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5 (295/305)

#295

왜 몰랐을까. 매일매일 꽃을 놓은 이가 유피테르라는 걸.

그는 끊임없이 주변을 맴돌며 홀로 외로움을 태우는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곁에 있다고, 혼자가 아니라고 하루도 빠짐없이 위로해 주었다. 비록 괴로움에 이성이 먹혀 오랫동안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가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차원을 넘은 목소리가 이제야 내게 닿았다.

이 세계에 떨어진 순간부터 나는 그와 함께였던 것이다. 아니, 나는 단 한 번도 그와 떨어진 적 없었다. 유피테르의 마력을 품은 이 귀걸이가 항상 나를 지켜 주고 있었으니까. 바보같이 눈에 보이지 않아 잊고 있었을 뿐이다.

“이 주소로 가 주세요.”

모두가 잠든 새벽. 신조차도 눈을 감아 사위가 어둑해진 이 밤에 유피테르가 적어 준 주소로 향했다. 혹시 내가 너무 늦게 알아챈 건 아닐까 초조하게 손톱을 뜯으며 마음을 삭였다.

언제까지 신의 눈을 피할 수 있을까. 유피테르가 나를 만나러 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그마저도 위험해질 것이다. 게다가 내가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갔다간 빠르게 멸망의 길을 걷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피테르를 만나고 싶다. 그가 나를 부르고 있다. 아득한 차원을 넘어서 제게 오라고 부르고 있어. 그러니 당장 눈앞에 죽음이 기다린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한줄기 빛조차 들지 않는 늪에 빠져 얌전히 죽음을 기다리기보단 나으니, 살아있을 때 마지막으로라도 유피테르를 담고 말겠다.

그러나 흔들려선 안 된다. 반드시 유피테르를 그 세계로 돌려보내야 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택시는 곧 으슥한 길목으로 접어들었다. 누군가 쓰다 내놓은 물건이 너부러진 허름한 마을엔 인적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곳곳엔 재건축이 무사히 끝나길 기원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이미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사를 간 듯했다.

영 분위기가 수상쩍었는지 택시기사는 백미러로 나를 흘겨보며 물었다.

“정말 이쪽으로 가는 거 맞죠?”

“네. 여기 근처에 내려 주세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택시는 도망치듯 부리나케 마을을 빠져나갔다. 헤드라이트까지 사라지고 나니 마을엔 어둠이 짙게 깔렸다. 얼마나 오래된 건물인지 접근금지, 붕괴 위험 등의 표지판이 도처에 놓여 있었다. 꼭 유령도시처럼 가로등이나 집안 불빛조차 없어 스마트폰으로 손전등을 켜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느 순간 위치조차 잡히지 않아 무작정 길목을 돌아다니던 그때였다. 저 멀리 유일하게 불이 켜진 곳을 발견했다. 표지판도 간판도 없었지만, 바로 이곳이 유피테르가 말한 장소임을 직감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다가가니 넓은 창으로 건물 안의 풍경이 보였다.

“…고서점인가…?”

따뜻한 색의 조명 아래 노끈으로 묶인 책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문을 살짝 열자 낡은 종이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이곳에 정말로 유피테르가 있는 건가? 반신반의하며 고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계세요?”

불이 켜져 있고 문도 열려있는 걸 보면 누가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작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 서점에서도 내가 무언가를 발견해야하는 걸까? 제목조차 알아 볼 수 없는 빛바랜 책만 가득했지만, 그래도 책에 단서가 있을까봐 책등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찬찬히 살펴보았다.

한참 이러고 있으니 문득 이 세계에서 유피테르를 위한 선물을 사려고 서점에 갔던 날이 떠올랐다. 지금이야 유피테르가 남에게 무언가를 받길 싫어한단 사실을 알지만, 그땐 어떻게든 그의 눈에 들려고 안달이 나있었다.

그러다 운 좋게 서점에서 유피테르가 아직 구하지 못했다던 책을 발견했었다. 곧바로 사려고 했지만, 웬 손님이 높은 책장에 있던 책을 가로채 버렸다. 긴 로브를 입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손만큼은 고운 사람.

“그게… 유피테르였지.”

높은 책장을 올려다보며 회상에 잠겨 있다가 유독 새것처럼 보이는 책을 발견했다. 뿌옇게 쌓인 먼지 아래로 손톱만 한 글씨가 선명히 쓰여 있었다. ……‘저주란 축복’이라고.

“저건…!”

나를 저쪽 세계로 끌어들인 책이다. 인터넷에 아무리 검색하고 주변에 수소문해도 절대 찾을 수 없던 책이,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곧바로 발판을 가지고 와서 책장 앞에 두고 밟고 올랐다. 떨리는 손으로 책을 집으려는 순간 불쑥 나타난 손이 책을 가져가버렸다.

여기서 놓칠 수 없단 생각에 다급히 발판에서 내려오며 소리쳤다.

“저기요! 혹시 그 책, 사실 거…….”

“태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일순 굳어버렸다. 바닥에 꽂힌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리자 나를 내려다보는 눈과 마주쳤다. 언제나 올곧게 세상을 비추던, 따스한 봄볕처럼 나를 비추던 그 눈빛이었다.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으니 잔잔한 호수에 물결이 치듯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제야 나를 똑바로 봐주는군.”

말도 안 돼. 정말로 그 사람이 내 눈앞에 서있었다. 그동안 어렴풋이 보이던 환상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은은한 창포 꽃향기가 코끝을 간질였고,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력이 느껴졌다. 심지어 제 주인을 찾은 듯 공명하는 귀걸이에 이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자각했다.

“…유피…?”

무려 유피테르가, 내가 태어난 세계에 있다. 예상을 했음에도 믿기지가 않아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붕 뜨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안기려다가 겨우 정신을 붙잡곤 뒷걸음질을 쳤다. 함부로 닿았다간 물거품처럼 사라질 지도 모른다. 그런데 유피테르는 아랑곳 않고 거리를 좁혀오며 나지막이 물었다.

“유피? 새로운 애칭인가?”

“더 이상 다가오지 말아요!”

어깨를 움츠리며 언성을 높이자 유피테르가 미간을 찌푸리곤 멈춰 섰다. 내 반응이 의아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막상 만나고 보니 반가움보다도 두려움이 더 크다는 걸 유피테르가 알리 만무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거기 있어요.”

터질 듯 두근거리는 심장이 당장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혹시 시스템이 어딘가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까? 만약 유피테르에게 순리를 거스른 책임을 묻는다면, 나는……. 불안한 눈초리로 주변을 살피며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온 거예요?”

“자네가 넘어왔듯이.”

“하지만 차원을 넘는 일은 신만이 할 수 있는…….”

말하다 말고 아차 싶었다. 비록 신으로 숭배하는 인간은 없어도 그 또한 절대자였다. 자신의 힘을 나누어 생명을 창조하고, 사람들의 기억을 지우는 이가 ‘신’이 아닐 리 없었다. 아직 현실감이 없어 혼란스러워하니 유피테르는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자는 공간에도 얽매이지 않지. 나도 가능할 줄은 몰랐네. …정확히는 세계가 여러 개로 나뉘어있으리라 생각지 못했지.”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보니 이미 많은 사실을 알게 된 모양이다. 이제 나에 대해 설명하기만 하면 되는데,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식은땀이 흥건한 손을 모은 채로 눈만 뒤룩뒤룩 굴리는데 유피테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태오. 아니, 유태오라고 해야겠지.”

“그, 그걸 어떻게…….”

“그날 자네가 하는 말을 전부 들었네. 어디서 왔는지, 왜 이쪽 세계로 왔는지도.”

일순 피가 얼어붙는 느낌에 온몸이 빳빳하게 경직되었다. 다 들었다고…? 어떻게? 의식을 잃은 게 아니었나. 충격으로 굳어버린 나를 유피테르는 퍽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간 혼자 많은 걸 짊어지고 있어 힘들었을 텐데… 몰라주어 미안하군.”

“왜…….”

“그리고 늦어서 미안하네.”

왜 미안해하는 건데? 잘못한 건 나잖아. 유피테르에 대해서 전부 알고 싶어 하면서 정작 나는 정체를 숨겼다. 게다가 말없이 떠나기까지 한 내게 어째서 사과하는지 모르겠다. 말이 나오지 않아 고개만 살래살래 젓는데, 유피테르는 점잖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만 나와 함께 돌아가지.”

갑자기 눈물이 차올라 그의 얼굴이 아물아물해졌다. 그동안 너무도 듣고 싶었던 말이다. 감히 상상조차 허락되지 않아 꿈에서도 듣지 못한 말이었다. 곧바로 손을 잡고 싶었으나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건 두려움이었다. 당장의 괴로움에 눈이 멀어 그와 함께 돌아간 후에 벌어질 상황이 너무도 무서웠다.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만큼 주먹을 꽉 쥐고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못……가겠어요…….”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흘끗 눈을 드니 마치 버림을 받은 듯 상처 입은 얼굴이 보였다.

“여기가… 더 좋은 건가?”

“아뇨. 저도 유피테르와 함께 있고 싶어요.”

“그리하면 되는 거 아닌가. 뭐가 문제지?”

뭐가 문제냐고? 애석하게도 모든 것이 걸림돌이다. 하다못해 지금 그와 함께 있는 이 짧은 순간마저 들킬까 두렵다. 무엇보다 전부 내팽개쳐버리고 유피테르를 따라가고 싶다는 내 욕심에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말없이 눈을 내리감자 절절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약속하지 않았나. 언제나 내 곁에 있겠다고.”

“그건….”

“어째서 날 두고 가버린 건가.”

결국 참았던 눈물이 흘리며 격해진 감정을 토해냈다.

“잃고 싶지 않았어요! 유피테르도, 유피테르가 아끼던 세상도, 마물이나 사람들도 전부… 소중하니까요. 그냥 제가 사라지기만 하면 모두가 행복하게 산다는데 어떻게 이기적인 선택을 할 수가 있겠어요.”

“…태오.”

“유피테르도 그러지 않겠어요? 저만 없으면 모든 게……!”

“내게 자네가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올곧은 눈빛이 내 가슴을 꿰뚫었다.

“세상이 끝나는 순간까지…. 설령 세계가 멸한다 하더라도 내 곁에 있어야지.”

“…저는…….”

잠시 망설이는 틈에 다가온 유피테르는 나를 품으로 끌어당겨 안으며 속삭였다.

“나를 진정 사랑한다면, 세계가 아니라 나를 선택하게.”

유피테르는 알까. 나의 최우선은 언제나 그였다는 걸. 그래서 돌아갈 수 없는 거다.

단 한 번이라도 유피테르를 보고 싶어서 이곳으로 찾아왔다. 그때도 지금도 곁에 남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러나 결국 ‘올바른’ 선택을 하는 이유는 오직 유피테르 때문이다. 사랑하니까. 행복했으면 하니까. 나 때문에 불행해지는 일은 없었으면 하니까-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유피테르는 내가 없어 슬퍼보였다. 대체 뭐가 옳은 것일까. 다시 돌아간다면 평생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망가져가는 세계와 시름에 빠진 소중한 사람들을 보면서 자책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못하겠다. 그럴 자신이 없다.

“…유피테르.”

그의 어깨를 힘겹게 밀쳐내며 울음이 뒤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나에 대해서 잊지 않은 거예요?”

다시 만나게 된다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제가 하는 말을 다 들었다면서요. 저를 잊고 행복하게 살라고 했잖아요.”

보고 싶었다고, 한순간도 잊은 적 없다고, 나를 잊지 않아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좋아한다는 말도 많이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은 그리 다정하지 못했다.

“그런데 위험하게 왜….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서러움이 북받쳐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힘겹게 나를 찾아온 그에게 이따위 말을 하면 안 되는데…. 더는 상처주고 싶지 않았으나, 또 다시 유피테르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말았다. 그러나 유피테르는 내가 밀쳐낸 만큼 다가와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세계가 아니라 자네를 선택했으니까.”

“…바보 같은…….”

눈물로 희뿌옇게 흐려진 시야엔 따사로이 웃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이윽고 유피테르는 눈가에 입을 맞추곤 다시금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이 이렇게나 따뜻했었나. 얼음장같이 차갑던 몸이 그의 온기를 닮아 점점 녹아갔다.

이래서 닿지 않으려고 한 건데. 이러면 더는 그를 밀어낼 수 없는데….

“…안 돼요…. 그가 보기라도 한다면…….”

나지막이 중얼거린 그때 누군가 서점에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뒤돌자 책장 틈으로 어렴풋이 사람이 보였다. 나이 지긋한 노인이 무심하게 서점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고서점의 주인인가. 당황한 나와 달리 유피테르는 가만히 제자리에 서있기만 했다.

부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로 떠나가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노인은 문을 안에서 잠그더니 정확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뭐지? 꼭 우리가 여기에 숨어있다는 걸 아는 것 같았다. 이내 노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가 있는 책장으로 걸어왔다.

당황할 거 없다. 그냥 무난하게 넘기면 된다.

“저…….”

그가 우리를 찾아오기 전에 먼저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노인은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심지어 내 뒤에 있는 유피테르를 흘끔 보고는 다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순간 노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결국 여기까지 오셨군요.”

메마른 입술에서는 겉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심지어 중저음의 미성은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늘 내 머릿속에서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였다.

“…당신은…….”

정체를 알아채자 노인의 모습이 서서히 바뀌어갔다. 오케아노스의 껍질은 버려버린 걸까. 날렵한 선에 나른한 눈매가 내가 기억하고 있던 얼굴과는 사뭇 달랐다. 그럼에도 달빛처럼 청아한 은발과 냉랭한 붉은 눈동자는 그대로였다.

- 오랜만입니다. 태오 님.

시스템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