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1 (291/305)

#291

이대로 정말 끝인가…? 도무지 믿기지 않아 문으로 들어가자마자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새하얀 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돌아갈 길은 없다. 오직 내가 태어난 세계로 이어진 문뿐이었다. 넋을 놓고 우두커니 서 있는데 문 옆에 서 있던 시스템이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 수고하셨습니다. 태오 님.

“…….”

- 앞으로 모든 일이 원하시는 대로 풀릴 겁니다.

원하는 대로? 내가 지금 무엇을 바라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작자가 할 말인가? 잠자코 그의 말을 듣다가 기가 막혀 헛웃음을 쳤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데도 시스템은 일말의 미동도 없었다. 시종일관 침착한 모습이 얄미웠지만, 이상하게도 그를 탓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시스템. 저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요.”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하자 잔잔한 호수 같던 그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내가 으레 미워할 줄 알았던 건가. 적잖이 당황했는지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놀란 얼굴이 그답지 않게 맹해보여서 바람이 새듯 픽 웃음이 새어나왔다.

“진심이에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유피테르를 만날 수조차 없었을 테니까.”

- …태오 님.

“차마 고맙다는 말은 안 나오네요.”

시스템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고민하다가 끝내 입을 꾹 다물었다. 더 이상 미련은 없다. 늘 의문만 가득하던 그와의 인연도 여기까지다. 여전히 충격에 잠겨 있는 시스템의 앞을 지나치며 말했다.

“수고했어요. 우리, 다신 만나지 말아요.”

애써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작별을 고하고 새하얀 문을 통해 걸어 나갔다. 이윽고 눈부신 빛이 내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순간 잠에 빠지듯 의식을 잃었다. 그 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삑, 삑, 삑. 높은 기계음 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왔다.

뭐지? 살며시 눈을 뜨니 새하얀 천장을 가로지른 커튼레일이 보였다. 뭔가 익숙하다 싶었건만, 그 옆에 있는 링겔대를 발견하자마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병원이구나. 그제야 병상 옆에서 열심히 차트를 적고 있는 간호사가 눈에 들어왔다.

“으음, 오늘도 바이탈은 정상이고….”

얌전히 눈이 마주칠 때까지 기다리는데, 간호사는 차트를 몇 번 뒤적거리더니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내가 깨어난 줄 모르는 눈치였다. 얼른 손을 뻗어 옷깃을 잡으니 간호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화, 환자분?”

“…….”

“정신이 드세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간호사는 서둘러 의사를 불러왔다. 의사는 내 상태를 면밀히 살펴보더니 대뜸 인적사항을 물었다. 이름, 나이, 직업 따위를 막힘없이 대답하자 의사는 신기하면서도 의아한 듯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진술에 의하면 달려오는 트럭에 부딪쳐 몸이 붕 떴다가 떨어졌다더군요. 그런데 병원에 오셨을 때는 골절상은 물론이고 타박상조차 없었어요. 정밀 검사를 다시 해 봐야 알겠지만, 기억에도 문제가 없으신 것 같고…. 그저 기적이 일어났다고밖엔 할 수 없겠네요.”

다행히 몸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어째선지 의식을 찾지 못했단다. 다른 세계로 영혼이 넘어갔었다고 말하면 주치의가 정신과로 바뀌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다가 의사에게 넌지시 물었다.

“제가 며칠 동안 누워 있었나요?”

“오늘로 일주일이에요.”

고작 일주일 밖에 안 됐다고? 그곳에서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었었는데…. 아무리 시간이 제각기 흘러간다지만 엄청난 간극이었다. 혼자 심각해져 있는 동안 진찰이 끝났는지, 의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상태면 조만간 퇴원하셔도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푹 쉬세요. 뭔가 상태가 이상하거든 바로 말씀하시고요.”

그들이 나간 후에 뻐근한 몸을 움직여 창밖을 내다보았다. 흙먼지를 풍기며 달리는 마차는 사라지고, 아스팔트에 자동차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의 옷차림과 건물 생김새 모두 내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정말… 돌아왔구나.”

그제야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그 세계에 있었던 게 꿈만 같다. 아니, 정말로 꿈이었던 게 아닐까? 가끔 그럴 때 있지 않나. 꿈이 너무도 생생해서 현실과 착각하고 마는 것이다. 머리로는 당연히 꿈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그 어디에도 내 기억이 현실이었음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

결국 환상이랑 다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유피테르.”

그리운 이름을 중얼거리던 그때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얌전히 병상에 앉아 돌아보니 아까 나갔던 간호사가 들어왔다. 링거 액을 교체해야 한다기에 최대한 방해되지 않도록 가만히 있었다. 능숙하게 일을 하던 간호사는 뭔가 떠오른 듯 아! 하며 말했다.

“퇴원하시려면 보호자 분이 한 번 더 오셔야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보호자…요?”

“네. 입원하실 때는 이모되시는 분께서 오셨었어요.”

“아….”

안 그래도 사업으로 바쁘신 분이 나 때문에 오셨었구나. 그런데 이모 연락처는 어떻게 알았지? 아, 요즘은 이름만 치면 전산으로 다 뜨는 건가? 내 얼굴에 의아한 빛이 확연했는지 간호사가 설명을 덧붙였다.

“사고 직후에 오신 분께서 다행히 연락처를 주셨어요.”

“누가 저를 찾아왔었다고요?”

“네. 중년 분이셨는데….”

중년?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 눈을 굴리던 그때였다. 뭔가 다급해 보이는 노크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열렸다. 뒤를 돌아본 간호사는 마치 아는 사람을 만난 듯 화색을 띄며 가볍게 목례했다.

“마침 오셨네요.”

“누구….”

간호사가 병실 밖으로 나가고 난 후, 웬 손님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사고 직후에 나를 찾아왔다던 중년이 누군가 했더니- 익숙하다 못해 잊을 수가 없는 얼굴이 보였다.

“…교수님?”

죽기 직전까지도 나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 난 지도교수였다.

“유 군.”

중후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곧바로 몸이 먼저 반응했다. 교수님을 만나면 무슨 일이 있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이 인사했어야 했다. 그 버릇이 여전히 몸에 배어 있어 나도 모르게 침상에 달린 난간을 붙잡고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웬걸. 교수가 나를 보며 한껏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어어, 무리하지 말게나.”

심지어 나를 대하는 눈빛이나 목소리도 예전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나이 어린 손자를 대하듯 하나부터 열까지 조심스러웠다.

“대체 언제 의식이 돌아온 건가? 몸은 좀 어떻고?”

“어….”

뭐야? 진짜 교수님 맞아? 반신반의하는 상태로 눈치를 살피다가 차근차근 설명을 이었다. 그러자 교수는 병상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 처음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랬는지 아나?”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게 뭐있겠나. 창창한 나이에 다칠 뻔했던 몸한테 미안해야지.”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듯 얼얼했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이 중년이 정녕 내 지도 교수가 맞나? 독감으로 고열이 들끓을 때도 해열제를 먹고 랩실로 나오라는 작자였다. 게다가 감기 옮기지 않게 저 구석으로 가서 자료를 정리하라고 했었지. 위액까지 전부 토하고 말았던 급성 장염에 걸려도 예외는 없었다.

그러니 이 말도 안 되는 변화가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반쯤 넋이 나가서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는데, 교수는 아랑곳 않고 가져온 종이 백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어 내밀었다.

“게다가 조금만 늦었어도 아깝게 될 뻔했어.”

“이게 뭔가요?”

“이번에 내게 보여 주려던 초고이네.”

가지런히 정리된 서류를 보고 또 다시 굳어 버렸다. 이건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당시 도로에 흩뿌리고 만 논문 초고였다. 그대로 기억에서 사라져 버릴 줄 알았는데 교수가 직접 내 컴퓨터에 있는 파일을 프린트해서 읽어 봤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교수는 한 술 더 떠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역시 유 군이야. 아주 대단하더군. 바로 읽어 봤는데 조금만 더 다듬으면 학회에서 주목받을 수 있을 걸세. 다른 교수들한테도 보여 줬더니 이건 석사 수준의 논문이 아니라고 그랬어.”

“아….”

“다들 이런 제자를 둘 수 있어서 부럽다고 했지 뭔가. 하하!”

이젠 어지럽기까지 했다. 내가 보고서를 아무리 열심히 써도 비난하기 급급하던 사람이었다. 어디선가 상을 타와도 잘 가르친 제 공이 크다며 몇 번이고 운운했었지. 그런 쓰레기 같은 교수였건만, 무서울 정도로 태도가 바뀌었다.

“한 번 읽어보게나. 유 군이 쓴 초고에서 고치면 좋을 부분을 표시해 봤네.”

“표시… 하셨다고요?”

“이런, 방금 깨어난 환자한테 너무 무리한 일을 시킨 건가?”

“아니에요. …바쁘실 텐데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명색이 지도 교수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적응이 안 돼. 내가 죽다 사니 이제 와 태도를 바꾸려는 건가? 아니, 그럴 리 없어.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이다.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아랫사람에게 굽히진 않을 것이다. 이건 아예 다른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의아함이 풀리지 않은 채로 봉투를 열어 서류를 꺼내었다. 초고를 보니 정말 세세하게 메모가 적혀 있었다. 저 교수님 아래서 몇 번의 보고서를 쓰는 동안 교정이라곤 한 문장도 받아 본 적이 없는데, 이번엔 보완해야 할 부분까지 일일이 짚어 주고 괜찮은 부분엔 좋다는 평가까지 있었다.

이로 말할 수 없는 충격에 빠져 있자 교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그러나. 어디 아픈가?”

“아, 아뇨. 초고는 말씀해 주신 대로 보완해서 조만간 다시 보여 드릴게요.”

“그래.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 천천히 하게나. 천천히.”

그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미친 교수에게서 설마 히페리온이 겹쳐 보이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다른 악감정 없이 순수하게 나를 걱정해 주는 눈빛이 기괴할 지경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교수는 이내 바닥에 내려 두었던 종이 백을 내밀었다.

“아, 그리고 이거.”

두 손으로 받아서 안을 보니 윤기 흐르는 잎사귀가 보였다.

“이건….”

“재스민이네. 병문안을 간다고 하니 꽃집에서 추천해 주더만. 공기 청정에 좋다던가?”

화분 선물을 받고는 아예 생각하길 포기했다. 정말로 꿈을 꾼 건 아닐까? 의식 불명이었으니 아주 불가능하진 않다. 죽기 전에 읽은 책을 토대로 꿈을 꿔 버린 거다. 그게 아니라면 설마, 시스템이 무슨 짓을 한 건가.

문득 시스템이 차원의 틈새에서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저 긴 꿈을 꾼 것뿐입니다. 무사히 현대로 돌아간다면 원하는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함께 지식을 나눌 동료도, 존경할 만한 교수도, 좋은 일자리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소원을 이뤄 주겠다는 말이 이거였나. 허망한 웃음이 굳은 표정 위로 비집고 나왔다.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걸 바꿔 버렸다면, 그 소설책은 어떻게 됐을까. 내 인생을 단번에 뒤집어 버린 계기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교수님.”

“음?”

“그때 자제분이 읽는다고 하셔서 제게 요약하라고 하셨던 책 있잖아요.”

바로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교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 ‘저주란 축복’이란 판타지 소설이요.”

친히 제목까지 말했지만 그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는지 어깨를 으쓱였다.

“내 아들놈은 나를 안 닮아서 책이라면 질색하는데.”

“…네?”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거 아닌가? 난 유 군에게 그런 부탁한 적 없네.”

시답잖은 연기 같은 게 아니었다. 정말로 책에 대해 아예 모르는 표정이었다. 처음부터 적합자를 찾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었으니, 그 역할을 다해 사라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겐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야 책이 유일하게 내가 그 세계에 있었다는 증거였으니까. 더 이상 그 세계의 풍취와 책속에서나마 살아 숨 쉬는 이들을 떠올릴 수 있는 물건은 없었다.

“제가… 헷갈렸나 봐요.”

“뭐, 그럴 수도 있지. 일주일간 의식 불명이었다가 오늘 깨어났잖나.”

정말로 꿈을 꾼 건가? …아니야. 나는 그곳에 살아 있었어. 내가 똑똑히 기억하잖아. ……하지만 그게 꿈이었다면? 사고를 당해서 의식을 잃은 사이 머릿속에서 벌어진 상상에 불과하다면 어떡하지? 그럼 나는 망상 속에 살고 있는 건가?

“그런데 유 군.”

두려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그때 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줄곧 꾸미는 거엔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역시 학생은 학생이야.”

“네?”

“유 군에게 잘 어울려.”

교수는 의미 모를 말만 남기고 푹 쉬라며 병실을 떠났다.

뭘 꾸몄다는 거야? 슬쩍 고개를 내려 옷차림을 살펴보았지만, 당연히도 하늘색으로 병원 이름이 적힌 환자복이었다. 며칠간 밥도 못 먹고 내리 누워있었으니 몰골은 물론 형편없겠지.

“그럼 그냥 해 본 소린가….”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해서 링겔 대를 끌고 비척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이내 거울에 비친 내게서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 온몸에 힘이 훅 풀렸다.

“이건….”

말라비틀어진 입술로 중얼거리며 멍하니 거울 속만 바라보았다. 혹시 환각인가 싶어 마구 눈가를 비비고 다시 봐도 그대로였다.

“…꿈이 아니야.”

곤히 잠든 유피테르의 곁을 떠나며 정화석과 팔찌를 빼서 내려놓았었다. 그땐 경황이 없어 그랬겠지만, 지금 와 생각하니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내 몸에서 결코 떨어뜨리려 하지 않았던 물건. 그와의 추억이 깃든 단 하나의 물건.

“…그와의 추억은 망상이 아니었어….”

유피테르가 선물해 준 귀걸이가 아련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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