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2 (282/305)

#282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축축 처지는 느낌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죽으면 솜털처럼 가벼워지는 게 아니었나? 몽롱한 기분에 취해 있는데, 저 멀리서 희미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그러……했잖아!”

점차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뒤섞이더니 마치 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듯 시끌벅적해졌다. 심지어 아이의 울음소리 뒤로 익숙한 음악이 들려왔다. 옆 랩실 동기가 죽고 못 살던 아이돌의 타이틀곡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꿈이지?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져 비틀거리는데, 이번엔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자동차 매연 냄새였다. 어떤 특정한 향을 맡으면 과거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고 하던가.

“말도… 안 돼.”

탁한 공기에 잠시 잊고 있던 풍경이 떠올랐다. 네온사인과 높은 건물들, 그리고 도로 위에 뒤엉킨 자동차들. 이윽고 눈을 뜨니 머릿속에 있던 모습과 똑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무려 신입생 시절부터 족히 6년을 썩어 온 대학가 한복판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헤메라 신전에서 쓰러진 내가 갑자기 원래의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구경하고 가세요! 세일 중입니다~”

“응, 엄마. 나 마트 앞이야.”

“선배님! 여기예요!”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무서우리만치 내가 죽기 전과 똑같았다. 계절도 유행도 변하지 않았다. 마치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것처럼 전부 그대로였다. 꿈…이겠지? 책 속으로 넘어간 후로 한 번도 현대의 꿈을 꾼 적은 없기에 이 상황이 당혹스럽기만 했다.

그때 내 옆에 서있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아오, 팀플 제대로 조졌어.”

이따금씩 내게 과제를 제출하러 오던 학부생들이었다. 종종 복도에서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으니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먼저 말을 걸려다가 문득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이게 꿈이 아니라면 어떡하지? 그들이 내 질문에 태연하게 대답한다면, 더 이상 현실을 부정할 여지도 없다. 그건 싫다. 아니, 말이 안 된다. 내가 현대로 돌아올 방법 따윈 없으니까.

그 사이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왜 또?”

“발표하기로 한 새끼가 갑자기 웬 감기로 못 나온다잖아.”

“엥? 지난주에는 장염이라고 하지 않았냐?”

“아, 내말이. 아무튼 그 새끼 때문에 학점 좆 됐어.”

사람이 많아서 못 본 걸까? 그들은 나를 그냥 지나쳐 횡단보도 앞에 섰다. 왠지 신경이 쓰여 적당히 떨어진 자리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들의 입에서 내 이름이 튀어나왔다.

“조교님한테 사정을 말해 보는 건?”

“아, 태오 형?”

“어. 착하잖아.”

“글쎄다. 조교가 무슨 힘이 있겠냐.”

대화를 들으면 들을수록 꿈이 아닌 것 같단 확신만 들었다. 정말로…. 만에 하나 이게 현실이라면 어떻게 멀쩡한 거지? 분명 그때 트럭에 치였는데 쓸린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다.

뭔가 이상하다. 혹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을까 그들의 뒤를 밟았다. 이윽고 신호가 바뀌어 횡단보도에 오르는 순간 귀를 찌르는 듯한 경적소리가 울렸다. 빠앙-! 옆을 휙 돌아보니 트럭의 전조등 빛이 내 눈을 쏘았다.

내가 죽었던 그날 일이 되풀이되려 하고 있었다. 경직되어 굳어 있던 그때였다.

“…어?”

맹렬하게 달려들던 트럭이 갑자기 멈췄다. 그뿐이 아니었다. 길을 걷던 행인들은 물론이고 가게에서 흘러나오던 음악, 심지어 하늘에 날아가는 새까지도 우뚝 멎어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다급히 스마트폰을 꺼내어 시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나 1분이 지나도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정말로 트럭에 치이기 직전 시간이 멈춘 것이다.

“이게… 뭐야?”

일순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시끄런 도시의 소음이 모두 사라져 작은 상자 안에 갇힌 듯했다. 비현실적인 상황에 식은땀이 맺힌 이마를 닦아 내는데, 불쑥 손이 다가왔다.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선혈처럼 붉게 빛나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칼에 찔려 죽어가는 나를 싸늘하게 관망하던 그 눈이었다.

- 뭘 그리 두려워하십니까.

시스템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 꼭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이유 모를 공포에 잠겨 저절로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네가 왜… 여기 있어?”

- 있으면 안 됩니까?

“그걸 말이라고 해?”

이곳이 현실이든 꿈이든 시스템이 나오는 건 비정상적이다. 게다가 모든 것이 멈춘 이곳에서 유유자적 움직이는 그는 도무지 평범한 존재로는 보이지 않았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겨우 입을 떼었다.

“너는… 누구지?”

시스템. 그는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사실을 아는 유일의 존재이다. 매번 내가 위험할 때나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나타나서 도와주곤 했다. 그렇다한들 오케아노스의 일부와 결합되기 전엔 단순히 인공지능에 불과했다.

- 늘 태오 님의 곁을 지킨 시스템이잖습니까.

어느 순간 그마저도 믿지 못했지만.

물론 처음부터 그의 정체를 마냥 믿은 건 아니다. 스마트폰을 쥐고 죽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 머릿속에 인공지능이 들어온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 있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납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직 나만 알고 있는 비밀까지 전부 알고 있었으니까.

- 오랜만에 오시니 어떻습니까.

“…….”

- 비록 그날과는 조금 다르지만, 나름 열심히 재연해 봤는데.

시스템은 뒷짐을 진 채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화가가 전시회에서 제 아이와도 같은 작품을 둘러보는 것처럼 애틋했다. 다행히 내가 알고 있는 시스템의 얼굴이었다. 그 덕분에 약간은 긴장이 풀려 바닥을 짚고 일어설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시스템이 도와주려는 듯 손을 내밀었지만, 못 본 척 무시하며 홀로 일어나 물었다.

“하나만 묻자.”

- 편히 말씀하시죠.

“여기… 꿈이야, 현실이야?”

시스템은 말없이 내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조차 알지 못하는 무의식까지 샅샅이 파헤칠 것만 같았다. 우아하면서도 강렬한 눈빛에 압도되어 뻣뻣하게 굳어 있으니, 시스템은 긴장을 풀라는 듯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 현실은 아닙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가 무섭게 그가 말을 덧붙였다.

- 물론, 꿈도 아니죠.

“그럼 뭔데?”

- 차원의 틈새. …오직 선택받은 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입니다.

차원의 틈이라고? 감이 오지 않아 인상을 찌푸려도 시스템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슬쩍 올라가는 눈썹을 보아하니 어차피 내가 알아듣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듯했다. 이윽고 내 옆을 스쳐지나간 시스템은 트럭의 보닛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 전 아직도 태오 님이 차에 치이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이쪽을 흘긋 돌아보는 얼굴엔 온화한 미소가 그득했다.

- 바로 그날 이후 당신의 모험이 시작됐으니까.

“그걸 전부 보고 있었어?”

- 물론입니다. 트럭에 치이는 모습을 보곤 아차 싶었죠. 생각했던 것보다 꽤 세게 치였더군요. 그 덕분에 ‘저쪽’으로 넘기기는 수월했지만, 아프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시스템은 은근한 미소와 함께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굳이 말하자면 사과할 일도 아니었다.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의식을 잃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사고를 당한 후에 눈을 뜨니 웬 숲 한가운데 있었다. 그날부로 어떻게 책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는데, 시스템의 말을 들으니 더욱 아리송해졌다.

‘저쪽’으로 넘긴다니. 그 말은 마치 시스템이 일부러 내 죽음을 계획한 것 같지 않은가.

“이젠 말해줘. …네 진짜 정체가 뭔지.”

- 당신의 모험을 돕는 시스템입니다.

“거짓말.”

- 지금 들고 계신 그 스마트폰 안에 있는 존재였죠.

“헛소리 좀 작작해! 내가 또 속을 것 같아?”

불쑥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시스템을 향해 스마트폰을 던졌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 닿기 직전 스마트폰은 산산조각 나더니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 와중에도 여유를 잃지 않은 시스템은 뒷짐을 진 채 나긋한 투로 말했다.

- 이런, 화가 많이 나신 것 같군요.

“너 같으면 안 나겠어? 그러니까 말해.”

- 현명한 태오 님이라면 제가 누군지 충분히 눈치채셨을 텐데요.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을 보니 불현듯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도 지금처럼 시스템의 정체에 대해서 추궁한 적이 있었다. 헤메라 신전 기도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였나. 내가 모르는 진실을 알려달라고 부탁하자 시스템은 의미심장한 대답을 했다.

‘시지프에게 잡혔을 때처럼 간절히 기도해 보시면 어떠십니까.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그 자가 태오 님께서 궁금해 하는 답을 알려줄지.’

‘갑자기 누구한테 기도하라는 거야?’

‘이 세계의 유일한 신에게 말입니다.’

단지 그 상황을 피하기 위한 궤설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카르사 제국에 신이 몇 명인데 그딴 소리를 하는 거냐며 화를 냈었다. 그러자 시스템은 퍽 진지하게 말했었다.

‘그런 염원으로 만들어진 인공물 말고, 차원마저 초월하는 진정한 신 말입니다.’

염원으로 만들어진 인공물이라. 다시금 곱씹어 보니 시스템은 역시 진실을 알고 있었다. 카르사 제국의 열두 신이 허황된 존재라는 걸. 하지만 지금 중요한 부분은 그게 아니었다.

‘누가 당신을 이 세계에 데려왔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정말로 차원을 초월하는 신이 존재한단 말인가.

아주 오랫동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제국의 크나큰 음모를 좇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다른 문제 따위 뒷전이었다. 그런데 이젠 오래도록 나를 괴롭힌 난제의 답을 알 것도 같았다.

“너. …아니, 당신이었구나.”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조종하듯 나도 누군가의 체스 말이 아닐까 하고.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가는 곳엔 항상 사건이 일어났고, 적재적소에 필요한 조력자가 나타났다. 게다가 평범한 인간이라면 마땅히 죽어야할 순간에 몇 번이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래서 어떤 목적을 위해 이용당하고 있다는 상상을 하긴 했지만…. 그게 사실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

허탈한 기분에 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일그러진 얼굴만큼이나 복잡한 감정이 숨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앞에 펼쳐진 세상이 달리 보여 이대로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쓸어내리며 토해 내듯 말했다.

“나를 책 속으로 보낸 존재가 당신이었어요?”

- 저는 단지 그분의 지시를 따랐을 뿐입니다.

“그분이라니…. 그럼 당신은 신의 사자라도 되나 보죠?”

설마 하고 물었건만 시스템은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긍정의 뜻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또다시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래서 그렇게 모든 걸 알고 있었구나. 나에 대한 정보도, 앞으로의 일도,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도. 이제야 시스템이 어떻게 매번 나를 절묘하게 도울 수 있었는지 깨달았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눈을 끔뻑이다가 불현듯 떠오른 의문을 꺼냈다.

“그런데 그분께선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를 택하신 거죠?”

나보다 월등한 사람을 택했다면 훨씬 편했을 테다. 자고로 영웅이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비범하지 않은가. 그에 비하면 나는 한없이 평범한 인간이다. 일부러 비효율적인 선택을 한 게 이해가 되지 않다며 묻자 시스템은 선뜻 입을 열었다.

- 구원자는 반드시 ‘마물을 사랑하는 인간’일 것.

“그게 무슨….”

- 그 조건에 부합하는 자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세계를 돌아다녔는지 모릅니다.

이내 천천히 다가온 시스템은 부드러운 손길로 내 뺨을 감싸며 속삭였다.

- 그리고 마침내 찾았죠. 유 태오. 당신이라는 인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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