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9 (279/305)

#279

해 질 녘이 다 되어서야 유피테르는 피곤한 얼굴로 연구실에 돌아왔다. 한쪽 벽에 가득 쌓인 선물을 정리하다 말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왔어요?”

싱긋 웃으며 다가가니 유피테르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품에 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리들 할 말이 많은지 식을 끝내질 않더군.”

“하하, 졸업식이라 그랬나 봐요. 많이 지루했어요?”

“지루하기만 하면 다행이지. 향수 냄새에 후각에 마비가 오는 줄 알았네.”

왠지 유피테르에게서 인위적인 향기가 난다 했더니, 주변 귀족들의 향수 냄새가 묻었나 보다. 그게 어지간히도 싫었나. 유피테르는 그 향기를 잊으려는 듯 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떨어지지 않았다. 귓가에 닿는 숨결이 간지러워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 맞다. 선물은 적당히 정리해 뒀어요.”

“음? 굳이 자네가 정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슬슬 상자를 둘 자리가 없어보여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제야 유피테르가 고개를 들고 연구실을 둘러보았다. 꽃은 꽃대로 두고, 박스 안 내용물에 따라 정리해 두니 훨씬 깔끔했다. 유피테르도 만족스러웠는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고맙네. 괜한 수고를 끼쳤군.”

“아니에요. 그보다 선물은 전부 저택으로 옮길 거예요?”

“아니, 늘 그랬듯 처리해야지.”

고개를 젓는 모습이 퍽 단호했다.

유피테르는 언제나 선물을 받으면 그 자신이 쓰는 법이 없었다. 시들기 쉬운 생화는 온실로 옮기고, 찻잎이나 디저트는 손도 안 댄 채 인근 보호소로 보낸다. 심지어 보석이나 금화는 전부 보낸 사람에게 그대로 반송해 버렸다. 물론 선물이나 성의가 아깝긴 하지만, 아스레인은 이래야 뒤탈이 없다고 했다.

“여러모로 정계에 얽히면 피곤해지네요.”

“그러니 자네도 조심하게나. 태자와의 관계가 들키면 입장이 곤란해질 걸세.”

“어차피 이젠 단 둘이 만날 일도 없는 걸요.”

황제가 되면 더더욱 바빠질 테니, 아마 얼굴 볼 일도 손꼽을 만큼 적어질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며 그의 팔을 톡톡 두드리곤 벽 쪽으로 걸어갔다. 함께 남은 박스를 마저 정리하면서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니, 유피테르가 감회 어린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진이 벌써 졸업이라니….”

“신기하죠? 학회가 끝나면 연구실로 간대요.”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 모르겠군.”

“저도 내년이면 졸업인걸요.”

졸업이란 말에 유피테르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한테도 시간이 빠르게 느껴지는데, 영겁을 사는 유피테르에겐 오죽할까. 말없이 어깨를 으쓱이자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논문 주제를 고민하는 게 좋겠네.”

“실은 미리 생각해 둔 주제가 있어요.”

“벌써?”

또 한 번 놀라는 얼굴에 배시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바로 눈치챈 진과 달리 유피테르는 아예 모르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피테르에겐 지금껏 한 번도 귀띔한 적이 없었다. 마음 같아선 전부 비밀로 하고 결과물만 보여 주고 싶지만, 무려 지도교수에게 논문을 숨기긴 어려웠다.

“목차만 정리해서 얼른 말씀드릴게요.”

얼마나 놀랄까? 내 졸업 논문이, 그 자신에 관한 거라면. 아직은 비밀이라며 장난스럽게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엔 그간 쌓인 편지를 정리하려고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편지 봉투를 한 움큼 쥐는데, 등 뒤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별 걱정 안 하긴 한다만….”

성큼성큼 다가오던 발걸음 소리가 딱 멈췄다.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돌아보려는데, 그보다 먼저 그의 팔이 내 허리를 둘렀다. 와락 끌어당기니 속수무책으로 그의 품에 폭 안겨 버렸다. 단단한 몸이 느껴질 정도로 바짝 붙은 유피테르는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내게 숨기는 게 있다니 서운하군.”

낮게 깔린 목소리가 마치 귀를 핥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떨었다. 조용히 옆을 돌아보니 숨결이 닿는 거리에 그의 얼굴이 보였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선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말해주지 않을 건지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이 귀엽게 보인다고 하면…… 화내겠지. 응.

꾹 웃음을 참으며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전 유피테르가 쉬지 않고 일하는 게 더 서운한 걸요.”

“언제는 또 자기 때문에 일에 지장받는 게 싫다고 하지 않았나.”

“으음, 제가 그랬나요?”

능청스럽게 모르는 척 하자 유피테르마저 훗,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이슬비가 내리듯 얼굴 곳곳에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간지러워서 몸을 움찔거릴 때마다 그의 팔이 강하게 내 허리를 옥죄었다.

점점 대담해지는 손길에 입술까지 입술로 막혀 숨이 달뜨던 그때, 팔꿈치로 책상에 쌓여 있던 편지를 쳐버렸다.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에 몽롱해졌던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곧바로 유피테르의 어깨를 붙잡곤 바닥을 내려다보니 흐트러진 편지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아….”

어쩌나 싶은 순간 문득 붉은 실링 왁스로 찍힌 독수리 문장이 눈에 띠었다. 에브게니아 황가의 표식이었다. 조심스럽게 유피테르의 품에서 벗어나 그 편지부터 주워들었다. 뒷면에는 수신인만 적혀있을 뿐 황법상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황실인가요?”

편지를 내밀며 묻자 그는 선뜻 대답했다.

“칼리온에게서 온 편지네.”

“설마 황제의 소식인가요?”

유피테르는 말없이 머리를 내젓곤 지휘하듯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바닥에 흐트러져 있던 편지가 둥실 떠올라 책상 위로 올라왔다. 마법으로 난장판을 말끔하게 정리한 그는 내 손에 있던 황실의 편지를 가져가며 말했다.

“헤카테로 인해 무너진 마을을 복구해야 하는데, 마법사가 부족해서 내게 도움을 요청하더군.”

“확실히 제국엔 유피테르만 한 마법사가 없긴 하죠. 그래서 가시는 건가요?”

“복구 작업은 가능한 한 많이 도와주려고 하네. 마을이 무너진 데에는 내 책임도 있으니.”

“…또.”

또 스스로의 탓으로 돌리려고 했다.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쳐다보니 유피테르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이젠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전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도 이번 기회에 한 번 더 말해야겠다 싶어 그의 팔을 잡고선 차분하게 말했다.

“유피테르가 사람들을 도와주는 건 어디까지나 호의일 뿐이에요. 책임이 아니라고요.”

“…알겠네.”

“정말이죠?”

“그래. 조만간 그 호의를 베풀고 오지.”

표현만 바뀌었을 뿐이지만, 그래도 정정할 건 정정해야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가득 쌓인 편지를 바라보았다. 혹시 놓친 건 없나 살펴보는데 책상 한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편지가 보였다. 일부러 유피테르가 따로 빼 놓은 것 같았다.

“이건 뭐예요?”

편지 봉투에 그려진 꽃 그림이 수상쩍었다. 설마 연서인가? 분명 유피테르 모르게 전부 처리했을 텐데, 왜 못 봤지? 그리고 유피테르는 어째서 이 편지만 소중하게 둔 거지?

펼쳐보고는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커지던 그때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 그건 자네에게 온 편지이네.”

“네? 저요?”

뭐야. 유피테르에게 온 절절한 연서가 아니라고? 얼떨결에 편지를 건네받고 슬쩍 봉투를 뒤집어보았다. 그러자 봉투 끝자락에 퍽 우아한 글씨체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헤스티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게다가 왠지 여자 이름 같아서 더욱 미궁에 빠졌다. 나한테 꽃그림까지 그려 가며 편지를 보낼 여성이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 일단 편지를 뜯고 봤다.

잘못 왔을지도 모른단 걱정이 무색하게 편지 첫 문장을 보자마자 헤스티아가 누군지 알아챘다. 나를 ‘천사님’이라고 부를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아!” 하고 탄성을 내뱉자 유피테르가 자못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구지?”

“캄페 산에 사는 소녀요. 예전에 유피테르가 그 아버지를 도와줬었잖아요.”

“아…. 그런데 그 소녀가 어떻게 자네가 있는 곳을 알고 편지까지 보냈나.”

“닉스한테 제가 어디 있는지 물어봤나 봐요.”

닉스에게서 내가 무사하단 소식을 들어 편지까지 쓴 듯했다. 심지어 글씨를 모르는 헤스티아를 위해 닉스가 대신 써 줬단다. 이정도면 나보다 더 헤스티아에 대한 애정이 대단한 것 같은데, 닉스에게 물어보면 또 아니라고 둘러대겠지.

시간이 된다면 꼭 마을에 놀러와 달라는 말로 짤막한 편지가 끝났다.

“귀여워라….”

저절로 흐뭇한 미소를 그리며 소중하게 편지를 접어 봉투에 담았다. 그제야 봉투에 그려진 꽃 그림이 내가 선물한 재스민이라는 걸 알아챘다. 것도 모르고 대뜸 연서인 줄 알았다니, 왠지 헤스티아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답장할까 고민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라 냉큼 유피테르에게 물었다.

“조만간 복구 작업을 도우러 간다고 했었죠?”

“음. 아마도 이번 주 내로 갈 것 같네.”

“그럼 저는 캄페 산에 다녀올게요.”

똑같이 답장해 주기보다는 직접 방문하는 쪽이 더 좋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헤메라 신전이나 테세스의 안부가 궁금하기도 하고. 소풍가는 아이처럼 들떠있으니 유피테르가 의아하게 물었다.

“아이를 보러 가는 건가?”

“네. 제가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편지까지 써 줬으니 당연히 가야죠.”

“흐음….”

왠지 유피테르의 반응이 시원찮았다. 지금껏 내가 위험한 곳에 가지 않는 이상 말리지 않았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혹시 내게 말 못한 비밀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그의 안색을 유심히 살폈다. 뒤늦게 내 시선을 알아챈 유피테르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중얼거렸다.

“자네도 나도 주변에서 부르는 사람이 너무 많군.”

아. 그런 이유였나. 묘하게 공감이 돼서 엷은 미소만 지었다. 그 사건이 끝난 부로 아직도 단둘이 오붓하게 시간을 보낸 적이 없긴 했다. 데우스가 제국에 남기고 떠난 상처는 너무도 컸고, 그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기까지 아직 먼 듯했다. 그렇다고 나나 유피테르나 할 일은 끝났다며 망가진 마을을 나 몰라라 할 성격은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유피테르를 북돋을까 고민하다가 친구들끼리 한 얘기가 떠올랐다.

“그럼… 이번 일이 끝나면 단둘이 여행가기로 해요.”

“여행?”

“네! 일 같은 건 잠시 미뤄 두고요. 어때요?”

슬쩍 팔짱을 끼며 묻자 유피테르의 입가에 사르르 미소가 번졌다.

“르브하가 좋겠군.”

그렇게 우리는 저택에 갈 때까지 여행 얘기를 꽃피웠다. 그와 평범한 연인과 같은 약속을 한 게 얼마만인가. 아니, 어쩌면 처음은 아닐까? 조만간 국경을 넘어 옆 나라에 갈 생각에 기대가 한껏 부풀었다.

***

캄페 산에 가는 발걸음은 마치 고향에 가듯 가벼웠다. 아침 일찍부터 이동마법진에 올라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그나마 마을에 가까운 곳에 도착해선 그때부터 짐마차를 얻어 타고 산길을 올랐다.

마부의 말을 듣자하니, 캄페 산에 있는 여러 마을 중 유일하게 헤스티아가 있는 마을만 멀쩡하단다. 내 명령을 받은 헤카테들이 헤메라 신전 일대를 잘 지켜 준 모양이다. 마을 사람들이 무사해서 다행이라 생각하던 차, 마부가 비밀을 얘기하듯 은밀하게 말했다.

“그래서 그 마을을 ‘성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지.”

“성역이요?”

“암. 게다가 헤메라 님을 따르는 신도 수도 부쩍 늘었고.”

마부는 호탕하게 웃으며 눈짓으로 마차 위를 가리켰다. 마차 끝에는 꽃을 입에 문 새 형상의 나무 조각이 달려 있었다. 아무래도 그도 헤메라의 신도가 된 모양이다. 이내 마부는 내 품에 들려있는 꽃다발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역시 젊은이도 헤메라 님을 따르는구먼.”

“하하….”

헤스티아에게 선물할 재스민 꽃다발을 안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 후 짐마차에서 내려 마을로 이어진 언덕을 올라갔다. 마을 풍경은 얼마 전에 왔을 때처럼 평화로웠다. 산 너머로 해가 떠올라 하늘이 밝아졌지만, 아직 마을에 아침이 오진 않은 듯했다.

“너무 이른가….”

아침부터 집에 방문하기는 아무래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발걸음을 돌려 언덕을 올라갔다. 한참을 걷다 보니 저 멀리 헤메라의 신전이 보였다. 예전과 다를 바 없는데도 어째 올 때마다 새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신전 주변을 오가는 신도들 때문인가. 꽃다발을 들고 가만히 서 있다가 신전에서 나오는 여인을 보았다. 산에서 갓 딴 열매를 마을에 가져다주려는 건지, 양손에 붉은 열매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여인은 화들짝 놀라며 입을 가렸다.

“어머, 기도하러 오셨나요?”

“아…. 테세스 사제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어떡하죠? 테세스 사제님은 시시포스 부제님과 옆 마을로 봉사하러 가셨거든요.”

참 부지런하기도 하지. 그래도 시시포스까지 사제로서의 역할을 잘 해 주는 것 같아 안심이었다.

“그래요? 언제쯤 오시나요?”

“글쎄요. 나흘 전에 가셨으니, 아마 오늘 안으로 오실 거예요.”

오늘 안에만 온다면 얼굴은 보고 갈 수 있겠다. 헤메라 신전에 낮까지 있다가 마을로 내려가서 헤스티아와 시간 보내지, 뭐. 잘하면 닉스도 불러서 함께 놀고. 벌써부터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있는 것 같아 스멀스멀 웃음이 나왔다.

꽃다발을 소중하게 끌어안으며 여인에게 말했다.

“그럼 기도만 하고 갈게요.”

“네! 헤메라 님의 축복이 앞날에 깃들기를.”

여인을 지나쳐 홀로 신전으로 들어갔다. 이른 아침이라 예배당은 조용했지만, 그간 신도가 많이 늘어난 흔적이 보였다. 예배당 벽 쪽에 있는 난간에 사람들이 두고 간 촛불들이 길게 놓여있었다.

간절한 기도를 담은 불꽃을 하나씩 눈에 담고 있는데, 예배당 앞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또 다른 신도가 있었나 싶어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제단이 보이는 자리에 서니 창문으로 눈부신 아침 햇살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겨우 빛에 시야가 익숙해질 즈음 어렴풋이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찬란한 햇빛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는 이는 어떤 절대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내 반짝거리는 은색의 머리카락을 보곤 나도 모르게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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