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5 (285/305)

#285

휘브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유피테르가 그 마물이라는 사실을 이미 눈치챈 것이다. 이제와 숨겨 봤자 소용없었기에 더는 부정하지 않고 차분하게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예전에 교수님이 내게 이런 걸 줬었죠.”

휘브는 옷 안에 감추고 있던 목걸이를 꺼내들었다. 그건 휘브가 라비린토스로 떠나기 전, 프로메테우스의 지배에서 벗어나라며 유피테르가 건넨 마석이었다. 영롱한 금빛을 발하는 마석은 창밖에 보이는 하늘과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여기서 느껴지는 마력과 코카서스 산을 뒤덮은 마력이 똑같아서 알았습니다.”

“…감이 생각보다 좋네요.”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어깨만 살짝 으쓱였다. 어쩌면 휘브뿐만 아니라 유피테르의 마법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그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뭐, 이젠 상관없다. 당장 내일 세계가 어찌될지도 모르는 판국에 무슨 비밀이 따로 있단 말인가.

“저렇게 된 지는 얼마나 지났나요?”

“닷새쯤 됐습니다.”

나의 죽음과 동시에 재앙이 시작됐구나.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금 창밖을 바라보았다. 산 정상에서 터져 나오는 빛에 태양마저 보이지 않았다. 일평생 저만큼 거대한 마력은 본 적이 없다. 안 그래도 긴장하고 있는데 설상가상 휘브는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그나마 헤메라의 신전이 마력이 범람하는 걸 막아 주고 있습니다. 그사이 산자락에 사는 주민들은 전부 대피했습니다만, 문제는 다른 마물들까지 폭주했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마물이 폭주했다니….”

“아마 ‘그 마물’의 영향이 아닐까 싶네요. 마법사들이 모여 결계를 구축했지만, 언제 부서질지 모르겠습니다.”

들은 적이 있다. 유피테르의 감정은 다른 마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그리고 그 감정이 분노나 슬픔과 같이 부정적일수록 더더욱 깊게 뿌리내린다고 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만 생각이 나쁜 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모든 재앙이 나 때문이라는 죄책감이 몰려왔다.

내가 그대로 현대로 갔었더라면. 내가 그를 다시 한 번 보겠단 결정을 안 했더라면. 내가,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시스템의 말마따나 최악의 경우를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그때 휘브가 내 어깨를 세게 틀어쥐었다.

“형님!”

벼락이 치듯 귀에 꽂히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옆을 돌아보니 휘브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설마 자책하는 건 아니겠죠.”

“…아니에요.”

“형님은 엄연한 피해자입니다. 이 사달이 난 건 전부 황제 때문이라고요.”

그래. 휘브의 말이 맞다. 전부 황제의 욕심이 불러온 결과다.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이미 좀먹힌 마음은 자꾸만 화살을 내게로 돌렸다. 그나마 휘브 덕분에 소란스러운 마음을 겨우 다잡곤 본론으로 돌아갔다.

“대응할 마법사 수는 충분한가요?”

“아닌 것 같습니다. 황실에선 계속해서 마법사를 구하고 있지만, 일부러 지원 안 했어요.”

“…왜요?”

“그가 대륙을 공격하는 게 이해돼서요.”

휘브는 그 답지 않게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형님을 찌른 황제가 죽었다고 한들 그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현 황실이 그 죗값을 치러야죠. 게다가 그딴 마법사 나부랭이로는 수천 명이 모여도 저 거대한 마력은 못 막습니다.”

“그래도 무고한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끼칠 수는 없어요.”

“뭐, 형님이라면 그리 말할 줄 알았지만요.”

악은 대물림되어서는 안 된다. 이미 칼리온은 계약을 끊음으로써 유피테르를 해방시켰고, 거기서 악연은 끝나야 한다. 이대로 마물이 인간을 공격하는 걸 가만 두고 있다간 과거처럼 종족 간의 전쟁으로 번지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유피테르가 잔혹한 학살자로 역사에 기록되길 원치 않았다.

“방법은 있습니까?”

“확실하진 않지만… 지금으로선 이 방법뿐이에요.”

이 시체 같은 몸으로는 유피테르에게 다가가기는커녕 마력에 닿자마자 녹아 없어지고 말 것이다. 반드시 도움을 받아야 한다. 조심스럽게 소매를 걷어 내자 끊어진 부분을 단단히 엮어 놓은 거미줄이 드러났다. 더 이상 닉스와 연결되어 있진 않았으나,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오르커스 황야에 있다는 것을.

“이만 가야겠어요.”

의자를 짚고 일어서자 휘브가 당황하며 따라 일어났다.

“그 몸으로 어디를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고 했잖아요.”

더 시간만 끌어봐야 피해만 커진다. 마지막 방어선인 헤메라 신전이 무너지기 전에 반드시 유피테르를 만나야 한다. 비틀거리며 예배당 문으로 향하자 휘브가 불쑥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설마… 그를 직접 막으려는 겁니까?”

“…….”

“형님.”

“제가 아니면 안 돼요.”

현존하는 마법사로는 유피테르를 막긴 불가능하다. 게다가 대사제가 사라진 지금, 유피테르에게 대항할만 한 신력을 가진 이도 없다. 그러니 나밖에 없다. 아니, 나여야만 한다. 오직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차원을 넘어 왔으니까.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휘브.”

단호한 의지를 내비치자 휘브는 잠시 주춤거리다 옆으로 물러섰다. 제멋대로 나타나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게 미안하지만, 아직 부탁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 팔을 살짝 잡으며 속삭였다.

“부디 제 이름이 적힌 관을 묘지기와 함께 묻어 주세요.”

“예? 형님은 여기 살아계신데, 어째서 비어있는 관을 묻으라는 겁니까?”

“제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선 안 돼요.”

“…정말 숨기실 겁니까? 다들 그토록 형님을 그리워했는데….”

휘브는 내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다소 격양된 투로 말했다.

“장례식 날 예배당을 가득 채운 울음소리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심지어 아이리스는….”

“그만!”

눈을 질끈 감으며 휘브의 말을 끊었다.

“때가 되면 제가 찾아갈게요. 아직은…. 정말 미안하지만, 지금은 안 돼요.”

누군들 안 보고 싶을까. 당장이라도 그들 앞에 나타나 나는 죽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리운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다시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내 얼굴은 본 휘브는 더 이상 말을 얹지 않았다. 대신 비틀거리는 나를 부축하며 함께 예배당을 나섰다. 사제가 머무는 숙소와 이어진 복도에 멈춘 휘브는 대뜸 나를 벽에 기대게 하고선 말했다.

“그럼 마을에서 마차를 불러오겠습니다.”

“네? 그러지 않아도 돼요.”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요.”

괜찮다고 말리기도 전에 휘브가 신전을 떠나 버렸다. 어차피 오르커스 황야로 가려거든 마차가 필요하긴 했지만, 계속 신세만 지니 마음이 쓰였다. 신전 밖으로 뛰어나가는 휘브를 바라보다가 문득 창문에 비친 내 얼굴과 마주쳤다.

안 그래도 혈색이 없던 피부는 납빛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퀭한 눈에 새하얀 수의까지 더해지니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볼품없는 몰골을 어떻게든 가려야겠다 싶어 사제들의 방으로 향했다.

“실례합니다….”

허름한 침대 옆에 있는 옷장을 열자 단정한 의복이 여럿 놓여 있었다. 허락 없이 가져가기 미안했지만, 지금 도덕성을 따질 때는 아니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로브를 위에 걸치고 혹여 얼굴이 드러날까 후드도 썼다.

채비를 마치고 다시 한 번 창문에 비쳐 보았다. 얼굴을 반절 가려 음산해 보이긴 해도 나라는 걸 들킬 염려는 없어 안심이었다. 이윽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나가 보니 자그마한 마차 한 대가 신전 앞에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휘브는 마부에게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속삭였다.

“돈은 이미 지불했습니다.”

“또 신세를 져 버렸네요.”

“내가 형님한테 진 빚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장난스럽게 한 쪽 눈을 찡긋거리는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떠나기 전에 평소의 휘브를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제 그만 마차를 타려는데, 휘브가 “형님.” 하고 무겁게 불렀다. 그렇게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다시… 돌아올 거죠?”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 뒤로 짙은 불안감이 느껴졌다. 눈치 빠른 휘브라면 이미 알아채지 않았을까. 이게 마지막이라는 것을. 웃는 얼굴을 보니 선뜻 말문이 떨어지지 않았다. 거짓말의 유혹은 참으로 달콤했으나, 나는 결국 침묵을 택했다.

말없이 휘브를 꼭 끌어안아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휘브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제발 돌아와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마차의 문을 닫아 주었을 뿐이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마차 안에 난 작은 쪽문으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휘브에게 작별 인사라도 건네려다가 끝내 딱딱한 의자에 등을 기대며 답했다.

“오르커스 황야로 가 주세요.”

휘브가 돈을 적잖이 쥐여 준 걸까. 마부는 묵묵히 오르커스 황야로 말머리를 돌렸다. 늦은 밤이 되어서도 마차는 멈추지 않았다. 코카서스 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하늘을 대낮처럼 밝힌 덕분에 길을 비출 야광화나 등불도 필요 없었다.

마부는 때때로 마을에서 간단한 육포나 빵을 사서 내게 권하기도 했다. 식사는 해야 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괜찮다며 거절했다. 이상하게도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았다. 심지어 마차에 있는 이틀 내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어두운 밤이 너무도 길고 외롭게 느껴졌다.

유피테르는 늘 이런 밤을 혼자 지내왔겠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 넓고 고요한 리리오페 호수 위에서 고독을 씹어 왔을 것이다. 어쩌면 그간 너무 무뎌져서 외로움이라곤 느낄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추워.”

춥다. 온도 따위 느낄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지만, 이상하게도 몹시 추웠다. 삐걱거리는 의자 위에 몸을 웅크려도 한기는 가시지 않았다. 오들오들 떨며 눈을 감으니 어둠 위로 며칠 전 헤어진 휘브의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다시… 돌아올 거죠?’

그냥 거짓말을 할 걸. 그렇게 해서라도 웃는 얼굴을 한 번만 더 볼 것을.

“…미안해요.”

시스템. 어쩌면 나는 잘못된 판단을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다시 마주하면 깨끗하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점점 더 돌아가고 싶지 않아지네요. 그냥 그때 기억을 지워 버릴 걸 그랬어요. 나도, 유피테르도, 소중한 사람들도 모두 잊고 새로이 출발했다면 좋았을 텐데….

점점 깊어져만 가는 고독을 위로해 주는 건, 어깨 위로 닿는 달빛뿐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마침내 마차는 오르커스 황야에 다다랐다. 언제와도 생명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황량한 대지에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더 마차를 타고 들어갔다간 마부에게도 위험할 것 같아서 쪽문을 툭툭 두드렸다.

“이쯤이면 됐어요. 이 앞은 걸어갈게요.”

비틀거리며 마차에서 내리자 마부는 곧바로 말을 돌려 사라졌다. 바짝 메마른 황야에 일 분 일 초라도 더 있고 싶지 않은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저 멀리 사라지는 마차를 바라보다가 나도 걸음을 옮겼다.

울퉁불퉁한 붉은 대지를 얼마간 걷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조용하네….”

분명 근처에서 방대한 마력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성을 잃었다는 소문과 달리 일대가 너무 조용했다. 애초에 인간에게 화가 난 거라면 인간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 황야에 있지는 않았을 텐데…. 닉스는 왜 이곳을 택한 걸까.

또 한 번 큰 언덕을 넘으니 저 멀리 벤테온의 손이 보였다. 우두커니 서 있는 파란 수정은 여전히 위용이 엄청났다. 그런데 필리스 줄기에 둘러싸여 있으리란 예상과 달리, 푸른 수정 숲은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닉스.”

저곳에 닉스가 있다. 검은 연기를 따라가다 보니 곳곳에 앙상한 병사들의 시체가 늘어져 있었다. 체액을 전부 빨려 죽었는지 미라 같은 모습이었다. 그 탓에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갑옷에 새겨진 문양을 보아하니 제국병이었다. 아무래도 닉스를 막기 위해 수를 쓰다가 화를 입은 듯싶었다.

만약 닉스가 나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폭주한 상태라면 나도 저 병사처럼 되겠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검은 연기가 자욱한 곳으로 향했다. 이윽고 그의 영역에 발을 들이려는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잠깐만요.”

너무도 익숙한 음성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감히 뒤돌아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목소리는… 나의 것이었다. 설마, 잘못 들은 거겠지. 목소리가 비슷한 사람은 많으니까.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경직된 목을 억지로 돌려보았다.

그러나 어떻게든 예상을 빗나갔으면 하는 나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닉스를 보러 오신 거죠?”

그곳엔 내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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