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3 (283/305)

적합자를 찾기 위해 수많은 세계를 돌아다녔다니, 여태 믿고 있던 사실과 전혀 달랐다. 나는 단지 지도 교수님의 부탁 아닌 명령으로 소설을 읽었을 뿐이다. 그러다 불의의 사고로 책 속으로 들어온 줄 알았는데… 시스템의 말이 사실이라면 전제부터 틀려먹었다.

“잠깐만요. 그럼 그곳이 책 속의 세계가 아니란 말인가요?”

- 그곳은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엄연히 실재하는 차원입니다. 책은 조건에 부합하는 이를 찾아낼 수단 중 하나였죠. 마물이 없는 세계에서 마물에 대해 순수한 애정을 갖기는 어려우니까요.

예상을 빗나가는 이야기는 적지 않은 충격으로 돌아왔다.

“어째서 제게 미리 말해 주지 않은 거죠?”

- 현존하는 세계보다 가상 세계를 구하는 쪽이 부담이 덜하지 않겠습니까.

할 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자 창백하게 질린 입술 위로 그의 손가락이 닿았다. 소름끼치는 손을 당장 쳐 내려다가 그의 표정을 보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외롭고 쓸쓸해 보여 모질게 밀어낼 수가 없었다.

조용히 한 걸음 물러서 손길을 피하곤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온통 거짓말뿐이었네요.”

- 태오 님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거짓말이겠죠.”

시스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침묵이 손끝에서부터 온기를 앗아 갔다.

설마 소설을 접한 순간부터 시스템의 손 안이었을 줄은 몰랐다. 트럭에 치여 죽을 운명도, 그리하여 다른 세계로 넘어가 온갖 사건에 휘말리게 될 것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내 선택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고 자부했던 게 눈물이 날만큼 우스웠다.

“그래서 그 위대한 계획은 완벽하게 이뤄 졌나요?”

- 과정에서 약간의 오류가 생겨 버렸지만, 지금이라면 충분히 되돌릴 수 있습니다.

“…오류라뇨?”

또 다시 적막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역시 말해 주지 않을 건가. 일이 잘못되어 간다는 불안감보다도 지금껏 치열하게 살아온 시간을 기계적으로 대하는 시스템에게 환멸이 났다. 경계심 어린 눈으로 쳐다봐도 시스템은 태연하게 말을 돌렸다.

- 자, 이만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어딜 돌아가요?”

- 본디 태오 님께서 나고 자란 세계로 가셔야죠.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현대로 돌아간다니. 그럼 이제 저쪽 세계로는 갈 수 없는 건가? 그보다 내가 왜 돌아가야 하지? 내 마음은 이미 저쪽 세계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전부 주었는데…. 혼란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해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전 못 가요. 아니, 안 가요.”

- 태오 님.

“쓸모를 다했으니 이제 저를 버리겠다는 소리로밖에 안 들려요.”

어떻게 얻은 행복인데, 어떻게 찾은 내 사람들인데-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불쑥 다가오는 시스템의 손을 피하며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에도 시스템은 물러서지 않고 한 발 다가와 나직하게 말했다.

- 태오 님으로 인해 세계가 무너진다고 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 순리를 벗어난 존재는 세계를 병들게 하는 독입니다. 태오 님도 알다시피 마물로서 생을 마감했어야하는 프로메테우스는 신이 되기 위해 이치를 깨뜨렸죠. 그래서 다른 세계에서 태오 님을 모셔온 겁니다. 그에게 대항하려거든 또 다른 ‘순리를 벗어난 자’가 필요했으니까요.

한쪽으로 기울어진 저울의 평형을 맞추려면 동일한 무게가 나가는 물질이 필요하다. 그게 나였다. 내가 프로메테우스가 무너뜨린 형평을 돌려놓기 위해 불려 온 존재였다. 나로 인해 적이라곤 없던 프로메테우스를 무사히 제거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지금부터다.

프로메테우스가 사라져 저울이 또 다시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그 말은… 프로메테우스가 죽었으니 저도 사라져야 한다는 거예요?”

- 예. 태오 님께서 오래 머물수록 그 세계는 또 다시 무너질 겁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불과 방금 전만 해도 시스템이 무슨 소리를 하든지 내 결심은 흔들리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어떻게든 저쪽 세계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잔인한 현실에 다짐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다른 것도 아니라 세계, 그 자체가 볼모라니… 이기적으로 굴려야 굴 수가 없었다.

“제가 만약 이쪽 세계로 돌아온다면, 저곳에서 저는 고인이 되는 건가요?”

- 계획대로 됐다면 그 정도로 끝났을 테지만….

말끝이 길게 늘어질수록 불안은 점점 커져 갔다. 방금 전 시스템이 ‘약간의 오류’가 생겼다고 말한 게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윽고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 이젠 태오 님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지워야만 합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현대로 돌아가는 순간 모두가 당신을 잊을 겁니다. 어렴풋이 세계를 구한 영웅이 있다는 건 알지만, 정작 태오 님의 이름조차 떠올리지 못하겠죠.

나를… 잊는다고? 그들 사이에서 나는 아예 없었던 사람이 되는 거다. 일순 그들이 나를 보고도 모르는 척 스쳐 지나가는 모습이 눈앞에 어릿대었다. 아주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서 숨이 턱 막혀 왔다. 답답한 가슴을 쥐어뜯듯 옷깃을 쥐며 힘겹게 운을 떼었다.

“그럼 유피테르도 저를 잊는 건가요?”

- 예외는 없습니다.

그가 나를 잊는다. 나를 모르던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그의 인생에 나는 없는 존재가 된다. 실수로라도 가정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건 싫어요. 그럴 순 없어요.”

- 태오 님.

“그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저를 당장 유피테르 곁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맹렬히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을 치자 시스템이 다가왔다. 눈물로 뿌예진 시야에 들어온 그의 모습이 꼭 사신처럼 보였다. 잔뜩 겁에 질려 움츠러들어 있자 시스템은 걸음을 멈추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내 그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손을 올리며 말했다.

- 직접 보여드리는 수밖에 없겠군요.

시스템이 살짝 손을 휘두르자 아스팔트 바닥이 갑자기 무너졌다. 휩쓸릴까 두려워 도망치려는 순간 그것이 환상임을 깨달았다.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듯 갈라진 아스팔트 사이로 어느 지역의 풍경이 보였다. 대지 위에 우뚝 솟은 산이 금빛으로 물들어 곧 종말이 다가올 듯 보였다.

“이게…뭐죠?”

- 카르사 대륙입니다.

뭐? 너무 놀란 나머지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곧바로 다시 바닥을 내려다보니 익숙한 건물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코카서스 산에서부터 흘러내린 금빛이 마치 용암처럼 일대를 삼키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 마을에까지 닿진 않았지만, 무너지기까지 머지않은 듯했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자 시스템은 단숨에 쐐기를 박았다.

- 애석하게도 상상이 아니라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비춘 겁니다.

“그럴 리가요. 저런 일이 일어났다면 유피테르가 바로….”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눈을 찌르는 황금빛에 아차 싶었다. 대륙을 뒤덮은 저 금빛은 불행히도 익숙한 것이었다. 내가 시시포스에게 납치되었을 때 육안으로 봤었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설마….”

- 눈치 채셨군요.

시스템은 구름 사이로 흘러가는 세계를 지긋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 유피테르가 이성을 잃어 대륙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헤메라의 신전이 그를 붙잡고 있지만, 이대로라면 제국이 함락되기까진 시간문제입니다.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피테르가 그간 희생을 감수하며 지켜 온 세계를 스스로 멸망시키려 하고 있다니. 절망적인 소식에 머리가 아예 굴러가지 않았다. 어떻게든 되돌릴 방법이 있을 것이다.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시스템의 옷깃을 덥석 붙잡았다.

“어, 어쩌다 이렇게….”

- 아이리스 딜런.

“…네?”

- 그 소설 속 주인공이 태오 님의 역할이었습니다. 부디 책에 나온 대로 따라 주시길 바랐습니다만, 역시나 계획대로 되진 않았죠. 물론 태오 님께서 주어진 바를 충실하게 이행하셨으니 아무렴 상관없었습니다.

이윽고 시스템은 옷깃을 잡은 손을 잡아 떼어 내며 중얼거렸다.

- 단 하나, 그에 대한 감정이 사랑으로 변하는 것만큼은 막았어야 했는데….

입가에 떠오른 씁쓸한 미소는 후회하는 빛이 역력했다.

- 언젠가 유피테르가 당신의 죽음으로 인해 폭주하게 되리란 걸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둘의 사이를 가르려고 했습니다. 소설에서처럼 유피테르를 단지 조력자로 남기면 지금과 같은 최악의 경우는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부드럽게 내 손을 쥐었다가 놓은 그에게서 미련이 느껴졌다.

- …하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흘끗 올려다보니 시스템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 자못 굳어 있었다. 왠지 긴장한 듯 보이기도 했다. 만들어진 미소를 벗어 내고 처음으로 진심을 드러낸 그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당신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했으면 했거든요.

“…시스템.”

- 저도 제가 세계보다 한 인간의 행복을 우선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이내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

- 결국 그 욕심이 전부를 망쳐 버렸으니 변명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제라도 세계를 구하기 위해선…. 유피테르를 해방하기 위해선 당신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지워 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내가 그와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저쪽 세계로 돌아간다면, 나는 제2의 프로메테우스가 되고 만다. 진정 유피테르를 위한다면 그에게서 나를 지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선뜻 그리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느 한 쪽도 고르지 못하고 괴로운 고민에 잠겨있자 시스템이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 걱정 마십쇼. 태오 님의 기억도 지워 드리겠습니다.

“제…기억을요?”

- 그저 긴 꿈을 꾼 것뿐입니다. 무사히 현대로 돌아간다면 원하는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함께 지식을 나눌 동료도, 존경할 만한 교수도, 좋은 일자리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꿈에 그리던 삶이다. 훌륭한 연구원 동료와 교수, 가슴이 뛰는 연구, 인생을 바칠 수 있는 직장을 죽기 전까지도 계속 바라왔었다. 저쪽 세계에서 있었던 기억을 전부 잊어버린다면 앞으로 마냥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엔 내가 살아갈 이유가 없다.

“그래봤자 유피테르가 없는데 무슨 소용이죠?”

잊고 싶지 않다. 세계가 나로 인해 망해 가는 걸 지켜보긴 싫지만, 유피테르와 소중한 친구들을 더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훨씬 괴로웠다.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져 서러운 눈물이 쉴 새 없이 뺨을 타고 흘렀다.

“인사도 못하고 왔어요. 이번 일이 끝나면 와인을 마시자고, 나중에 여행을 가자고… 그렇게 말하고 왔는데….”

툭, 툭. 떨어지는 눈물방울 아래로 금빛으로 뒤덮인 산이 보였다. 저곳에 유피테르가 있겠지.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린 나를 끌어안고 얼마나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내 죽음은 당신의 탓이 아니라고, 나는 다른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 거라고 말해야 하는데….

어떻게 한 번이라도 이야기할 수는 없는 걸까. 하다못해 떠나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다. 끝내 자존심 따위 던져 버리고 시스템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당황한 시스템이 곧바로 내 팔을 잡고 일으키려고 했지만, 고집스럽게도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인상을 한껏 찌푸린 시스템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를 그 세계로 돌려보내는 것쯤은 시스템에겐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시스템의 팔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간절히 빌었다. 곤란한 듯 일그러진 입술이 당장이라도 안 된다고 말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의 말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다시금 간청했다.

“뭐든 할게요. 다시 이용당한다고 해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보게 해 주세요.”

- 저보고 ‘그 분’을 배반하라는 겁니까?

“마지막 인사만 하고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갈게요.”

- 하지만….

“시스템.”

울음이 섞인 목소리에 시스템은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행복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래서 세계가 뒤틀릴 걸 알면서도 유피테르와의 관계를 막지 않았다. 그러니 시스템에게 아직 일말의 마음이 남아있기를 빌며 격양된 목소리로 물었다.

“매번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했잖아요.”

- …예.

“진정으로 날 생각해 준 적이 있긴 해요?”

눈을 똑바로 바라보아도 시스템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서 눈높이를 맞추었다. 천천히 벌어지는 입술 새로 높낮이 없는 평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매 순간.

그래서 그게 시스템의 유일한 진심임을 깨달았다.

- 단 한시도 빼놓지 않고 태오 님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럼 이번만….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그 분’이 아닌 나를 위해 움직여 줘요.

말도 안 되는 부탁임을 안다. 고작 나라는 인간을 위해 창조주를 배반하라니 어불성설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나를 도울 사람은 시스템뿐이었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붉게 빛나는 눈동자가 심연에 빠진 듯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시스템이 고민하는 사이에도 초조함은 점점 커져 저절로 그의 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윽고 시스템은 결심을 끝냈는지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왠지 거절당할 것 같아 처절하게 그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잠깐만요. 제, 제가 뭐라도 할게요.”

그럼에도 내 손을 가차 없이 밀어낸 시스템은 이내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 뒤쪽으로 계속 걸어가다 보면 하얀색 문이 나올 겁니다.

“시스템…?”

- 그 문을 열고 나가십시오.

허락…해 준 건가? 뜻밖의 말에 멍하니 있기만 하자 시스템은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 제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어서 가세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닥을 짚고 벌떡 일어났다. 무너지는 아스팔트에도 아랑곳 않고 앞만 보고 뛰어갔다. 얼마나 달렸을까.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로 새하얀 문이 보였다. 유피테르의 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마침내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 순간 등 뒤로 나직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 모든 일이 끝나거든 제 이름을 부르십시오. 모시러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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