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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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그날은 유독 날씨가 좋았다.

“다녀오세요!”

언제나 그렇듯 나를 배웅해 주는 그 다정한 미소도.

“아, 맞다. 유피테르.”

꼬박꼬박 이름을 불러주는 그 목소리도.

“괜찮으면 이따가 일 끝나고 와인 한잔해요.”

“그래. 최대한 빨리 돌아오마.”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매번 이 행복이 언제 사라질지 몰라 초조해하던 태오도 오늘만큼은 불안한 기색이 없었다. 아무래도 밤낮없이 그를 괴롭히던 사건이 끝나서겠지. 그래서일까. 소녀에게 선물한다던 재스민 꽃다발을 들고 있는 태오는 어느 봄날의 꽃보다 빛나고 있었다.

이따 보자는 인사를 끝으로 태자가 알려 준 마을로 향했다. 리리오페 호수의 서쪽에 위치한 어느 시골마을이었다. 다행히 피해가 크진 않았지만, 곳곳에 외벽이 무너져 쓰러진 잔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얼마나 되돌려주어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훅,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아스레인 백작님?”

무너진 건물에서 나온 사내가 설마 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치렁치렁한 사제의 정복보다 단정한 옷차림을 보아하니 황실 소속 마법사인 듯했다. 마법사는 나를 아주 잘 아는 듯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태자 전하께서 말씀하신 지원군이 백작님이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자네는?”

“아, 이 마을의 복구 작업을 맡은 담당자입니다.”

함께 일할 수 있어 영광이라며 악수를 권하는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예전이라면 그냥 무시했겠지만 요샌 그럴 수 없었다. 왠지 태오가 어디선가 지켜보다가 “인사를 무시하면 어떡해요.”하고 타이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지못해 그의 손을 스치듯 잡았다가 놓으며 바로 일 얘기로 넘어갔다.

“여기부터 시작하면 되나?”

“예! 자잘한 건 저희가 복구를 마쳤으니, 이제 부서진 외벽만 처리하면 됩니다.”

“그럼 제일 피해가 심각한 곳부터 안내해 주게.”

그 말에 마법사는 마을 곳곳에 무너진 건물들을 하나씩 보여 주었다. 대부분 외벽이 무너진 정도였기에 큰 힘을 들일 필요도 없었다. 손쉽게 건물을 복구해 나가니 담당자는 연신 탄성을 질렀다.

“대단해….”

그게 묘하게 신경 쓰여서 부디 입 좀 다물어 달라고 말하려다가 이번에도 참았다. 이유는 역시나 태오였다. 그래 봤자 태오는 내가 그 곁에 없는 동안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말해 주면 기뻐하려나?

햇살처럼 웃는 얼굴이 상상되어 픽 웃다가 문득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곧바로 옆을 돌아보니 건물 사이에 드리운 그림자가 짙어져 있었다. 마법까지 멈추고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있자 마법사가 의아한 투로 물었다.

“거기 뭐라도 있나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네. 이쪽은 혼자서도 충분하니 이만 가 보게.”

“아… 넵!”

마법사는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표정으로 서성거리다가 이내 떠났다. 인기척이 사라지자마자 어두운 길목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백작님. 대단하세요~]

기다렸다는 듯 그림자에서 걸어 나오는 존재는 예상대로 닉스였다.

“네가 왜 여기 있지?”

[오해하지 마. 쿠네 숲으로 가던 길에 잠깐 와 본 거니까.]

히페리온이 부르기라도 한 건가. 자세한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요즘 들어 마물들이 부쩍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이 늘어난 듯했다. 오케아노스나 이카로스도 그렇고. 아무렴 서로 생사도 모르고 지내던 그들이 다시 가까워졌다니 좋은 일이었다.

옆에서 깐죽거리는 닉스를 무시하다가 불현듯 궁금증이 일었다.

“닉스. 혹시 르브하에 가 봤나?”

[르브하?]

뭔가 켕기는 게 있는지 눈을 뒤룩뒤룩 굴리던 닉스는 뒤늦게 시치미를 뗐다.

[아니. 영감이 우리보고 웬만해선 카르사 대륙을 벗어나지 말라면서.]

“그래서 네가 순순히 내 명령을 따랐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원체 순종적인 이카로스나 히페리온이라면 몰라도 천하의 닉스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빤히 쳐다보니 닉스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전에… 몇 번 다녀오긴 했어. 뭐랄까. 탐사 차?]

“네가 그럼 그렇지.”

이제 숨기긴 글렀다고 생각했는지 닉스는 도리어 뻔뻔한 태도로 말을 바꿨다.

[르브하는 내가 잘 알지. 근데 왜?]

“복구 작업이 끝나면 태오와 가기로 했거든.”

[…뭐?]

자신만만하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지는 모습은 나름 장관이었다.

[왜?]

“왜냐니. 여행 말고 또 있겠나.”

[그럼 나는?]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무심하게 넘겨버리자 닉스는 대놓고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한동안 긴 손톱으로 턱을 어루만지던 그는 좋은 생각이 떠오르기라도 한 듯 혼자 웃음을 흘렸다. 의미심장한 표정에 또 무슨 장난을 칠지 불안하기도 잠시, 닉스는 손뼉을 마주치며 말했다.

[어쩔 수 없네. 나도 따라가야지.]

“…웃기려고 던진 농이라면 실패한 것 같다만.”

[미안해서 어쩌지? 농담 아닌데.]

적당히 부러워하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괜히 말했네. 당최 종잡을 수 없는 그는 내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 한숨이 깊어질수록 닉스의 입꼬리는 점점 길게 올라갔다.

[영감이 태오한테 괜한 짓을 할지 모르니 걱정돼서라도 따라가야겠어.]

“괜한 짓이라니?”

[이를 테면 오르커스 황야에서 내가 봤던 거라든가.]

오르커스란 말에 폐허에서 있었던 일이 단번에 떠올랐다. 한창 무르익는 분위기에 닉스가 기척도 없이 나타나는 바람에 방해받았었지. 그날부로 태오는 인기척이 조금이라도 느껴진다 싶으면 은근히 내게 거리를 두게 되었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내 걸 내가 만지겠다는데 뭐가 문젠가.”

[보호자로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언제부터 태오의 보호자가 내가 아니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닉스는 제법 진지해 보였다. 그 아이를 아껴 주는 마음은 고맙다만…. 아무래도 태오 주변에 있는 이들은 전부 거슬린단 말이지.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쳐다보았으나 닉스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어차피 허락은 태오한테 받을 거야. 누구씨랑은 다르게 착하니까 같이 가자고 할 걸?]

“나참….”

맞는 말이라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심지어 태오가 ‘닉스와 함께 가고 싶다’라고 말하면 나도 기꺼이 응할 테니까. 결국 내가 태오에게 한없이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닉스를 이길 방도는 없었다.

뭐, 아무렴 좋다. 이토록 달콤한 약점이 또 있을까.

[그래서 헤메라는 지금 어디 있어?]

“캄페 산에 있는 마을로 갔네.”

[엥? 거긴 왜.]

“그걸 네가 알아서 뭐하려고 그러나.”

[뭐하긴. 얼른 쿠네 숲에 들렸다가 태오 보러 가야지.]

반짝거리는 눈을 보니 울화가 불쑥 치밀어 올랐다. 태자에게 듣기론 복구가 필요한 마을이 이곳뿐만이 아니었다. 당장 닉스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이미 벌인 일을 끝내는 게 우선이었다.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리자 닉스가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비아냥댔다.

[부럽지?]

“하아….”

[그러니까 왜 인간들 일까지 돕고 앉았어.]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물론 데우스와 나로 인해 무고한 인간들까지 휘말렸다는 데에 미안함이 들긴 했다. 태오에게도 그래서 마을 복구를 돕는 거라고 말했었고. 하지만 궁극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태오가….”

[어?]

“태오가 인간이니까.”

그뿐이었다. 간결하고도 명료한 대답에 닉스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이내 닉스는 졌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건물 사이로 돌아갔다. 뒷모습을 가만 바라보는데 닉스가 별안간 걸음을 멈추고 나를 불렀다.

[유피테르.]

그의 입에서 유피테르란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다. 영 낯선 느낌에 대답은 않고 있자 닉스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 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이었다.

[행복해?]

“뭐?”

[행복하냐고, 지금.]

단순한 만큼 어려운 질문이었다. 나뿐아니라 어느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영겁의 세월을 살면서 감정이 무뎌졌지만, 이어지는 나날은 분명 행복하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언젠가 시들 꽃을 보며 아름답다고 말하듯 반드시 사라질 이 순간을 행복하다고 평해도 괜찮겠지.

“보면 모르겠나.”

복잡 미묘한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어 엷은 미소만 띠었다. 그러자 심각한 고민을 끌어안고 있던 얼굴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아니, 평소보다도 훨씬 후련해 보였다.

[괜히 물어봤네~ 배 아프니까 얼른 가야겠다.]

“그래. 내가 가기 전까지 잘 놀고 있게.”

이젠 일로 돌아갈 시간이 됐다. 그림자로 사라질 닉스를 뒤로하고 다시금 복구 작업에 임했다. 벽의 잔해를 하나둘씩 붙여 나가다가 문득 아직도 제자리에 남아 있는 닉스를 발견했다.

“왜 아직도 안 가고 있나.”

그늘 진 골목에 서있는 닉스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닉스?”

왠지 수상한 낌새를 느끼곤 곧장 그에게로 다가갔다. 어깨를 잡으며 무슨 일이냐고 묻자 닉스는 연방 똑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팔찌가….]

갑자기 그의 상태가 이상해졌다. 두려움이라곤 모르는 닉스가 어깨를 파르르 떨고 있었다. 이윽고 닉스의 손바닥에 들려있는 물건을 발견했다. 거미줄을 촘촘히 엮은 끈이 억지로 당긴 듯 끊어져있었다.

“그게 뭐지?”

[…헤메라한테 선물했던 거야….]

“태오한테?”

완전히 패닉에 빠진 닉스는 띄엄띄엄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 아이가 위험하면 거미줄이 진동해서 바로 알 수 있어. 그런데….]

끊어졌다.

일순 소름끼치는 오한이 엄습해 왔다.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당장 캄페 산으로 향했다. 먼저 소녀의 집으로 가 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하고 언덕을 올라가니 헤메라 신전 앞에 불길한 기운이 맴돌았다. 어느새 따라온 닉스가 신전 기둥 위로 검은 연기를 뻗어 무언가를 가져왔다.

그건 마력 제어장치였다.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지…?]

불길한 생각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때 예배당에서 작은 체구를 가진 누군가 튀어나왔다. 공포에 질린 소녀, 헤스티아는 닉스를 발견하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달려왔다.

“아저씨!”

“돌멩아. 무슨 일이야?”

“천사님이…. 흑, 천사님이….”

울음에 섞여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듣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신전으로 들어가자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부디 그 피가 태오의 것이 아니기를 빌고 또 빌었다. 예배당 문을 여니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몸 군데군데가 뜯겨 나간 병사의 시신이었다. 안심했다. 태오가 아니라서.

그러나 다음 순간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그누스?”

검은 늑대가 바닥에 엎드려 마치 아이처럼 낑낑 울고 있었다. 대체 뭐가 그리 서러운 걸까. 성큼성큼 다가가니 기둥 뒤에 누워 있는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누군지 몰랐다. 아니, 알고도 믿고 싶지 않았다.

바닥을 채운 흥건한 피. 그리고 피가 말라붙어 빛을 잃은 금색 귀걸이.

“…태…오?”

곧바로 그에게 달려가 상태를 확인할 새도 없이 치유 마법을 썼다. 칼에 베이고 찔린 상처는 말끔하게 나았으나 그게 끝이었다. 기력을 회복시키려 쏟아 부은 마력이 흡수되지 못하고 헛돌았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이성은 자꾸만 답을 내리려 했다.

내가 마법으로 할 수 없는 일은 오직 하나-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것뿐이라고.

“아니야….”

조심스럽게 그를 끌어안아 가슴에 귀를 대어 보았다. 항상 내 곁에 있을 때면 가쁘게 뛰던 심장이 조용했다. 홍조를 띠던 얼굴도, 복숭아 빛 입술도 색깔을 전부 빼앗겨 창백하기 짝이 없었다. 잘게 떨리는 손으로 피에 젖은 뺨에 손을 대어 보았다. 아직 온기는 남아 있었다. 그러나 겨울에 해가 지듯 빠르게 식어 가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눈 좀 떠 보게.”

이미 숨이 끊어졌다는 걸.

“태오….”

단지 믿지 않을 뿐이다.

“같이 르브하에 가기로 하지 않았나.”

의식할 새도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툭, 툭. 차가운 대지 위에 뜻하지 않은 가랑비가 내렸다. 혹시라도 숨이 돌아올까 연신 마력을 쏟아 붓고 온기를 나눠 주었다. 하지만 굳게 감긴 눈꺼풀은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헤메라…?]

등 뒤에서 충격에 떨리는 닉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짓말….]

그래. 거짓말이다. 전부, 꿈이다. 이따금씩 태오가 꿈에 나오지 않았나. 그러니 모두 악몽일 뿐이다. 손에 닿는 익숙한 감촉도, 피 냄새 끝자락에 묻어나는 꽃향기도, 축 늘어진 그의 모습도 전부…… 내가 만들어낸 끔찍한 환상이다.

뿌옇게 번져 가는 시야에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즈음 문 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곧장 마법으로 예배당을 봉쇄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피 묻은 손으로 다급하게 후드를 쓰는 사람을 발견했다.

“너는….”

“아, 아스레인 백작!”

도망치다가 실패해 당황한 노인은 다름 아닌 미노스 황제였다. 왜 병사가 있나 했더니 황제의 친위대였나. 그 이상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어 넋 놓고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황제는 시키지도 않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 말을 들어 보게. 전부 저 놈이 스스로 자초한 짓이야.”

“뭐…?”

“감히 이 황제의 말을…. 아니, 신의 계시를 따르지 않았으니 벌을 받아야지.”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제야 죄를 부정하며 내젓는 손에 묻은 핏자국이 선명히 보였다. 하다못해 호위병이 저지른 짓인 줄 알았건만, 진상은 그게 아니었나.

“태오를 해한 게, 네 놈인가?”

메말라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나갔다. 분명 들었을 텐데도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해!!!]

닉스가 몰아붙이고 나서야 황제는 겁에 질려 실토했다.

“실수였네. 그건, 실수였어.”

실수? 고작 한다는 변명이 실수라는 건가.

무거운 침묵이 마치 늪처럼 가라앉았다. 발버둥치지도 않았는데 늪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태오를 품에 안고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화조차 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이름을 부르면 깨어날 것 같은데, “언제 왔어요?” 하며 배시시 웃을 것 같은데.

“겨, 경은 이해하지 않나? 더 나은 세계를 만들고 싶다는 짐의 원대한 꿈을…!”

그 순간 머리부터 피가 싸늘하게 식어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하, …더 나은 세계라….”

제국에게 일말의 복수심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뿔을 되찾고 나서 혈통을 아예 끊어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참았다. 내 인생을 살라며, 절실하게 나의 행복을 빌어 주는 그 마음을 저버릴 수가 없었으니까.

‘마지막 아스레인이 될 거예요.’

처음으로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이 생겨 기뻤다. 그래서 처음으로 나의 진실을 말했고, 그는 그것마저 기꺼이 품어 주었다. 내가 무너질 때마다 그 작은 몸으로 곁을 지키며 앞으로 나아가자고 말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이 길고도 지겨운 일생에 처음으로 사랑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젠 전부 끝났다.

“태오.”

진정한 자유를 얻고 살아갈 의미를 잃었다.

“…태오.”

결국 이럴 운명이었다면 나는 무얼 위해 지금껏 달려왔나. 최후를 알았더라면 애초에 과거를 찾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평생 제국의 개로 살지언정 그와의 평범한 일상을 누렸을 것이다. 그리하여 태오가 필멸자로서 죽음을 맞이하면, 함께 했던 기억을 영원토록 양분 삼아 이 지겨운 삶을 이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해는 더 이상 뜨지 않는다.

“…빛이 없는 세계 따위…….”

오직 지독한 어둠만이 앞을 가렸다.

[멸망해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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