 사람들이 저마다 똑같이 생긴 과일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윤기 흐르는 붉은 껍질은 자두 같으면서도 제법 큰 것이 코코넛을 닮아있었다. 자세히 보니 마을 곳곳에도 그 과일을 그려둔 그림이 걸려있었다.

“저… 빨간 과일 수확 축제인가 본데요?”

“아, 가끔 황실에 선물로 들어올 때가 있네. 마프카…라고 하던가.”

어느 노점에서는 아예 마프카란 과일을 반으로 잘라 엄지만한 나무 조각을 함께 팔고 있었다. 지나가던 아이가 엄마에게 사달라고 조르는 걸 보다가 왠지 나도 먹고 싶어졌다. 그래서 아이를 따라서 유피테르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유피테르.”

“음?”

“저도 저거 먹어보고 싶어요.”

눈을 반짝 빛내자 유피테르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노점에 같이 가려고 했는데, 그는 뜬금없이 나를 건물 사이에 있는 인적 드문 길목에 데려다 주었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올려다보니 유피테르는 퍽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사올 테니 여기 있게.”

“에이, 그래도 같이 가는 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피테르는 이미 혼자 노점으로 향했다. 조금 심심하긴 해도 얌전히 골목에 서서 유피테르를 눈으로 좇았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오로지 그만 눈에 들어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역시 제일 눈에 띈 다니까.”

본인만 몰라. 본인만.

나름 흥미롭게 유피테르를 구경하던 그때였다.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어두운 골목에 나처럼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약간 등이 굽은 모습이 노인인 것 같았다. 혹시 도움이 필요할까봐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어르신.”

바로 앞까지 다가가도 노인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설마 말을 하기 힘들 정도로 기력이 쇠한 건가. 나이가 들면 몸이 약해지는 게 자연의 순리이기는 하다만, 그래도 모두가 즐기는 축제이니만큼 그에게도 행복한 시간이 되었으면 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노인에게 천천히 힘을 불어넣었다. 차갑게 굳은 몸이 오늘만이라도 따뜻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력이 몸에 스며들기는커녕 노인의 주변에서 맴돌기만 했다.

이제 신력은 마물의 마력과도 충돌하지 않을 텐데…. 기분 탓인가?

“혹시 댁이 어디세요?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노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는 순간 “헤메라?”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뒤를 돌아보니 큰 길목에 유피테르가 과일을 든 채 서있었다. 노인을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어 여기 있다며 손을 흔드는 그때였다.

“행복해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가을밤에 산뜻하게 부는 바람처럼 정갈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어왔다. 고요한 호수 같은 기억에 잔잔한 파문이 이는 듯했다. 달빛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그 음성은 이상하게도 익숙했다. 누구지?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서있던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유피테르가 살짝 창백해진 내 안색을 보곤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건가?”

“……아뇨.”

꼭 백일몽이라도 꾼 것 같았다. 분명 그가 코앞에 있었는데,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어두운 길목은 텅 비어있었다. 뒤늦게 미소를 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렸지만 유피테르는 여전히 의아해했다. 그의 관심을 돌리려 과일을 받아들고는 능청스럽게 물었다.

“먹어봤어요?”

“음?”

“유피테르는 마프카란 과일 먹어봤나 싶어서요.”

다행히 유피테르는 의심을 지우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한 번 먹어보라고 하려다가 왠지 내가 먹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나무 조각을 숟가락처럼 들고는 부드러운 과일 속을 파서 유피테르에게 내밀었다.

“자, 먹어봐요.”

“…자네가 먹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맛있는 건 나눠 먹어야죠. 어서요.”

유피테르는 잠시 고민하더니 허리를 숙여 과일 속을 받아먹었다. “어때요? 어때요?” 아이처럼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묻자 유피테르는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냥… 단 맛이 나네.”

“에이, 그렇게 말고요. 좀 더 자세하게요.”

한 번 더 먹어보면 다른 평을 해주려나. 다시 나무 조각을 들고 과일 속을 파는데, 갑자기 그의 손이 시야를 가르고 훅 다가왔다. 내 턱을 그러쥐고 고개를 들리는 손길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다음 순간 그의 입술이 내게 와 닿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멍하니 벌리고 있던 입술 새로 달콤한 과일 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아서 입술이 떨어진 후에도 눈만 끔뻑이다가 중얼거렸다.

“……단 맛이네요.”

“그렇지?”

언제쯤이면 입맞춤 한 번에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리지 않으려나. 붉게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꾹 누르며 유피테르를 흘겨보았다. 그도 나처럼 이렇게 두근거리고 있을까? 왠지 바보 같은 궁금증이 일어 유피테르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한참 나와 눈싸움 아닌 눈싸움을 하던 유피테르는 별안간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나를 보면 설레는 게 아니라 그냥 웃긴 거 아닐까? 왠지 억울해져서 이유를 물어보려는 찰나, 유피테르가 내 뺨을 감싸 쥐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질끈 눈을 감았다.

“…….”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슬그머니 한쪽 눈을 떠보니 유피테르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마물이 진짜…! 눈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비죽거리자 또 다시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왜 자네만 보면 장난을 치고 싶어질까.”

“안 좋은 버릇을 들여 버렸네요.”

“그래서, 별로인가?”

유피테르는 눈썹을 슬쩍 치켜세우며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나만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하니 장난으로라도 별로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투정을 부리듯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래요. 언제나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죠.”

“그럼 난 한 순간도 자네를 이긴 적이 없다만.”

“……말은.”

말은 잘해. 진짜.

살며시 눈을 감고 고개를 들자 입술 위로 따스한 온기가 닿았다. 이렇게 품에 안겨있자면 걱정도 불안도 전부 사라지고 머릿속에 오로지 그만 남는다. 세상에 단 둘만 남은 것처럼. 평범한 연인처럼. 그러니 앞으로의 삶이 어찌 흘러갈지는 모르지만, 유피테르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괜찮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누군가 내 행복을 빌어주고 있기 때문일까? 혹시 그 ‘누군가’가 방금 전 신기루처럼 사라진 존재였을까? 내게 행복해보여서 다행이라는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이 말만큼은 꼭 해주고 싶었다.

행복하다고. 그러니 당신도 나를 잊고 행복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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