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0 (280/305)

#280

긴가민가하며 이름을 부르자 은발의 사내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머리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얇은 베일 속 붉게 빛나는 눈동자와 마주치자마자 확신했다. 그는 정말로 시스템이었다.

“얼마만이더라. 그간 안 보여서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어.”

나름 반갑게 인사했지만 시스템은 아무 말도 없었다. 제단 앞에 서서 나를 관망하듯 바라볼 뿐이었다.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던 시스템이 이상하리만치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라도 있는 걸까.

조심스럽게 그에게로 한 걸음 내디디며 물었다.

“왜 그래? 네가 말하던 내 모험이 끝나서 기뻐할 줄 알았는데.”

시스템은 늘 모험에 대해 언급했다. 애초에 그가 존재하는 이유가 ‘나의 모험을 돕기 위해서’이니 당연한 행동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시스템의 목적이 나로 하여금 세계를 구하는 것임을 깨달았고, 프로메테우스를 제거하는 순간 나의 모험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마침내 목적을 이뤘으니 지금쯤 나보다도 더 행복해할 줄 알았다. 그런데 잘못 생각한 건가. 무심한 얼굴엔 기쁨은 물론이거니와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 아무렴 상관없어. 이제 자유롭게 살 거니까.”

나의 할일은 이로써 끝났고, 더 바랄 것도 이룰 것도 없었다. 할 만큼 했기에 아쉬움도 남지 않았다. 오랜만에 후련한 기분을 느끼며 혼잣말을 길게 늘여놓았다.

“앞으로 제국이 어떻게 될지 걱정했었는데, 칼리온을 보니 안심해도 될 것 같아. 그래서 유피테르랑 조만간 옆 나라로 여행 가기로 했어. 부럽지?”

장난스럽게 웃어 봤지만 딱딱한 분위기는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 한동안 나를 응시하던 시스템이 갑자기 제단에서 내려왔다. 햇빛을 등진 그의 얼굴은 유독 창백해 보였다. 이내 베일을 걷어 낸 시스템은 오른손을 가슴에 얹으며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대뜸 정중한 인사를 올리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래?”

눈치를 보며 물었지만 시스템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은 묘하게 슬픔으로 젖어 있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던 그때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장 뒤돌아보니 허름한 로브를 입은 사람이 예배당으로 들어와 있었다. 의복을 보아하니 사제는 아닌 것 같고… 그럼 신도인가? 자리를 비켜 줘야겠단 생각에 조용히 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노쇠한 목소리가 예배당을 채웠다.

“역시 올 줄 알았네.”

귀에 익은 음성에 당황하기도 잠시, 그 신도가 후드를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당신은….”

사건 직후 실종되었던 미노스 황제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지? 너무 놀란 나머지 품에 안고 있던 꽃다발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한껏 경직된 내 표정을 본 황제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어떻게… 여기 있는 거죠?”

“신께서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셨으니까.”

“그럴 리가 없어요. 당신이 믿고 따르던 신은 이제 이 세상에 없어요.”

프로메테우스는 죽었다. 코어가 산산조각 나서 마지막 기억 파편과 유해만 남기고 소멸됐단 말이다. 그런데 아직도 신의 계시를 운운하니 완전히 미쳤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는지 황제는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마. 더는 신의 계획을 방해하지 마라.”

황제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려야 한다. 당장 마석 귀걸이를 통해 유피테르에게 말을 전하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마력이 이어지지 않았다. 수상한 낌새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 황제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발버둥 쳐 봤자 소용없다. 이미 손을 써 뒀으니까.”

설마 마력 차단 장치를 쓴 건가? 처음부터 내가 헤메라 신전으로 올 걸 알고 미리 판을 짜 둔 것 같다. 이러면 유피테르에게 알릴 방법이 없다. 일단 황제의 페이스에 넘어가지 않으려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그만하시죠. 이건 무의미한 짓이에요.”

“너야말로 회개하고 다신 나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서약해라.”

“이제와 서약한들 무슨 소용이죠?”

“이 몸이 살아있는 한, 신의 계획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백발이 성한 노인의 눈에 광기가 서렸다. 프로메테우스가 사라지면서 사람들을 지배하던 신력까지 전부 사라졌을 줄 알았다. 하지만 스스로가 신에게 선택받은 자라는 망상은 치료할 수 없었나 보다.

“신께선 내게 모든 걸 맡기셨다. 그러니 그릇된 세계를 바로잡고 진정 인간을 위한 제국을 만들 것이다!”

추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하늘을 향했다. 환상을 좇듯 두리번거리는 눈길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사이 차분히 이곳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마력이 차단되었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수중에 생명력이 충만한 꽃이 있다는 것. 그리고 상대는 노인 하나라는 사실이다.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그리 안심하던 순간 예배당으로 건장한 호위병 다섯이 들어왔다.

“폐하. 명령하신 대로 잡아 왔습니다.”

“잘했다.”

뭘 잡아왔다는 거지? 설마…. 불안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던 그때 가장 뒤에 있던 병사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 우악스러운 손에 잡혀있는 작은 아이를 발견하곤 기함을 토했다.

“헤스티아!”

공포에 질린 눈이 나를 보자마자 눈물로 차올랐다. 얼굴의 대부분이 병사의 손에 가려져 있었지만, 두려움으로 일그러진 표정만은 생생하게 보였다. 설마 헤스티아를 인질로 잡을 줄은 몰랐기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한순간에 평정을 잃자 황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다시피 목숨은 붙어 있다. 아직은 말이지.”

“저 아이와는 아무런 관련 없어요. 그러니까….”

“글쎄. 마을 소문에 의하면 저년이 너와 유독 친하다고 하던데.”

비뚤게 올라간 입꼬리가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너처럼 마물을 보호하고 있더구나. 훗날 방해물이 될 싹은 미리 제거해야지.”

내가 명령대로 따르지 않으면 죽일 생각인가. 이윽고 황제가 다가오라 손짓하자 병사가 억지로 헤스티아를 끌고 왔다. 더러운 시선으로 소녀를 훑어보던 황제는 이내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으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소중한 것을 다루듯 부드러운 손길에 빠득, 절로 이가 갈렸다.

“그 손 떼세요.”

더는 참지 못하고 말하자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모든 건 네놈에게 달렸다. 순순히 짐과 피로써 계약할 테냐.”

황제는 낡은 소매를 걷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칼리온과 유피테르가 계약을 파기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기에 저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주 잘 안다. 저 손을 잡고 맹세하는 순간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거겠지.

“아니면, 저 아이를 죽일 것이냐.”

나를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이미 승리감에 젖어 있었다.

적은 평범한 병사도 아니고 황제의 친위대다. 결코 호락호락 얕잡아 볼 상대가 아니었다. 심지어 인질까지 데리고 있다. 물론 꽃에 깃든 생명력을 바쳐 아그누스를 움직인다면 제압할 수는 있겠지만, 그 사이 헤스티아가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다.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답답하던 그때 헤스티아와 눈이 딱 마주쳤다. 여전히 겁에 질려 있었지만 나를 보고는 많이 진정한 모양이다. 헤스티아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면서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나 때문에 인질로 잡힌 건데.

“자, 선택해라.”

중후한 음성이 나를 서서히 낭떠러지로 몰았다. 하지만 놈의 기대대로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고 반드시 헤스티아를 구출하겠다. 시선을 내리자 그림자 위에 떨어져 있는 꽃다발이 보였다. 방법은 이것뿐이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그누스. 내가 황제를 붙잡는 순간 호위병을 제압해.”

그림자가 대답하듯 일렁거렸다. 이윽고 아그누스는 꽃에 있는 생명력을 빨아들이며 힘을 축적해나갔다. 혹여 황제가 빠르게 시드는 꽃을 발견할까 봐 소매를 걷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다행히 의심하지 못한 황제는 나를 지그시 쳐다보고만 있었다.

기회는 단 한 번.

“제게… 선택권이라곤 없네요.”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맹세의 조건은 뭐죠?”

바로 앞에 멈춰 서서 묻자 황제는 턱을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

“짐의 명령이 무엇이든 따른다.”

가늘게 뜬 눈이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을 들어 황제의 팔을 붙잡았다. 바로 다음 순간 어깨 너머로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렸다.

“웬 놈이냐!”

혼비백산이 된 한 가운데 그림자 늑대가 버티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마물의 등장에 호위병은 다급하게 칼을 빼들었다.

뒤늦게 마물을 발견한 황제가 소리쳤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제가 할 말이죠.”

황제가 몸을 뒤트는 순간 팔을 거세게 붙잡았다. 어딜 도망가려고. 노쇠한 그는 내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버둥거릴 뿐이었다. 그 사이 아그누스는 날렵한 몸놀림으로 호위병 다섯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었다.

도망치려거든 지금 뿐이다.

“어서 여길 빠져나가!”

곧바로 바닥에 쓰러진 헤스티아를 향해 외쳤다. 그러나 헤스티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움직일 수 없는지 바닥에서 움찔거리기만 했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황제를 따돌리고 내가 헤스티아를 업고 뛰어야겠다.

그리 결심한 순간이었다.

“윽…!”

갑자기 팔뚝에 생살을 찢는 아픔이 밀려왔다. 피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황제가 품에 숨긴 칼을 꺼내 내 팔을 그은 것이다. 극심한 통증에 황제를 붙잡기는커녕 똑바로 설 수도 없었다. 그새 내게서 벗어난 황제는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예 죽여 달라고 발악을 하는 구나.”

피가 흐르는 상처를 부여잡고 고개를 들자 예리한 칼끝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너는. 아니, 너희는 신의 세계로 갈 자격이 없다.”

그대로 내게 달려들 줄 알았건만, 황제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내 피가 묻은 칼을 들고 헤스티아에게 다가갔다. 망설임 따위 없는 뒷모습을 보자마자 직감했다. 저걸 막지 못하면 헤스티아가 죽는다.

“안 돼!!”

절체절명의 순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다고 하던가. 지금 이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는 채 황제를 향해 달려갔다. 이윽고 어깨를 붙잡으려는 순간 황제가 돌연 방향을 돌려 칼을 휘둘렀다.

푸욱- 살갗을 꿰뚫는 감촉에 그대로 숨을 멈췄다. 뻣뻣하게 굳은 고개를 억지로 숙여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첨예한 쇠붙이가 배에 박혀 있었다. 다급히 손목을 붙잡았지만, 황제는 가차 없이 칼을 뽑아 냈다. 깊은 상처에서 피가 왈칵 뿜어져 나왔다.

“천사님!!”

힘없이 쓰러지자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어서 도망치라고 말해야 하는데, 밭은 숨을 내쉬는 게 고작이었다. 찢겨나간 팔과 배에서 뜨거운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정신이 점점 아득해졌다. 급기야 환청마저 들려왔다.

‘난 너의 죽음을 봤다. 헤메라.’

어째서 프로메테우스의 마지막 신탁이 지금 떠오르는 것일까.

“흑, 제가 당장 아저씨를 불러올게요. 네?”

문득 힘겹게 바닥을 기어 내게 다가오는 헤스티아가 보였다. 늘 화사한 미소로 나를 반겨 주던 얼굴은 어느새 눈물로 얼룩져 엉망이 되어있었다. 불쌍한 아이. 나만 아니었어도 평범하게 살았을 텐데.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아그누스가 그녀를 무사히 탈출시켜 줄 것이다.

그럼 나는.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백색 우주에 빠진 듯했다. 눈이 무겁게 감겨 온다. 난, 아직 잠들고 싶지 않은데. 겨우 의식을 붙잡고 눈을 굴렸다. 그러자 처음 사람을 찔러 패닉에 빠진 황제의 뒤로 익숙한 얼굴이 스쳤다.

냉랭한 붉은 눈동자와 마주치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시스…템….”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예배당 구석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렇게 되리란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그럼 어째서 평소처럼 나를 구해 주지 않은 거지. 설마 방금 전의 그 인사는 작별의 의미였나.

결국 아무것도 물어보지도 못한 채 피를 쏟아내며, 그렇게 싸늘히 식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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