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8 (288/305)

#288

무엇 하나 성한 게 없었다. 바위는 부서지고 나무는 불타고 있었으며, 심지어 땅마저 움푹 파여 마치 운석이 떨어진 듯했다. 그 비극적인 종말의 장면 한가운데 그가 있었다. 하늘을 뚫을 듯 곧게 뻗은 뿔과 대지를 뒤덮을 날개- 꿈속에서 본 그 마물의 모습 그대로였다.

“언젠가 본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보게 됐네요.”

사나운 포효에 온 대지가 진동했다. 더 이상 부술 것 없는 폐허에서도 총기를 잃은 눈은 끊임없이 파괴할 거리를 찾고 있었다. 어쩌면 검을 쓰지 않고 이성을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실제로 분노한 그를 보니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보다 이 세계를 지키려고 애쓰던 존재가 이젠 그것을 멸망시키려 하고 있다. 언제나 파괴는 구축보다 쉬웠고, 오랜 시간 쌓아올린 평화는 그의 손에 함락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유피테르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너기 전에 찾아와서.

금빛으로 물든 하늘을 따라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충분하다고 생각한 닉스의 힘은 벌써 바닥나고 있었고, 사방에서 밀어닥치는 마력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럼에도 헤르메스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발목을 붙잡아도 멈출 수 없었다.

저 괴로움에 찬 포효 소리는 나를 부르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거센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로브를 붙잡고 얼마나 올랐을까. 마침내 거대한 그림자가 머리 위에 드리웠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태양을 등진 마물의 실루엣이 시야에 가득히 들어왔다. 새까맣게 타 버린 나무 기둥에 기대어 그를 올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유피테르. 저예요.”

작은 목소리가 그에게 닿은 걸까. 아니면, 영역 안으로 침범한 존재를 이제야 눈치챈 걸까. 금색으로 형형히 빛나는 동공이 매섭게 이쪽을 돌아보았다. 단지 눈을 마주쳤을 뿐인데도 느껴지는 위압감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늦게 왔죠?”

혹시라도 알아볼까 싶었으나 역시나 헛된 기대였다. 가까이 있던 닉스도 끝까지 나를 알아보지 못했는데, 이성을 잃은 유피테르가 알아챌 리 만무했다. 침입자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유피테르는 가차 없이 내게 공격을 가했다.

정면으로 다가오는 황금빛 번개를 피할 새도 없었다. 눈앞이 번쩍하는 순간 갑자기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헤르메스가 내 뒷덜미를 발톱으로 붙잡고 날아오른 것이다. 그 사이 번개는 바닥에 꽂혀 내가 서 있던 자리를 초토화 시켜 버렸다. 잠시 기대고 있던 나무는 반으로 쪼개지다 못해 아예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헤르메스가 재빨리 나를 데리고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저 나무가 나의 미래였겠지.

“…고마워.”

무사히 바닥에 내려와선 헤르메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안심하긴 아직 일렀다. 공격을 피했다는 걸 알아챘는지 유피테르는 예리한 눈초리로 주변을 살폈다. 재빨리 바위 뒤에 숨어 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금세 나를 발견한 유피테르는 커다란 날개를 펼치며 포효했다. 분노에 찬 소리와 함께 그의 머리 위로 수십 개의 빛 구체가 생겨났다.

일순 등골이 오싹해졌다. 주저하는 순간 죽는다.

“헤르메스!”

곧바로 매의 등에 올라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콰광! 엄청난 폭발음에 귀가 찢어지는 듯했다. 흙먼지가 걷히고 바닥을 내려다보니 대지 곳곳이 달의 표면처럼 움푹 파여 있었다. 간발의 차로 피해서 망정이지, 자칫 먼지가 되어 버릴 뻔했다.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그때 어디선가 강렬한 살의가 느껴졌다. 다급히 고개를 들자 자욱한 흙먼지 사이로 오롯이 빛나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유피테르가 벌써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헤르메스가 아득히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자 유피테르가 곧장 뒤를 따라왔다. 속도로도, 힘으로도 그가 압도적이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옷자락 안에서 정화석을 꺼내어 움켜쥐었다.

“부디 그를 자유롭게 하소서.”

차분하게 기도를 읊자 하얀 빛이 터져 나오더니 이내 손 안에서 칼자루로 변했다.

그날부로 신의의 검을 꺼내는 날은 없을 줄 알았는데…. 이 검의 주인은 동료를 지키기 위해 죽기까지 검을 휘둘렀다고 했던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검을 물려받은 나도 그 이름 모를 기사가 걸어간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신력을 바닥까지 끌어 모아 겨우 검신을 만들어 내었다. 안 그래도 기력이 없는 몸으로 무리한 탓인지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럼에도 더는 도망치지 않고 멈춰 서서 유피테르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얼마나 높이 올라왔는지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탁 트인 창공에 오직 그만이 보였다.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서 기뻐요. 유피테르.”

그 순간 거센 바람이 불어와 후드가 벗겨졌다. 창백한 얼굴이 드러나자 유피테르가 잠시 주춤거렸다. 애석하게도 나를 알아본 건 아니었다. 단지 이성을 잃고도 무의식 속에 깊게 박힌 내가 잠깐 떠오른 듯했다.

찰나의 망설임은 곧 기회였다.

“헤르메스! 나를 그의 코어 앞으로 데려가 줘!”

최후의 명령을 받은 헤르메스는 날개를 퍼덕이며 빠르게 앞으로 날아갔다. 곧장 나를 저지하려 번개가 셀 수 없이 쏟아졌다. 그러나 로브 자락이 찢기고, 머리카락 끝이 타들어 가고, 빛에 눈이 멀어도 검을 놓지 않았다. 오직 그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단 집념만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이젠 자유롭게 살기를.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기를.

무엇보다 스스로를 탓하지 말기를.

그리고- 아픈 기억만 남기고 떠나는 나를 깨끗하게 잊어 주기를.

“…미안해요.”

푹. 두꺼운 가죽을 찢고 들어가는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번뜩 눈을 뜨니 금빛으로 이루어진 심장이 검에 찔려 있었다. 그제야 이 모든 일들이 현실로 자각되어 온몸이 떨렸다.

지금 내가 뭘 한 거지? 정녕 검으로 유피테르를 찌른 건가. 사랑하는 사람의 심장을 내 손으로 찔렀다는 충격이 뒤늦게 몰려왔다. 결국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와 두 뺨을 적셨다. 손톱이 들릴 정도로 세게 칼자루를 쥐었는데도 아픔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나보다 그가 더 아프겠지. 만약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까.

“당신을… 사랑해서 미안했어요.”

툭하고 손을 놓자마자 신의의 검이 사라졌다. 그 순간 벌어진 코어로 찬란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떠 보니 새하얀 공간에 혼자 남아 있었다. 유피테르도, 헤르메스도 곁에 없었다.

바닥을 짚고 겨우 일어나던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그 책… 사실 거예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너무도 익숙한, 그래서 더욱 그리운 광경이 보였다.

‘그건 왜 묻나.’

‘제가 사려고 했거든요.’

그건 오랜 과거의 기억이었다. 그것도 유피테르와 내가 처음 서점에서 만났을 때였다. 머릿속에서만 떠올리던 추억이 눈앞에 보이니 절로 다리가 움직였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마치 지금 그곳에 있는 것처럼 장면이 선명해졌다.

‘단순 흥미인가?’

‘아뇨. 선물하려고요.’

‘내용이 꽤 어려울 텐데.’

‘괜찮아요. 그분은 마물학 전문가시거든요.’

유피테르 얘기에 눈을 빛내는 내 얼굴을 보며 피식 웃어버렸다.

그땐 얼굴을 가린 그가 내가 찾는 사람인 줄도 모르고 신이 나서 말했었지. 게다가 유피테르도 무슨 생각에선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함께 책을 골라 주었었다. 한때는 그게 운명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건 비극의 시작이었다.

‘책을 주면서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으음, 만약 선물을 받아 주신다면….’

만나선 안 됐어.

‘저 같은 사람도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요?’

저렇게 평범한 사랑 이야기처럼 시작해선 안 됐어.

로브에 가려진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홀린 듯 손을 뻗었다. 하지만 기억은 내가 닿기도 전에 산산조각 나서 사라져 버렸다. 그때 알아챘다. 이건 유피테르가 가슴에 품고 있던 추억이자, 내가 부숴 버린 코어라는 사실을.

이윽고 기억의 조각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꼭 주마등처럼 느껴져 나도 모르게 회상에 잠겼다.

‘하등 도움 되지 않는 저 아이를 제가 거두겠습니다.’

유피테르는 아멜리 백작에게서 나를 구해 주고-

‘충분한 땅과 가능성을 가진 씨앗을 네게 주마. 어디 능력껏 피워 봐라. 과연 어떤 꽃이 필지 궁금하구나.’

나의 가능성을 믿어 주었다. 생각해보면 그는 처음부터 나를 편견 없이 바라봐 주었다. 백작의 하인이라고 해서 하대하지도 않았고, 내세울 거라고는 패기뿐인 나를 늘 지지해 주었다. 내가 원래 태어난 세계보다 더 나다울 수 있었던 이유는 전부 그 덕분이었다.

‘그럼 내가 도움을 구할 정도로 성장하게. 언젠가 그날이 오길 기대하지.’

그래서 나도 보답하고 싶었다. 처음엔 단지 은혜를 갚으려던 것뿐이었지만, 그 마음이 점차 깊어져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다. 물론 짝사랑이 이루어지리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야 유피테르는 남자이고, 나의 스승이며, 무엇보다 감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언제라도 이곳을 떠날 것처럼 굴었다.

‘자넨 금방 나를 앞설 걸세.’

‘예? 제가 어떻게….’

‘난 그저 한 철에 머물러 있을 뿐이니.’

현세에 미련이 없는 모습이 너무도 신경 쓰였다. 설령 관계의 벽을 영영 허물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의 행복을 빌어 주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었는데, 아무래도 간절한 바람이 그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켰나 보다. 유피테르는 점차 내게 곁을 내주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도리어 내가 사라질까 초조해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떠나지 않을 건가.’

‘태오. 내가 왜, …왜 이렇게 불안한 건가.’

그 모습을 보며 느꼈다. 유피테르는 감정을 모르는 게 아니라 빼앗긴 거라고. 그때부터 모든 걸 전부 되찾아 주기로 결심했다. 뿔을, 이름을, 감정을, 자유를, 행복을. 그리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의미를 알려 주고 싶었다.

‘어느새 자네가 가진 가능성이 아니라, 자네라는 사람을 눈으로 좇고 있었지.’

힘들기도 했지만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조금씩 변해 가는 유피테르를 바라보며 희망을 느꼈다. 어쩌면 이 사람과 내가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그러니 이기적인 부탁이지만, ……내 곁에 있어 주겠나.’

노력의 결실은 달콤했으나, 이제와 보니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더 이상 자네가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조차 없네.’

점차 그의 머릿속에서 나와의 기억이 사라져 간다.

‘이 세계가 멸망할 때까지 내가 가진 모든 시간을 주마.’

손쓸 새도 없이 하나둘씩 지워져 갔다. 나를 잊게 해 달라고 기도해 놓고선 막상 눈앞에서 기억이 없어지는 광경을 보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서서히 흐려지는 기억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무참히 깨져 버렸다.

“안 돼….”

나를 잊지 마.

‘그래. 아예 자네와 혼약을 발표하면 어떤가.’

이대로 사라지지 마.

‘유한하더라도 상관없네. 지금 함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니까.’

나를 혼자 두지 말아 줘.

‘자네가 내 곁에 있어 다행이야.’

나는 여기 있어. 아직 당신 곁에, 당신과 같은 세계에 있어.

‘태오. 누구도 자네를 만난 것을 후회하지 않네.’

차라리 후회했으면 좋겠다. 나를 미워했으면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날 믿어요? 아스레인.’

‘언제나.’

그래도 떠나야 했다. 하나, 나를 향한 믿음을 저버리고 가기엔 너무도 힘드니까.

‘무사히 내게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게.’

‘약속할게요. 그러니 아스레인도 무사해야 해요.’

‘…널 향한 마음에 대고 맹세하마.’

나와 했던 약속은 잊고.

‘그럼… 이번 일이 끝나면 단 둘이 여행가기로 해요.’

‘여행?’

‘네! 일 같은 건 잠시 미뤄 두고요. 어때요?’

전부 잊고.

‘르브하가 좋겠군.’

내가 없는 세계에서 행복하기를 바랐다.

마지막 기억이 눈앞에서 부셔졌다. 이윽고 깨진 기억들이 한데 모여 모래알처럼 바닥에 소복하게 쌓였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두 손을 모아 기억을 건져 올렸다. 그러나 너무 늦어 버린 걸까. 고운 입자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무엇도 남지 않았다.

텅 빈 손바닥으로 투명한 눈물방울만 떨어졌다. 그때 그리운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태오.’

퍼뜩 고개를 드니 유피테르가 서 있었다. 부드럽게 웃으며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하지만 품에 안기는 순간 그의 몸은 자그마한 모래알이 되어 부서졌다. 두 팔 안에서 사그라지는 빛을 바라보며 영혼이 나간 듯 허탈하게 웃었다.

“이제와 뭘 바란 거야….”

그 후 눈을 뜨니 폐허가 된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암담한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저 멀리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유피테르가 보였다. 다행히 인간의 형태로 돌아와 있었다. 곧바로 다가가고 싶었으나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결국 가진 힘을 모두 써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유피테르를 두 눈에 담았다.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차마 의식을 놓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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