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
펑!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꽃가루가 팔랑팔랑 날렸다. 마치 꽃비가 내리는 듯한 환상적인 광경에 사람들은 저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의 끝자락에 보이는 높은 시계탑엔 알록달록한 꽃바구니가 장식되어 있었다. 항상 정갈한 분위기를 자랑하던 안겔루스가 이토록 시끌벅적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오늘은 바로 졸업식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진, 여기예요!”
인파를 피해 구석진 곳에 있다가 진을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다. 양손 가득 꽃다발을 들고 있던 진이 우리를 발견하곤 반갑게 달려왔다. 곱실거리는 머리에 주근깨까지 있어서 원래 나이보다 한참 어려 보이던 그가 오늘따라 어른스러워 보였다. 말끔하게 차려입어서 그런가.
“오늘 되게 달라 보이는데요?”
“그래요?”
기분 좋게 웃던 진이 목소리를 낮춰 비밀스레 말했다.
“저 졸업한다고 하니까 옆집 아주머니가 웬 제단사까지 불러서 옷을 지어 줬다니까요.”
“왠지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지긴 했어요. 졸업 선물인 거예요?”
“그런 거 같긴 한데… 자꾸 괜찮은 영애 있으면 말을 걸어 보라잖아요.”
“으음, 한창 혼담이 들어올 시기긴 하죠.”
혼담이란 말에 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진저리를 쳤다. 아무래도 마을에 잠시 돌아갔을 때, 결혼하라는 소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은 모양이다. 괜히 나까지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는 않아서 곧바로 화제를 바꿨다.
“아, 맞다. 논문 봤어요.”
“진짜요? 어땠어요?”
“물론… 세세하게 이해하진 못했어요.”
“하하, 타전공이 다 그렇죠. 뭐.”
약초 배합식이니, 조합 비율이니 보고 있자니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덕분에 약초학에 있던 일말의 관심까지 말끔하게 사라졌다. 약초에 약자를 보기만 해도 피곤하자도 과장되게 말하자 진이 호탕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태오도 내년에 졸업 아닌가요?”
“별 일 없으면 그렇겠죠.”
“슬슬 논문을 준비할 때가 됐네요.”
논문이라면 이미 생각해둔 주제가 있었다. 마물학과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그 존재’에 대해 들었을 때 바로 마음을 굳혔었다. 반드시 그를 주제로 논문을 쓰겠노라고.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비밀을 말하듯 진에게 속삭였다.
“사실… 주제는 진즉 정해져 있었어요.”
“정말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잠시 진을 응시하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은 설마 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점점 표정이 굳어 갔다. 이내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헉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잠깐. 진짜 제가 생각하는 그거예요?”
“궁금하시면, 제 논문 발표 때 와 주세요.”
“그건 당연히 가죠!”
그 후에도 ‘정말 그게 맞냐’며 끈질기게 물어보기에 웃음으로 답했다. 집요한 공방을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리스가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뭐 재밌는 얘기라고.”
아이리스가 부질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데, 곁에 있던 세잔이 불쑥 입을 열었다.
“나름대로 흥미로운데요.”
“그럼 그쪽도 저기 껴서 논문 얘기 즐겁게 하시든가요~ 난 관심 없으니까.”
세잔이 트집을 잡는다 생각했는지, 아이리스가 픽픽 웃으며 비아냥댔다. 하지만 세잔에겐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 도리어 세잔은 현실을 보여 주려는 듯 차근차근 타이르는 어조로 말했다.
“아이리스. 어차피 졸업하려면 당신도 논문을 써야 됩니다.”
그 말에 아이리스의 얼굴이 얇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공부는 잘하지만 보고서 쓰길 죽기보다 싫어하는 전형적인 유형이 아이리스였으니까. 저쪽엔 혼담으로, 이쪽엔 논문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 사이에 유일하게 멀쩡한 세잔이 태연하게 물었다.
“진. 그럼 바로 연구실로 출근하는 겁니까?”
“아무래도 학회부터 끝내야 할 것 같아요. 준비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보니까….”
“진이라면 잘할 겁니다.”
“고마워요.”
꽃다발을 가득 끌어안고 웃는 진을 보니 정말로 졸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안겔루스에 처음 왔을 때도 텃세 하나 없이 친절하게 대해 주던 그였다. 그때부터 여러모로 의지하고 있었는데, 이젠 그가 학교에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아이리스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지 은근히 아쉬운 기색을 드러냈다.
“이제 바빠서 얼굴도 잘 못 보겠네.”
“그런가…. 노예인건 똑같은데.”
“그래? 연구실 가면 혼자 연구하고 그런 거 아니야?”
“거기에도 상사는 있으니까. 뭔가… 때깔만 달라진 노예라고 해야 되나.”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그간의 고생이 담겨 있었다. 딱히 위로의 말이 떠오르지 않아 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원래 연구직은 대학원에서부터 시작이니까. 우스갯소리로 애인의 얼굴보다 책과 논문을 더 많이 봐야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하지 않나. 아무래도 바인하르 교수 밑에서 구를 대로 구른 진은 그 사실을 진즉 눈치챈 듯했다.
진은 힘없이 어깨를 으쓱이며 한숨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종종 놀러올 테니까 그때마다 반겨 줘야 돼요?”
“당연하죠.”
“언제든 오세요.”
냉큼 고개를 끄덕이는 나와 세잔과 달리 아이리스는 짓궂은 농담을 던졌다.
“얼굴이나 안 까먹으면 다행이지.”
그 말에 진은 꽉 쥔 주먹으로 아이리스의 팔을 퍽 때렸다. “아, 왜!” 하고 짜증을 내던 아이리스는 진과 눈을 마주치곤 조용히 맞은 부위만 쓸었다. 얼굴을 까먹기는 무슨. 백발의 노인이 되어서도 저 둘은 저렇게 장난칠 게 분명했다.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몰래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데, 진과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안 웃은 척 황급히 표정을 바꿔도 소용없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진은 픽 바람이 새듯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아스레인 교수님도 지금 엄청 바쁘시지 않아요?”
“맞아요. 어제부터 연구실로 꽃다발이고 뭐고 선물이 엄청 많이 오더라고요.”
“졸업 시즌만 되면 교수님들 연구실이 거의 연회장이죠. 다들 잘 좀 봐 달라고 오니까.”
진의 말마따나 지금 연구실엔 선물 상자와 꽃, 편지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유피테르가 잠시 마물 학과 졸업생들을 위해 연설을 나가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아직까지도 선물을 헤아리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철저하게 편지를 확인하던 그도 모르는 게 있었다.
내가 줄곧 유피테르를 향한 연서와 영애의 초상화를 슬쩍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물론 마음이 담긴 편지를 당사자 모르게 처리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차라리 그들에게도 내 선에서 정리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유피테르는 일과 관련된 서신이 아니면 가차 없이 찢어 버리니까.
그러니 고백 편지를 봐도 그냥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구는 게 최선이었다.
“일일이 답장하느라 힘들죠?”
“저보다 교수님이 고생이시죠.”
한참 이야기꽃이 피우던 그때 시계탑에서 종이 울렸다. 데엥- 길게 이어지는 소리에 진은 누구보다 먼저 반응했다. 발부터 움직이고 본 진은 뒤늦게 아차 싶었는지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미안한데, 이만 교수님을 뵈러 가야겠어요.”
“괜찮으니 어서 가 봐요. 진. 졸업 축하해요.”
“나중에 봐요!”
진은 환하게 웃으며 연구실 쪽으로 달려갔다. 꽃잎을 휘날리며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니 잠시나마 안고 있던 걱정이 말끔히 사라졌다. 누구보다 강한 마음을 가진 진이라면 어떤 어려움이라도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다.
졸업식이 한창일 무렵, 정원에 가득 차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건물로 들어갔다. 그래서 우리는 정원에 있는 사각 테이블에 둘러앉아 한가로운 낮을 즐겼다. 그때 누군가 내 옆 벤치에 털썩 앉으며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 피곤하다.”
테이블에 팔을 턱하니 걸친 사람은 다름 아닌 휘브였다.
“휘브! 일은 끝났어요?”
“딱히 일이랄 것도 없었습니다. 여기가 마법학과 교실입니다, 라고 말하는 정도였죠.”
졸업식 안내원을 맡은 그는 졸업생만큼이나 말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부슬부슬한 머리카락마저 정갈하게 넘기니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 그 모습이 신기해서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자 휘브가 입모양으로 ‘왜요?’하고 물으며 웃었다. 왠지 원하는 대답을 해 주고 싶지 않아 어깨를 으쓱이며 시선을 돌려버렸다.
“다시 새 학기네요.”
턱을 괸 채 나른하게 중얼거리자 아이리스가 테이블에 늘어지듯 엎드리며 말했다.
“하아…. 과제할 생각에 갑자기 짜증나네.”
“그래도 나름 모범생이잖습니까? 딜런.”
휘브의 말에 “맞아.”라고 공감하다가 뒤늦게 이상함을 눈치 챘다. 딜런…이라고? 아, 아이리스 성이 그거였지. 아무도 그렇게 안 불러서 잊고 있었다. 심지어 아이리스도 당황한 듯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상체를 세웠다.
“야. 미쳤냐?”
“뭐가요. 나요?”
“그래. 너!”
“왜요?”
“나를 그 이름으로 부르는 놈은 처음 봤으니까.”
아이리스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자 휘브는 퍽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딜런을 딜런이라고 하지, 뭐라고 해요?”
“아이리스. 이 멍청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리스가 휘브의 멱살을 콱 틀어쥐었다. 말끔한 옷이 살짝 구겨졌지만, 휘브는 아랑곳 않고 히죽 웃고만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인데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평화롭기만 했다.
아…. 이런 느낌인가? 오케아노스랑 닉스가 싸울 때 평온하게 차를 마시던 유피테르의 심정이. 맞은편에 앉은 세잔과 함께 가만히 싸움이 벌어지는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화르르 타오른 불씨는 점점 커져 갔다.
“너. 다시 한 번만 나를 성으로 부르기만 해 봐. 어?”
“네~ 딜런.”
“야이, 개새끼야!”
이러다간 정말 주먹다짐이라도 할 것 같아서 서둘러 말렸다. 세잔이 휘브를, 내가 아이리스를 붙잡자 상황은 금세 정리됐다. 애초에 휘브의 장난에 아이리스만 씩씩대고 있긴 했지만.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 보고자 짝! 손뼉을 마주치며 물었다.
“자자, 다들 앞으로 뭐할 거예요?”
나름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리는 회심의 질문이었다. 하지만 불이 제대로 꺼지지 않은 상황에서 진지한 말이 나올 리 만무했다. 다행히 내 의도를 눈치 챈 세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 계속 마법과 검술을 병행해 보려고 합니다. 그때 형이 저택을 다녀간 이후로 아버지의 태도가 많이 바뀌셨거든요.”
“정말요?”
“예. 저를 믿으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더는 간섭하지 않고 뭐든 지원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세잔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그게 묘하게 씁쓸해 보이는 건 단지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애석하게도 피아트 후작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저택에 초대받았을 적에 넌지시 던진 태자와의 연결점 때문이겠지. 가문이 출세할 길을 엿봤으니 세잔을 지지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계기는 썩 달갑지 않지만, 그래도 세잔에게는 좋은 일 아닐까.
“잘 될 거예요.”
두 눈을 마주하며 미소 짓자 세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났을 때 왠지 모르게 주눅들어 보이던 청년은 더 이상 없었다. 강인하고 자신감에 찬 눈빛은 장차 피아트 가문을 이끌어갈 후작으로서 더할 나위 없었다.
한시름 놓으며 이번엔 옆에 있는 휘브를 바라보았다.
“휘브는요?”
“으음, 글쎄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얻은 자유라서 뭘 해야 될지 감이 안 오는데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얻은 자유라. 생각해보면 휘브도 참 부자유한 길을 걸어왔다. 육체는 피아트 가문과 이아페 신전에, 정신은 프로메테우스에게 얽매어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 두 곳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새 삶을 얻었으니 어리둥절할 법도 했다.
아직 길을 찾지 못했을 휘브에게 문득 떠오른 일을 제안했다.
“그럼 순례 길을 걸어 보는 게 어때요?”
“형님. 설마… 나보고 진짜 사제가 되라는 겁니까?”
“그럴리가요. 그냥 여러 곳을 다니면서 견해를 넓히라는 거죠.”
괜한 오해에 기겁하던 휘브는 그제야 진지하게 내 말을 받아들였다.
내 착각일지 모르지만, 휘브는 라비린토스에 다녀온 후로 언행이 많이 달라졌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부드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아마도 헤메라의 신력이 담긴 씨앗을 심고 다니면서 여러 가지를 보고 배운 듯했다. 그러니 여유롭게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분명 휘브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뭐, 형님의 제안이라면 생각해 보죠.”
휘브는 길게 흉터가 진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사실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일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제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아이리스를 바라보니 그는 심드렁한 투로 말했다.
“마법 공부나 더 해야지.”
“그러다 나중에 진처럼 되는 거 아니에요?”
“야! 헛소리 하지 마.”
험상궂게 인상을 찌푸린 아이리스는 이내 상의 안에서 목걸이를 꺼내었다. 목걸이 끝에 달린 사이누르의 마석을 보니 일순 마음이 숙연해졌다. 저게 아이리스에게 가기까지도 참 많은 일이 있었지.
“이걸 받은 한, 나한텐 책임이 있으니까.”
마석을 소중하게 쥐는 아이리스를 보며 새삼 느꼈다.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 예전 클라우스 자작 아래서 정체를 숨기고 만났을 때의 그는 꼭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도치 같았는데….
왠지 옛 생각에 가슴이 울렁거려 생각에 잠겨있는데, 아이리스가 대뜸 물었다.
“그러는 넌?”
“저요?”
“응. 너도 계획이 있을 거 아냐.”
생각은 했다. …생각은 했는데,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직도 프로메테우스와의 결전이 끝났다는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런가. 갑자기 찾아온 평화로운 일상이 낯설 뿐이었다.
“글쎄요.”
“웬일이냐? 바로 마물 연구 하고 싶다고 할 줄 알았는데.”
“모르겠어요. 기왕 이렇게 된 거 느긋하게 생각해보려고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사방에서 이런 일은 어떠냐는 말이 날아왔다. 말 타고 대륙 건너기, 기초 마법 공부하기, 호신술 배우기.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별의 별 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게 또 은근히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했다.
“교수님이랑 여행을 가 보는 건?”
“그것도 좋겠네요. 안 그래도 너무 일만 하시거든요.”
“그건 알아라. 너도 일만 한다는 거.”
“하하, 그런가요?”
그 순간만큼은 잊고 있을 수 있었다.
“또 웃으면서 넘기려고 그러지. 또.”
너무도 행복하면 불행이 찾아온다는, 나의 징크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