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시스템이 어디선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진 않을까 내내 불안했는데, 역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얼굴이 반갑기는커녕 경계심을 넘어 적의마저 느껴졌다.
“다신 만나지 말자고 했을 텐데요.”
의도치 않은 삼자대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초조해하는 나와 달리 시스템은 입을 닫고서 좀처럼 속내를 내비치지 않았다. 신의 사자인 그가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지 불안해진 나머지 다급히 유피테르를 변호했다.
“그는 아무 죄도 없어요. 제가 억지로 불러온 거예요. 그러니까….”
- 진정하시죠.
시스템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 이곳은 차원과 차원 사이의 지평선이자, 신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그늘입니다. 당분간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분께 닿지 않을 겁니다.
여기가 사각지대라는 건가? 그래서 유피테르는 편지를 써서 나를 여기로 불렀나 보다. 감시를 피할 수 있어 안심하다가도 문득 시스템의 정체가 떠올랐다. 그늘에 있다고 한들 신의 눈을 대신하는 자가 바로 여기 있다면 사각지대 따위 아무 소용없다.
“…당신이 말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잖아요.”
- 저를 믿지 못하심이 당연하겠지만, 그에게 ‘그늘’의 존재를 알려준 이가 바로 접니다. 그 덕분에 두 분이 무사히 재회할 수 있었던 거죠.
시스템이 유피테르를 도왔다고? …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돌아보니 유피테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게 거짓말을 할 리는 없고, 그럼 설마 시스템이 속인 건가? 유피테르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며 그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저 자를 믿지 마요. 우리를 아무 이유 없이 도와줄 사람이 아니에요.”
“도움 받은 게 아니라 협상을 했을 뿐이네.”
“협상…이요?”
그사이 나는 모르는 모종의 사건이 있었던 건가. 애초에 유피테르와 시스템이 어떻게 만난 거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려는데, 시스템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가로챘다.
- 그 마물이시여. 말씀은 제대로 하셔야죠.
웬일로 날이 서있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시스템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 세계를 볼모로 잡아 저를 위협하지 않으셨습니까.
뭐? 세계를 볼모로 잡아? 시스템을 위협해?? 단어 하나하나가 당혹스러워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과장된 말인 줄 알았건만 유피테르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시스템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내 무심한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도리어 시스템을 비아냥거렸다.
“그럼 남의 연인을 멋대로 데려간 작자에게 좋은 말로 회유할 줄 알았나? 이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 굳이 당신께서 힘을 쓰지 않았어도 제 방식대로 할 거였습니다.
“네가 태오를 다시 데려오기라도 할 작정이었단 말인가? …웃기지도 않는군.”
- 글쎄요. 확실한 사실은 저도 당신 못지않게 태오 님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는 겁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돌연 유피테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 입…함부로 놀리지 마라.”
- 믿어주시지 않으니 유감스럽군요.
공기 중에 날카로운 가시가 날아다니는 듯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분노의 화살이 내게 쏠린 것도 아닌데, 신력마저 사라진 지금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나로선 이 자리에 서 있기도 힘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쓰러질 것 같아서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쳤다.
“잠깐만요! 지금 이게 다 무슨 소리예요?”
안색이 어지간히 창백했는지 뒤늦게 나를 본 유피테르는 퍽 당황스러워했다. 서둘러 마력을 억누르고 부축해 주기에 괜찮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시스템도 덩달아 놀랐는지 내 눈치를 슬쩍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
- 태오 님께서 차원을 넘은 후, 계획대로 저쪽 세계에 ‘태오’란 인간과 얽힌 기억은 전부 사라졌습니다. 그리하여 뒤틀렸던 세계는 다시 균형을 되찾았습니다만…. 제가 미처 생각지 못한 존재가 남아있더군요.
내가 사라져서 세계가 순리대로 돌아왔다면 그걸로 해피엔딩 아니었나. 또 뭐가 남아 있다는 거지?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니 시스템은 잠시 말하길 망설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 헤메라.
“무슨….”
- 사람들은 ‘태오’와 관련된 기억은 못하지만 ‘헤메라’에 대해선 잊지 않았습니다.
뒤통수를 맞은 듯 머리가 띵하고 어지러웠다. ‘태오’는 사라졌지만, ‘헤메라’는 남아 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 둘을 동일인물이라 자각하지 못한데서 오는 기이한 경우였다. 반면에 내가 헤메라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기억에 혼선이 생겼을 뿐, 나를 완전히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유피테르도 나를 기억하는 거예요?”
충격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니 유피테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한동안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러자 유피테르는 내가 사라지고 난 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애석하게도 자네가 약해질수록 내 의식은 돌아오고 있었네.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듣는 것 정도는 가능했지. 그리고… 자네가 사라지던 날에 저 자와 나눈 대화를 전부 들었네.”
“그때 시스템의 존재를 알았군요….”
“그래. 곧바로 눈을 떴지만 자네는 이미 사라져 있었고, 그 ‘시스템’이라는 자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지.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네. 그자가 자네의 행방을 아는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나는 유피테르의 행방을 알기라도 했지. 혼자서 어디 있는지 모를 나를 막연히 찾아다녔을 그를 상상하니 마음이 미어지는 듯했다. 기억이 지워지지 않아 다시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할지, 그로인해 힘들었을 유피테르에 시스템을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눈빛으로 쳐다보니 시스템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일부러 무시한 건 아닙니다. 그저 태오 님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선 안 된다는 철칙이 있었을 뿐이죠.
“그런데 왜 뒤늦게 마음을 바꾼 거죠?”
- 당장 나타나지 않으면 이 세계를 멸망시키겠다는데, 저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더군요. 그래서 바라시는 대로 차원을 넘는 방법을 알려드렸습니다.
시스템이 당시를 회상하는지 퍽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 자체로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무려 신을 상대로 세계를 가지고 협박했다니…. 나로선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유피테르가 별 탈 없어서 다행이었다.
나를 위해 기꺼이 위험을 무릅쓴 유피테르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러자 유피테르는 이 세상에 단 둘만 남은 듯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저 미소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 내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다시 볼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요. 시스템. …그래도 저는 안 돌아가요.”
나지막이 진심을 내뱉자 유피테르는 당황한 듯 내 손을 잡아끌었다.
“태오!”
“부디 유피테르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 주세요.”
고개를 돌려 눈길을 피하곤 나를 붙잡는 그의 손을 힘겹게 떼어 냈다. 내게 쏘아 오는 시선이 느껴졌음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지금 눈을 마주치면 더는 유피테르를 밀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예 걸음을 돌려 시스템에게로 다가가니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 정녕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내가 얼마나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냈는지 알면서….”
또 지옥 같은 삶이 시작되겠지. 그러니 이번엔 내 기억도 아예 지워 달라고 하자. 완전히 연을 끊어내는 거다. 그것만이 내가 살 길이다. 속절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뜬 순간이었다.
갑자기 팔을 끌어당기는 힘에 뒤쪽으로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미안하지만 이번만큼은 자네의 선택을 따라 줄 수 없겠군.”
“유피테르…?”
“이젠 세계가 어찌되어도 상관없네.”
어느새 다가온 유피테르는 나를 보호하듯 뒤에서 끌어안으며 시스템에게 말했다.
“태오가 넘어오는 게 문제라면, 내가 이곳으로 오지.”
- 말도 안 되는 이야길 하시는군요.
“할 일이 끝나니 태오를 원래 세계로 버리듯 돌려보내는 건 말이 되는 이야기였나?”
날카로운 반문에 시스템은 끝내 입을 다물었다. 살짝 일그러진 얼굴엔 못내 지우지 못한 죄책감이 묻어났다. 어차피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 유피테르가 이 세계에 넘어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걸. 그런데도 맹렬하게 빛나는 눈에선 그 어려운 일을 정말로 해낼 것 같은 집념이 느껴졌다.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시스템이 이내 지그시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만.
“…방법?”
-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 방식대로 할 거였다고.
붉게 빛나는 눈동자는 마침내 결단을 내린 듯 굳건한 의지가 돋보였다.
- 태오 님께서 ‘헤메라’로 살아가시는 겁니다.
“예? 그게… 가능한 거예요?”
- 헤메라는 그 세계에서 태어났기에 순리를 벗어나지 않은 존재입니다. 그러니 헤메라로서 살아가도 세계의 균형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헤메라로서 살아가면 그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니- 한 치 앞마저 캄캄하던 동굴에서 드디어 희망을 찾은 듯했다. 적잖이 놀란 듯 얼떨떨한 표정으로 시스템을 쳐다보던 유피테르가 의심스레 물었다.
“그걸 왜 이제 말하나.”
- 유일신을 따르는 제가 인공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게 어디 쉬운 줄 아십니까.
시스템은 눈살을 찌푸리며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 오직 신을 위해 태어난 자가 인간을 위해 스스로를 부정한다. 그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기에 더는 시스템을 탓할 수도 없었다. 유피테르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로도 시스템은 착잡한 심경을 흘려보내는 듯 한참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 그래도 이것으로 당신이 행복해진다면….
“…시스템.”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는 다시금 차분한 태도로 돌아와 설명을 이었다.
- 다만, 기억이 온전한 자는 헤메라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들뿐입니다. 태오 님께서 아끼시던 친구 분들은 당신을 거의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렴풋이 ‘헤메라’일적의 모습을 떠올릴 뿐이죠.
아이리스도, 진도, 세잔도, 휘브도… 전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가. 그간의 추억이 단숨에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시큰거렸다. 그래도 슬픔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내 소중한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었다.
“아예 못 만나는 것보단 나아요. 추억은… 다시 만들면 되니까.”
꿋꿋한 의지를 내비치자 시스템은 퍽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 평범한 인간처럼 늙지도 죽지도 못할 겁니다.
“네? 그게 무슨….”
- 믿음으로 이루어진 자는 ‘모든 이의 기억에서 잊힐 때’ 비로소 죽게 됩니다. 그 전까진 늙지도, 죽지도 못하는 삶을 살게 될 겁니다. …더러는 불멸을 축복이라 생각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지겨운 삶을 끝내지 못하니 저주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시스템은 유피테르를 흘끗 쳐다보고는 이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 소중한 이들은 먼저 떠나 버리고, 당신은 영원히 제자리에 남아 있겠죠. 지금이야 세상이 아름답겠지만 어느 순간 환멸을 느끼게 될 겁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혼자 남는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지겨울 정도로 잘 알고 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렇게 내 곁을 떠나셨으니까. 이젠 친구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한다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갑자기 숨이 꽉 막히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해 질끈 눈을 감았다. 그때 싸늘하게 얼어붙은 내 손을 조심스럽게 그러쥐는 손길이 있었다. 살며시 눈을 떠 옆을 돌아보니 또렷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언제나 의지가 흔들릴 때면 나를 붙잡아 주던, 자그마한 그늘마저 전부 몰아내는 태양 같은 눈빛이었다.
“내가 있잖나.”
“…유피테르.”
“이번엔 결코 혼자 두지 않겠네.”
그래. 내게는 그가 있지. 물론 유피테르가 있다고 해서 이별의 괴로움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이가 함께 있다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되었다. 무엇보다 유피테르를 혼자 두고 가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끝내 결심을 굳히고 시스템에게 말했다.
“시스템. …‘유태오’는 제 부모님과 함께 묻어 주세요.”
- 미련은 없으신 겁니까.
“네. 부모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시스템은 우리의 등 뒤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 그럼 저 문을 따라 가시죠.
어느새 책장은 사라지고 새하얀 문이 나타나 있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넘어온 차원과 차원을 이어 주는 통로였다. 곧바로 걸음을 돌리는 유피테르를 따라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는 시스템이 왠지 모르게 마음에 걸렸다.
결국 문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멈춰서 넌지시 말을 걸었다.
“당신은 정말로 괜찮은 거예요?”
- …예?
“신을…. 그토록 믿고 따르던 그분을 속이고 저희를 보내 줘도 시스템은 무사한 거죠?”
그 순간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던 시스템의 눈가가 살짝 움찔거렸다.
- 저를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걱정이 아니라….”
- 정말 여전하시군요.
시스템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피식 바람이 새듯 웃었다. 저렇게 웃는 얼굴을 보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모든 일의 진상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자주 내게 웃어 주곤 했는데. 이제 와 돌이켜보면 나는 생각보다 많이 시스템을 의지하고 있었다. 내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자, 하나뿐인 조언자였으니까. …이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 버렸지만.
“괜히 말 돌리지 말고 솔직하게 대답해줘요.”
- 글쎄요. 이번 일로 인해 저를 어찌 처분하실지는 오로지 그분의 판단입니다. 하지만 두 분께 피해가 가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책임은 전부 제가 질 테니까요.
“…시스템.”
- 이젠 모두 잊고 온전히 당신의 삶을 사세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시스템은 가슴에 손을 올리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할 수 있어 기뻤습니다. 태오 님.
꼭 영원한 작별 인사처럼 들렸다. 새하얀 문으로 들어가 기나긴 통로를 걸으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시스템은 우리가 까마득히 멀어졌는데도 계속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이윽고 반대편 통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먹혀 정신이 아득해졌다.
모두 잊으란 말 때문이었을까. 그간 시스템과 함께한 기억이 서서히 흐릿해져 갔다.
‘너 정말 시스템이야?’
‘네. 맞습니다. 저는 태오 님의 편리한 모험을 돕는 시스템입니다.’
처음 만났던 그 순간마저도, 빛바랜 사진처럼 희끄무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