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7 (277/305)

#277

차를 홀짝이던 오케아노스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차가운 물빛 눈동자와 마주하자마자 얼어붙는 듯했다. 진짜, 정말로, 실재하는 오케아노스였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아 연방 눈을 깜빡거렸다. 대뜸 불러 놓고 아무 말이 없으니 오케아노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지?]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한참 전부터 있었다만.]

단순히 내가 못 본 거였구나. 히페리온과 이카로스, 거기다 닉스에게 차례대로 신경이 팔린 탓에 오케아노스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보다 오케아노스가 왜 쿠네 숲에 있는 거지? 다른 마물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성격은 결코 아니었기에 신기할 따름이었다.

슬그머니 테이블로 다가가 유피테르의 옆자리에 앉았다.

“실례합니다….”

쇳조각이 자석에 붙듯 시선이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있는 오케아노스로 향했다.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쳐다보려했지만, 들키지 않을 리 없었다. 곁눈질로 계속 흘끔거리자 오케아노스는 찻잔을 탁! 내려놓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왜. 난 여기 오면 안 되나?]

“네? 아, 아뇨. 그럴리가요! 계신 줄 몰라서 그랬어요.”

오해가 쌓이지 않도록 두 손을 열심히 내저으며 변명했다. 그런데도 오케아노스의 미간 주름은 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때 닉스가 나를 도와주려는 듯 오른편에 앉으며 말했다.

[그냥 좀 쳐다볼 수도 있지, 왜 애를 겁주고 그래?]

[네가 끼어들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난 헤메라의 보호자인 걸.]

도와주는 거…… 맞겠지? 어째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것 같았다. 오케아노스의 표정은 점점 얼음장처럼 식어 가는데, 닉스는 마치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듯 얄궂게 웃고만 있었다. 둘의 시선이 맞부딪치는 자리에 스파크가 튀는 것만 같았다.

섣불리 끼어들 수 없어 유피테르의 옷깃을 슬쩍 잡아당겼다. 조용히 차를 음미하고 있던 유피테르가 그제야 나를 바라보았다. “음?” 하고 묻는 표정이 너무도 평화로워보여서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아무래도 저 살벌한 광경이 그에겐 일상의 한 장면인가 보다.

“아뇨….”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입을 꾹 닫았다. 의도치 않게 강 건너 불구경이 되어 버렸다. 부디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기를 바라며 눈치만 살피는데, 마침 히페리온이 다가와 그들 사이에 앉았다.

[자자, 좋은 날에 왜들 이러나.]

싸늘한 바람이 부는 들판에 햇볕 한 줄기가 내리쬐는 기분이었다. 히페리온이 중재하자마자 날이 서 있던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역시 히페리온이야. 마물계의 스위스라고.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존경을 표하는 사이, 이카로스도 다가와 한마디 얹었다.

[예전부터 두 분이 만날 때마다 그러기에 반가움의 표현인 줄 알았습니다만?]

무심한 말이 교묘하게 정곡을 찔렀나. 조금 누그러든 닉스는 턱을 괸 채 투덜거렸다.

[반갑긴 뭐가 반가워.]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차기에 진심인가 싶어 은근슬쩍 물어보았다.

“반갑지 않아요? 저는 다들 이렇게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은데.”

[헤메라. 내 말은….]

“닉스는 아니에요?”

다들 언행은 차갑게 해도 기쁜 줄 알았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나 혼자 즐거웠단 생각에 내심 서운해져 버렸다. 그 마음이 표정에까지 드러났는지, 닉스가 곤란한 듯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네가 좋다면 좋은 거지, 뭐.]

“정말요?”

[응. 네가 없었으면 아마 다 같이 모여 있지도 않았을 거야.]

능청스럽게 웃으며 하는 말에 또 아이처럼 마음이 풀려 버렸다.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다섯 마물이 한 테이블에 마주앉아 이야기하는 날이 올 줄은. 그도 그럴 것이 세월은 그들 사이에 커다란 벽을 만들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누군가는 사명을 지키기 위해, 또 누군가는 봉인되어 있어 서로의 생사조차 알지 못했다.

그게 왠지 안타깝게 느껴졌다. 내가 외동에다가 부모님까지 안 계셔서 그런가. 나름 같은 뿌리에서 나고 자란 형제 같은 관계인데, 그들이 조금이나마 서로를 의지하고 지내길 바라왔었다.

하지만 이젠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래서 요즘 그대가 지내는 바다는 어떤가?]

[언제나 그렇듯 아름답지.]

[후후, 몸이 좋아지거든 가 봐야겠구나.]

흩어져 있던 조각이 마침내 하나로 합쳐졌으니까.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이 완벽하기에 도리어 한 명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내가 앉아 있는 이 다섯 번째 의자는 분명 그를 위한 자리일 것이다. 만약 이곳에 데우스가 있었다면, 진심으로 즐거워하지 않았을까. 누구보다 사람을 그 자체로 좋아하는 마물이었으니….

문득 예전에 데우스가 우리와 함께 이 쿠네 숲에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의 광경을 현재와 겹쳐 그리니 저절로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갑자기 말수가 적어지자 유피테르가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왜 그러나.”

“아뇨. 그냥…… 이 행복이 오래갔으면 해서요.”

왠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졌던 걸까. 유피테르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며 속삭였다.

“걱정 말게. 이젠 매일이 오늘 같을 테니까.”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좋을 텐데.

***

그간 어떻게 운을 떼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데우스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학교에 남아 있는 그들에게 말해야만 했다. 하지만 막상 부고를 전하자니 선뜻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진이 물었다. 연구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는데 데우스는 어디 있느냐고. 더 이상 어물쩍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어렵게 입을 열었다.

“데우스는 하늘이 금빛으로 물들던 날, …세상을 떠났어요.”

무거운 침묵이 어깨를 지그시 짓눌렀다. 어쩌다 유명을 달리했는지, 또 마지막은 어떠했는지 세세하게 전하는 게 예의이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부디 데우스가 그저 남들보다 좀 더 똑똑한 친구로 기억되길 바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오랜 적막 끝에 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뒤뜰에 작게라도 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어요.”

“…진.”

“그 정도는 괜찮겠죠?”

슬픔을 애써 미소로 감추는 진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날로 며칠 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날, 우리는 뒤뜰에서 다시 만났다. 미리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모두들 한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마법으로 가공된 돌조각을, 세잔은 데우스의 눈을 닮은 푸른 수국을, 그리고 진은 예전 데우스에게 처음 줬던 딸기 사탕을 가져왔다. 전부 데우스를 위한 선물이었다.

홀로 빈손인 게 신경 쓰였는지, 휘브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난 아무것도 안 가져왔는데 어떡하죠?”

“괜찮아요. 새로운 친구가 선물이라고 하면 되죠.”

그렇게 우리는 봄비를 맞으며 뒤뜰로 향했다. 약초가 무성하게 자란 들판은 데우스가 유독 좋아하던 장소였다. 저기 저 울타리 근처에 둘러 앉아 이야기하던 때가 눈에 선히 그려진다. 데우스가 약초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안겔루스에 입학하자고 우스갯소리를 툭툭 던지기도 했었는데…. 이젠 전부 지나간 추억일 뿐이다.

아이리스는 데우스가 있던 울타리에 자그마한 돌조각을 내려놓았다. 어떤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마법 덕분에 은은하게 빛이 맴돌아 꼭 특별한 비석처럼 보였다. 이내 진은 그 앞에 쪼그려 앉아 혼잣말하듯 불쑥 말했다.

“사실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어요. …데우스와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완전한 이별일 줄은 몰랐죠. 입안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쓸쓸한 가을바람 같았다.

“그 사이 연구 결과도 다 나왔어요. 말린 토타 꽃을 넣어 보라고 했었죠?”

진은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약병을 꺼내어 한참 동안 바라만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치듯 머물다 사라졌다. 이윽고 진은 작은 돌조각 옆에 약병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교수님 말로는 혁명이래요. 이 약물로 고통 받는 환자들을 여럿 구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덕분에 처음으로 제국에서 제일 큰 학회에 초대받았어요. 꼭 공동 연구라면서 함께 발표하고 싶었는데….”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살짝 벌어졌던 입술에선 끝없는 한숨만 흘러나왔다. 결국 진은 마음에 담고 있던 말을 하지 못하고 지그시 눈을 내리감았다. 가느다란 빗줄기가 그의 어깨를 적셨다. 투둑, 투둑. 풀잎에 닿는 빗소리가 우리를 다독여주는 것 같았다.

그새 눈가를 적신 빗방울을 닦아낸 진은 한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맞다. 약의 이름은 ‘데우스’라고 하기로 했어요. 교수님께선 신약에 사람 이름을 붙이지 말라고 했지만, 제가 그 이름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어요. …이렇게라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끊기자 뒤뜰은 슬픈 적막에 휩싸였다. 세잔도, 아이리스도, 심지어 마주한 적 없는 휘브까지도 하염없이 떨어지는 빗물에 복잡한 감정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 후에도 한참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진은 목줄이 설만큼 활짝 웃으며 말했다.

“짧은 시간 동안 고마웠어요. …나한텐 전혀 짧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윽고 진은 딸기 사탕이 담긴 주머니를 돌조각 옆에 두었다. 그를 따라 세잔도 푸른 수국 꽃다발을 울타리에 내려놓았다. 데우스를 추억하는 물건이 하나둘씩 쌓일 때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숙적이자 친구. 반드시 제거해야 하지만, 끝내 죽이고 싶지 않았던 존재. 지독하게 미워했으나, 이상하게 원망할 수는 없는 사람. 프로메테우스. 그 이름을 속으로 삼켰다.

“태오.”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곧바로 진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자 진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우린 친구였어요. 그렇죠?”

대답할 것도 없었다. 똑같은 관심사를 나누며,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마주보며 장난스럽게 웃는 그들이 친구가 아니면 무얼까. 비에 젖은 진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 안으며 말했다.

“감기 걸리겠어요. 이만 가요.”

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가늘게 떨어지던 빗줄기가 기다렸다는 듯 거세져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고 천천히 뒤뜰을 걸어 나갔다. 추억이 남아있는 자리를 벗어나는 내내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그때 문득 따뜻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자 굵은 빗방울 사이로 무언가 보이는 듯했다. 푸른 수국과 바람에 흩날리는 리본, 그리고 은은하게 빛나는 돌조각. 그 앞에 앉아있는 인영이 얼핏 시야에 스쳤다.

“왜 그래?”

갑자기 멈춰 선 내게 아이리스가 다가와 물었다.

“저쪽에…….”

곧바로 울타리 쪽을 가리켰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잘못 본 걸까. 분명 누군가 있는 것 같았는데…. 그저 푸른 수국의 꽃잎만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비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꼭, 우리를 향해 인사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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