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
살랑거리는 바람이 콧잔등을 간지럽혔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폐 속 깊은 곳까지 진한 꽃향기가 스며들었다. 완연한 봄인가. 마치 꽃밭에 누워 있는 착각이 일었다. 따사로운 햇볕이 잠을 깨워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정말로 새하얀 꽃이 만발해 있었다. 만개한 흰 국화가, 차갑게 식은 내 몸을 끌어안고 있었다.
“…여긴…어디지?”
정교하게 세공된 석조 천장이 묘하게 눈에 익었다. 이윽고 천장 귀퉁이에 포효하는 사자의 형상을 보자마자 절로 탄식이 새어나왔다. 이곳은 레톤의 신전이다. 어째서 여기에…, 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내 몸에 두른 순백색 천을 보곤 깨달았다.
아. 나의 장례식이었구나. 그럼 아까부터 등에 닿는 이 딱딱한 감촉은 관일 테고.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뻣뻣하게 굳은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제야 내가 누워있던 곳이 신전 성역의 제단 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죽었었구나.”
이 복잡한 감정을 무어라 표하면 좋을까. 아득히 흐려진 정신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불현듯 텅 빈 손바닥을 내려다보니 피부가 마치 시체처럼 창백했다. …살아있는 게 맞나? 혹시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닐까. 파르르 떨리는 손을 조심스럽게 가슴 위에 올려보았다. 기대가 무색하게 심장의 박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죽은 몸에 시스템이 억지로 영혼을 묶어 뒀으니. 이 상태론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길어 봐야 일주일. 기적이 일어난다면 열흘. 그래 봤자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한다. 그 안에 모든 일을 끝내야 한다. 어렵게 얻은 기회를 후회로 날려 보낼 수는 없다.
몸을 감싼 국화를 치워 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맨발을 차디찬 석조 바닥에 댔는데도 한기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얇은 수의 안으로 바람이 스며들어도 피부에 닿는 감촉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저 습관처럼 팔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추워.”
봄이 원래 이렇게 추웠었나. 어깨를 움츠리는 순간 가슴 한가운데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여보니 목에 걸고 있던 반쪽자리 정화석이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내게 남은 온기가 꼭 데우스처럼 느껴져 나도 모르게 정화석에 대고 말을 걸었다.
“데우스. …잘한 선택인 걸까요?”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다시 돌아온 걸 후회하진 않을까요. 어떻게 당신은 소중한 사람을 전부 이곳에 두고 홀로 떠날 결심을 할 수 있었나요. 그 방법을 알았더라면 나도, 내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꺼이 잊힐 수 있었을 텐데.
뻣뻣한 손으로 정화석을 쥐자 희미하나마 신력이 느껴졌다. 딱 한 번 신의의 검을 뽑을 수 있을 만큼의 힘만 남아 있었다. 참으로 기구한 우연이었다. 마치 이 검으로 끝을 맺으라는 신의 계시처럼 느껴졌다.
“곧 만나요. 유피테르.”
정화석을 소중히 그러쥐던 그때였다. 갑자기 예배당 문이 열렸다. 끼이익- 낡은 경첩이 내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휘브리스였다. 새하얀 재스민 꽃다발을 들고 온 그는 나를 보자마자 돌처럼 굳어 버렸다.
“…어…?”
녹색 눈동자가 툭 치면 빠질 듯 커졌다.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나 또한 설마 휘브를 마주칠 줄은 몰랐기에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 며칠 사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며칠째 잠을 못 잤는지 눈두덩은 푹 꺼져 있었고, 색이 죽은 입술은 바짝 메말라 있었다. 그게 전부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휘브.”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자 그는 경기를 일으키듯 어깨를 떨었다. 이윽고 아연실색하며 뒷걸음질을 치는 모습에 선뜻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당연히 놀랐겠지.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버젓이 살아있으니 기절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자 휘브는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누구야.”
“저예요. 태오.”
“거짓말…. 형님은 닷새 전에 죽었어.”
그날로 벌써 5일이나 지났나. 내겐 한 시간도 채 흐르지 않은 것 같은데. 잠시 상황을 파악하는 사이 휘브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진 그는 거친 숨을 내쉬며 소리쳤다.
“저기 누워 있는 시신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이 내 뒤에 있는 관을 가리켰다. 곧바로 눈을 부릅뜨고서 관을 바라본 휘브는 이내 충격에 빠져 손을 툭 떨어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관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걸어 나오다가 흐트러뜨린 국화만 남아 있을 뿐.
“말도 안 돼….”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적잖이 놀란 휘브를 위해 나를 믿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휘브는 여전히 불신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떤 새끼가 이딴 장난을 치는 거야?”
나를 마법이 만들어 낸 환각이라 생각하는 걸까. 휘브는 매서운 눈초리로 사방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당장 나와!”
공허한 예배당에 절망이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예배당엔 그와 나, 단 둘뿐이다.
이러다 사달이라도 날까 걱정되어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믿기지 않는 거 알아요.”
“내가 미쳤지. 이젠 환각에 환청까지….”
“휘브.”
“듣지 마. …들어선 안 돼….”
내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휘브는 머리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심지어 환상에서 벗어나려는 듯 손바닥으로 머리를 치기까지 했다. 고통스러워하며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성큼성큼 다가가 움츠러든 어깨로 손을 뻗는 순간 휘브가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다가오지 마!”
휘브가 팔을 휘두르자 그의 손에 들려있던 꽃다발이 내게 날아왔다. 퍽! 꽃다발이 가슴팍에 부딪쳐 새하얀 꽃잎이 허공에 흩날렸다. 일순 시간이 멈춘 듯했다. 나부끼는 꽃잎 사이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다시금 창백해져있었다. 내게 실체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진짜… 형님입니까?”
줄곧 의심만 가득하던 눈동자에 마침내 희망이 서렸다. 그 모습이 가슴이 찢어질 듯 안쓰럽다가도 다행이어서 금세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도 웃는 얼굴로 반겨 주고 싶어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휘브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떻게 하면 믿어 줄래요?”
무언가에 홀린 듯 다가온 휘브는 내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저 손을 잡는 것뿐인데 심히 주저하고 있었다. 그토록 매몰차게 사라지라고 했으면서, 막상 닿으면 정말로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한참동안 움찔거리기만 하던 휘브는 끝내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손과 손이 닿자마자 그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하…. 떨리는 숨소리가 부르튼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이내 휘브는 내 손등에 제 얼굴을 묻으며 연신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사라질까 내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이윽고 얼음장같이 차디찬 손에 뜨거운 눈물이 닿았다.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묵묵히 눈물을 삼키며 복슬복슬한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웃으며 떠들었던 것 같은데.
“그만 울어요. 잘생긴 얼굴 상하겠다.”
괜히 장난스럽게 말하자 휘브는 그제야 엷은 웃음을 터뜨렸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손으로 눈물을 슥슥 닦아 냈다. 여전히 얼굴은 수척하기 그지없었지만, 차츰 화색이 돌기 시작하니 내가 알던 그 장난기 많은 휘브로 돌아와 있었다.
잠시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손을 어루만지던 휘브가 걱정스레 물었다.
“몸은 또 왜 이렇게 차갑습니까.”
“봄바람이 차서 그런가 봐요.”
말도 안 되는 변명에도 휘브는 아무 말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겉옷을 벗어 내 어깨에 둘러주고는 의자에 앉혔다. 긴 예배당 의자에 나란히 앉은 휘브는 나를 연신 흘끔거리며 쳐다보았다. 아직 눈빛에 흐릿하게나마 의심이 묻어나서 슬쩍 떠보았다.
“아직도 못 믿겠어요?”
“어떻게 바로 믿겠어요. 바로 이틀 전에 형님의… 장례식에 왔었는데.”
남의 입에서 장례식이란 단어가 튀어나오니 절로 숨이 막혀 왔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에, 나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가 앉아 있었겠지. 전혀 상상되지 않았다. 조금 더 말해달라고 부탁하자 휘브는 내 오른손을 소중하게 잡은 채로 띄엄띄엄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꽃 사이에 누워 있는 형님을 보고 그대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거든요. 며칠 전만해도 함께 웃고 떠들던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떠났다는 게….”
또 다시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휘브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
“그러다 이제 관이 땅에 묻히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서 다시 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를 돌아보는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딱 잘라 답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고,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는 이야기를.
그래서 천연덕스럽게도 말을 돌렸다.
“글쎄요. 휘브의 기도가 신께 닿은 거 아닐까요?”
“…무슨 그런 농담을 하십니까.”
“농담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슬쩍 고개를 숙이며 안색을 살피자 휘브는 한숨만 푹 내쉬었다. 말없이 얼굴을 쓸어내리는 그에게서 깊은 시름이 느껴졌다. 나 때문에 마음 고생한 그를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는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별일 아닌 것처럼 가벼운 투로 말했다.
“아직 제게 할 일이 남아있어 갈 수가 없었어요.”
“그럼… 할 일이 끝나면요?”
예리한 질문에 순간 아차 싶었다. 할 일이 끝나면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야겠지. 지금 이 순간뿐만 아니라 내가 그의 기억에서 깨끗하게 사라질 것이다. 그럼 휘브는 더 이상 나 때문에 가슴 아파하지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지 않아도 된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모두가.
어떻게 말해야할지 몰라 입만 벙긋거리자 휘브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휘브….”
“기적이든 뭐든 상관없습니다. 지금은 형님을 다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휘브는 나를 바라보며 평소와 다름없이 짓궂게 웃었다. 나로선 마주 웃어 주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눈을 가린다고 점점 다가오는 길의 끝을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언제가 끝일지 모르고 싶어 스스로 눈을 감았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차츰 진정이 되어가는 휘브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어요?”
“전해들은 거라 자세하진 않습니다만… 미노스 황제가 범인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그래요?”
“사건 당시에 같이 있던 소녀가 모든 사실을 증언했습니다.”
소녀란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헤스티아는 무사한가요?”
“이름이 헤스티아였군요.”
휘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몸은 성하지만 그날의 충격으로 마음을 아예 닫아 버린 것 같았습니다. 마을에 친하게 지내던 또래한테는 물론이고, 제 부모한테도 말을 하지 않더군요.”
결국… 그렇게 됐구나. 아직 어린 아이에게 너무 큰 짐을 줘 버렸다. 눈앞에서 죽어 간 것도 모자라 그 아이를 지키다 사고를 당했으니 분명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있을 테다. 늘 해맑게 웃던 아이에게서 웃음을 빼앗았단 자책에 마음이 한량없이 무거워졌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마저 소식을 물었다.
“…황제는요?”
“죽었습니다.”
“예?”
황제가 죽었다고? 휘둥그레 뜬 눈으로 돌아보니 휘브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시신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죽었습니다.”
“그, 그럴 리가 없어요.”
아그누스는 제압만 했을 뿐 호위병을 죽이진 않았다. 심지어 내가 의식을 잃을 때까지만 해도 황제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런데 대체 누가…. 뒷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휘브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레톤 신전에서 보여선 안 될 것이 보였다.
코카서스 산이 찬란한 금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빛이 얼마나 밝던지 멀리 떨어진 신전에까지 훤히 보였다. 저 멀리 금색으로 물든 하늘은 금방이라도 온 대륙을 삼킬 듯했다. 시스템이 보여 준 환영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욱 장엄하고 공포스러웠다.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별안간 휘브가 말을 꺼냈다.
“사람들은 단지 ‘그 마물’이 갑자기 분노했다고만 하더군요.”
“……!!”
“하지만 나는 그가 이성을 잃은 이유를 압니다.”
예상치 못한 흐름에 흠칫 놀라며 휘브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미 그는 모든 진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차분한 목소리가 더 이상 뛰지 않는 심장에 정확히 날아와 박혔다.
“누구라도 사랑하는 존재를 잃으면 그리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