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7 (287/305)

#287

오르커스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닉스가 나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잠깐 상상했었다. 왜 이제야 왔냐고 화를 내려나. 아니면, 평소처럼 장난치며 반겨 주려나. 여러 선택지가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닉스는 커다래진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오로지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 다가오거나 건드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동상처럼 우두커니 서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만 했다. 그간 외롭지 않았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걸로 충분했다.

“…보고 싶었어요.”

나지막이 속삭이며 그의 품에 기대자 드디어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니 어스름한 새벽의 시원한 향기가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꿈쩍 않던 닉스는 한참 후에서야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쓸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다정한 손길이었다.

[살아…있었구나.]

살아있었어. 환영이 아니었어. 닉스는 연신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그 소리가 다신 꿈에 빠져들지 않으려는 간절한 주문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등에 두 팔을 두르곤 아이를 달래듯 토닥여주었다. 비록 살아있는 이의 온기 따위 잃어버렸지만 나는 여기, 당신의 곁에 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얼마간 적막이 흐르고, 닉스는 내 머리에 뺨을 기대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를 잃고 나서 매순간이 후회의 연속이었어.]

“닉스….”

[조금 더 빨리 만나러 갈 걸. 그랬다면… 너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 그 싸늘한 바닥에서 혼자 쓸쓸히 보내지 않았을 텐데. …고작 할 수 있는 거라곤 너와 헤스티아를 데리고 유피테르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뿐이었어.]

역시 닉스였구나. 유피테르의 폭주로 무너져 가는 신전에서 헤스티아와 나를 지켜 준 사람이. 그 덕분에 헤스티아도 무사했고 나도 온전한 상태로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계속 미안하다고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는 깊은 자책으로 얼룩져 있었으나, 내겐 감사할 일밖에 없었다.

“미안해하지 말아요. 이건 닉스의 탓이 아니에요.”

[하지만… 널 지키겠다고 했는데…….]

“닉스는 절 마지막까지 지켜 줬는걸요.”

그가 아니었다면 헤스티아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나 또한 멀쩡히 깨어날 수 없었겠지.

“고마워요.”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리자 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말없이 온기를 나눠주던 닉스는 이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헤메라.]

“네. 닉스.”

[낮이 없는 밤이 외로웠냐고 물었지.]

닉스는 내 어깨를 잡고 살짝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한때는 영원히 아침이 오지 않길 바랐지만, 지금은 아니야. 낮이 없는 밤은 존재할 수 없어.]

꿈을 꾸고 있는 듯 어딘가 넋이 나가 보이던 그는 이제야 내가 아는 사람으로 돌아와 있었다. 슬픔의 그림자가 사라진 얼굴은 언제나 그랬듯 부드러운 미소로 가득했다. 웃는 그를 보니 다시 이 세계로 넘어오길 후회한 것이 무색하게 돌아오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침울한 분위기는 금세 사라지고 우리는 모닥불 앞에 나란히 앉았다. 아까 멱살을 붙잡히는 바람에 구겨진 옷매무새를 정리하자 닉스가 슬쩍 눈치를 살폈다.

[괜찮아?]

“그럼요. 닉스가 저한테 모질게 군 게 오랜만이라 꽤 신선했어요.”

[나 참. 이젠 날 두고 농담도 하네~]

닉스는 피식 싱겁게 웃고는 다시 진지한 태도로 돌아와 물었다.

[언제 어떻게 깨어난 거야?]

“이틀 전에 갑자기 깨어났어요.”

[전혀 못 느꼈어. 사실 지금도… 네게서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아.]

이미 떠나간 영혼을 억지로 육체에 묶어 둔 탓이겠지. 백 마디 말보다 직접 느끼게 해 주는 게 나을 것 같아 닉스의 손을 잡아 내 가슴 위에 올렸다. 죽음의 문턱 앞에 선 이처럼 거의 박동이 느껴지지 않을 터였다. 화들짝 놀란 닉스는 이내 불길한 예감을 느낀 듯 인상을 찌푸렸다.

[너….]

“보다시피 이런 상태라 시간이 별로 없어요.”

[이런 상태라니. 너… 꼭 살아있는 시체 같아.]

“딱히 틀린 말은 아닐지도요.”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고 싶지 않아 별일 아닌 양 웃으며 말했다.

“그 안에 유피테르를 멈출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래봤자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닉스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 갔다. 이제 겨우 재회했는데, 또 다시 작별해야한단 말을 나라고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복잡한 마음을 알아주었는지 닉스는 애써 차분하게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지금의 영감은 나도 어떻게 막을 수 없어.]

“괜찮아요. 제가 막을게요.”

[뭐…?]

“그러니까 제가 유피테르에게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주세요.”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마치 ‘그 몸으로 뭘 할 수 있냐’고 묻는 듯했다. 그래서 옷자락 안에 숨겨 둔 정화석을 꺼내 들었다. 손 안에서 푸른빛을 띠는 마석을 보자마자 닉스는 탄식을 흘렸다.

[설마 내게 했던 것과 같은 방법을 쓰려고?]

“네. 헤메라의 신전이 그나마 유피테르를 막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제 힘은 통할 거예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신력이 헤메라의 것이라서, 또 그 신력이 유피테르에게 통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결계를 뚫고 유피테르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만 있다면 모든 준비가 끝난다. 그럼 신의의 검은 이번에도 나의 바람을 이루어 줄 것이다. 닉스에겐 정화를, 데우스에겐 영원한 안식을 선사했듯이.

[그래.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겠지. 하지만 유피테르를 멈추는 데 실패하면 바로 죽을지도 몰라.]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절대 실패하지 않을 테니까.”

단호한 태도를 내비치자 닉스는 순순히 내 의견을 따라 주는가 싶더니 별안간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하지만 그 다음은?]

“네?”

[그를 멈추면 헤메라, …너는 어떻게 되는 건데?]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또 다시 상처를 주게 될까 봐 입술만 움찔거렸다. 망설이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닉스는 하!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 몸으론 길어야 한 달도 못 가.]

“…알아요.”

[알아? 그걸 알면서 나한테 도와 달라고 찾아왔어?]

순간 참담히 일그러지는 얼굴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얼마나 이기적인 부탁인지 알기에 가만히 입술만 깨물었다. 그러자 닉스는 괴로운 심정을 숨기려는 듯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말했다.

[잔인하구나. 헤메라.]

“…닉스.”

[넌 알고 있었겠지? 내가 네 부탁이라면 거절하지 못할 거란 걸.]

“…….”

[그게 설령 소중하게 여기는 너를 사지로 내모는 일일지라도.]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야하는데 어째서 입이 열리지 않는지 모르겠다. 제대로 정곡이 찔려서인가, 마음 한 구석에 뿌리내린 미안함 때문인가. 이내 닉스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건조한 어조로 내뱉었다.

[내일. …내일 해가 뜨면 가자.]

“도와주는 거예요…?”

[이 세계 따위 망해도 상관없지만, 정말 그리 되어 버리면 네가 슬퍼할 테니까.]

욕심을 버리지 못해 남에게 상처만 안겨 준 나와 달리, 닉스는 끝까지 나를 위한 결단을 내렸다. 애써 괜찮은 척하는 얼굴에 대고 고맙다는 인사조차 할 수 없었다. 시선을 툭 떨구자 닉스가 내 뺨을 감싸 쥐며 고개를 들게 했다.

[그러니까 헤메라.]

나를 내려다보는 눈동자엔 이로 말할 수 없는 애환이 뒤섞여 있었다.

[오늘은 그냥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여기 있어 줘.]

일분일초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더는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뺨에 닿은 손이 너무도 애처롭게 떨려서 차마 쳐 낼 수가 없었다. 아니, 그저 내가 남아 있고 싶은 것을 비겁하게 얼버무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 후로 닉스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의 부탁대로 머리 아픈 화제는 아예 꺼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유피테르와의 여행에 대해 떠들고, 다른 마물들의 안부를 전해 듣는 그 순간만큼은 불안한 미래로부터 자유로웠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에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녹아 들어갔다. 잠을 자지 않아도 밤은 전혀 길지 않았다.

***

해가 뜨자마자 약속대로 우리는 코카서스 산맥으로 향했다. 찬란한 금빛에 가까워질수록 마치 태양에 닿은 것처럼 몸이 뜨거워졌다. 그래도 닉스의 마법 덕분에 꼬박 하루가 걸릴 거리를 반나절만에 도착했다.

[여기야.]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네요.”

아직 결계에 닿지도 않았는데 엄청난 마력이 느껴졌다. 유피테르가 이 땅을 부수려 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위를 올려다보니 정상에서 흘러내린 빛이 헤메라 신전을 기준으로 멈춰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진 못할 것 같았다. 신력으로 만들어진 결계에 난 균열이 멀리서도 보일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정말 괜찮겠어?]

닉스가 걱정스러운 빛으로 바라보았다. 자칫 결계를 넘다가 죽을 수도 있겠지만,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유피테르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란 생각에 이미 죽어 버린 심장이 욱신거릴 뿐이었다.

“네. 부탁드릴게요.”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자 닉스는 거미줄을 엮은 팔찌에 마력을 충분히 불어넣었다. 이정도면 정상으로 가기까지 나를 지켜 주고도 남을 것이다. 마지막 채비를 마치곤 닉스에게 넌지시 물었다.

“다른 마물들은 어때요?”

[모르겠어. 네가 사라진 후로 정신이 없었거든.]

무사해야 할 텐데. 무고한 인간을 해치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그로 인해 스스로를 상처 주는 일은 더더욱 없어야 할 텐데. ……나를 잊고 잘 살아야 할 텐데.

일일이 찾아가서 얼굴을 비추고 싶었으나 불가능한 걸 알기에 또 다시 염치없이 닉스에게 부탁했다.

“유피테르를 진정시키는 동안 아무도 다치지 않도록 막아 줄래요?”

[…오래 버티진 못할 거야.]

“시간을 끌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이젠 닉스와도 작별할 시간이다. 이틀을 내리 달려 불과 어제 만났는데, 시간이 야속하기도 하지. 애써 아쉬움을 숨기려했으나 아무래도 표정에 전부 드러난 모양이다. 닉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헤메라.]

나직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닉스는 마치 세례를 주듯 내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살짝 눈을 감았다가 뜨니 너그러운 미소가 작별을 고했다.

[네가 가는 모든 곳마다 밤의 축복이 함께하길 비마.]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닉스.”

덩달아 인사를 건네는데, 닉스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썹을 삐죽이며 말했다.

[흐응, 방금 그 말은 안 들은 걸로 할게.]

“네?”

[그러니까 무사히 돌아와서 다시 말해 줘.]

다시…라. 다음이 있으리라 확신하는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닉스를 뒤로하고 조심스럽게 결계 안으로 발을 들였다. 거센 바람이 다가오지 못하게 밀어내고, 어깨를 짓누르는 위압감에 쉬이 걸음을 뗄 수 없었다. 아마 닉스가 힘을 빌려주지 않았더라면 진즉 혼절했을 것이다.

설상가상 눈부신 빛이 앞을 가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대강 손으로 빛을 가리고 땅바닥만 보고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대로 유피테르를 만나지도 못하고 조난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던 그때였다.

온통 금빛으로 물든 이곳에 유일하게 검은 존재가 서 있었다.

“…아그누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름을 부르자 긴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정말로 아그누스였다.

“아직 거기 있었구나….”

반갑게 손을 내밀자 검은 늑대는 천천히 다가와 내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그르릉- 기분 좋을 때마다 들려주는 소리에 초조한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듯했다. 이윽고 아그누스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점점 금빛으로 물들었다. 마치 유피테르의 마력에 동화되는 것처럼.

“괜찮아?”

문제가 생긴 줄 알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가 초점 없는 눈과 똑바로 마주쳤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어떤 단어가 번뜩 떠올랐다. 묘하게 익숙한 이름을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헤르메스…?”

그리 부르자마자 검은 늑대는 어느새 두 쌍의 거대한 날개를 가진 매로 변했다. 길게 흘러내린 꼬리 깃과 날개에서 흘러나오는 금빛은 신기하리만치 유피테르와 닮아 있었다. 조심스레 손을 내밀자 금빛 매는 날렵한 부리를 내 손바닥에 살살 비볐다.

“이게 진짜 네 모습이구나.”

유피테르의 마력으로 마침내 본 모습을 찾은 걸까. 그를 보고 있으니 문득 옛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도 아그누스를 따라가기만 하면 빈번이 유피테르를 만났었다. 그땐 내 그림자에 머무는 마물이 어떤 존재인지도 몰랐다. 마물 도감에 적힌 대로 ‘세상을 얻을 수 있는 비밀로 길을 안내하는 마물’이라고 막연히 알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언제나 늠름하게 내 곁을 지켜주던 이 마물은 나를 유피테르에게로 이끌어 주는 유일한 길잡이라는 사실을.

“그래. 헤르메스. …나를 그에게로 안내해 줘.”

이내 금빛 매는 살벌한 기세로 달려드는 마력을 묵묵히 뚫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번에도 길잡이가 향하는 목적지엔 어김없이 그가 있었다. 하늘을 향해 포효하며 무자비하게 주변을 파괴하고 있는 아름다운 황금의 마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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