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6 (276/305)

#276

주문을 외운 순간 칼리온과 유피테르의 손에 얽힌 매듭이 드러났다. 서로의 손을 겹겹이 묶은 새하얀 끈은 쉽사리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칼리온의 피가 얇은 줄기로 나뉘어 매듭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금세 피로 물든 끈은 하나둘씩 빛을 잃어 갔고, 드디어 그들 사이를 억지로 묶은 매듭은 완전히 사라졌다.

봉인에서 풀려나 몇 년 만에 얻는 진정한 자유였다. 그래서일까. 유피테르는 한동안 말없이 손바닥을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금빛 눈은 여명이 트는 새벽하늘을 닮아있었다. 이제 그의 앞날엔 찬란한 아침 햇살만 가득할 것이다. 나의 바람처럼.

“잘됐네요.”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손에 내 손을 얹으며 웃었다. 그러자 유피테르는 부드럽게 내 손을 잡으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의 얼굴에 져 있던 쓸쓸한 그림자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큼큼 목을 다듬는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옆을 돌아보니 칼리온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나와 유피테르를 번갈아보는 눈빛이 어째 ‘내가 안 보이나?’하고 묻는 것 같아 슬그머니 손을 거두었다.

“…죄송해요.”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마음 같아선 이만 보내주고 싶은데 아직 할 말이 남아서.”

“할 말이요?”

칼리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유피테르에게 말했다.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세간에 진실을 알려야겠어요.”

“무슨 진실 말인가.”

“제가 오늘 들은 모든 이야기요.”

의외의 결정이었다. 그간의 역사가 완전히 뒤집히면 황실은 물론이고 제국 전체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래서 칼리온은 당연히 과거를 숨기려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그가 우리보다 먼저 진실을 밝히길 원했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는 좋은 일이지만, 앞으로의 고생길이 불 보듯 뻔해서 선뜻 그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유피테르도 나와 같은 걱정을 한 걸까. 당장이라도 귀족들을 모아 회견을 열 것 같은 칼리온을 바라보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됐네. 일련의 사건은 카인 대사제와 미노스 황제가 꾸민 일로 마무리하지.”

“고작 그걸로 괜찮으시겠어요?”

“자네야말로 괜찮겠나? 선황의 자격에 문제가 생길 경우 자네의 입지도 불안해질 걸세.”

“황제로서 이겨 내야 하는 시련이죠.”

“그럼 신민들은?”

예리한 질문에 칼리온은 일순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여태껏 자신이 믿고 따르던 지도자가 사라진다고 생각해 보게. 온 제국이 무질서해질 걸세. 비단 신민들만 혼란스럽겠나? 평생을 신에게 바쳐 온 신도와 사제들은? 그들에겐 아무런 죄가 없네.”

“하지만 진실을 숨겨서는 제 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잖아요.”

잔뜩 찌푸린 얼굴에서 얼핏 두려움이 스쳤다. 그건 언젠가 제 아버지처럼 부패할지도 모른다는 미래에 대한 공포였다. 칼리온이 무리해서라도 진실을 밝히려는 이유는 아마도 속죄의 표현임과 동시에, 자신은 아버지와는 다르다는 걸 증명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 불안감을 눈치 챈 유피테르는 칼리온의 어깨를 짚으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답게 행동하게. 칼리온.”

“……!!”

“자네의 신민을, 그들의 안정을 책임져야하지 않겠나.”

참으로 유피테르다운 결정이었다. ‘그 마물’은 인간의 적이라는 그릇된 역사를 바꾸기보다 칼리온과 제국의 앞날을 고려해 준 것이다. 유피테르의 뜻을 깨달았는지 칼리온은 잠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이내 칼리온은 졌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아벨은 그 마물이기 이전에 제 대부이시네요.”

짧은 고심 끝에 마음을 바꾸기로 한 모양이다. 그제야 유피테르도 한시름 놓으며 칼리온의 어깨에 올린 손을 거두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훈훈한 분위기가 되어선 유피테르도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이젠 대부고 백작이고 그만두겠네.”

“백작 작위는 그렇다 쳐도, 대부를 갑자기 그만두는 게 어디 있어요!”

“벌써부터 자네가 나를 귀찮을 정도로 찾아올 모습이 상상돼서 안 되겠군.”

“그건 부정 못하겠지만… 안 돼요.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칼리온은 실없는 웃음을 흘리다가 뭔가 떠오른 듯 손뼉을 치며 물었다.

“아, 계속 아벨이라고 불러도 돼요?”

“하아…. 자네 마음대로 하게.”

“그럼 호칭도 앞으로의 일도 제가 알아서 정리하죠.”

장난스럽게 찡긋 윙크를 한 칼리온은 이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동안 고생했어. 나의 친구.”

언제나처럼 싱긋 웃는 얼굴을 보면서도 슬쩍 눈치를 살폈다.

“괜찮으세요?”

“뭐~ 놀라긴 했지만, 또 괜찮지 않을 건 없지. 오히려 어릴 적부터 나를 지켜 준 존재가 그 마물이라니 신기했어. 지금도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린다니까?”

“하하….”

칼리온은 역시 칼리온이다. 왠지 속내를 억지로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평소대로 돌아온 칼리온을 보며 안심하다가 문득 잊고 있던 인물이 떠올랐다.

“그런데 미노스 폐하는요?”

분명 황제가 코카서스 산으로 몸소 군사를 이끌고 간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하지만 내가 뿔을 가지고 진영을 넘어갈 때도 황제는 보지 못했다. 혹시 군을 데리고 산을 올라온 칼리온이라면 만나지 않았을까 싶어 물었다. 그런데 칼리온의 반응이 영 이상했다.

“그게… 모르겠어.”

“네? 직접 군을 이끌고 원정을 나가셨다고 했잖아요.”

“응. 그 행렬은 나뿐만 아니라 세핀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잠깐 말하길 망설이던 칼리온은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근데 군사들의 말에 의하면, 새벽녘에 갑자기 사라지셨대.”

“사라지셨다뇨…?”

“그 후로 아직까지 소식이 없어서 나도 잘은 모르겠어. 아버지를 본 사람도 없고.”

황제가 실종됐다고…?

***

그 후로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이번 사건은 계획대로 대사제와 황제의 소행으로 마무리되었다. 청렴의 상징인 대사제가 헤카테를 만들어 사람들을 공격했다는 소문은 산불처럼 빠르게 퍼져 나갔다. 게다가 축도의 날 이아페에 나타난 ‘그 마물’도 헤카테였다는 이야기에 마물을 향해 적대적이던 여론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이제 앞으로의 일은 칼리온이 잘 이끌어 나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제는 아직도 감감무소식인 황제의 행방이었다. 칼리온은 우리에게 황제를 찾거든 연락을 준다고 했지만 며칠째 전령은 오지 않았다. 조만간 대관식을 한다는 얘기가 근근 들려올 뿐이다. 왕좌의 주인이 바뀌는데, 미노스 황제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비참한 최후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단죄가 두려워 도망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제국은 예상보다 빠르게 일상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이정도면 충분하겠죠?”

“충분하고 말고.”

그리고 우리에게도 좋은 소식이 찾아왔다.

“기왕이면 하나 더 살걸 그랬나….”

“그럼 오히려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르네.”

“으음, 역시 그렇겠죠?”

신력에 당해 쓰러졌던 히페리온이 무사히 의식을 되찾은 것이다. 사실 깨어난 지는 며칠 지났지만, 이제야 시간이 나서 쿠네 숲으로 향할 수 있었다. 병문안 선물로 준비한 여러 가지 꽃모종을 품에 안고 숲길을 걸었다.

잠시 후, 나뭇잎 나비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주변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의 환영을 받으며 들어가니 저 멀리 하늘 높이 뻗은 거대한 나무가 드러났다. 그 아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양복 차림의 노신사를 발견하곤 쪼르르 달려갔다.

“히페리온!”

[어서 오게나.]

다정하게 웃으며 반겨 주는 히페리온은 다행히 건강해보였다. 아직 신력의 영향이 가시지 않았는지, 히페리온의 머리칼이 희끗희끗했다. 그 모습이 꼭 눈이 쌓인 나무 같아서 묘하게 잘 어울렸다.

어느새 곁에 온 유피테르가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몸은 좀 어떤가.”

[신경써 주신 덕분에 말끔히 나았습니다.]

“음. 코어도 이정도면 많이 좋아졌군.”

확신에 찬 표정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했다. 코어를 살피는 유피테르의 눈은 명의보다 정확하니 사실 더 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 덕분에 기분 좋게 학교에서부터 가져온 꽃모종을 히페리온에게 건넸다.

“이거 병문안 선물이에요.”

[뭘 이런 걸 다…. 정말 고맙구나.]

벌써 잎사귀 사이로 꽃봉오리가 맺힌 것도 있고, 가을이 되어서야 꽃이 피는 것도 있었다. 쿠네 숲에 없는 식물을 한 아름 안겨 주니 히페리온은 완연한 봄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더없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는데, 히페리온은 대뜸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물론 병문안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말이지.]

“안 돼요. 유피테르가 완치라고 말할 때까지 더 쉬어야 된다구요.”

[하하, 안 그래도 누르도 똑같은 소릴 하더구나.]

“누르가 여기 있었어요?”

곧장 주위를 둘러보자 히페리온은 나지막이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숲 반대편에 있네. 나를 대신해서 순찰을 돌고 온다고 했지.]

“열심이네요.”

[그럼. 그 아이 덕분에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구나.]

의젓하게 순찰을 다녀온 누르를 놀래 줄 생각에 들떴다. 갑자기 찾아온 날 보고 화들짝 놀라겠지. 안 그래도 누르를 위해서 여러 종류의 열매도 챙겨 왔는데, 어서 만나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한껏 기대하는 마음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누군가 수풀에서 걸어 나오며 말했다.

[누르라면 곧 올 겁니다.]

딱딱한 말투에 혹시나 하고 봤더니 역시나였다. 곱실거리는 붉은 머리칼을 가지런히 묶은 이카로스가 나무 열매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다가왔다. 그새 히페리온의 씨앗들과도 친해졌는지, 그의 어깨에 나뭇잎 나비들이 참새처럼 앉아 있었다.

“이카로스, 아직도 있었어요?”

놀란 눈으로 쳐다보니 이카로스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당신이 상태를 지켜봐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날로 벌써 열흘이나 흘렀잖아요. 진즉 돌아간 줄 알았죠.”

[그건….]

미묘하게 굳은 이카로스의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숨기고 있는 듯했다. 그때 나무 위에서 검은 물체가 뚝 떨어졌다. 화들짝 놀라며 쳐다보니 푹 파인 나뭇잎 더미 위로 늘씬한 미청년이 서있었다.

[걱정돼서 남아 있는 거라고 솔직하게 말 못해서 그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닉스였다.

[내 형제가 부끄러움이 워낙 많아야지.]

나른한 걸음걸이로 다가온 그는 이카로스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그렇지? 이카로스.]

뾰족한 손톱이 이카로스의 말랑한 뺨을 쿡쿡 찔렀다. 그런데도 이카로스는 목석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금세 흥미가 떨어진 닉스는 재미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팔을 거두었다. 이윽고 나를 바라보는 닉스의 눈이 초승달 같이 아름답게 휘어졌다.

[오랜만이야…. 라고 하기엔 시간이 별로 안 지났나?]]

“당연히 오랜만이죠!”

한달음에 달려가 닉스의 품에 폭 안겼다. 내가 달려들 줄은 몰랐던 걸까? 웬일로 답지 않게 당황한 닉스는 살짝 커진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풋, 하고 웃었다. 그 후로도 내 머리를 쓸어 주는 내내 기분 좋은 웃음은 끊이질 않았다.

[잘 있었어? 헤메라.]

“그럼요. 닉스가 신경써 준 덕분에요.”

[귀엽긴.]

내 콧잔등을 톡 건드린 닉스는 매력적인 눈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오랜만에 영감이랑 둘만 남아서 신났겠네?]

“그게… 실은 간만에 학교에 갔더니 일이 엄청 밀려 있더라구요. 그래서 유피테르는 밤까지 새워 가며 일했어요.”

[뭐? 아직도 교수인가 뭔가 하는 그 일 하는 거야?]

마치 비밀을 고하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닉스는 옅게 혀를 찼다. “사서 고생하네.”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엔 깊은 한숨이 담겨 있었다. 닉스의 입장에선 그 일이 있고도 인간들 사이에서 지내는 유피테르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나도 신기하긴 했다. 황실과의 계약만 끝나면 유피테르가 당연히 인세를 떠나고 싶어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유피테르는 여건만 허락한다면, 계속 마물에 대해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연인이기 이전에 그를 존경하는 제자로서 그 결정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카로스랑 닉스 둘 다 여기서 지내고 있던 거예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자 이카로스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말했다.

[저희뿐만이 아닙니다.]

[네?]

차분한 시선이 나무 근처의 공터로 향했다. 그곳엔 나무로 된 테이블과 함께 두 사람이 앉아있었다. 하나는 언제 거기로 갔는지 모를 유피테르였고, 또 다른 하나는……. 어? 햇빛 아래 윤슬처럼 반짝이는 모습을 보자마자 저절로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오, 오케아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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