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
외로이 동굴 속을 헤매다가 마침내 출구를 찾았나 싶어 달려갔건만, 빛 하나 들지 않는 막다른 길에 막혔다면 이런 기분일까. 갈증은 한 방울의 물에 보다 심해지고, 절망은 한 줄기의 희망 앞에서 더욱 짙어진다. 참담한 현실이란 벽 앞에 무릎을 꿇고 순식간에 먼지가 되어 사라진 희망을 눈물로 흘려보냈다.
그렇게 울다 지쳐 쓰러지니 어느새 밤이 되어있었다.
“…추워…….”
으슬으슬 몸이 떨리는 한기에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야심한 밤에 어떻게 시야가 환한가 싶었더니 창밖에 보름달이 훤히 떠있었다. 오직 나를 위한 가로등인양 달빛이 창문으로 흘러들어와 내게 닿았다. 평소라면 아름답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달빛마저 소름끼쳐서 커튼을 재빨리 쳐버렸다. 창백한 달이 꼭 말없이 웃음 짓던 시스템 같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태오 님.’
마치 남을 대하듯 차가운 목소리가 떠올라 속이 울렁거렸다. 입을 급하게 틀어막고 화장일로 뛰어 들어가려는 순간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직 불을 켜지 않았고 더 이상 빛이 새어들지도 않는데, 여전히 주변이 희미하게 밝았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바닥에 흩뿌려진 재스민 꽃이 빛나고 있었다. 서둘러 발 앞에 떨어진 꽃잎을 주워 확인하자 희미하긴 해도 빛이 완연했다. 뭐지? 재스민은 야광화가 아닐 텐데…. 심지어 교수가 병문안 선물로 준 화분은 새벽빛처럼 환했다. 그간 바깥에서 들어오는 달과 가로등 빛에 묻혀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설마, 하고 책상을 보니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곧바로 꽃을 내팽개치듯 내려놓고 책을 집어 들었다. 기대와는 달리 그 안에는 생물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이어졌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꼼꼼하게 읽어가던 그때 유독 빛나는 페이지를 발견했다.
재스민 꽃잎이 끼어있는 그 페이지엔 생물학이 아닌 전혀 다른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건….”
웬 신학 서적에 나올 법한 줄글이었다. 다음 장을 넘기자 다시금 평범한 생물학 내용이 시작되었다. 단 한 페이지만 부자연스럽게 바뀌어있었다.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눈에 불을 켜고 읽어나가다가 두드러지게 빛이 나는 글자를 발견했다. 심지어 하나가 아니었다. 불규칙적으로 표시된 글자를 띄엄띄엄 읽어보니 자연스럽게 문장이 완성되었다.
“신의…눈을…… 피하기 위한… 방법….”
이게… 뭐지? 중간까지 읽다가 화들짝 놀라서 일순 숨을 멈췄다. 누군가 책을 통해 내게 말을 전하고 있다. 그것도 ‘신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이런 방법을 쓴 것이다.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줄글을 훑어가며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이, 곳, 으로…오라. …약속을… 믿는다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창문이 활짝 열리며 찬바람이 불어왔다. 그 탓에 달빛이 흘러들어오니 재스민 꽃은 빛을 잃었고 페이지는 사라졌다. 순식간에 단서가 사라져 머릿속은 더욱 엉망이 되었다.
이곳이라니. 거기가 어딘데? 그리고 무슨 약속을 말하는 거지? 정체불명의 존재가 나를 어디로 이끌려는 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 의심이 앞섰다. 시스템이 이런 식으로 나를 그쪽 세계로 이끌었었으니까.
두 번 다시 속지 않으리라고 단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하고 말았다. ‘어쩌면 기회가 주어진 건 아닐까….’하는 멍청한 기대감이 겨울에 때 아닌 꽃이 피듯 불쑥 고개를 들었다.
페이지에 달라붙은 꽃잎을 떼어내다가 문득 창가에 놓인 화분을 돌아보았다. 다른 꽃이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간 와중에도 그 화분만은 달보다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 교수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재스민이네. 병문안을 간다고 하니 꽃집에서 추천해주더만.’
그래. 평범한 꽃집에서 사왔을 화분이 이렇게나 빛이 날 리가 없다. 처음부터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의 계획이었다. 내가 이 세계로 돌아온 순간부터 나를 부르고 있던 것이다. ‘이곳’으로 오라고.
목적은 물론이고 정체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정말 바보 같은 짓이겠지만, 마지막으로 내 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저 앞의 길이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동굴을 빠져나갈 출구이리라.
***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랩실로 향했다.
“교수님!”
계단을 뛰어올라오느라 헉헉거리며 들어가자 교수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유 군.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예전이었다면 점심시간이 되도록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을 교수가 책상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성큼성큼 그의 책상으로 가서 거친 숨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전에… 그, 저한테 선물로 주신 화분있잖아요….”
“아, 재스민 말인가?”
“네. 그 화분 어디서 사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교수는 신문을 내려놓으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지 씁, 입맛을 다시며 한동안 눈만 굴렸다. 설마 까먹은 건가? 초조한 마음에 책상 아래로 보이지 않는 발을 동동 굴렀다.
다음 순간 교수는 무언가 떠오른 듯 대뜸 지갑을 꺼내더니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 여기 있었군.”
그러곤 지갑 사이에 껴있던 명함을 내밀었다. 냉큼 명함을 받아들고 뒤집어보니 꽃집 전화번호와 주소가 적혀있었다. 내가 입원했던 병원 근처에 있는 꽃집이었다. 점점 사건의 진상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속절없이 두근거렸다.
명함을 멍하니 보고만 있자 교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꽃집은 갑자기 왜? 화분에 문제라도 있나?”
“궁금한 게 생겨서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점심시간 끝나기 전에 바로 돌아올게요.”
“어차피 내가 휴가를 주지 않았나. 편히 다녀오게.”
가볍게 목례만 하고 뒤로 돌아서는데, 교수가 갑자기 나를 불러 세웠다.
“그보다 유 군.”
“네?”
“상태는 좀 괜찮아졌나?”
선뜻 대답이 튀어나오진 않았다. 이걸 괜찮다고 할 수 있을까. 꽃집에 가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이번에야말로 다신 돌아올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져들 것이다.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나를 갉아먹는 환상에 갇혀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저 너머가 천국인지 지옥인지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거짓된 희망이어도 아예 없을 때보단 나았으니까.
“전 언제나 괜찮았어요. 교수님.”
서둘러 학교를 나와 택시를 타고 꽃집으로 향했다. 한적한 골목에 있는 가게는 아담하면서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겼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종이 딸랑 울리며 카운터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오세요~”
아주머니는 한창 꽃다발을 만들고 있었는지 양손에 꽃을 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뭐 좀 여쭤보고 싶어서 왔는데요.”
“네. 어여 말씀하세요.”
“혹시 이날 화분 사셨던 손님을 기억하세요?”
예약 내역이 적혀있을까 카운터에 있는 달력을 넘겨보았지만, 내가 의식을 찾은 날엔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아쉬운 대로 날짜를 가리키며 말하자 아주머니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하! 제가 그런 걸 어떻게 다 기억해요~ 하루에도 손님이 몇 분이나 오시는데요.”
“물론 알지만, 제게 정말 중요한 일이라서 그래요.”
그날 교수님 말고도 누군가 꽃집에 왔었을 거다. 아니면, 도서관이나 빌라 cctv처럼 뭔가 비현실적인 일이 있었거나. 간곡하게 부탁하니 아주머니는 꽃을 내려놓고 카운터에 있는 컴퓨터를 만지기 시작했다.
“으음… 글쎄요. 전표에는 뭘 팔았는지만 적혀있고 어느 손님이 사가셨는지는 안 나와 있거든요.”
아주머니는 와서 보라고 선뜻 모니터를 돌려주었다. 도서관 때와는 달리 교수가 왔으리라고 추측되는 시간에 결제 기록이 남아있었다. 눈앞의 증거에 나도 모르게 냉소가 지어졌다.
대체 뭘 기대한 거야. 갑자기 시스템이라도 나타날 줄 알았나? 아니면, 유피테르가? 나를 잊고 행복하라고 그렇게 기도해놓고서 실은 찾아와주길 기다렸던 거지. …이기적인 새끼. 어제 봤던 빛나는 꽃들과 글자마저 간절함이 낳은 환상은 아니었을까? 차라리 그편이 합리적이었다.
“학생. 괜찮아요…?”
힘없이 고개를 떨구자 당황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구질구질하게 굴어봤자 민폐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그때 제자 병문안을 간다고 하니 사장님께서 재스민을 추천해주셨다고 들었는데….”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다 끝내 뒷말을 뭉개버렸다. 그만 곤란하게 하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주머니는 무언가 떠오른 듯 카운터 테이블을 탁! 두드렸다.
“아~! 그 중년 남성분이요?”
“기, 기억하세요? 제가 그 제자거든요.”
“어머. 퇴원하셨구나! 축하드려요.”
환하게 웃은 아주머니는 이내 테이블 아래 서랍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안 그래도 언제 찾으러 오시나 걱정했는데.”
“…뭐를요?”
“이거 찾으러 오신 거 아니에요?”
아주머니가 서랍에서 꺼내어 내민 것은 다름 아닌 편지 봉투였다. 여느 공공기관에서나 볼 법한 새하얀 봉투엔 아무 표식도 없었다. 지극히 평범한 나머지 정말로 교수가 두고 간 물건이 아닌지 의심마저 들었다. 얼떨결에 받아드니 아주머니는 잘 됐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손님이 가시고 나서 바닥에 떨어져 있더라구요. 중요한 것 같아서 보관해두긴 했는데, 지금이라도 돌려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아…네….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대로 편지만 들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택시 안에서 펼쳐볼까 고민해봤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기대와 달리 아무것도 아니라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낙심할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한 후에도 편지를 침대 위에 올려놓고 무릎을 꿇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몇 번이나 편지를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다 질 무렵이 되어서야 결심이 섰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 그 안에 접힌 편지지를 꺼내었다. 그런데 기대가 무색하게 그 안에는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았다.
“……하.”
백지다. 아무것도 없는 종이를 보고 꼬박 한나절을 고민한 거다. 멍청하기도 하지. 허망한 웃음을 흘리며 빈종이 위에 얼굴을 묻었다.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환멸과 실망감으로 마음에 구멍이 난 듯 공허했다.
후, 길게 한숨을 내쉬던 그때 어디선가 진동 소리가 들렸다. 전화가 왔나 싶어 스마트폰을 꺼내봤지만 연락이 온 건 없었다. 이젠 하다하다 별 환청을 다 듣는구나. 헛웃음을 지으며 스마트폰을 끄는데, 검은 화면에 비친 무언가를 보곤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뭐야….”
귀걸이가 공명하며 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지금껏 현대에서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야 마석이 공명하는 조건은 단 하나- 똑같은 파장과 위력을 가진 마력을 만났을 때뿐이니까. 당연히 유피테르가 없는 현대에서 귀걸이는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
그 말을 달리하면, 지금 이곳에 그의 마력이 존재한단 소리였다.
“유피테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또 잘못 본 건가? 급하게 귀걸이를 빼서 손에 들자 정말로 희미하게 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환각 따위가 아니었다.
곧바로 마력이 느껴지는 곳을 찾으려 귀걸이를 들고 방을 돌아다녔다. 놀랍게도 귀걸이는 재스민 화분이나 책이 아니라 침대 근처에서 가장 밝은 빛을 뿜어냈다. 의아하게 침대 주변을 보다가 아까 반쯤 구겨버린 편지지를 발견했다.
“설마….”
잔뜩 긴장한 채로 종이 위에 귀걸이를 대보았다. 그러자 희미한 금빛이 서서히 종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하더니 이내 마법처럼 글자가 완성되었다. 어느 주소가 적혀있었다. 그곳이 어디인지, 뭐하는 곳인지도 모르지만, 글자를 보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정말로… 당신…이에요……?”
그건 그토록 동경해 마지않던 유피테르의 글씨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