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
왠지 간만에 행복한 꿈을 꿨던 것 같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담소를 즐겼다. 웃음소리에 묻혀 무슨 얘기가 오고갔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굳이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꿈이니까.
헛된 희망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젠 잘 안다. 아래로 추락하며 아름다운 하늘을 동경해 봤자 곧 차가운 땅바닥에 처박힐 운명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눈뜨면 사라질 환상을 뒤쫓아 봐야 현실만 더욱 암울해질 것이다.
꿈이 현실이 되긴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잠에서 깨어났을 때 도시 한가운데가 아니길 간절히 빌었다. 비록 시스템의 이름을 부르지도 약속한 시간이 다 된 것도 아니었으나, 더는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몽롱한 정신이 깨어나자 감각이 하나둘씩 돌아왔다. 도시의 소음이나 매캐한 매연 냄새는 없었다. 살며시 눈을 떠보니 머리 없는 조각상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왁!”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지르자 침대 옆에서 누군가 벌떡 일어났다.
[헤메라…!]
갑자기 달려드는 탓에 침대에 누운 채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자 바닥까지 길게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닉스…?”
혹시나 하고 이름을 부르자 그는 더욱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가슴이 눌려 묘하게 숨이 막혀 오는 감각에 이것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다행이다. 아직 이 세계에 남아 있어서.
“저… 며칠 동안 자고 있었어요?”
[오늘로 사흘이 지났어.]
생각보다 일찍 깨어났다. 심장은 여전히 제 기능을 못하고 있지만, 이 정도면 몇 주는 거뜬히 버틸 수 있다. 그리 안심하며 닉스에게 내가 잠든 사이 특별한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흘러나왔다.
“네? 일주일간의 기억이 바뀌었다고요?”
무려 제국 신민들이 지난 일주일동안 있었던 일을 실제와 다르게 기억하고 있단다. 더 정확히는 모든 재앙을 단순 자연재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기이한 현상을 닉스는 ‘일주일을 도둑맞았다’고 표현했다.
“그럴 리가요.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마법사들은 분명 유피테르의 마력을 느꼈을 거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내가 직접 확인해 봤을 땐 아무도 마력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어. 심지어 마물이 곳곳에서 이성을 잃고 폭주했다는 사실도 기억 못하더라고.]
“확인해 봤다뇨…?”
[머릿속을 여럿 들여다봤거든.]
닉스가 기억을 봤다면 더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정말로 모든 생물의 기억이 덧씌워진 것이다. 심지어 나는 황제에게 찔려서 빈사 상태가 됐었고, 황제는 도망치다가 산사태에 휘말려 죽었다고 알려졌다.
모두의 머릿속에서 주된 원인이었던 ‘유피테르의 폭주’가 아예 사라져 버렸다.
[사건의 전말을 기억하는 건 나뿐이야.]
“다른 마물들은요?”
[인간들의 기억과 동일해.]
“말도 안 돼….”
한두 명도 아니고 전체의 기억이 바뀐다. 그건 마치 기록에서 완전히 제거된 고대 이아페 같지 않은가. 유피테르가 아니라면, 이런 대규모 마법을 쓸 존재는 단 한 명뿐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절대자- 시스템이 아니고선 불가능했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려 얼굴을 찡그리자 닉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
“네. 조금… 놀란 것뿐이에요.”
차라리 잘된 일이다. 그 마물의 폭주보다는 자연재해로 기억되는 편이 낫다. 나도 죽음보다는 빈사상태에서 깨어난 편이 훨씬 일리 있었다. 과연 시스템의 계획은 참으로 빈틈이 없었다. 그가 친히 훔쳐간 일주일은 영원히 차원의 틈새에 묻혀야만 한다.
***
그 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모두의 기억이 뒤바뀐 덕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왔다.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 맞은편 자리에 누군가 앉았다. 크흠! 헛기침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보랏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아이리스. 이렇게 돌아다녀도 괜찮아요? 수업 시간이잖아요.”
“아까 끝났거든? 그리고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아이리스는 내가 읽던 책에 손을 턱하니 올리며 말했다.
“너, 벌써 돌아다녀도 되는 거야?”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해요.”
“…진짜?”
“보여 드릴까요?”
태연하게 셔츠 앞섶을 여민 끈을 풀려고 하자 아이리스가 기겁하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
“미쳤어?!”
빽 소리를 지르는 그의 얼굴이 단풍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어수룩한 모습이 귀여워서 고개를 숙이고 키득거리는데, 그 뒤로 세잔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도서관은 정숙입니다. 아이리스.”
퍽 진지한 꾸중에 아이리스는 씩씩거리면서도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아마 아이리스만 모를 것이다. 세잔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씰룩거렸다는 사실을. 이내 세잔은 천연덕스럽게 내 옆에 앉으며 넌지시 물었다.
“뭐하고 계셨습니까?”
“논문 초고 쓰고 있었어요.”
“벌써 정리가 끝나신 겁니까?”
“틈틈이 생각해 뒀었거든요.”
자료 조사 겸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말하자 아이리스는 이해가 안 된다는 투로 말했다.
“아직 졸업이 멀었는데 뭐 벌써 쓰고 있어.”
“지금 써야죠.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새어 나갔다. 아차 싶어 고개를 드니 세잔이 의아한 빛으로 물었다.
“또 어디 가십니까?”
“그게….”
뭐라고 변명하지. 난처해하던 순간 아이리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때 교수님이랑 여행 간다고 했잖아. 그거 때문이겠지, 뭐.”
“네네. 바로 그거예요.”
곧바로 맞장구를 치자 세잔은 금세 의심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편히 여행하려면 대강 일을 마치고 가는 게 좋긴 하겠군요.”
조심히 잘 다녀오라고 말하는 그들에게 미소 밖에 지어 줄 수 없었다. 여러 의미로 여행이긴 하니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단지 아주 멀리 떠난다는 것과 돌아올 기약이 아예 없다는 점만 빼면.
애써 씁쓸한 기분을 삼키며 대화를 이어 나가는 그때 책장 사이로 장신의 실루엣이 보였다. 족히 2미터는 달해 보여서 신기하게 구경하기도 잠시, 그 장정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커튼 사이로 흘러들어온 햇빛에 반짝거리는 녹색 눈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저, 이만 가 볼게요.”
“어?”
“손님이 오셨어요.”
어리둥절한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냉큼 책을 챙겨 나섰다.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신사는 다름 아닌 히페리온이었다. 인간을 흉내 낸 모습은 종종 보긴 했지만, 이렇게 사회에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히페리온.”
[몸은 좀 어떤가.]
“괜찮아요. 이렇게 가끔 바람을 쐬니까 좋더라구요.”
반갑게 웃으며 다가가자 히페리온이 기다렸다는 듯 내가 들고 있던 책을 가져갔다. 당황해하며 “짐은 제가 들게요.” 하고 말하니 히페리온은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 온화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문득 사양은 저렇게 하는구나, 싶었다.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대가 여기 있으니 저택으로 데리고 와달라고 닉스가 그러더구나.]
“저를요?”
히페리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닉스가 히페리온에게 부탁해 가면서까지 나를 저택으로 부를 이유가 뭐지? 슬쩍 떠보려다가 이번에도 인자한 미소에 밀려 입을 다물었다. 교수회관에서 마법진을 통해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도 히페리온은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다.
저택은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했다. 웬일로 닉스가 마중 나오지 않은 것만 제외하면.
“닉스가 어디로 갔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히페리온이 별안간 내 어깨를 살짝 감싸고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물어봐도 히페리온은 입을 꾹 닫고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잠시 후 1층에 있는 접견실에 도착하고 나서야 히페리온이 나를 놓아주었다.
“뭐, 뭐예요?”
말을 더듬어가며 묻자 히페리온이 슬쩍 눈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아무리 봐도 너무 수상한데…?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문을 열었다. 그러자 눈앞에 웬 분홍색 꽃잎이 휘날렸다.
[축하해! 헤메라!]
한껏 신이 나서 박수를 치는 닉스는 웬일로 밝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문 옆에 서있던 이카로스가 무표정하게 바구니를 들고 꽃잎을 흩뿌리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이게…… 뭐지? 화려하게 꾸며진 파티의 주인공은 아무리 봐도 나였다. 그런데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됐다.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눈을 굴리는데, 히페리온이 불쑥 꽃다발을 내밀었다. 향기로운 봄을 품은 꽃이 한 아름에 안기도 힘들 정도로 가득했다.
[그대에게 주는 선물이네.]
“와…! 너무 예뻐요….”
얼떨결에 고맙다며 받아들긴 했는데 도무지 의아함을 버릴 수가 없었다. 뭐야? 이 상황.
[엄청 놀랐나 보네.]
닉스가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심지어 그의 등 뒤로 케이크까지 놓여 있었다. 잠깐. 나 축하받을 일이 있었나. 아, 혹시 쾌유 축하 파티인 건가? 아직 사태 파악이 안 됐는데 닉스는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이번엔 또 뭔데. 꽃다발을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내려놓고 상자를 받아들었다. 뚜껑을 열어 보니 검은 보석이 달린 펜던트가 들어 있었다. 보석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상당히 비싸 보였다.
“이런 걸 어디서 구했어요?”
[지하에 많아.]
“아….”
[그 중에서 제일 예쁘고 말끔한 걸 골라봤지.]
대체 뭐야. 나한테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보통 쾌유한다고 저만 한 크기의 꽃다발에 보석이 달린 펜던트를 선물하나? 그야 그만큼 생각해 주니 고맙기는 한데, 뭔가 찝찝할 따름이었다. 멍하니 상자를 들여다보는데 이번엔 이카로스가 다가와서 선물을 내밀었다.
[준비할 시간이 별로 없어서 크게는 못 만들었습니다.]
그의 손에 뭔가 익숙해 보이는 물건이 들려 있었다. 끈을 엮어 만든 장식 끝에 여러 개의 붉은 깃털이 흘러내려 있었다. 선물을 두 손으로 받아들고는 정교한 끈 장식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우와, 이게 뭐예요?”
[나쁜 꿈을 막아 준다더군요. 테세스에게 만드는 법을 배웠습니다.]
현대에서 이거랑 비슷한 걸 본 것 같은데…. 드림캐처라는 이름이었나. 심지어 장식으로 달린 깃털은 무려 이카로스의 날개였다. 물론 그에게는 흔한 물건이겠지만, 전 황제는 이걸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선물의 행렬에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그게 끝인 줄 알았건만, 이카로스는 한 걸음 물러서며 창가를 가리켰다.
[그리고 저것도.]
접견실 창가에 마치 분재처럼 엄청난 모양으로 뻗어나간 산호가 놓여 있었다.
[오케아노스가 보낸 선물입니다. 조만간 저택으로 찾아가겠다는 말도 전해 달라더군요.]
연달아 이어진 선물 공세에 더는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받은 선물을 전부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심호흡을 한 번 크게 내뱉고 물었다.
“다들 너무 고마워요. 고마운데… 대체 왜 주는 거예요?”
그토록 어색한 적막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왜 아무도 대답을 안 하는 거지? 환하게 웃는 닉스의 얼굴이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궁금증이 점점 커져만 가던 순간 이카로스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이 생일이라고 들었습니다.]
“네?! 저요?”
[예.]
“누가 그래요?”
붉은 눈동자가 슬그머니 닉스를 향했다. 그와 동시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시선이 닉스에게 꽂혔다. 그제야 닉스는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표정을 굳혔다. 안 그래도 창백한 그의 얼굴이 완전히 회색빛으로 질려버렸다.
[뭐, 잠깐. 설마 오늘 생일이 아닌 거니?]
“…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닉스가 충격 받은 채로 굳었다. 또 다시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허허, 하고 웃는 히페리온의 목소리 안에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이카로스마저 허탈해진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갑자기 파티를 제안할 때부터 뭔가 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아무 의심 없이 선물 준비해 온 놈이 누군데.]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는데 누가 의심을 합니까?]
[그….]
닉스는 벙긋거리던 입을 끝내 다물었다. 처음으로 닉스가 이카로스와의 말싸움에서 지는 모습을 봐서 영광이라고 해야 할지, 유감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조용히 눈치만 살피다가 닉스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혹시 제 생일은 어디서 들으신 거예요?”
[당연히 영감이지.]
“네?”
[유피테르가 분명 네 생일이 오늘이라고 했었단 말이야.]
뭐? 유피테르가 그랬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아 주저하다가 말했다.
“으음, 저는 아무한테도 제 생일을 말한 적이 없는데요….”
[뭐? 그럼 이 영감탱이 나 엿 먹이려고 적당히 아무 날짜나 부른 거야?]
애석하게도 그게 정답인 것 같은데…. 불현듯 닉스의 관자놀이에 바짝 선 핏대를 보고는 아차 싶었다. 함부로 맞장구를 쳤다간 대참사가 벌어질 것이다. 곧바로 닉스에게 다가가 어떻게든 냉랭한 분위기를 풀어보려 활짝 웃어 보았다.
“그, 그렇지만! 오늘 미리 축하하면 되잖아요.”
[그래도 아쉽잖아.]
“그럼 나중에 또 축하하면 되는 거죠. 즐거운 일은 많을수록 좋은 거잖아요?”
초롱초롱 눈을 빛내자 닉스가 착잡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한결 마음이 풀린 걸까. 눈을 지그시 감으며 한숨을 내쉰 닉스는 이내 내 머리를 툭툭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네가 이걸로 즐거우면 그만이지.]
“그럼요! 처음엔 영문을 모르고 놀라긴 했지만요.”
실없이 웃으며 이카로스와 히페리온에게도 잊지 않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다 같이 모여서 추억을 나눌 수 있다는데, 그깟 생일 날짜가 틀린 게 뭐 그리 중요할까.
그때부턴 다 잊고 그들과 함께 생일 파티를 시작했다. 현대에서처럼 케이크에 촛불을 붙일 수는 없었지만 착실하게 소원도 빌었다.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를 잘라서 나눠 주고 가장 큼직한 조각을 골라다가 접시에 담았다.
“이 케이크, 유피테르한테 주고 올게요.”
그대로 접견실을 떠나려고 하니 닉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망할 영감은 왜?]
“저랑 생일을 같이 쓰기로 했었거든요.”
세잔의 생일 연회에 갈 때였나. 유피테르에게 생일을 물었지만,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그래서 내 생일을 같이 쓰자고 했다. 서로에게 축하해주면 좋을 것 같다고. 닉스는 그게 뭐냐며 이해하지 못했지만 케이크를 들고 가는 걸 말리진 않았다.
그 후 케이크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계단을 올라 유피테르의 침실에 도착했다. 습관처럼 노크를 하고 들어가자마자 유피테르에게 케이크를 자랑했다.
“유피테르. 이거 봐요. 다들 제 생일을 축하하려고 찾아왔어요. 그런데 실은 제 생일은 오늘이 아니라 6월이거든요. …정말로 유피테르가 닉스한테 아무 날짜나 말한 거예요?”
왠지 닉스와 유피테르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상상돼서 저절로 웃음이 번졌다. 그대로 방을 가로 질러 볕이 잘 드는 자리로 걸어갔다. 오늘따라 날이 좋아서 그런지, 유피테르의 머리카락이 금빛 모래사장처럼 반짝거렸다.
“기억나요? 우리 생일 같이 쓰기로 했잖아요. 그러니까 오늘은 유피테르도 축하받아야 해요.”
케이크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자 침대에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유피테르의 얼굴이 가까이서 보였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백옥 같은 뺨을 어루만졌다.
“태어나 줘서 고마워요.”
“…….”
“소원은 뭐로 빌래요?”
“…….”
“제가 유피테르 소원까지 대신 빌어 줄게요.”
그날부로 2주하고도 며칠이 더 흘렀나. 유피테르는 깨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건드려도 움직이지 않았고, 심지어 숨도 쉬지 않았다. 그저 끊임없이 마력을 뿜어 내는 코어가 유피테르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그것만이 내 유일한 희망이었다.
“있죠. 저는… 당신이 깨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조심스럽게 그의 가슴에 뺨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따뜻한 온기가 차갑게 얼어붙은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잘 수 없는 몸이 된 후로, 밤이 되면 늘 이렇게 딱 붙어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외로움은 도무지 줄어들지 않았다.
“유피테르.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어요?”
“…….”
“그때처럼 꿈속에 제가 나오진 않았나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곤히 잠든 유피테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언젠가 깨어날 것이다. 지금은 몸을 회복하기 위해 잠들어있는 것뿐이다. 기다리기만 하면 반드시 다시 만날 수 있다. 문제는 내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하루가 다르게 허약해지는 몸을 보며 본능적으로 느꼈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마주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 세계를 떠나기까지- 겨우 사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