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3 (293/305)

#293

아주머니가 자신 있게 내민 꽃을 보곤 일순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이게…뭐야? 아니, 재스민 꽃인 건 알겠는데 대체 누가 이걸 내 택배 함에 두고 갔는지 모르겠다. 빌라에서 친한 사람이라곤 집주인 아주머니 말곤 없었기에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의아하기만 한 나와 달리 아주머니는 수줍은 듯 호호 웃으며 말했다.

“청춘이네. 청춘. 요즘에도 꽃 선물을 주고받는구나?”

“하하… 혹시 누가 두고 갔는지 아세요?”

“그건 아줌마도 모르지~”

아주머니는 퍽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내 손에 직접 꽃을 쥐여 주고는 가 버렸다. 어쩔 수 없이 받긴 했지만 꺼림칙한 기분이 도통 사라지질 않았다. 아주머니의 기대와 달리 내게 꽃을 선물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그러니 아무리 봐도 층이나 호수를 헷갈린 것 같은데…. 뭔가 잘못된 걸 알면 어련히 알아서 찾아오겠거니 싶어 집으로 향했다.

“다녀왔습니다.”

습관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집안이 웬일로 환했다. 활짝 열린 커튼 새로 가로등 불빛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 덕분에 창가에 놓인 재스민 화분이 한층 더 새하얗게 보였다. 가만히 꽃을 바라보다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 재스민인 거야….”

교수님이 병문안 선물로 가져온 화분도, 이 의문 모를 선물도 그렇고- 우연의 일치라기엔 너무도 짓궂은 운명이었다. 그야 재스민은 내게 그날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었다.

침대에 풀썩 누워 꽃을 얼굴에 대고서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라일락을 닮은 은은한 향기가 온몸에 가득히 감돌았다. 지그시 눈을 감으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좋아하는 게 뭐예요?’

유피테르와 호숫가에 나란히 앉아 와인을 마시던 때였다. 불쑥 던진 질문에 유피테르는 그답지 않게 당황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취미도 취향도 없었던 그에겐 인생 최대의 난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열심히 고민하던 끝에 유피테르는 생각지 못한 대답을 내었다.

‘좋아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마음이 편해지는 건 또 하나 있네.’

‘뭔데요?’

‘재스민 꽃.’

그리 속삭이는 목소리에선 꽃망울이 움트는 봄의 향기가 묻어났다.

‘자네한테서 늘 그 향기가 나거든.’

그날부로 저 새하얀 꽃만 보면 유피테르와 행복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인지 꽃에게마저 유독 애틋한 감정을 가졌던 것도 같다. 그런데 모든 걸 애써 흘려보내려는 지금, 왜 자꾸만 재스민 꽃이 눈에 밟히는 걸까.

우연이겠지. 하지만 그 우연이 그때로 돌아가지 못하는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창가의 화분이 보이지 않도록 몸을 돌려 눕곤 눈을 감았다. 애써 무시하려고 해도 코끝을 간질이는 꽃향기에 자꾸만 신경이 쏠렸다.

그 덕분인지 현대로 돌아오고 처음으로 어떤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에 빠졌다.

“으음….”

오랜만에 단잠을 자니 물 먹은 솜처럼 무겁던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교수는 며칠 쉬라고 했지만, 집에만 있어 봤자 괜히 안 좋은 생각만 날 것 같아서 아침 일찍부터 나섰다. 그런데 문을 열고나서는 순간 문틈에 끼어 있던 무언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뭐야….”

재스민 꽃이었다. 여린 꽃잎은 방금 막 숲에서 가져온 듯 생생하기 그지없었다. 아직도 주소가 잘못되었다는 걸 모르나?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들어 꽃을 가져가지 않고 얌전히 바닥에 두고 학교로 향했다.

그러나 영문을 모르겠는 꽃 선물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무려 일주일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밤낮으로 재스민 꽃이 집 앞에 놓여 있었다. 혹시라도 밟힐까 봐 모아 두다 보니 어느새 창가 앞은 자그마한 화단이 되어 있었다. 예쁘긴 하다만 누가 보내는 건지를 모르니 마냥 기쁘지는 않았다.

심지어 오늘은 집으로는 모자랐는지 랩실 책상 위에도 꽃이 놓여 있었다. 자료 정리 때문에 새벽 같이 도착한 건데, 어떻게 나보다 빨리 왔는지 모르겠다. 혹시 아직 근처에 있을까 싶어 곧바로 꽃을 들고 랩실 밖으로 나갔지만 복도엔 짐을 나르던 후배뿐이었다.

“오, 형. 일찍 왔네요?”

“응. 정리할 게 좀 있어서.”

엷은 미소로 반겨 주자 후배가 자못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혹시 뭐 좋은 일 있어요?”

“딱히 없는데…. 왜?”

“전에 옥상에서 만났을 때보다 훨씬 안색이 좋아 보여서요.”

“…그런가?”

그러고 보니 요새 악몽을 꾸는 빈도가 눈에 띄게 줄었다. 꽃… 덕분인가? 살짝 열린 창틈으로 흘러오는 밤바람을 타고 꽃향기가 방안에 자욱하게 퍼졌다. 잠이 안 오는 날에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으면, 마치 유피테르가 곁에 있는 듯해 금세 마음이 편해졌다.

“아니다. 좋은 일… 있는 것 같기도 해.”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말을 바꾸자 후배는 잘됐다며 웃었다. 매일매일 꽃을 선물해 주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일단 내 집 주소를 알고 있고, 랩실에도 자유롭게 드나드는 사람이다.

조용히 범위를 추리다가 실없이 웃고 있는 후배와 눈이 딱 마주쳤다.

“너 혹시….”

“네?”

설마, 아니겠지. 별 일 아니라며 다시 랩실로 돌아갔다. 재스민 꽃이 망가지지 않도록 책상 서랍에 넣어 두곤 간만에 환하게 웃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내게 잃어버린 밤을 돌려줘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서관에 향했다. 한 달이 넘도록 건드리지 못한 논문 초고를 이제야 수정해야겠단 마음이 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공부하려고 도서관에 자리 잡은 학생이 꽤 됐다. 방해되지 않으려 조용조용 생물학 섹션에 도착한 그때였다.

툭. 멀쩡히 책장에 꽂혀있던 책이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튀어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깜짝 놀라 소리 지를 뻔한 것을 겨우 입을 틀어막아 참았다. 뭐지? 마치 누가 책등에 실을 걸어 두고 잡아당긴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봐도 그 섹션엔 나밖에 없었다.

뭔가 이상해도 한참 이상했다. 조심스럽게 책을 주워드니 책장 사이에 끼워져 있던 것이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내 발 앞에 가볍게 안착한 것은 다름 아닌 재스민 꽃이었다.

“어…?”

새하얀 꽃을 보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혹시나 싶어 떨어진 책의 양옆에 있던 서적도 꺼내어 확인해 봤다. 그러나 재스민 꽃이 끼워져 있던 책은 이 한 권뿐이었다. 애초에 내가 이곳을 지나가리란 사실을 미리 알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치 ‘보란 듯이’ 떨어지지 않았나.

넋을 놓고 있다가 떨어진 꽃을 챙겨서 데스크로 향했다. 학생증과 책을 함께 내밀자 사서는 아무 의심 없이 바코드를 찍었다.

“2주 뒤 반납이요.”

기계처럼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사서에게 물었다.

“혹시 이 책을 제일 마지막에 반납한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그런 건 규정상 알려드리기 힘들어요.”

“꼭 알아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요. 제발요.”

간곡하게 부탁하니 사서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책을 가져갔다. 그러곤 표지에 붙은 바코드를 찍으며 모니터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음 순간 피곤함에 절어 있던 사서의 얼굴이 별안간 사색이 되었다.

“어? 이거 왜 이래.”

갑자기 블루스크린이라도 떴나? 당황한 기색을 보아하니 컴퓨터에 오류가 난 모양이다. 나로선 모니터 뒤통수만 보이니 무슨 일인지 예상할 수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뒤에서 책을 정리하던 다른 사서가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게… 이 책, 대출 기록이 하나도 없어요.”

“네? 그럴 리가요. 이거 생물학 전공 기초 서적이라 인기도서인데요?”

사서는 그 책을 들고 다른 컴퓨터에 가서 재차 바코드를 찍었다. 그 후로도 삑 하는 기계음이 몇 번이고 울렸으나 그들의 표정은 더더욱 굳어 가기만 했다. 다른 책은 무사히 열람되는 걸 보아하니 이 책의 기록만 송두리째 사라진 듯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관리실 가서 전산 오류인지 확인해 볼게요.”

차라리 전산 오류처럼 설명이 되는 일이라면 좋으련만, 뭔가 낌새가 수상하다. 갑자기 튀어나온 책. 그 안에 있던 재스민 꽃. 그리고 이유 없이 사라진 기록. 너무도 이상한 일의 연속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서있으니 사서가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어떡하죠? 그 책만 기록이 사라져서 열람이 안 되네요.”

“괜찮아요. 그보다 빌려가도 되나요?”

“아, 네. 수기로 작성해 둘게요.”

새하얗게 빈 머릿속으로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그’가 나의 규칙적인 동선을 알고 내가 가는 곳마다 재스민 꽃을 두는 거라면 어떨까. 그럼 지금 당장 자취방으로 돌아간다면 문 앞에 꽃이 없을지도 모른다.

책을 가지고 도서관을 빠져나와 곧바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문틈에는 싱싱한 꽃이 꽂혀 있었다. 일순 전신으로 으스스한 오한이 들어 몸이 굳었다.

“…대체 뭐야….”

정말로 내가 어딜 가는지, 심지어 어디로 갈 건지까지 알고 있는 건가? 불안감에 주변을 살피다가 문득 계단 위에 달려있는 cctv를 발견했다. 카메라의 방향은 고맙게도 복도를 찍고 있었다.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옆 동에 살고 있는 집주인에게 갔다.

벨을 누르자 아주머니가 앞치마 차림으로 문을 열고 나왔다.

“어머, 태오 학생.”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무슨 일이야? 반찬 떨어졌어?”

“아뇨. 그게 아니라….”

주변에 누가 없는지 재차 확인하고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복도에 달린 cctv 좀 볼 수 있을까 해서요.”

“갑자기 cctv는 왜…. 설마 도둑 들었어?”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에 서둘러 고개를 내저으며 사정을 설명했다.

“요 며칠간 누가 자꾸 제 집 문을 두드리고 가는 것 같아서요.”

“어머. 웬일이래.”

“제가 예민한 걸 수도 있지만… 이상한 사람일까 봐 걱정돼서요.”

“어우, 얘. 요즘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남자애라도 당연히 불안하지. 어서 들어와.”

아주머니는 흔쾌히 나를 안으로 들여보내주고는 안쪽 방으로 향했다. 얌전히 뒤를 따라가니 아주머니는 익숙한 듯 컴퓨터 앞에 앉아서 cctv를 확인했다. 4개로 분할된 화면 중 복도를 비추는 건 단 1대였다.

복도에 있는 cctv화면을 키운 아주머니는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언제인지 기억 나?”

‘그’가 꽃을 두는 주기는 늘 일정하다. 내가 집밖으로 나갈 때, 그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 두 번이다. 꽃잎이 무척 싱싱한 걸 봐서는 내가 도착하기 몇 분 전쯤 온 게 확실하다. 시계를 확인하니 지금은 9시 5분. 만약 나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일찍 집을 오고갔다면 10분 내외일 것이다.

“오늘… 9시쯤이요.”

“어휴, 대체 누가 아침 댓바람부터 헛짓거리를 하나 몰라.”

아주머니는 혀를 끌끌 차며 녹화된 영상을 틀어서 보여 주었다.

“응. 여기. 이게 오늘 8시 55분이야.”

“감사합니다.”

녹화 화면은 불과 10분 전의 빌라 복도를 보여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문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옆집 문이 열리고 말 한 번 섞은 적 없는 이웃이 나왔다.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찍혔다. 노이즈가 자글거리는 화면으로 봐도 우리 집엔 일말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 후로도 택배원이 다른 집을 오고가긴 했지만 우리 집 앞에 멈추지는 않았다. 그리고 9시 정각이 되는 순간. 갑자기 cctv화면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전원이 나간 것처럼 검게 변했다.

“이게 갑자기 왜 이래?”

당황한 아주머니가 모니터 화면을 손으로 툭툭 쳤다. 그러나 화면은 여전히 새까맣기만 했다. 그렇게 10초가 지나니 화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분명한 차이점을 발견했다.

“아휴, 돌아왔네. 뭐 좀 보이니?”

“…네.”

현관문 앞에 새하얀 꽃이 놓여있었다.

“다시 돌려 볼까?”

아주머니가 다시 59분부터 화면을 재생시켰다. 하지만 정확히 9시가 되자마자 화면이 일그러졌다. 몇 번을 되돌려도 정각에서부터 10초간 이어진 장면을 볼 수 없었다. 해킹이라도 당했단 말인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오류를 계속 보고 있으니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졌다.

“카메라에 귀신이 들렸나.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아들을 불러서….”

“아니에요. 괜찮아요.”

더는 아주머니를 관여하게 만들면 안 되겠단 생각에 손을 내저으며 사양했다.

“바람에 흔들렸던 걸 제가 착각했나 봐요.”

감사하단 인사만 남기고 서둘러 집을 나왔다. 아침만 해도 반가웠던 우렁각시의 존재는 점점 두려움의 대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자취방에 들어오자마자 현관문을 꽉 닫고 가쁜 숨을 가다듬었다.

오늘로 벌써 두 번째다. 책부터 시작해서 cctv까지- 내가 ‘그’의 행적을 추적하려고 하면 마치 금기를 들춰본 것처럼 기록이 지워지고 있다. 아니, 어쩌면 기록되어서는 안 될 존재가 내 주변을 맴돌고 있는 건 아닐까.

“…하.”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니 저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내게 이런 장난을 칠 사람은 단 한 명이다.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기적’같은 일을 쉽게 저지르는 존재.

“시스템. …너야?”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지만 방에는 무거운 적막만 흘렀다. 그래. 바로 나타날 리가 없지. 내 앞에 당당히 나타날 낯짝이 없으니까 숨어있는 거다.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번져 답답한 가슴을 쿵쿵 두드리며 말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어? 충분히 괴롭혔잖아. 모자라?”

좁은 방 안을 둘러보며 울음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갑자기 죄책감을 덜어내고 싶어졌어? 내 인생이 망가지는 걸 보니까 후회가 되던?”

그 순간 창가에 놓인 재스민 꽃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얼마나 간절한 심정으로 꽃을 모아 두었는지 떠올라 자조 섞인 웃음이 기침처럼 튀어나왔다. 이내 성큼성큼 창가로 걸어가 가지런히 놓아 둔 재스민 꽃을 전부 쓸어 내버렸다. 거친 손길에 새하얀 꽃잎이 허공에 흩날리다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제야 현실을 자각했어. 이제 겨우… 무뎌지려고 하는데…….”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뜯겨 나간 꽃잎을 조심스럽게 모아들었다. 이건 내 희망이었다. 죽고 싶을 만큼 그리워도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한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런데 며칠간 나의 밤을 채워 주던 빛이 단숨에 망가져 버렸다.

서서히 흐려지는 향기에 얼굴을 묻으며 절박한 숨을 토해 냈다.

“그러니까… 더 이상 희망을 주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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